제갈량

 






'''촉한승상
諸葛亮
제갈량'''
'''시호'''
충무(忠武)
'''작위'''
무향후(武鄕侯)
'''최종직위'''
승상(丞相) 겸 녹상서사(錄尙書事) 겸 가절(假節)[1] 영 사례교위(領 司隷校尉) 겸 익주목(益州牧) 겸 개부치사(開府治事)
''''''
제갈(諸葛)
'''이름'''
(亮)
''''''
공명(孔明)
'''아버지'''
제갈규(諸葛珪)
'''생몰연도'''
181년 8월 20일 ~ 234년 10월 8일 (양력)
181년 7월 23일 ~ 234년 8월 28일 (음력)[2] (향년 54세)
'''고향'''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
'''사망지'''
오장원(五丈原)
'''승상 재임기간'''
221년 ~ 234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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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관직 [ 펼치기 · 접기 ]
촉한
(유비

유선)
군사중랑장(軍師中郞將)
→군사장군(軍師將軍) 겸 서좌장군부사(署左將軍府事)
→승상(丞相)
→승상(丞相) 겸 녹상서사(錄尙書事) 겸 가절(假節)[48]
→승상(丞相) 겸 녹상서사(錄尙書事) 겸 가절(假節) 영 사례교위(領 司隷校尉)
→승상(丞相) 겸 녹상서사(錄尙書事) 겸 가절(假節) 영 사례교위(領 司隷校尉) 겸 개부치사(開府治事)
→승상(丞相) 겸 녹상서사(錄尙書事) 겸 가절(假節) 영 사례교위(領 司隷校尉) 겸 익주목(益州牧) 겸 개부치사(開府治事)
→우장군(右將軍) 겸 행 승상사(行 丞相事)
→승상(丞相) 겸 녹상서사(錄尙書事) 겸 가절(假節) 영 사례교위(領 司隷校尉) 겸 익주목(益州牧) 겸 개부치사(開府治事)

1. 개요
2. 상세
10. 설전
11. 사상
12. 여담
13. 궁경지 논쟁
1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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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후한#s-1 말에 태어난 인물로, 촉한의 초대 승상을 지냈다. 문무 모두에서 뛰어났던 재상이자 전략가였으며, 탁월한 능력 뿐 아니라 타의 모범이 되는 행동과 충성심으로 당대 사람들과 후세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중국 역사에서 훌륭한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의 모범의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는 공명(孔明), 작위는 무향후(武鄕侯), 시호충무(忠武).[4]

2. 상세


정사 삼국지에 의하면 진수의 평으로 상국(相國)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고 되어 있다. 계한보신찬에는 제갈량이 선제(유비)의 유명을 받아 재상이 되었다고 나오는데 제갈량은 이미 유비 생전에 승상이었으므로 상국은 이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상국은 최고 재상인 승상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왕보다 높고 황태자와 같은 급이며 황제 바로 밑인 엄청난 벼슬이다. 상국이라는 직책이 워낙에 엄청나다 보니 제갈량 이전에는 전한소하, 조참, 번쾌, 여산, 후한동탁만이 이 지위에 올랐다. 다만, 여산은 여씨 일족의 후광으로 얻었고, 동탁은 황제를 협박하여 강제로 빼앗은 직위라서 제대로 된 상국은 사실상 소하, 조참, 번쾌, 제갈량 네 명뿐이다. 더불어, 제갈량 사후에는 촉한에서 상국은 물론이고 승상도 영구 결석이 되면서, 멸망 때까지 승상이 된 자는 아무도 없다.[5]
정사를 기준으로 단순한 사실들만 보면 제갈량이 칭송받는 게 의아할 수 있다. 제갈량은 관우장비, 여포 같은 무력이 뛰어난 장수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연의에서 보이는 것처럼 신산귀모의 신비한 책사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갈량이 명재상으로 평가받는 데에는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과 더불어 고금을 통틀어서도 최고의 행정관 중 하나였다는 점에 있다. 효율적인 행정체계를 구축하고 경제를 중흥시켜 국력을 증진시켰으며 이로 인해 이릉대전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촉은 수차례 북벌을 진행할 수 있었다.
또한, 흔히 소설이나 미디어의 영향으로 뛰어난 전술 및 계략이나 압도적인 무력이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중요한 조건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을 비롯해서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한니발, 항우, 사자왕 리차드 1세 등 뛰어난 전술적 능력이나 무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쟁에서 패한 사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수히 많다.[6][7] 컴퓨터나 통신체계 심지어 인쇄술도 발달하지 않았던 삼국시대에 보급체계를 운용하고 관리하는것은 엄청난 난제이다. 이것은 제갈량이 삼국시대의 인물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부분이였다. 그는 부대 내에서 최적의 보급과 운용을 할 수 있는 이동체계를 항상 고민했으며 진영을 세울 때도 늘 정교하고 화려하게 구축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보다 높은 확률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된다는 것. 북벌 당시 제갈량에 맞서 싸웠던 위나라가 압도적인 국력과 훌륭한 사령관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이 이끄는 군대와 정면대결을 회피했던 것이 바로 이런 이유이며,[8] 사마의가 제갈량 사후 오장원에서 후퇴한 촉군의 진영을 보았을 때 천하의 기재라며 감탄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실 이런 재능은 삼국지연의 같은 소설에서 제갈량을 부각시키기 힘들었던 부류의 재능이므로, 나관중은 신비한 책사 모습의 제갈량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제갈량이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충성심이다. 제갈량의 시호인 충무후(忠武候)를 보면 알 수 있듯 제갈량의 충성심은 예로부터 끝없이 칭송받았다. 유비-유선 2대에 걸쳐 촉한의 중대사를 결정하고 실행했던 그는 조조에게 여러번 회유를 받았지만, 그야말로 죽어서 그만둘 때까지 삼고초려의 은혜를 잊지 않고 계속 유씨를 섬겼다. 티끌 같은 희망을 놓지 않고 나라를 위해 두 번이나 출사표를 올리며 몸을 아끼지 않은 채 북벌을 벌였으니, 이것이 제갈량의 군재(軍才)나 행정력을 낮춰보는 사람은 있어도 제갈량의 충성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를 수식하는 많은 단어들이나 묘사가 있지만 후출사표의 표현인 '''국궁진력 사이후이'''('''鞠躬盡力 死而後已''')와 삼국지연의의 대사인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 그의 삶을 압축하는 말들이라 할 수 있다.

3. 생애




3.1. 제갈량의 북벌




3.2. 추풍오장원




4. 연의




5. 인간관계




6. 업적




7. 평가




8. 논란




9. 관련 일화들




10. 설전


삼국지연의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설전을 벌여 작살내곤 한다.

10.1. vs 오나라



84부작 삼국지 당국강 버전 제갈량의 설전[9]
가장 격렬했던 설전은 역시 적벽대전을 앞두고 오나라에 가서 손권과 동맹을 맺으려다 오나라의 신하들과 주전론/항복론을 얘기하는 장면. 이에 대해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설전을 보면 알겠지만, 말투와 별개로 논쟁 수준이 참 현대의 키배와 별 차이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나관중의 시대에도 설전을 하라고 했더니 이상한 주제로 내용이 변질되는 건 똑같았던 모양이다[10].
장소: 그대는 스스로를 관중악의에 비했다. 그런데 당신을 얻기 전에 유현덕은 그나마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할거하다가 당신이 휘하에 들어간 이후로는 연패하여 한 구석에 처박히더니 이제 우리에게 손을 벌리려 한다. 관중악의가 주군을 그렇게 섬겼나?[11]
공명: 우리 주군(유비)께서는 여남에서 조조에게 패배한 이후, 작고 궁핍한 신야에 병사는 천 명도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박망파 화계, 백하 수계로 하후돈과 조인을 패퇴시켰다. 또한 유종이 조조에게 갑자기 항복했을 때에도 동족의 기업을 차마 빼앗지 못했고 당양에서 수만 명의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모두 데리고 피난을 갔다. 자고로 적은 수가 많은 병력을 당하지 못하고, 승패는 병가에서 자주 있는 일이다. 한고제항우에게 연이어 패배하였지만 해하 전투 한 번으로 전세를 바꾸지 않았던가?
우번: 조조의 군대가 백만이라는데, 대책은 있는가?
공명: 그 대부분이 원소유표에게서 항복한 자들이다. 즉 조조 자신도 못 믿는 장졸들 대부분이다. 게다가 흡수된 유표군을 제외하면 전부 북방 출신이다. 이렇듯 제하고 제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번: 그렇게 자신 있는 사람이 신야를 넘겨주고, 당양에서 대패를 하는가? 또한 조조군이 두려워서 우리한테 도움을 청하러 온 주제에 큰소리만 치는 게 아닌가?
공명: 우리 병사 숫자가 조조군보다 많이 적어서 패했을 뿐이고, 비록 패했지만 지금 하구에서 재기를 노리고 있다. 그에 비하여 장강의 천험과 싸울 군대가 있으면서도 항복을 생각하며, 나라를 팔아먹을 생각부터 하는 그대들이 어찌 우리 심정을 알겠는가?
보즐: 그대는 소진장의를 본받아 세객이 되어 우리 오나라를 달래러 왔는가?[12]
공명: 소진과 장의는 언변만 좋은 게 아니라 실제로 그것으로 여러 성을 탈환한 당대의 명재상이다. 당신네들은 싸움도 안 하고 숨으려면서 어떻게 소진과 장의를 비웃을 자격이 있다 하는가?
설종: 조조를 어떤 사람으로 보는가?
공명: 두말할 필요 없는 한실의 역적이다.
설종: 조조는 이미 한나라의 2/3를 차지했다. 이는 조조가 한나라를 배반한 게 아니라 하늘의 순리가 그를 따라가는 것이다. 망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공명: 조조는 할아버지 때부터 한실의 은혜를 입었다. 그러고도 난세를 틈타 세상을 훔치는 게 순리라면, 그대도 주군이 쇠퇴한다면 조조처럼 주군을 얕잡아볼 것인가? 부모도 주군도 없는 패륜의 논리이니 더 이상 입 열지 마라.
육적: 조조는 현재 한의 승상이고 그 조상으로는 한의 건국공신이었던 조참, 하후영이 있다. 반면 그대의 주공이라는 유현덕은 스스로 황손이라 하지만 확실하지도 않고[13], 기껏해야 돗자리나 짜던 촌부였는데, 어찌 상대가 될 수 있겠나?
공명: 천자께서 우리 주공을 만났을 때 여러 기록을 대조하여 황실의 후예임을 확인했고, 천자뿐만 아니라 온 천하가 우리 주공을 황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고조께서는 정장이라는 말단 벼슬을 지냈을 뿐이지만 결국엔 항우를 제압하고 한 황실을 세우셨다. 그럴진대 출신이나 지금의 관직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14]
엄준: 당신이 지금까지 한 얘기는 궤변에 불과하니 더 이상 말 할 필요가 없다. 어떤 경전을 읽으셨는지 물어도 되겠는가?
공명: 경전이 뭐가 중요하겠나? 옛적에 강자아가 어떤 경전을 따로 읽었다는 얘기를 들어 보기나 했는가? 선비도 쓸모있는 선비가 있고 쓸모없는 선비가 있으니, 쓸모없는 선비는 고작 문장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인다. 난 그렇게 쓸데없이 책이나 읽고 허송세월하진 않았다.
정병: 그대는 뻗대기만 할 뿐 배운 바가 없는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이 그대를 욕할 것 같다.
공명: 선비라 해도 군자가 있고 소인배가 있는 법이다. 양웅은 당대가 알아주는 대학자였지만 왕망을 도왔다가 급기야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어 더러운 이름만 후대에 남겼다. 이러한데 어찌 학문만을 배운다고 쓸모가 있겠나?[15]
여기에 장온낙통이 나서서 다시 제갈량을 자극해보려고 하다가 보다못한 황개가 난입해서 "적을 물리칠 생각은 하지 않고 입씨름만 하겠는가"고 꾸짖어서 종결된다. 삼국지 시리즈를 이용해 현대식으로 연출한 장면이 컬트적인 인지도를 갖고 있다. 비속어가 많으니 주의.
참고로 연의라서 정사와 상관없기는 하지만, 서주 대학살의 피해로 서주에서 양주로 이주한 호족들이 많이 나오며 제갈량 본인도 서주 호족 출신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정작 양주 토착 호족은 한 사람밖에 없지만.
서주(徐州) 출신
  • 장소 서주 팽성국(彭城國)
  • 장굉 서주 광릉군(廣陵郡)
  • 보질 서주 임회군(臨淮郡)[16] → 하비국(下邳國) 동성현(東城縣)
  • 엄준 서주 팽성국(彭城國)
  • 제갈량 서주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
기타
한편 동오측 모사들의 최종보스 격인 주유와도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는 자신을 오나라로 데려온 노숙을 교묘하게 이용하기도 한다. 고수들끼리의 설전답게 직접 맞붙지 않고 서로 노숙을 내세워 염탐을 하지만, 결국 주유는 제갈량의 패드립 한 방에 열받아서 무너지고 제갈량의 소원대로 손권에게 항전을 간언하여 손권은 최종적으로 항전을 결심한다. 다음은 대화 요약.
  • vs 주유
노숙:[17] 조조군이 쳐들어왔는데, 어떡할 생각인가?
주유: (제갈량의 속셈을 알기 위해 거짓으로) 생각해보니 답이 없어서 그냥 항복하기로 했다.
노숙: 무슨 소리, 당신은 동오 최고의 사령관이 아닌가. 그 실력은 국 끓여먹을 생각인가?
주유: 군사를 잃기도 아깝고, 지면 나만 있는 욕 없는 욕 다 처먹을 거 아닌가.
노숙: (조용히 웃기만 하는 제갈량에게) 보고만 있지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하는게?
제갈량: 주유 말이 맞다. 군사도 살고 백성도 살고, 주유 당신도 목숨 건지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18]
주유: (속뜻을 알고 분노하지만 더 말려들까봐 침묵을 지킨다)
노숙: (대노하여) 아니, 그럼 우리 주군더러 남에게 무릎을 꿇는 굴욕을 당하란 말인가?
제갈량: 사실 방법이 있긴 하다. 조조가 동오의 미녀 둘, 그러니까 대교와 소교를 흠모한다던데 뇌물로 갖다 바치면 될 거다.
주유: (불쑥 끼어든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증거는 있나?
제갈량: 조조의 셋째아들인 조식이 지은 동작대부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제갈량이 익히 알려진 대로 왜곡된 동작대부를 읊으며 주유를 격동시킨다)[19]
주유: 그 늙은 역적놈이 나를 욕보이는구나!
제갈량: 그 사람들이야 하찮은 백성에 생판 남인데, 왜 그리 화를 내는지?
주유: (깊은 빡침) 그 하찮은 생판 남들이 내 형수랑 내 아내거든![20]
제갈량: (거짓말) 어이쿠, 그건 몰랐다.
손권과는 설전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설득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정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 장소를 필두로 한 항복파가 있었고, 이들이 연의처럼 주전파에게 반대 의사를 강하게 내비치며 제갈량과 설전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은 그 문답. 손권도 어그로 한 방에 말려드는 모습을 보이는데, 연의 내내 '동오 사람들은 성질이 불 같아서 화를 돋우면 잘 넘어온다'는 표현이 클리셰처럼 등장하고 실제로 자주 먹힌다. 안 그런 경우도 많지만.

"해내(海內)에 대란이 일자 장군께서는 군사를 일으켜 강동을 점거해 차지하고 유예주(劉豫州)께서는 또한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거두어 조조와 천하를 다투었습니다. 지금 조조는 큰 어려움을 제거하고 대략 평정을 끝냈습니다. 마침내 형주까지 격파하여 위세를 사해(四海)에 떨쳐 영웅들이 용병할 곳이 없으니 이 때문에 예주께서 도피하여 이곳에 이른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역량을 헤아려 대처하셔야 합니다. 만약 오(吳), 월(越)의 군사로 중국(中國)과 능히 맞설 수 있다면 (중국과) 일찍 관계를 끊느니만 못합니다. 만약 능히 당해낼 수 없다면 어찌 무장해제하고 북면(北面)하여 조조를 섬기지 않습니까! 지금 장군께서는 겉으로는 복종의 명목을 내세우며 내심으로는 망설이십니다. 일이 급한데 결단하지 못하니 머지않아 화(禍)가 닥칠 것입니다!"

손권이 말했다, "그대의 말대로라면 유예주는 어찌 끝내 조조를 섬기지 않는 것이오?"

제갈량이 말했다, “전횡(田橫)은 제나라의 장사(壯士)이나 오히려 의(義)를 지키며 모욕을 당하지 않았습니다.[21]

하물며 유예주께서는 횡실의 후예로,뛰어난 재주가 세상을 덮어 뭇 선비들이 앙모하는 것이 마치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듯 하는 분이니, 만약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곧 하늘의 뜻일 뿐, 어찌 남의 아래에 들어가겠습니까!”

손권이 발끈하며 말했다,

"나는 오(吳) 땅 전부와 10만 군사를 들어 남에게 제어당할 순 없소. 내 계책은 이미 정해졌소! 유예주가 아니면 조조를 당해낼 수 없소. 그러나 예주가 이제 막 패한 직후니 이 어려움에 어찌 대처해야 하겠소?"

제갈량이 말했다,

“예주의 군이 비록 장판에서 패했으나 지금 돌아온 병사와 관우의 수군(水軍)이 정병 만 명이고, 유기가 합한 강하의 전사 또한 최소한 만 명입니다. 조조의 군사는 멀리 와서 피폐해졌고, 제가 듣기로 예를 추격해 경기병로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왔다 하니, 이는 이른바 '강한 화살이 끝에 이르러서는 노나라의 명주 천도 뚫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22]

이 때문에 병법에서 이를 꺼려 '필히 상장군을 꺾이게 하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북방 사람들은 물싸움에 익숙지 않고 또한 조조에 귀부한 형주민은 병력에 핍박당한 것이지 마음으로 복종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장군께서 실로 맹장(猛將)에 명해 수만 군사를 이끌며 예주와 협력하여 힘을 모으면 필히 조조 군을 격파할 수 있습니다. 조조군 이 격파되면 틀림없이 북쪽으로 돌아갈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형(荊), 오(吳)의 세력이 강해져 솥발의 형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패의 계기는 금일에 달려 있습니다.”

손권이 크게 기뻐하며 주유(周瑜), 정보(程普), 노숙(魯肅) 등 수군 3만을 보내 제갈량을 따라 선주에게로 나아가 힘을 합해 조공에 맞서게 했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10.2. vs 위나라



84부작 삼국지 당국강 버전 제갈량 vs 왕랑의 설전

삼국 육의 버전 제갈량 vs 왕랑의 설전
제갈량의 북벌 당시에는 조진의 참모격으로 따라온 왕랑과 설전을 벌였는데, 설전으로 왕랑을 죽여버리는 실로 괴상한 모습을 보여준다.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 vs 왕랑 참고.
왕랑: 와룡이라 불리는 선생께서 어찌 하늘의 뜻을 모르고 전쟁하러 나오셨나?
공명: 난 한나라의 승상으로서 역적을 토벌하러 왔는데 어찌 하늘의 뜻을 모른다는 말인가?
왕랑: 우리 무황제께서는 원소 등과 같은 버러지들을 쳐서 나라를 평안하게 만들고, 문황제께서는 망해가는 한나라의 제위를 물려받아서 신위를 떨치셨다. 게다가 오나라도 우리에게 숙이고 들어오려는 판국이니, 항복하는 수밖에 없지 않냐!
공명: 어찌 그런 썩은 말만 하는가? 이제 잘 들어보아라. 조조와 조비가 세운 공이 많다 한들 조조는 한실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조비는 제위를 찬탈하는 역적질을 저질렀다. 왕 사도, 그대는 효렴[23]에 뽑혀서 한나라를 섬겼는데 위나라의 벼슬을 받더니 조비의 역적질을 돕지 않았나. (여기서부터 김홍신 평역판 원문 그대로) 이 머리 허연 하찮은 것, 늙은 수염의 도적놈아! 그러고서 죽은 뒤에 어찌 한나라의 스물 네 황제를 뵙겠는가? 늙은 도적은 썩 물러가고 역적이나 불러내서 나와 승부를 가리게 하라.
촉한 진영은 찬탄을 금치 못하는 반면, 위 진영은 침묵만이 가득했고, 당사자인 왕랑은 울분을 참지 못하다 그대로 사망했다.
이에 대해서 김홍신은 자신의 평역판에서는 "본래 설전의 주제는 '어느 쪽이 한나라의 정통 후계자인가'인데, 이렇게 되면 위나라에는 위나라의 주장이, 촉나라엔 촉나라의 논거가 있어서 장군하면 멍군하는 의미없는 싸움이 되었다. 이에 공명은 이념의 싸움을 피하고 뭇 사람의 정서에 호소한 것이었다."라고 설명한다[24].
즉 당시 설전을 보고 있던 관중들은 대부분 일반 병사들이었으므로 어려운 한실의 정통성 얘기를 꺼내기보다는 모욕감을 줘서 분사하게 한 것이라 주장했다.
저건 연의 한정된 이야기지만 정사의 주석 제갈량집에 비슷한 일화가 있다. 화흠, 왕랑, 진군#s-2, 제갈장 등의 위나라 대신들과 명사들이 제갈량에게 촉나라는 거짓 황제놀음은 그만두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위나라에 항복을 하라는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제갈량은 서신에 대한 답장은 보내지 않고 정의(正議)라는 반론의 글을 써, 역사의 사례를 열거하여 항복, 그런 거는 촉나라한테는 있을 수 없고, 되려 약으로 강을 제압해 통일을 하겠다고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주석 제갈량집에 남은 정의(正議)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옛날 항우는 인덕에 의거하여 일어나지 않았던 까닭에 비록 중원을 차지하고 제왕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죽임을 당하여 후세의 영원한 경계가 되었다. 위나라가 이를 거울로 삼지 않고 그 전철을 밟고 있으니, 만약 그 자신은 화를 면한다 하더라도 자손들에게는 타일러주어야 할 것이다. '''헌데 몇몇 선생이 기애(耆艾)[25]

의 나이임에도 적의 의사를 받들어 내게 서한을 보내왔으니, 이것은 마치 진숭과 장송이 왕망의 공적을 칭송하고서도 큰 재화가 박두하자 죄를 모면할 요행을 바라는 것과 같지 않은가!'''

세조께서는 한나라 제업을 중흥시킬 때 불과 수천 명의 여위고 쇠약한 병사들을 분발시켜 곤양의 들에서 왕망의 강대한 40만 대군을 물리치셨다. 정도(正道)에 의거하여 사악한 자들을 토벌하는 것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다. 조맹덕은 간교한 수단으로 병력을 얻어 수십만의 군사를 출동시켜 양평에 이르러 장합을 구하려 했으나, 힘이 다하게 되자 후회하면서 겨우 자기 한 몸으로 도망쳐 정예선봉을 욕되게 했고, 마침내 한중을 잃고서야 황제의 자리를 함부로 얻을 수 없음을 깊이 깨닫고 급급히 돌아오다가 허창에 이르기도 전에 통한으로 병이 나 죽고 말았다. 조자환은 황음무도하여 그 뒤를 이어 황위를 찬탈했다. '''설사 몇몇 선생들이 소진과 장의의 허황되고 기만적인 유세를 찬양하고 죄악이 하늘에 사무치는 환두의 언사를 들고 나와 당제를 헐뜯고 하우와 후직을 비웃어 흩어지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문채를 헛되이 쓰고 필묵을 허비할 따름이다! 이런 것은 대인과 군자들이 할 바가 못 되는 것이다.'''

「 군계 」에서는 "만 사람이 죽음을 결심한다면 천하를 종횡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옛날 헌원은 수만의 군사를 정비하여 사방을 제압하고 천하를 안정시켰는데, 하물며 우리(=촉한)는 수십만 군사로써 정도에 의거하여 죄 있는 자들을 물리치려 하거늘, 이를 감히 막아낼 수 있겠는가!"'''

정사 쪽이 더 초전박살로 때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좀 뜬금없기는 하지만 조식이 한 주장에 대해 서신으로 반박하면서 논쟁을 벌인 적도 있다.

한나라의 두 시조(한고조 유방/광무제 유수)는 모두 포의布衣(=서민) 신분에서 일어났다. 고조는 거칠었으나, 광무제는 예의를 알았다. 고조에게는 군자의 풍도가 없었으니, 유자의 관(冠)에 오줌을 눈 것을 존중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벽양후(=심이기)가 음란하니 고조와 궁인들도 함께 휩쓸렸다.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은 요 임금이 나라를 다스린 근본이었으나, 고조는 이를 경시했다. 문왕은 많은 문인을 등용하여 나라를 안정시켰으나, 고조는 이를 멸시하여 등용하지 않았다. 또한 척희의 간사한 아첨을 들어 여후의 포락을 초래했고, 종국에는 영악한 여자가 제 마음대로 악독하고 잔혹한 궤계를 펼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모든 일들이 어찌 지모와 멀리 내다보는 식견이 없음이 초래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것은 고조를 필부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에 반해) 광무제는 견식이 넓고 인덕이 있으며 지혜로움이 뛰어났다. 무용과 계략을 펼쳐 반란을 제거했고, 의병義兵을 일으켜 잔적을 소탕했다. 곤양에서는 두 공(公)을 깨뜨렸고(왕읍과 왕심을 물리친 곤양대전), 한진(漢津)에서는 진부와 양구사를 쳐부쉈다. 당시 구주(九州, 천하)는 어지럽고 혼란스러웠으며, 황제를 칭한 자가 두셋이었고 왕을 칭한 자들이 네다섯이었는데, (광무제는) 동쪽의 제나라 땅에서 난적을 물리쳤고(경감의 장보 토벌), 계략이 없는 적미군을 굴복시켰다.

팽총은 남들과 다른 것을 바라다가 수하에게 목숨을 잃었고, 방맹은 군주를 배반했다가 살해당했으며, 외효는 신의를 저버렸기 때문에 주검이 되었고, 공손술은 다른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광무제에게) 머리를 바쳐야 했다. 이러한 모든 것은 (광무제의) 면밀한 계책과 계략이 정해진 다음에 출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승리였다. 전투에 임한 장수나 계략을 결정한 모신들 중 명령을 따른 자는 총애를 받았고, 명령을 위반한 자는 목숨이 위태로웠다. 광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싸운 것은 그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계략을 세운 것이고, 승리는 조정에서 결정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당시 유수 세력이 거둔 모든 승리가 광무제 한 사람의 재능과 위업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말). 이 때문에 두융은 그의 명성을 듣고 귀순했으며 마원은 그를 한번 만나보고는 탄복하였다.

조식

조자건(조식)은 광무제를 논하면서 그의 무장들이 한신, 주발과 비기기 어렵고, 그의 모신은 장량진평을 당해내지 못한다고 했으며(광무제 한 사람의 재능만을 부각시킨 조식의 논점을 지적하는 것) 또한 당대의 사람들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러한 논리가 광무제의 덕을 찬미하기 위해 당대의 준걸들을 말살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 때문이겠는가? 광무제에게는 운대 28장은 물론이고, 마원 등에 이르기까지 충성스럽고 지혜로우며 용맹한 인재들이 모두 갖춰져 있었으므로, 결코 고조 때보다 못하지 않았다. 장량과 진평이 특별히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본래 고조의 일처리가 거칠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장량과 진평은 넓은 충의와 신의를 표현할 수 있었고, 팽월주발은 외부에서 전장을 종횡할 수 있었다.

'굴뚝을 구부리고 땔감을 옮기게 한 사람은 잊었으면서 불을 끄다 머리를 태우고 이마를 데인 사람만 상객으로 여긴다'는 말이 있다(<한서>의 <곽광전>이 출처. 앞서 옳은 말을 한 사람은 잊고 뒤에 고생한 사람만 대우하는 사람의 심리를 지적한 고사). 이 말이 비록 작은 일을 두고 한 말이지만, 두 시조의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광무제의 신묘한 계책은 천심(天心)에서 나온 것이었다. 때문에 전략과 전술을 결정할 때 다른 사람들이 근심할 필요가 없었고, 여섯 가지 기책(진평의 여섯 기략을 의미하는 듯)을 따로 내놓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부합시킬 필요가 없었으며, 모두가 함께 제왕의 공업을 이룩하기만 하면 되었다.

광무제가 등우를 칭찬하여 말할 제 "공자에게 안회가 있었기에 문인들이 더욱 가까워졌다"고 하였고, 오한을 칭찬하여 말할 제 "장군은 나의 뜻을 이해하니, 그의 무력에 비할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그의 충심에 비할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신하들과 계략을 결정할 때는 마원의 의견을 마지막에 들었는데, 이는 마원의 생각이 늘 그의 생각과 합치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지혜로운 신하를 알아보는 명군의 현명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광무제의 상장들은 결코 한신, 주발보다 못하지 않았고, 모신들도 장량이나 진평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광무제는 멀리 내다보고 깊이 생각함으로써 나쁜 일을 조기에 방지하는 현명함을 가지고 있었으나, 고조는 일처리가 거칠었기에(광무제에 비해 개인의 재능이 다소 떨어졌기에) 진평, 장량, 한신, 주발 등이 힘을 다하여 그들의 공로를 세울 수 있었다.

제갈량

1차 원전은 남북조시대의 저작인 <금루자金樓子>라는 문집이다. 조식과 제갈량 두 사람은 각기 위나라의 황족과 촉한의 재상이라는, 단순히 지리적인 문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리감이 있었음에도 이런 논쟁이 벌어졌다는 게 좀 특이하긴 한데, 두 사람의 글이 사적으로 쓴 논찬이 아닌 대외에 공표하기 위한 '언론문'이었다면 (몇 년 정도의 시차를 감안한다면) 논쟁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아 보인다. 대체적인 논지 요약은 대충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조식: 다 필요없고 광무제 킹왕짱. 고조는 재능도 예의도 없는 필부!

제갈량: 광무제가 뛰어난 건 맞는데, 그 사람한테도 한신 주발 장량 진평에 못잖은 인재들이 있었음. 한신 등이 더 유명한 건 고조가 워낙 거칠어 그 사람들이 일할 기회가 많아서 그랬을 뿐이고.

두 사람이 아무래도 좋을 유방과 유수의 논찬에 대해 왜 이런 논쟁을 했는가하면 이 논쟁은 단순히 두 황제의 재능이나 인덕에 대한 평가에서 그치지 않는, 조식과 제갈량 두 사람이 산 시대의 정치적, 사상적 패러다임을 꿰뚫고 있는것이라 할 수 있다.
한고조 유방은 조식의 말마따마 돈도 땅도 없는 맨주먹 신분으로 일어나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갈 한(漢) 제국의 기틀을 다진, 전설적이기까지 한 건국 황제다. 비록 당대에도 여러 식자들로부터 문제시되긴 했지만, 통념에 가까운 그의 거친 성품과 유자들에 대한 멸시를 새삼스럽게 끄집어 낸 것은 유방, 나아가 한 제국 자체의 위신과 명망을 깎아 내리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지모와 식견이 없어 여후의 포락을 초래했'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일 수 있고.
그에 반해 광무제에 대해서는 어마어마한 찬탄을 늘어놓고 있는 조식인데, '불편한 사실'이긴 하지만, 광무제는 한때나마 주군이자 그가 모시는 황제였던 경시제에게서 등을 돌리고 자립하여 세력을 구축한 사람이다. 이는 결국 재능과 공로만 충분하다면 그 사람이 황제의 자리에 오름이 마땅하다는 논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인데, 광무제는 중원의 싸움에서 명성을 올리고, 하북을 석권함으로써 중국의 최강자가 되었다. 조식의 아버지 조조도 마찬가지로 중원의 싸움에서 세력을 구축했고, 관도대전, 나아가 하북을 정벌하며 원소 세력을 절멸시킴으로써 최강의 세력을 확립한 역사가 있다. 결국 조식의 논지는 결국 '현 시대의 광무제와 같은 조조가 황제가 됨이 옳다' 라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공무에 쫓겨 과로사로 죽었다는 기록까지 있는 제갈량이 왜 굳이 아무래도 좋을 조식의 논평에 반박을 했는가, 조식의 글이 한나라의 위명을 깎아내리고 조조 세력의 찬탈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갖고 서술된 것이라면, 그 한나라의 복원과 재흥을 명분으로 삼고 있는 유비 세력으로서는 묵혀두기 껄끄러웠을 것이다. <정의正議>나 <출사표> 등의 글들이 모두 한나라의 정통성과 촉한 건국의 정당성, 위나라의 찬탈 합리화에 대한 비판을 주 내용으로 삼고 있으니, 조식이 광무제와 조조를 같은 그릇으로 놓으려 했다면, 제갈량은 유비를 또 하나의 유방으로 만들기 위해 행동했다고나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곳 참고.

11. 사상


제갈량의 사상에 대해서 유가라든가 법가라든가 하는 등의 다양한 평론이 현대에 많이 있는데, 제갈량이 제자백가를 논한 글은 제갈량집의 집본에 남아있어서 제자백가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다만 이는 제갈량 본인이 제자백가를 보는 관점이고, 현대인이 제갈량의 사상을 평가하는 관점은 이와 다를 수 있다.

는 양생에는 뛰어났으나 위험과 재난에 대처하지 못했다. 상앙은 법치에 능했으나 백성을 교화하지 못했다. 소진장의는 말재간이 뛰어났으나 쌍방이 동맹을 맺도록 하지 못했다. 백기는 성을 치고 점령하는데는 능했으나 대중을 너그럽게 포섭하지 못했다. 오자서는 적을 막는 계책을 꾸미는데는 뛰어났지만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지 못했다. 미생#s-2은 신용을 지켰으나 변화에 부응할 줄 몰랐다. 왕가는 성군을 받들어 모시는데는 능했으나 어리석은 황제를 위해 처사할 줄은 몰랐다. 허자는 명망 있는 인사들의 우열을 평가하는데는 능했으나 인재를 양성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사람들의 좋은 점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여명협 교수는 저서 《제갈량 평전》에서 이글, 「논제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제갈량이 지은 글인) 「논제자」는 선진 시대 대표적 학문이었던 유가와 묵가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순자』의 「해폐편(解蔽篇)」은 유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나 묵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다. 제갈량이 유가와 묵가에 대해 논평하지 않은 것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여기서 그의 사상적 경향이 드러난다. 그는 시와 예를 중시하는 가정에서 자라나 배우기 시작하면서 형주의 많은 명유 석학에게 가르침을 받았기에 그가 유학을 숭상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묵가의 절용(節用)과 절장(節葬) 및 과학기술에 대한 중시 경향도 제갈량이 높이 쳤다. 이처럼 그가 유가와 묵가를 학문의 으뜸으로 쳤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논평을 하지 않은 듯하다

...........제갈량은 유학을 으뜸으로 삼았지만, 공자 · 맹자 · 순자 중 그 사상은 뚜렷이 순자에 기울었다. 「논제자」 중 직접 『순자』의 「해폐편」을 본받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순자』「군도편君道篇」에서는, "몸을 닦으면 나라가 다스려진다"고 했는데, 제갈량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몸을 닦는 것과 같다"고 했다. 또 『순자』 「성상편成相篇」에는, "다스림의 핵심은 예와 형이다"라고 했는데, 제갈량 역시 나라를 다스리는 데 덕과 형벌을 동시에 중시했다. 『순자』 「왕제편王制篇」에는, "칭찬과 상으로써 힘쓰도록 하고, 형벌로써 징계한다"고 했는데, 제갈량은 상벌을 엄격하고 밝게 할 것을 강조했다. 주지하다시피 순자는 유가학파 중에서도 가장 법가에 접근한 사상가다. 이 때문에 그의 제자 한비와 이사는 모두 법가의 대표적 사상가가 되었다. 제갈량 역시 법치를 숭상했으니 학술사상 방면에서의 사승관계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여명협, 《제갈량 평전》, 600p

이렇듯, 여명협 교수는 저서를 통해 제갈량의 「논제자」가 『순자』 「해폐편」에서 탈태한 것임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그 방향에 차이가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26]

夫君子之行, 靜以修身, 儉以養德.

부군자지행, 정이수신, 검이양덕.

무릇 군자는 행함에 지조가 있어야 하나니, 욕심 없는 평온한 마음으로 몸을 닦아야 하고, 근검과 절약으로 인품과 덕성을 길러야 한다.

非澹泊無以明志, 非寧靜無以致遠.

비담박무이명지, 비녕정무이치원.

담박하지 않은 마음으로는 자신의 뜻을 명확하게 밝힐 수 없고, 바깥 것에 흔들리는 마음으로는 원대한 목표에 이를 수 없다.

夫學須靜也, 才須學也, 非學無以廣才, 非志無以成學.

부학수정야, 재수학야, 비학무이광재, 비지무이성학.

배울 때는 고요한 마음을 유지해야 배울 수 있는데, 배움 없이 재능을 키울 수 없고, 뜻한 바 없이 이뤄지는 배움도 없다.

慆慢則不能勵精, 險躁則不能冶性.

도만즉불능여정, 험조즉불능야성.

거리끼는 것이 없고 게을러서는 정신을 진작할 수 없고, 조급하고 위험스러워서는 마음을 기르고 닦을 수 없다.

年與時馳, 意與日去, 遂成枯落, 多不接世, 悲守窮廬, 將復何及!

연여시치, 의여일거, 수성고락, 다부접세, 비수궁려, 장부하급!

세월은 시간 따라 나는 듯이 달려가고, 의지도 세월 따라 흘러가는데, 시들어 지고 말면 세상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한 채, 슬프게 부서진 집이나 지키고 있게 될 테니, 그때 가서 후회와 원망을 어찌 감당하겠느냐!

《계자서》(誡子書)

한편 《무후사, 그 안에서 본 삼국지》(신아사, 2017)의 50번째 챕터와 《제갈량 평전》은 제갈량의 계자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여명협 교수에 따르면 '담박'과 '영정'이라는 어휘는 비록 단어는 달라도 고요함을 위주로 하는 도교 사상과 같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만물을 고요히 관찰하며, 고요한 마음으로 생각해 냉정하게 처세하는 마음의 자세' 를 반영했다는 청정무위의 수신원칙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27]

12. 여담


  • 한국에서도 지혜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그의 이름은 보통명사화 되어 불린다. 보통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 있으면 그 인물의 성을 앞에 붙여서 X갈량,[28][29] 또는 이름만 따서 제갈X[30]로 부르는 식.
  • 책사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제갈량의 체격이 왜소했을 것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제갈량의 신장은 8척(삼국지 시대 기준 1척=22.7cm)이었다고 한다.
  • 제갈량의 외모가 매우 뛰어났다고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진수는 제갈량전에서 "제갈량은 어려서 빼어난 재주와 영웅의 그릇이었고 키가 8척에 용모가 매우 훌륭하여 그 당시 사람들이 뛰어난 인물로 여겼습니다(亮少有逸群之才,英霸之器,身長八尺,容貌甚偉,時人異焉.)."라고 서술한 바가 있다. 또한 연의나 민간전승에서는 흰 피부에 입술이 붉었으며 자태는 신선과도 같았다고 묘사되는데 흰 피부와 붉은 입술은 미인을 상징하는 용어인데자가 신선같은 외모는 절세미남을 상징하는 단어다. 주유, 손책 등과는 달리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엄연히 삼국지의 공식미남 중 하나다. 여담으로, 재미있게도 위, 촉, 오 들의 오른팔이자 세력의 대표 인재들인 순욱, 제갈량, 주유 모두 정사에 기록된 미남이다.[31] 그래서인지 제갈량이 모티브인 캐릭터나 삼국지 기반 창작물 속 제갈량은 거진 미남 설정이 붙는다. 고우영 삼국지나 이충호 삼국지 같은 일부 창작물들에서 이 점을 반영해서 마치 여성 캐릭터처럼 아름다운 외모로 묘사되기도 한다. 삼국전투기, 여자 제갈량처럼 성별이 진짜로 바뀌어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 관우의 트레이드 마크가 수염, 청룡언월도, 적토마, 춘추좌씨전이라면 제갈량의 트레이드 마크는 학창의,[32] 윤건,[33] 백우선,[34] 사륜거.[35] 이런 이미지는 이미 동진 시기부터 있었던 듯하다. 동진시기의 지인소설인 어림과 태평어람 인용 촉서에는 사마의가 제갈량과 위수에 대치하면서 사람을 보내 제갈량을 살펴봤는데 제갈량은 흰 수레를 타고 갈건을 쓰고 학우선을 든 채 삼군을 지휘하여 중군이 그에 따르니 사마의가 감탄하여 '가히 명사라 이를만 하다'라고 한 기록이 있다. 제갈량의 이런 이미지가 연의보다 이른 시점에 완성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시호가 충무여서인지 한국에선 이순신을 제갈량에 비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선비들부터 그러하였는데 선조실록에는 노량 해전을 두고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는 표현도 있다. 다만 위를 정벌하기 위해 수차례 북벌을 벌여 쳐들어갔던 제갈량을 조선을 침략해 들어온 왜군을 수차례 막아낸 이순신과 비교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이순신 본인도 자신의 재주는 제갈량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고. 물론 제갈량의 북벌이 한나라의 영토 수복이었다는 시각을 대입한다면 싱크로가 맞는 편이다.
  • 살아 생전 활발히 집필 활동을 했다고 알려졌으며, 그의 병법을 수집해 274년에 진수가 편찬한 《병법 24편》, 혹은 《제갈량집》이라 불리는 저서도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대부분이 소실되어 현재 전하고 있는 것은 명문으로 칭송받은 전후 출사표[36], 제갈량의 저서로 알려져 있으나 위진남북조 시대에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하여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는 《장원》, 병법 24편에 속하거나 혹은 그 외의 병법이라고도 여겨지지만 장원과 마찬가지로 제갈량이 저술했는지에 대한 진위가 불분명한 《편의십육책》, 그리고 태평어람등에 남은 일부 문집과 그가 지인들과 나누었던 편지 정도와 집본(輯本) 제갈량집으로, 현재 남은 집본(輯本) 제갈량집은 청나라 시대 인물 장주(張澍)가 제갈량의 남은 문장, 편의십육책과 장원, 제갈량과 관련된 일화등을 모은 책이다.
  • 정사 삼국지에서 황제를 제외하고 단독으로 입전(立傳)된 인물은 제갈량과 육손뿐이다. 진수는 제갈량전 본문에 11,722자를 사용했으며 마지막 평왈(平曰)에서는 천여자로 제갈량을 평했다. 거기다 배송지는 3000자의 주석을 달았다.[37]
  • 후출사표에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라는 말이 나오는데,[38][39] 사실 후출사표가 위작이라는 설도 있긴 하지만(이 문제에 대해서는 출사표 참고) 제갈량 본인이 이 말대로 살다간 사람인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 이 말대로 촉을 위해 노력했으며 그 말에 걸맞는 말년을 보냈고, 그 행보를 보면 여러모로 그의 죽음의 원인이 과로사 혹은 과로로 인한 병사라는 점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 승상이란 사람이 이러니 아랫사람들도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해 촉나라의 관리들은 과로사의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농담조로 제갈량이 누군가를 일처리 좋다고 칭찬하면 이른 죽음을 맞이한다라고 할 정도. 사실 체력적인 측면에서 제갈량이 약하지 않았느냐는 얘기도 있는데 정계와 군부를 총괄하는 승상/대장군직까지 가 보지도 못한 동윤이나 법정, 양홍 같은 사람들까지 픽픽 쓰러지는 게 일상이요, 제갈량이 후사를 맡긴 장완조차도 군사 지휘 업무를 분리한 채 정무와 전략 입안에 주력했으나 역시 10년 버티나 마나 하다가 사망했다. 그 외 오의나 장억을 비롯 군사 업무에서도 업무를 못 버티고 사망하거나 몸 망친 사람들이 다수. 그런데 제갈량은 저들이 맡은 모든 업무들, 즉 장완의 치적 및 군사 전략적 업무 + 강유의 군대 지휘 + 동윤과 법정의 관리 감찰 및 행정 절차를 오로지 혼자 총괄하면서 10년을 버텼다. 이 기간이면 강산이 변하고도 남는 긴 시간이다. 일건 절대 저질 체력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융중에서 농사일로 다진 체력이 있어서 그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는게 옳을 것이다.
  • 제갈량 인생에 가장 큰 암운을 드리운 것은 암군인 유선도,[40] 라이벌인 사마의도 아닌 손권. 일단은 동맹관계였지만 형주를 빼앗고 관우를 죽인 뒤 촉을 도발했다가 이릉대전이 터졌음을 기억했기에 손권의 뒷치기를 항상 염두에 두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북벌을 계획하였기에 늘 고생이었다.
  • 창작물에서는 초주가 제갈량에게 딴지를 거는 네거티브한 인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제갈량의 북벌을 반대한 적이 없었고, 제갈량이 사망하자 가장 먼저 달려간 인물이기도 하다.[41] 하지만 어디까지나 초주가 제갈량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일 뿐이고 본인은 현재까지 평가가 갈리는 중이다. 자세한 것은 초주 문서 참고. 제갈량의 경우 특별히 초주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없지만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외모를 보고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초주가 제갈량을 만나러 찾아오자, 키는 8척이지만 얼굴은 추했던[42] 그의 외모를 본 사람들이 모두 킥킥거리며 웃어대었다. 초주가 나간 후 법의 집행관이 웃은 자들을 처벌하자는 이야기를 올리자 제갈량이 나도 웃음을 참기 어려웠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땠겠냐?라며 처벌 없이 넘어간 것.
  • 현대에 와서는 주군인 유비보다 더 인기인이다. 성도의 사당들을 가봐도 유비의 사당보단 제갈량의 사당에 사람들이 더 바글바글하다. 쓰촨에서 지진이 났을 때도 "승상님이 다 해주실 거야"라며 무후묘에 피난 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소오강호에서는 당시 사천성 사람들이 제갈량을 기리기 위해 천 년이 넘도록 머리에 흰 띠를 둘렀기에 다른 지방 사람들과 구분이 되었다고 나와 있다.
  • 한국제갈씨는 신라 때 들어왔으며 제갈규의 5세손인 제갈충(諸葛忠)이 한나라가 망하자 위(魏)나라에 불만을 품고 미추 이사금 치세시 신라로 망명하여 지리산에 살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후로 후손들이 신라에서 벼슬을 하거나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는 등의 변천사를 겪다가 21대손 제갈공순(諸葛公巡)이 신라 흥덕왕 때 공식적으로 귀화하여 우리나라 제갈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제갈충은 제갈량의 증손자로 알려져 있다. 고려 현종때 후손 형제가 각각 제씨와 갈씨로 성씨를 하사받아 제씨와 갈씨로 갈라섰다가 구한말에 일부가 다시 제갈씨로 합쳐졌다. 그리고 2002년 법원 판결에 의해 제씨와 갈씨가 제갈씨로 합해졌다. 실제 복성 소송을 한 이유는 갈정웅 한국 M&A협회 회장 집안의 개인소송 때문으로 이 이후 이 사람은 제갈정웅이 되었다. 흔히 제씨 갈씨 두 성씨가 제갈씨로 복성을 한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복성이유를 갈갈이 패밀리 때문으로 오해하고 인터넷에 퍼뜨리는데 복성은 구한말 복성 운동으로 시행되던 것으로 구한말 이후 제씨, 갈씨, 제갈씨 3성이 존재하였고 이후 제씨, 갈씨는 복성을 하고자 하면서 개인소를 제기하여 복성이 된 것이다.
  • 원나라 때의 연극에서의 제갈량은 자신의 야망(나라가 다시 의로운 이의 통치를 받는 것)을 위해 유비를 따르고[43] 분노와 뿌듯함을 표현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이었지만 명나라 때의 연극에서는 이상주의자적인 면이 더 강조되었다.
  • 후촉의 왕소원(王昭遠)이라는 인물은 스스로 제갈량으로 자칭했는데, 병서를 좋아하고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나 모략이 부족했다. 송나라 군대가 후촉을 멸망시키려 할 때 싸웠으나 패배하여 울면서 탄식하다 눈이 붉어진 채로 잡혀버렸다. 사람들은 즙 눈물을 흘리는 제갈량이라며 비웃었다고.
  • 청나라 옹정제의 시절, 옹정제는 권신인 융과다를 숙청하기 위해 온갖 죄목을 가져다 붙혔는데, 개중에는 스스로를 제갈량에 비유한 오만함이라는 항목도 있었다.
  • 위 사진의 왼쪽의 여성이 제갈량의 63대손 제갈재기(諸葛梓岐)[44]이다. 1979년에 출생했고. 남편은 홍콩의 이름난 재벌 2세이다. 조상을 닮아서인지 제갈재기도 173cm로 장신이다. 캐나다 출신 화교로 홍콩에서 모델로 활동했다. 남편이 금수저 끝판왕인 재벌 2세답게 결혼식에 무려 11억원 정도를 들여 초호화 결혼식을 했다고 한다.
  • 이름 '량()'은 한자문화권에서 이름에 자주 쓰이는 글자 중 하나로 당대부터 이미 널리 쓰였다. 동시대 사람으로는 사마의의 3남인 사마량과 손오의 2대 황제 손량. 지금도 한자문화권에서 종종 쓰이는 이름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나라는 의외로 일본. '료'라고 읽히며 남자 이름이 외자로 료라면 십중팔구는 涼、亮、良 정도 중 하나. 복성이나 세글자 이상의 성도 심심찮게 있어 외자 이름이 어색하지 않은 문화적 배경과 삼국지의 인기가 한몫한다.
  • 일부 사람들이 향료이자 약재인 정향의 효능을 설명하기 위해 그에게 구취가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조조로부터 계설향(鷄舌香)을 받은 것도 그래서라고. 하지만 이건 근거없는 낭설이고,[45] 실제로 조조에게 계설향을 받은 이유를 중국에서는 적벽대전을 앞두고 제갈량을 회유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정향이 군주를 가까이에서 알현해야 하는 고관들이 썼다는 것에서 조조의 심중을 짐작하는 이들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의 일화 문서를 참고할 것.

13. 궁경지 논쟁


臣本布衣, '''躬耕南陽''', 苟全性命於難世, 不求聞達於諸侯,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신은 본래 '''남양땅에서 밭갈며 지내던''' 미천한 백성이라 구차히 어지러운 세상에서 성명을 보존하고 제후에게 알려져 출세할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선제께선 신을 비천하다 여기지 아니하시고 외람되게도 스스로 몸을 굽혀 세번이나 소신의 초옥을 찾으시어 당세의 일을 물으셨습니다.

제갈량의 전출사표 중에서

왜 이 구절이 문제가 되느냐면 제갈량 사후 이 "밭갈며 지내던" 남양 땅이 어디냐에 대한 논쟁이 여전히 끝이 없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직접 밭 갈던 곳을 '궁경지'라고 칭하는데, 동양권에서 삼국지의 인기는 말 그대로 남녀노소, 고금을 막론한 지라 이에 따른 관광 산업을 생각하면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46] 궁경지 논쟁에서 그 후보는 두 군데로 압축이 되어있는데 한곳은 후베이성샹양(양번), 또 한 군데는 허난성난양이다.
원래 궁경지 논쟁은 원나라 때부터 시작된 오래된 논쟁으로 삼국시대 이후 육조~남송까지 현재의 남양이 남양 완현이라는 기록이 없는데, 이후 원나라의 남양현지, 남양부지 같은 자료가 남양 완현이 남양 등현 융중이라는 주장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양번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몇가지 이유를 들어 반론을 제시한다.
1. 서서, 최주평, 석도, 방통, 마량, 방덕공, 황승언 등은 양양에서 활동하던 인물이다. 거기다가 제갈량의 큰누나는 양양 호족 괴기의 부인이 되고, 작은누나는 방덕공의 아들 방산민의 부인이 되었는데, 만일 현 남양에서 살고 있었다면 120km나 되는 길을 단시간 내에 왕복할 수 있겠는가?
2. 유비의 영지였던 신야에서 융중까지는 60km로 멀지 않지만 남양은 70km라 1일 이내로 왕복이 불가능하다. 거기다가 남양과 완현은 장수, 조조, 유표간 전투가 자주 벌어진 곳인데 과연 여기서 한가롭게 농사를 지을수가 있나?
이러한 설은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양번 융중을 제갈량의 궁경지로 인정하고 있다. 거기다가 같은 하남성 출신 사학자들마저도 양번 융중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양번도 약점은 존재한다.
1. 제갈량전 주석에 인용된 이흥이 쓴 제갈승상고택갈표에는 제갈량의 고택을 면지양, 북쪽에 물이 있고 남쪽에 산이 있다라고 본다면, 면수 이남의 융중은 이에 맞질 않다.
2. 현 융중은 강희년간에 만들어 졌고, 명 양양왕의 묘가 융중에 있다. 만일 제갈량의 궁경지면 왜 여기다가 묘를 쓰냐?
3. 악비는 남양 무후사에서 출사표에 대한 제발문을 썼는데 만일 제갈량의 궁경지가 남양이 아니면 뭐하러 여기다가 제발문을 남기겠는가?
이러한 양 지역의 첨예한 갈등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도 볼 수 있다.

마음은 조정에 둘 뿐, 선후주를 구별하지 않아 이름이 천하에 드높으니 양양이냐 남양이냐를 굳이 따질 필요가 있는가.

청나라대에 호북 출신인 고가형이 남양 지부로 부임할 때 어떤 사람이 고가형에게 "공명이 은거한 곳이 양양이냐 남양이냐?"를 물었을 때 쓴 시로 고가형은 저런 시를 쓰면서 진땀을 빼며 이 논쟁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 그만큼 양 지역간의 제갈량이 밭갈던 곳이 어느곳이냐 논쟁은 쉬이 가라앉을 성격의 것이 아니다.
여기에 1990년에 중국 정부가 여기에 기름을 더 부어버렸다. 한국의 우체국격인 중국우정이 삼국연의 특종우표 2세트를 만들었는데, 그중 1장이 삼고초려였다. 그리고 이 우표의 최초발행지를 결정하는 와중에 샹양과 난양끼리 서로 다투다가 결국 두 곳에서 각자 최초발행식을 치르게 했다. 거기다 2003년 중학교 어문교재에다가 10년 전에 삭제한 융중대를 실었는데 여기에 주석으로 융중은 산 이름이며 현재 후베이성 샹양에 있다고 적어버려서 활활 타는 기름에다가 폭약을 하나 던졌다. 이에 난양 사람들 1만명(!)이 서명하는 항의행사까지 있었다.
2008년엔 활활 타다 못해 폭발한 이 불구덩이에 중국 관영언론 CCTV가 핵폭탄을 하나 더 던져넣었다. 어느 프로그램에서 샹양의 도시광고를 내보냈는데, 여기에 "제갈 궁경지, 산수양번성"이라는 말을 집어넣어서 난양 사람들의 빗발치는 항의가 나타난 것이다. 근데 정말 웃긴건, 제갈량의 출생지는 이러한 궁경지 논쟁 때문에 묻혀 버리고 만 것이다. 제갈량의 출생지는 현재의 산둥성 린이(임기)시. 결국 임기 지역은 '제갈량문화관광지구'를 설치, 4평방킬로미터 내에 와룡산과 제갈량이 태어난 생가 등을 복원하고, 이후 제갈량문화관광축제를 개최해서 산업을 유치한다.
하여간 이 궁경지 논쟁에서 샹양과 난양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다. 샹양의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했고, 이 사이에 샹앙은 제갈량의 궁경지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는데, 이때 일본 대기업의 상무가 제갈량의 광팬이라 나중에 이곳에 이 기업과 중국 자동차 기업의 합작공장이 샹양에 지어지고, 융중을 개발해서 국가관광단지로 만들고 8~10억 위안의 매출을 올릴거라고 계획하고 있다.
난양의 경우 무후사를 기점으로 한 와룡강문화관광산업단지를 건설했는데 2015년의 매출은 14.35억 위안에 이르렀다. 거기다 이 문화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2만여 명, 그 부수효과로 취업하는 사람은 8만 명에 이를거라고 추산하고 있다. 샹양시의 경우엔 아예 시내에 제갈량 광장을 만들어 놓고 제갈량 동상을 세워놓았다.#[47]

14. 미디어 믹스




1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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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선 태자 책봉문에 따르면 사지절(使持節)이다.[2]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 유협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같은 해에 죽었다. 단 헌제는 3월, 제갈량은 8월에 사망했으며 헌제의 사망 당시 제갈량은 5차 북벌군을 이끌고 북진 중이었다.[3] 익주의 국정을 본격적으로 총괄해 맡게 된 시기는 214년.[4] 제후라고 다 같은 제후가 아니다. 충무는 군사적인 일에서 훌륭한 공적을 쌓은 이에게 주어지는 좋은 시호이다. 유사한 사례로는 충무왕 악비와 충무공 이순신이 있다.[5] 다만, 제갈량의 경우는 유비가 상국의 지위를 내렸다는 부분 이외에는 기록에서 거의 승상으로 불리기 때문에, 군주의 신뢰를 얻었다는 일종의 명예직일 가능성도 있긴 하다.[6] 한고제 유방이 일등 개국공신을 소하로 정했을 때 장수들이 반발하자 유방은 장수들을 사냥개, 소하를 사냥꾼에 비유하며 장수들이 공훈을 세울 수 있던 건 소하의 보급과 행정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일침을 놓자 장수들은 그제서야 조용해졌다는 일화가 행정력의 중요성을 알려준다.[7] 사실 리처드는 십자군 전쟁에서 무승부다. 항우도 약탈을 했는지 도대체 어떻게 밥을 먹었는지도 모르지만 진나라가 곳곳에 모아둔 쌀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 물론 촉의 보급이 무한하지는 않다는 것을 겨냥한 전략이기도 하다.[9] 그러나 자막이 부실하거나 틀린 감이 없지 않은데, 엄준의 말에 반박하는 대사에 자막이 안 나와 있거나, 양웅에 대해 논하더니 뜬금없이 왕망이 투항해서 망했다는 둥 엉망인 구석이 많다.[10] 사실 이는 설전이나 키배의 본질적인 한계이다. 물론 이상적인 토론의 진행 과정은 양측이 서로 자신의 주장과 그 근거를 내세우고, 자신의 근거로 스스로의 주장을 입증하며 상대의 주장을 반박함으로써 '''옳은''' 결론에 이르는 것이지만 이런 것은 실체적 사실을 다루는 학술 논쟁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가치판단의 문제에서 양측이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다투는 토론이면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은 그른지 명확히 구별되기 어렵다. 또한 한 쪽의 논거가 상대의 주장을 반박할만큼 강하다면 (상대가 바보가 아닌 한) 애초에 토론이 성립하지조차 않을 것이다. 결국 토론(설전)의 승리법이란 우호적으로 진행될때는 양쪽이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양측 모두 합의할 수 있는 절충안을 찾는 것이고, 그게 아니라 정말 승패를 가리자고 하면 주장-입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이 옳고 상대의 주장이 그릇되었음을 밝히기보다는 상대의 주장에서 허점을 찾아 논파하여 상대의 발언을 봉쇄해버리거나, 감정적으로 주변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등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결국 나관중의 시대든 제갈량의 시대든 현대든 토론의 필승법이란 십중팔구 말꼬리잡기 아니면 인신공격인 것은 거의 비슷하다. [11] 사실 제갈량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소리다. 관중이나 악의 모두 엄연히 나라 꼴 갖춘 군주에게 등용되어 일했지, 유비처럼 궁벽한 성 하나로 천하의 절반을 호령하는 협천자 군벌과 맞서는 군주에게 등용되진 않았다.[12] 종횡가 문서 참고. 춘추전국시대의 국가들이 고작 두 사람의 말빨에 넘어가서 전쟁을 벌였다고 생각하여 그 점을 비꼰 것이다.[13] 삼국지 내에서 유비의 혈통에 대한 태클이 등장하는 희귀한 장면이다. 유비/혈통을 보면 자세히 적혀 있듯이 당대에 유비가 황실의 먼 후손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근대에 와서나 그러한 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14] 참고로 어떤 판본에서는 육적한테 도둑놈이라고 트집을 잡는 소인배스러운 인신공격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건 단순히 귤을 가져간 것을 가지고 도둑놈이라 깐 것이 아니라, 귤을 가져다가 어머니에게 드리려 할 정도로 부모를 모시는 사람이, 어찌 주군에게는 항복을 권유하냐며 표리부동한 태도를 까는 것도 있다.[15] 양웅은 대학자로 명성이 높았지만 왕망과 결탁해 나팔수 역할을 한 어용문인으로 악명높다. 왕망이 몰락하자 제갈량 말대로 누각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이후 은둔해 생을 마쳤다. 아무튼 그의 이름은 곡학아세의 전형으로 여겨졌고 후대의 문인들에게 전방위로 까였다. 대표적으로 당나라의 이백은 자신의 시인 협객행의 마지막 구절을 誰能書閣下 白首太玄經(천록각 아래로 뛰어내린 그 누군가는 무엇하러 머리가 새도록 태현경이나 지었던고)이라 쓰며 시에 언급된 협객들과 대비하여 양웅을 깠다.[16] 서한 때 설치된 행정구역으로 동한 말 하비국에 편입된다.[17] 노숙이 형주에서 온 제갈량을 주유에게 소개하는 자리인지라 먼저 노숙이 입을 열었다.[18] 즉 얼핏 주유의 거짓 항복론에 동조하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재산과 목숨이 아까워서 도망친 겁쟁이'로 몰아가고 있다.[19] 본래는 그냥 '동쪽과 남쪽에 두 다리(二橋)를 놓고'인데 '동남에서 두 교씨(二喬)를 데려와서'로 바꿔 읊었다. 자세한 것은 동작대, 강동이교, 주유 참고. 여담으로 연의에서 조조는 진짜로 두 자매를 노렸다는 반전이 드러나 결과적으로는 제갈량은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격이 됐다.[20] 주유는 선대 주군이자 손권의 형인 손책의 의제(義弟)로, 손책이 원술에게서 도망칠 때 동오에서 가장 먼저 마중을 나갔다. 이후 죽음을 앞둔 손책이 무열황후를 통해 손권을 보필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손책과 매우 긴밀한 관계였다. 자기 아내를 욕한 거야 당연히 기분 나빴겠지만 이런 형제애를 모욕당한 것도 적잖이 화가 났으리라.[21] 한신, 관영이 제나라를 격파하고 제왕 전광(田廣)을 사로잡자 숙부인 전횡(田橫)이 제왕에 올랐는데 그 후 고제가 천하를 통일하자 5백 여 무리를 이끌고 바다로 달아났는데, 후환이 될 것을 우려한 한고제가 투항을 권유하며 위협하자, 이에 응해 경사로 오던 도중 "나는 처음에 한왕(漢王)과 함께 같은 왕이었는데, 이제 한왕은 천자가 되고 나는 도망친 포로 신세가 되어 북면하여 그를 섬겨야 하니 그 치욕을 감당하기 어렵다"며 자결한 고사를 뜻한다. 물론 고사상으로 그렇고 실제로는 역이기를 삶아죽인 일 때문에 그 동생 역상이 해코지를 할 까봐 자살한 것이다. 고제는 그 말을 듣고 역상에게 엄포까지 놓아가며 전횡을 회유했지만 전굉은 그래도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며 스스로 자살하였다.[22] 여기서 널리 퍼진 고사가 바로 강노지말.[23]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아가는 것.[24] 이 역시 토론이나 설전이 가진 본질적인 한계의 일부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촉한정통론조위정통론은 삼국시대가 끝나고 2천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현대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은 논쟁이고, 오히려 이것은 '각자 입장의 차이일 뿐 어느 쪽이 옳고 다른 쪽은 그른 관계가 아니다' 라는 것이 현대 합리주의적 결론이다. 하물며 당대인들이 각자 자신의 정당성 주장을 아무리 백날천날 떠들어봤자 결론이 날 리가 없고, 당연히 장군하면 멍군하고 단수치면 팻감놓는 무의미한 논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문제가 그 자리에서 시원한 결론이 날 수 있은 문제였다면, 애초에 설전이 시작될 일도 없고 작품에 비중있는 장면으로 등장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런 논쟁에서는 '자신에겐 정당하지만 상대는 결코 동의하지 않을' 주장과 논거를 내세워 다투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감정과 정서에 호소하여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이 훨씬 합리적인 대응이다.[25] 50~60대를 이름[26] 그러나 그의 주장은 가려들어야 한다. 윗글에서도 유가와 묵가에 대해 논평하지 않은 것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는데, 그 근거로 많은 명유 석학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굳이 유가에 대해 논평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할 수 있으나 묵가까지 도매금으로 묶은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현대 중국 학자들은 고대 중국 학문 가운데에서 과학과 논리의 흔적이 뚜렷한 명가나 묵가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경향이 있으며 순자도 비슷한 이치로 좋아한다. 순자가 분명 공맹순 중에서는 가장 논리적이고 법가에 기울어져 있는 것도 맞지만 그렇다고 묵가랑 친한 것도 아니다. 제갈량이 묵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마치 유가를 언급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의미로 묵가를 선호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중국 학자들은 종종 주장하는 바를 세우기 위해서 올바른 근거를 생략하거나 납득이 어려울 정도로 박약한 채로 내버려두고 진행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27] 그래서 성도 무후사의 제갈량 사당이자 정전인 정원당(靜遠堂) 대들보에는 '담박명지 영정치원 '(澹泊明志 寧靜致遠)이라고 새겨져있다고 한다.[28]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한다면 성을 붙일 때는 X량이라고 해야 한다. 제갈량은 성이 제갈(諸葛)씨이고, 이름이 '량(亮)'이기 때문. 그러나 X량이라고 하면 어색하기도 하고, 글자수도 맞지 않기에 X갈량이라고 표현하는 듯.[29] 예를 들어, 프로듀스 101 시즌2황갈량이나 KBO 리그염갈량 그리고 프로듀스 X 101싸갈량 [30] 이후락의 별명이 제갈조조였다. 뒷쪽의 조조같은 시대의 그 조조다.[31] 물론 당시 명문가 출신들이 모두 외모가 뛰어났다고 평가받지는 않은 만큼 타고난 유전자 빨이 제일 중요하겠다만, 셋 모두 다 명문가 출신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좋은 환경에서 좋은 관리를 받아 외모가 준수하다고 추측할 수가 있다, 그나마 제갈량의 경우 셋 중 가장 집안이 딸리고 20대 초중반 시절에는 손수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나머지 둘보다는 고생을 좀 했다.[32] 학창의는 예로부터 신선이 입는 옷이라고 하여 덕망이 높은 학자가 연거복(燕居服)으로 입었던 것으로, 소매가 넓고 뒷솔기가 갈라진 웃옷이다.[33] 비단실로 짠 두건(頭巾). 은자(隱者)가 쓰는데 촉한(蜀漢)의 제갈량(諸葛亮)이 등용된 뒤에도 계속 썼다 함.[34] 흰 새의 깃을 모아서 만든 부채.[35] 바퀴가 넷 달린 수레.[36] 다만 후출사표는 다른 사람이 쓴 위작이란 설이 있다.[37] 三國演義三國志對照本[38] 온 마음의 정성 몸이 부숴질 때까지 노력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정성을 다하겠다는 뜻. 정사 삼국지자치통감에는 국궁진력(鞠躬盡力)이라 표기되어 있다.[39] 이 말은 뒷날 강희제저우언라이도 좌우명으로 삼았던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40] 제갈량 생전에는 철저하게 제갈량의 말을 따랐다. 말을 안 들어먹었다면 제갈량은 훨씬 더 일찍 과로사했을 거다.[41] 다만 이막처럼 막나가는게 아닌 이상 눈치가 있다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어도 최소한의 예를 표하는 것이 도리다. 거기에 제갈량은 촉한 정치판 최고의 거물이었다. 정치적 쇼였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것. 유선이 가지 못하게 조서를 내렸다고 하지만 유선의 조서를 무시한 것이 아닌 그저 조서가 내려지기 전에 출발했기에 도달한 것 뿐이었다.[42] 정사에는 용모가 소박했다고 묘사되어 있지만, 진수와 초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추남이라는 사실을 최대한 돌려 표기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기 현대에도 외모가 별로라고 여겨지는 사람한테 대놓고 '너 못 생겼어'라고 말하는 건 인간관계 단절 및 싸우자고 시비를 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서 '착하게 생겼네' 등으로 돌려서 말하는 사례와 다르지 않다. 이 일화만 보아도 초주의 외모는 자리에 모인 모두가 웃음을 참기 어려워 했을 정도였으니.[43] 정확히는 유비가 황제가 돼서 3년밖에 못산다는 걸 알고(과거 연극의 제갈량은 도사로도 표현되었다) 망설이지만, 유비의 아들이 있다는걸 알고 따라나서기로 한다. [44] 원래 이름은 제갈일소(諸葛一蘇).[45] 저 링크에서는 조조가 적국의 재상인 제갈량을 조롱하기 위해 정향을 보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실제 제갈량이 재상인 승상이 된 것은 조조가 죽은 후이다(...).[46] 한국에도 이와 비슷한 지역 분쟁이 있었는데 정몽주의 출신지를 두고 영천시포항시가 분쟁을 벌인 바 있다. 다만 이쪽은 문헌상으로는 영천시 출생설이 거의 정설로 굳어진 상태. 역사적 유명인의 고향이나 연고지를 두고 벌어지는 지역분쟁은 한국이나 중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종종 벌어지는 현상이다.[47] 전근대 기준으로 하면 번성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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