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윤

 



1. 개요
2. 정사
3. 연의
4. 미디어 믹스


1. 개요


董允
(? ~ 246년)
삼국시대 촉한의 신하. 자는 휴소(休昭). 제갈량장완, 그리고 비의와 더불어 촉한의 사상(四相) 또는 사영(四英)이라고 불린다.

2. 정사


촉의 좌중랑장이었던 동화[1]의 아들이었고, 유비가 태자를 세우고, 동윤을 선발하여 태자사인으로 삼았다가 태자사마로 전임시켰다. 유선이 제위를 계승한 후, 동윤은 황문시랑으로 승진했다. 승상 제갈량이 북쪽 정벌에 나서 한중에 주둔했을 때, 유선의 나이가 어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려움을 걱정하고, 동윤이 공명정대함으로 일관된 인물이었으므로 그에게 궁궐의 일을 맡기려고 했다. 그는 성격이 매우 올곧고 강직하며 겸손하였다라는 평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제갈량이 일부러 그 쪽 일을 맡긴 것으로 보인다.
이런 성격 탓에 제갈량이 호방한 성품을 가진 비의와 대쪽같은 성품의 동윤 사이의 충돌을 막으려고 그 둘 사이에 곽유지[2]를 끼워 넣어 두 사람간의 분쟁을 조정했던 것 같다.
제갈량은 이어서 비의를 초청하여 참군으로 삼고, 동윤을 시중[3]으로 승진시켜 호분중랑장을 겸임하도록 하여, 숙위친병(황궁을 수비하는 근위병)을 거느리도록 했다.[4][5] 곽유지는 성정이 본디 온순하며 화해로워 정한 인원을 채울 뿐이었다.[6] (유선에게) 헌납(즉 임금에게 충언을 올리던 일하는 일)은 동윤이 전부 전담하였다. 제갈량은 출사표에서 궁중의 일은 곽유지, 비의, 동윤에게 묻고 태만할 경우 그 허물을 물으라고 했는데 아마도 유선이 곽유지에게는 궁중의 일을 묻기만 하고 곽유지가 유선에게 따로 지적하는 일은 동윤과 달리 없었던 듯 하다.
동윤의 사건에 대처하는 방법은 방비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천자의 잘못을 바르게 구하는 이치를 열심히 다했다. 후에 천자의 후비 수는 열두 명을 넘지 않았으며, 현재 궁궐 안의 비인은 벌써 채워졌으므로 더 증가시키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유선은 그를 더욱 어려워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상서령 장완은 익주자사를 겸임했을 때, 상소를 올려 비의와 동윤에게 자리를 양도하려고 했고, 또 유선에게 상소를 올렸다.

동윤은 안에서 황제를 여러 해 모시고 황실을 보좌했습니다. 마땅히 그에게 작위와 봉토를 내려 공로를 포상해야 합니다.

동윤은 간곡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황실 내부 일을 맡았다. 그는 환관들의 발호를 억제하고, 황제 유선에게도 직언을 서슴치 않아, 유선도 동윤을 어려워했다고 하며,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촉한을 말아먹은 환관 황호도 함부로 설치지 못했다. 동윤전과 화양국지 등의 기록을 보면 진지 이후 황호가 득세하여 세도를 떨치자 촉한 사람들은 다들 동윤을 그리워 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강직함으로 인망을 얻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황호는 동윤을 두려워하여 감히 나쁜 행동을 하지 못했다. 동윤이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황호의 직위는 황문승(黃門丞)에 불과했다.동윤은 일찍이 상서령 비의, 중전군(中典軍) 호제(胡濟) 등과 함께 밖으로 나가 연회를 열어 즐기기로 했었다. 나갈 수레가 이미 준비되었으므로 낭중인 양양 사람 동회(董恢)가 동윤에게 인사를 하여 경의를 표했다. 동회는 나이가 어리고 관직이 낮았는데, 동윤이 나가는 것을 멈추고 그를 접대하는 것을 보고 불안해하며 떠날 것을 청했지만, 동윤은 허락하지 않고 말했다.
"본래 내가 나온 목적은 좋아하는 선비들과 환담하기 위해서였소. 지금 그대는 벌써 자신을 굽히고 쌓아놓은 것을 말하려고 했소. 이 말을 버렸으니 그 연회에 가는 것은 적합하지 못한 일이오. "
그리고 말을 수레에서 풀도록 명령했다. 비의 등도 수레를 멈추고 가지 않았다. 동윤이 정직함을 지키고 아래 선비들에게 겸허하게 대하는 것은 대체로 이와 같았다. 연희 6년(243)에 보국장군(輔國將軍)을 더했다. 7년(244)에 시중수상서령으로서 대장군 비의의 차관이 되었다. 9년(246)에 세상을 떠났다.
유선이 비의를 익주자사로 삼고, 시중 동윤을 수상서령(守尙書令)으로 삼아 비의의 부직을 맡게 하였다. 이때 나라에서는 전쟁하는 일이 많았고 공무도 번거롭고 복잡하였다. 비의가 상서령이 되었을때, 알고 깨달은 것이 보통을 넘어 매번 올라오는 문서를 살피고 읽을 때마다 눈을 들어 잠깐 훑어보고도 이미 그 뜻하는 것을 알았는데, 그 속도가 보통 사람의 몇 배나 빨랐으며 끝까지 잊지도 않았다. 늘 아침과 포시(哺時)에 사건에 관한 보고를 받았는데, 그 중간에 빈객들을 받아들여 접대하고 마시고 먹으면서 쉬었고, 더욱이 박혁(博奕=쌍육과 바둑)까지 하면서 매번 사람이 즐기는 것을 다 하였지만 하는 일도 역시 팽개치지 않았다.

동윤이 비의를 대신하게 되자 비의가 한 것을 배워서 하려고 하였지만 열흘 동안에 처리할 일들은 틀어지고 어긋났다. 동윤이 탄복하여 말하였다. "사람의 재주와 힘이 차이가 나는 것이 이와 같은데 내가 좇아갈 바가 아니다." 이에 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는 것을 하루종일 하였으나 오히려 쉴 틈이 없었다.[7]
진지(陣祗)가 동윤을 대신하여 시중이 되자, 황호와 서로 협조하였으며, 황호는 처음으로 정사에 간여하게 되었다. 진지가 죽은 후, 황호는 황문령으로부터 중상시•봉거도위로 승진했고, 권력을 쥐고 흔들어 국가를 전복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다. 촉나라 사람으로 동윤을 추모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등애는 촉나라를 공격해 들어간 후에 황호가 교활하고 음험한 사람이라는 것을 듣고 체포하여 가두어 사형에 처하려고 했는데, 황호는 등애의 측근들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 사면되었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단역으로만 출연한다. 출사표에서 잠깐 이름이 언급된다. 위연의 난에서는 양의를 지지하고 위연을 설득하려고 한중으로 갔지만 도착하니 위연은 이미 마대에게 죽은 상태였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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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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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통솔력과 무력은 낮고 정치력이 90대 초반에 지력과 매력이 70대 중후반인 전형적인 내정머신으로 나온다. 능력치는 촉 사상 중에서는 가장 뒤쳐진다. 제갈량은 말할 것도 없고, 비의와 장완은 지력과 매력이 모두 80대에 통솔력도 70대 중반 이상이기 때문. 물론 저건 나머지 3명이 먼닭이라서 그렇고 객관적으로 충분히 좋은 무장이니 열심히 내정을 시켜주자. 또한 삼국지 11, 12에서 비의와 친애 관계이며 연계 보너스도 존재한다.
삼국지 3에서는 B급 군사쯤 된다. 능력치는 육전지휘 68/수전지휘 67/무력 23/지력 86/정치력 85/매력70에 야망 7, 운 7, 냉정 7, 용맹 7로 장완과 비의의 중간정도 되지만 일기토는 약하다. 그냥 내정용으로 쓰는 게 낫다.
삼국지 5에서는 무력 19/지력 84/정치력 90/매력 70의 능력치를 부여받았다. 무력이 한참 낮고 지력이 살짝 애매해서 전투 등에 직접적으로 사용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치력이 90으로 매우 높고[8] 지력과 매력이 적당히 서포트할 수 있는 수치여서 외교, 인사, 내정담당관에 한정해 종요나 사마낭 이상의 문관이 될 수 있다. 다만 지력과 정치력이 뒤바뀌었으면 군사로서 좀 더 요직에 기용됐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보유 진형은 횡액, 방원, 보유 특기는 고무, 혼란, 수습, 진화, 낙석, 침착이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정치력 90 지력 77. 내정용으로 굴리다가 필요하면 배반과 고무가 있으니 전투에 부장으로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그 이외의 병법으로는 공성계 병법인 투석과 지식계 병법인 조영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38/무력 22/지력 78/정치력 91/매력 72에 명사 특기를 가지고 있다. 기술 특기가 없는 것이 아쉽지만 농업, 상업 특기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정요원으로는 최고급 인재다. 전체적으로 특기는 농업, 상업, 보수, 고무, 항변, 반박, 명사. 총 7개로 아버지인 동화보다 특기가 2개 더 많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7/무력 28/지력 78/정치력 91/매력 79이며 특기는 지도#s-6. 지도의 경험치 획득 상승 효과는 후기 촉에 인재가 워낙 없다는 걸 감안하면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은 특기다. 지력과 통솔력이 촉한의 사상 중에서 제일 낮고 적성도 A가 하나도 없지만, 특기가 순수 내정용 특기인 능리인 비의보다 오히려 싸움에 나갈 일이 많을 것이다.
삼국지 12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7/무력 28/지력 79/정치력 91로 쓸 만한 전법인 공격약화를 보유하고 있으나, 지력이 딱 1이 모자라서 제조소를 돌리는 기간이 단축되지 못한다는 것이 안습. 백성의 진정으로 빨리 올려주자. 일러스트는 검지 손가락을 들고 조언을 하는 모습이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7/무력 28/지력 79/정치력 88로 정치력이 12 때에 비해 3 하락했다. 특기는 상업 6, 농업 4, 교섭 1. 중신특성은 상업중시로 전수특기는 상업이며 전법은 화공계. 문관형이지만 꽤나 좋은 전법을 가지고 있어서 내정을 하다가 전투를 할 때 반드시 데리고 나가야 한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47, 무력 28, 지력 78, 정치 91, 매력 73으로 전작에 비해 정치력이 3 상승한 대신 지력이 1 하락했다. 개성은 동지, 진흥, 교화, 절감, 주의는 아버지인 동화와 같은 예교, 정책은 지역진흥 Lv 5, 진형은 학익, 투석, 전법은 제사, 진정, 투석, 친애무장은 비의, 호제, 혐오무장은 황호다. 여담으로 동탁과 같은 성을 가진 무장 중에서 정치력이 제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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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도 등장한다.
삼국전투기에서는 김정준이 아니라[9] 달타냥의 모험의 포르토스로 등장한다. 장완이나 비의와는 다르게 천재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올곧은 인물이라는 점은 강조된다. 덤으로 첫 등장 시에는 수염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 눈매도 순해지고 수염도 사라졌다. 작중 제갈량 사후 장완, 비의와 함께 촉한의 국사를 담당한다. 장완이 사망하며 비의는 장완을 대신하고 동윤은 비의의 업무를 승계하나 엄청난 업무량을 소화했던 천재 비의와 달리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비의와의 재능의 차이를 실감한다. 결국 격무에 시달리며 과로사한다.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풍수사계 장수로 등장하며, 연의 제갈량전(하)에서도 출전 가능하다. 제갈량전(하)에서는 제갈량을 보좌하는 역할로 등장하는데,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여 많은 유저들로부터 강한 인상을 남겼다. 게임상의 성능은 평범한 수준이며, 레벨을 60~80까지 올리면 제갈량전(하)에서 무난하게 활용할 수 있다. 다만 섬멸전에서는 다른 걸출한 풍수사계 장수가 많은지라 동윤을 쓰는 유저는 거의 없다. 2019년 7월을 기준으로 본 게임에서 동윤을 최종 승급한 유저가 50명도 채 안 되는 실정.

[1] 동화와 동윤은 정사 삼국지에 '동유마진동여전'으로 열전이 편찬되어 있다. 앞선 동은 동화, 뒷선 동은 동윤을 의미하는데 배송지는 이 편찬 방식에 의문을 표했다. 보통 이런 경우 아버지의 전 아래에 아들의 전을 나란히 서술하여 그 부속적인 전으로 두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2] 정사에 그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고 연의에서도 출사표 부분에서 잠깐 언급될 뿐이지만, 아마도 충직하며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생각된다.[3] 후한서 백관지: 시중(侍中)은 (관질이) 비(比) 2천석(二千石)이다. 정원은 없다. 황제의 좌우(左右)에서 시중들고 뭇 사무를 찬도(贊導,돕고 인도함)하고 고문응대(顧問應對,자문에 응답함)하는 것을 관장한다. 법가(法駕,어가의 일종)가 출행하면 (시중 중에서) 다식자(多識者,많이 아는 자) 1명이 법가에 참승(參乘)하고 나머지는 모두 말을 타고 승여거(乘輿車)의 뒤에서 따른다.[4] 원래 광록훈 휘하직으로 호분중랑장과 우림중랑장이 숙위친병에 속하는데 여기선 호분위의 숙위친병을 거느리게 한 듯 하다. 이는 이릉대전 이후 관제정비의 연장선상에서 장차 황궁사무를 총괄하게 될 동윤에게도 친병숙위를 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5] 호분중랑장에 오른 사람중 뒤에 '통숙위친병(統宿衛親兵, 숙위친병을 거느리다, 통솔하다)'라는 표현이 동윤전에서만 나오는걸로 봐선 진수가 추가적으로 기술해야 할 부분이 있었던 걸로 보는게 합당할 것이다. 동윤이 시중 겸 호분중랑장이 된게 227년경인데 그는 이 직책을 시중수상서령이 되는 244년까지 무려 17년간 맡고 있었다. 동윤전에만 '통숙위친병'이 언급되었듯이 동윤전에만 그가 살아있었을때 황호가 황문승에 불과했다고 진수가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제갈량이 곽유지로는 시중직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환관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 새로 시중을 맡은 동윤의 권한을 대폭 늘린게 아닐까 보여진다. 또 광록훈은 이후 상랑이 맡게 되는데 상랑이 승상장사에서 짤린 후 정계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니 광록훈은 감독만하고 호분중랑장이 실질적인 일을 맡아 처리하는 체계일수도 있다. 제갈량전에서 진수가 '제갈량이 관직을 간략하게 하여, 권제(權制, 임시 제도)에 따르고' 라고 칭찬한 점을 고려해 봤을때 이것을 잘못된 관직운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6] 초국선현전(楚國先賢傳)에 이르길: 곽유지(郭攸之)는 남양(南陽)사람으로 인물과 학식에 의해 당대사람들에게 알려졌다.[7] 자치통감 권74[8] 무력이나 지력이 90 이상인 장수가 매우 많음에 비해 정치력이나 매력 90 이상은 상당히 드물다.[9] 아버지 동화김성근으로 나온다. 이유는 당시 김성근이 프론트에 직언을 하다 짤린 이미지가 동화의 꼬장꼬장한 성격과 비슷했기 때문. 물론 살려조 논란 이 후로는 작가도 김성근을 가차없이 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