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 삼국지

 




'''정사 삼국지
三國志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
[image]
돈황 문서의 일부인 '정사 삼국지'의 보즐의 전기.
'''저자'''
진수
'''시기'''
3세기 서진
'''언어'''
상고한어
'''권 수'''
65권
1. 개요
2. 판본
3. 구성
3.1. 위서(魏書)
3.2. 촉서(蜀書)
3.3. 오서(吳書)
4. 편찬과정, 시기
5. 정통성 문제
6. 내용
7. 한국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
8. 주의점
8.1. 명백한 오류들
8.1.1. 오류일 가능성이 높은 기술
8.2. 다른 역사서와의 비교
8.3. 주석 문제
8.4. 저자 본인에 관한 문제
8.5. 결론
9. 번역
10. 참고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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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진수(陳壽)가 짓고 남조 송나라배송지(裴松之)가 주를 달아 내용을 보충한 삼국시대의 인물들을 다룬 역사서로, <위지(魏志)> 30권, <촉지(蜀志)> 15권, <오지(吳志)> 20권, 합계 65권으로 되어 있다. 중국의 정사인 24사[1] 중 하나이며, 특히 ≪사기≫, ≪한서≫, ≪후한서≫와 함께 전사사(前四史)로 분류된다. 본래 66권이었으나 서록(序錄) 1권은 이미 일실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기전체 사서이나 표(表)나 지(志)는 포함되어 있지 않고 기(紀)와 전(傳)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이는 나라에서 만든 관찬서가 아니라 개인이 만든 사찬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는 모두 사찬서로, 편찬 순서는 ≪사기≫, ≪한서≫, ≪삼국지≫, ≪후한서≫ 순인데, ≪진서(晉書)≫ 이후로는 모두 관찬서다.
원래 삼국시대 이후 천 년 동안 삼국지라고 하면 이 역사책 정사 삼국지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소설'''인 삼국지연의가 워낙 유명해졌고 한국과 일본에선 현대에 삼국연의를 '삼국지연의'라고 부르기 때문에 '삼국지'라고 하는 한국, 일본에서 이 역사책을 집어 지칭하는 경우 정사라는 말을 굳이 붙여 '정사 삼국지'라고 말하게 되었다. 중국의 경우 역사책 '삼국지'와 소설인 '삼국연의'로 구분하고 있으므로 해당 사항이 없지만...하여간 본 위키는 이 문서에서는 별다른 경우가 아니면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삼국지≫로 표기한다.

2. 판본


진수가 쓴 원본책이 남아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아쉽게도 남아있지 않고, 현재 전해지는 정사 삼국지는 후대에 발간된 것들이다. 기본적으로는 판본마다 같은 내용이지만 판본마다 오탈자가 있고 내용이 살짝 다른 부분도 있다.
송본(宋本)은 남송시대에 편찬된 책으로 현재 가장 오래된 정사 삼국지이지만, 누락된 내용이 많다. 그래서 중화민국 시절인 1930년대에 장원제라는 사람이 송본을 기본으로 후대판본을 참고해 추가해서 새로 발간했다. 이렇게 새로 발간한 것을 백납본(百衲本)이라 한다. 가장 오래된 판본이지만 누락된 내용을 후대에 끼워넣은 부분이 많아서 순수한 송본도 아니고 가장 오래되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게 단점이다. 무영전본(武英殿本)은 명나라 말에 발간된 것으로 전본(殿本)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청나라 말에 금릉서국에서 발간한 금릉활자본(金陵活字本-풍본(馮本))이나 강남서국본(江南書局本-모본(毛本))[2] 이상 4종류이다.
현재 국내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사 삼국지는 베이징 중화서국에서 발간한 표점본(1959년)이다. 중화서국 표점본은 금릉활자본을 기본으로 하되, 타 판본으로 보완한 판본이다. 다만, 중화서국판에서 금릉활자본의 오류를 그대로 가져온 점이 인정되어 백납본을 기본으로 하여 1992년 발간한 오금화 삼국지가 인용되기도 한다. 그 밖에 중국에서는 무영전본 정사 삼국지도 여럿 발간되었다.
국내 한국어로 최초 완역된 정사 삼국지인 김원중 교수의 ≪정사 삼국지≫는 중화서국 표점본을 기본으로 번역한 것이다. 오역도 있는데다가 배송지 주석을 제대로 번역하지 않아 평가가 그리 좋지는 않다.

3. 구성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의 표제는 위지(魏志), 촉지(蜀志), 오지(吳志)인데, 송나라 이후 위서, 촉서, 오서라는 표제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특징이라면 전체적인 역사보다 다양한 유명 인물들의 열전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위지>는 왕침이 쓴 ≪위서≫ 등을 인용했고 <오지>는 위소가 쓴 ≪오서≫를 인용했다. 일단 국력이 가장 컸던 위나라의 기록이 가장 많고, 촉한의 기록이 가장 적은데, 특히 관우, 장비 등의 창업 공신들의 기록은 매우 짧다. 진수가 삼국시대 중에서도 꽤나 후반에 태어난 인물이고[3] 그 이전은 삼국이 정립되기 이전인, 굉장히 혼란한 시기라 자료를 구하기가 많이 힘들어서 그런듯하다. 관우, 장비같이 굵직굵직한 인물들도 생몰년이나 출신지가 제대로 표기 안 된 경우가 많은 걸 보면...
이에 대해 <후주전> 말미에 있는 진수가 제갈량과 유선을 까면서 쓴, "사관을 두지 않았다."[4]는 문장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후주전>을 보면 알겠지만 정작 바로 몇 줄 위에 있는 경요(景耀) 원년에 사관이 기록한 내용이 있으며, 당나라의 유지기(劉知幾)는 진수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景耀元年, 姜維還成都. 史官言景星見, 於是大赦, 改年。

경요(景耀) 원년(258년), 강유가 성도로 돌아왔다. 사관(史官)이 경성(景星-도가 있는 나라에서 보인다고 하는 상서로운 별)이 보였다고 말하자 이에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陳氏≪國志·劉后主傳≫云:"蜀無史職,故災祥靡聞。" 案黃氣見于姊歸,群鳥墮于江水;成都言有景星出,益州言無宰相氣;若史官不置,此事從何而書?蓋由父辱受髡,故加茲謗議者也。

(진수가 ≪삼국지≫·<후주전>에 이르기를, “촉에는 사관(史官)이 없어서 천재지변과 상서로운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다.” 라고 했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자귀현(秭歸縣)에 누런 안개가 끼고[5]

, 강주현(江州縣)에서 새 떼가 물에 떨어졌다고 하였으며[6], 성도에 상서로운 별이 나타나고[7], 익주에 재상의 기운이 없다고 하였다.[8] 사관을 두지 않았다면 이런 것들은 어떻게 기록됐단 말인가? 아마도 아버지가 제갈량에게 머리칼을 밀리는[9] 치욕을 당했기 때문에 이렇게 헐뜯었을 것이다.)

- 유지기,≪사통(史通)≫권 7·<곡필(曲筆)>[10]

[11]


3.1. 위서(魏書)



위서에는 위나라 인물뿐만 아니라 후한 때에 유비 또는 손오 측에 가담한 인물을 제외하고 후한말 군웅들을 포함하고 주변 이민족의 기록들도 모두 들어가 있다. 따라서, 촉서와 오서와는 비교조차 못할 양을 지닌다. 사실 위나라가 중국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니만큼 사서의 기록에서도 양과 질에서 압도적일 수밖에 없다.
'''위서(魏書) 구성'''
권1 위서1 무제기
(武帝紀)
조조(曹操)
권2 위서2 문제기
(文帝紀)
조비(曹丕)
권3 위서3 명제기
(明帝紀)
조예(曹叡)
권4 위서4 삼소제기
(三少帝紀)
조방(曹芳), 조모(曹髦), 조환(曹奐)
권5 위서5 후비전
(后妃傳)
무선변황후(武宣卞皇后), 문소견황후(文昭甄皇后)
문덕곽황후(文德郭皇后), 명도모황후(明悼毛皇后), 명원곽황후(明元郭皇后)
권6 위서6 동이원유전
(董二袁劉傳)
동탁(董卓), 이각(李傕), 곽사(郭汜), 장제(張濟), 양봉(楊奉)
원소(袁紹), 원담(袁譚), 원상(袁尙), 원술(袁術), 유표(劉表)
권7 위서7 여포장홍전
(呂布臧洪傳)
여포(呂布), 장막(張邈), 장홍(臧洪), 진등(陳登)
권8 위서8 이공손도사장전
(二公孫陶四張傳)
공손찬(公孫瓚), 도겸(陶謙), 장양#s-2(張楊), 공손탁(公孫度)
공손강(公孫康), 공손공(公孫恭), 공손연(公孫淵), 장연(張燕), 장수(張繡), 장로(張魯)
권9 위서9 제하후조전
(諸夏侯曹傳)
하후돈(夏侯惇), 하후연(夏侯淵), 조인(曹仁), 조홍(曹洪)
조휴(曹休), 조진(曹眞), 조상(曹爽), 하후상(夏侯尙), 하후현(夏侯玄)
권10 위서10 순욱순유가후전
(荀彧荀攸賈詡傳)
순욱(荀彧), 순유(荀攸), 가후(賈詡)
권11 위서11 원장양국전왕병관전
(袁張凉國田王邴管傳)
원환(袁渙), 장범(張範), 양무(凉茂), 국연(國淵), 전주(田疇), 왕수(王脩), 병원(邴原), 관녕(管寧)
권12 위서12 최모서하형사마전
(崔毛徐何邢鮑司馬傳)
최염(崔琰), 모개(毛玠), 서혁(徐奕), 하기(何夔), 형옹(邢顒), 포훈(鮑勛), 사마지(司馬芝)
권13 위서13 종요화흠왕랑전
(鍾繇華歆王朗傳)
종요(鍾繇), 종육(鍾毓), 화흠(華歆), 왕랑(王朗), 왕숙(王肅)
권14 위서14 정곽동유장유전
(程郭董劉蒋劉傳)
정욱(程昱), 곽가(郭嘉), 동소(董昭), 유엽(劉曄), 장제(蔣濟), 유방(劉放), 손자(孫資)
권15 위서15 유사마양장온가전
(劉司馬梁張溫賈傳)
유복(劉馥), 사마랑(司馬朗), 양습(梁習), 장기(張旣), 온회(溫恢), 가규(賈逵)
권16 위서16 임소두정창전
(任蘇杜鄭倉傳)
임준(任峻), 소칙(蘇則), 두기(杜畿), 두서(杜恕), 정혼(鄭渾), 창자(倉慈)
권17 위서17 장악우장서전
(張樂于張徐傳)
장료(張遼), 악진(樂進), 우금(于禁), 장합(張郃), 서황(徐晃), 주령(朱靈)
권18 위서18 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
(二李臧文呂許典二龐閻傳)
이전(李典), 이통(李通), 장패(臧覇), 손관(孫觀), 문빙(文聘)
여건(呂虔), 허저(許褚), 전위(典韋), 방덕(龐德), 방육(龐淯), 염온(閻溫)
권19 위서19 임성진소왕전
(任城陳蕭王傳)
조창(曹彰), 조식(曹植), 조웅(曹熊)
권20 위서20 무문세왕공전
(武文世王公傳)
조앙(曹昂), 조삭(曹鑠), 조충(曹沖), 조거(曹據), 조우(曹宇), 조림(曹林), 조곤(曹袞), 조현(曹玹)
조준(曹峻), 조구(曹矩), 조간(曹幹), 조상(曹上), 조표(曹彪), 조근(曹勤), 조승(曹乘), 조정(曹整)
조경(曹京), 조균(曹均), 조극(曹棘), 조휘(曹徽), 조무(曹茂), 조협(曹協), 조유(曹蕤), 조감(曹鑑)
조림(曹霖), 조례(曹禮), 조옹(曹邕), 조공(曹貢), 조엄(曹儼)
권21 위서21 왕위이유부전
(王衛二劉傅傳)
왕찬(王粲), 위기(衛覬), 유이(삼국지)(劉廙), 유소(劉劭), 부하(삼국지)(傅嘏)
권22 위서22 환이진서위노전
(桓二陳徐衛盧傳)
환계(桓階), 진군(陳羣), 진태(陳泰), 진교(陳矯), 서선(徐宣), 위진(衛臻), 노육(盧毓)
권23 위서23 화상양두조배전
(和常楊杜趙裴傳)
화흡(和洽), 상림(常林), 양준(楊俊), 두습(杜襲), 조엄(趙儼), 배잠(裴潛)
권24 위서24 한최고손왕전
(韓崔高孫王傳)
한기(韓曁), 최림(崔林), 고유(高柔), 손례(孫禮), 왕관(王觀)
권25 위서25 신비양부고당융전
(辛毗楊阜高堂隆傳)
신비(辛毗), 양부(楊阜), 고당융(高堂隆)
권26 위서26 만전견곽전
(滿田牽郭傳)
만총(滿寵), 전예(田豫), 견초(牽招), 곽회(郭淮)
권27 위서27 서호이왕전
(徐胡二王傳)
서막(徐邈), 호질(胡質), 왕창(王昶), 왕기(王基)
권28 위서28 왕관구제갈등종전
(王毌丘諸葛鄧鍾傳)
왕릉(王淩), 관구검(毌丘儉), 제갈탄(諸葛誕), 문흠(文欽), 당자(唐咨), 등애(鄧艾), 종회(鍾會)
권29 위서29 방기전
(方技傳)
화타(華佗), 두기(杜夔), 주건평(朱建平), 주선(周宣), 관로(管輅)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烏丸鮮卑東夷傳)
오환(烏丸), 선비(鮮卑),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동옥저(東沃沮), 읍루(挹婁), (濊), (韓), (倭)

3.2. 촉서(蜀書)



'''촉서(蜀書) 구성'''
권31 촉서1 유이목전
(劉二牧傳)
유언(劉焉), 유장(劉璋)
권32 촉서2 선주전
(先主傳)
유비(劉備)
권33 촉서3 후주전
(後主傳)
유선(劉禪)
권34 촉서4 이주비자전
(二主妃子傳)
선주감황후(先主甘皇后), 선주목황후(先主穆皇后), 후주경애황후(後主敬哀皇后)
후주장황후(後主張皇后), 유영(先主子永), 유리(先主子理), 유선(後主太子璿)
권35 촉서5 제갈량전
(諸葛亮傳)
제갈량(諸葛亮)[12]
권36 촉서6 관장마황조전
(關張馬黃趙傳):
관우(關羽), 장비(張飛), 마초(馬超), 황충(黃忠), 조운(趙雲)
권37 촉서7 방통법정전
(龐統法正傳)
방통(龐統), 법정(法正)
권38 촉서8 허미손간이진전
(許麋孫簡伊秦傳)
허정(許靖), 미축(糜竺), 손건(孫乾), 간옹(簡雍), 이적(伊籍), 진밀(秦宓)
권39 촉서9 동유마진동여전
(董劉馬陳董呂傳)
동화(董和), 유파(劉巴), 마량(馬良), 진진(陳震), 동윤(董允), 여예(呂乂)
권40 촉서10 유팽요이유위양전
(劉彭廖李劉魏楊傳)
유봉(劉封), 팽양(彭羕), 요립(廖立), 이엄(李嚴), 유염(劉琰), 위연(魏延), 양의(楊儀)
권41 촉서11 곽왕상장양비전
(霍王向張楊費傳)
곽준(霍峻), 왕련(王連), 상랑(向朗), 장예(張裔), 양홍(楊洪), 비시(費詩)
권42 촉서12 두주두허맹내윤이초극전
(杜周杜許孟来尹李譙郤傳)
두미(杜微), 주군(周羣), 두경(杜瓊), 허자(許慈), 맹광(孟光)
내민(來敏), 윤묵(尹黙), 이선(李譔), 초주(譙周), 극정(郤正)
권43 촉서13 황이여마왕장전
(黃李呂馬王張傳)
황권(黃權), 이회(李恢), 여개(呂凱), 마충(馬忠), 왕평(王平), 장억(張嶷)
권44 촉서14 장완비의강유전
(蒋琬費禕姜維傳)
장완(蔣琬), 비의(費禕), 강유(姜維)
권45 촉서15 등장종양전
(鄧張宗楊傳)
등지(鄧芝), 장익(張翼), 종예(宗預), 양희(楊戯)

3.3. 오서(吳書)



'''오서(吳書) 구성'''
권46 오서1 손파로토역전
(孫破虜討逆傳)
손견(孫堅), 손책(孫策)
권47 오서2 오주전
(吳主傳)
손권(孫権)
권48 오서3 삼사주전
(三嗣主傳)
손량(孫亮), 손휴(孫休), 손호(孫皓)
권49 오서4 유요태사자사섭전
(劉繇太史慈士燮傳)
유요(劉繇), 태사자(太史慈), 사섭(士燮)
권50 오서5 비빈전
(妃嬪傳)
오부인(吳夫人), 사부인(謝夫人), 서부인(徐夫人), 보부인(步夫人(練師步皇后))
대의왕황후(王夫人(大懿王皇后)), 경회왕황후(王夫人(敬懷王皇后)), 반부인(潘夫人(潘皇后))
전황후(全夫人(全皇后)), 주황후(朱夫人(朱皇后)),소헌하황후(何姬(昭憲何皇后))
등황후(滕夫人(滕皇后))
권51 오서6 종실전
(宗室傳)
손정(孫靜), 손분(孫賁), 손익(孫翊), 손보(孫輔), 손광(孫匡), 손소(孫韶), 손환(孫桓)
권52 오서7 장고제갈보전
(張顧諸葛步傳)
장소(張昭), 장승(張承), 장휴(張休), 고옹(顧雍), 고담(顧譚), 제갈근(諸葛瑾), 보즐(步騭)
권53 오서8 장엄정감설전
(張嚴程闞薛傳)
장굉(張紘), 장현(張玄), 엄준(嚴畯), 정병(程秉), 감택(闞澤), 설종(薛綜)
권54 오서9 주유노숙여몽전
(周瑜魯肅呂蒙傳)
주유(周瑜), 노숙(魯肅), 여몽(呂蒙)
권55 오서10 정황한장주진동감능서반정전
(程黃韓蔣周陳董甘凌徐潘丁傳)
정보(程普), 황개(黃蓋), 한당(韓當), 장흠(蔣欽), 주태(周泰), 진무(陳武)
동습(董襲), 감녕(甘寧), 능통(凌統), 서성(徐盛), 반장(潘璋), 정봉(丁奉)
권56 오서11 주치주연여범주환전
(朱治朱然呂範朱桓傳)
주치(朱治), 주연(朱然), 주적(朱績), 여범(呂範), 여거(呂據), 주환(朱桓), 주이(朱異)
권57 오서12 우육장낙육오주전
(虞陸張駱陸吾朱傳)
우번(虞翻), 육적(陸績), 장온(張溫), 낙통(駱統), 육모(陸瑁), 오찬(吾粲), 주거(朱據)
권58 오서13 육손전
(陸遜傳)
육손(陸遜), 육항(陸抗)
권59 오서14 오주오자전
(吳主五子傳)
손등(孫登), 손려(孫慮), 손화(孫和), 손패(孫覇), 손분(孫奮)
권60 오서15 하전여주종리전
(賀全呂周鍾離傳)
하제(賀齊), 전종(全琮), 여대(呂岱), 주방(周魴), 종리목(鍾離牧)
권61 오서16 반준육개전
(潘濬陸凱傳)
반준(潘濬), 육개(陸凱)
권62 오서17 시의호종전
(是儀胡綜傳)
시의(是儀), 호종(胡綜)
권63 오서18 오범유돈조달전
(吳範劉惇趙達傳)
오범(吳範), 유돈(劉惇), 조달(趙達)
권64 오서19 제갈등이손복양전
(諸葛滕二孫濮陽傳)
제갈각(諸葛恪), 등윤(滕胤), 손준(孫峻), 유찬(留贊), 손침(孫綝), 복양흥(濮陽興)
권65 오서20 왕누하위화전
(王樓賀韋華傳)
왕번(王蕃), 누현(樓玄), 하소(賀邵), 위요(韋曜), 화핵(華覈)

4. 편찬과정, 시기


태강 초(서력 280-289년), 진수는 ≪한명신주사(漢名臣奏事)≫ 30권, ≪위명신주사(魏名臣奏事)≫ 40권, 목록 1권을 찬집했다. 진수가 찬집한 위의 두 책은 ≪수서≫ 경적지, ≪구당서≫ 경적지, ≪신당서≫ 예문지와 세선당서목(世善堂書目)에 산견된다. 이 2종의 책은 진수가 삼국지를 저술할 당시 수집하여 지은 사료이다. ≪화양국지≫ (진수의) 본전에는 "오나라가 평정된 이후 진수는 이에 삼국사를 구합하여 만들었으니 위, 오, 촉 65편으로 삼국지라 불렀다" 서술하였다.
진수가 삼국지를 지은 것은 ≪화양국지≫ (진수의) 본전(本傳), 왕은(王隱)의 ≪진서(晉書, 청나라 탕구(湯球)의 집본)≫ 권7, ≪진제공별전(晉諸公別傳,청나라 탕구의 집본)≫과 당나라 때 수찬한 ≪진서≫ 본전에 보인다. 찬술에 착수한 시간은 대략 태강 초기였다. 앞에서 인용한 당나라 때 수찬한 진서 예지 중권에는 태강 년간에 진수가 저작랑이 되었다 하였다. 태강 원년, 손오가 가장 나중에 서진에게 멸망하고 천하가 다시 통일 되매 각 방면의 도적(圖籍)과 각종 중요한 당안(檔案) 자료들이 수도 낙양에 모이게 되었으니 삼국지와 같은 대형 사서를 찬술 할 수 있는 기초가 구비되었다.
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삼국지가 완성된 순서에 있어 <촉서>가 제일 처음이고 그 다음이 <위서>이며 또 그 다음이 <오서>였다 인식하고 있다. 이제 삼국지를 살펴보면 촉서 극정전에 극정이 죽은 해가 함녕 4년(서력 278년)이라 하였으므로 ≪삼국지≫를 찬술하기 시작한 시점은 이 해보다 빠를 수 없다. 그리고 함녕 4년에서 태강 원년 사이는 겨우 1년이 차이 날 따름이다. 또한 <위서> 호질전에 호위는 "안정(安定)에서 졸(卒) 하였다"하였는데 배송지의 주석에 인용된 ≪진양추(晉陽秋)≫에 근거하면 호위는 태강 원년에 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당나라 때 수찬된 ≪진서≫ 호위전에도 보인다)
≪화양국지≫, 왕은의 ≪진서(晉書-청나라 탕구의 집본)≫와 당나라 때 수찬한 ≪진서≫의 본전에 근거하면 진수의 삼국지가 완성된 후, 권신이었던 순욱의 불만을 야기했음을 서술하고 있다. 당나라 때 수찬한 진서 무제기를 살펴보면 순욱은 태강 10년 11월에 졸하였으니 삼국지의 완성시점은 태강 10년 이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당나라 때 수찬한 ≪진서≫ 하후담전과 진제공별전(청나라 탕구의 집본)에는 모두 진수의 책이 완성된 이후에 자신이 찬수한 ≪위서(魏書)≫가 진수가 지은 것만 못한 것이 부끄러워 (자신의 책을) 훼손하여 없앤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하후담이 죽은 것을 살펴보면 원강 초년이었으니 삼국지는 태강 연간에 완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 정통성 문제


진수는 일단 위를 유일하게 기(紀), 즉 본기로 써서 위나라만 정통 천자국으로 기록했다.[13] 반면 촉한의 유비, 유선이나 오나라의 황제들은 일반 인물들처럼 전(傳), 즉 열전에 기록했다. 다만 촉한의 유비와 유선은 선주, 후주라는 칭호로 불러, 위처럼 정통성을 부여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름을 그대로 적지는 않고 어느정도 격을 높였다. 거기다가 분명 촉한은 나라이름을 공식적으로 '한' 이라 했는데 쓰기는 '촉서' 라 해서 촉한이 후한의 정통 후계자가 아님을 피력했다. 오나라 황제들은 그냥 본명을 그대로 썼다.
그러나 서진시대 사람이라는 진수의 사정을 생각하면 위나라에서 선양으로 그대로 이어진 서진정권의 입장을 거스를 수는 없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한 것이 당연하다. 설령 진수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기록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진수는 어디까지나 '정통성은 조위에 있다'고 했을 뿐 '조위 말고 나머지는 전부 지방정권' 이라고 하진 않았다.
만약 촉과 오를 지방정권으로 보고 썼다면 서명부터 '삼국지' 가 아니라 '위지' 나 '위서' 가 되었을 것이고 촉, 오는 번국열전 식으로 부록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진수는 삼국지 책을 쓰면서 위서, 촉서, 오서를 따로 분리했다. 즉, 촉, 오는 위나라와 서로 경쟁하던 경쟁국이지, 위나라에 딸린 지방정권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는 이후 송사/요사/금사에서도 유사하다. 원나라 때 이전 시기 역사서를 집필하려 할 때 많은 논쟁 끝에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의 지방정권이라 볼 수 없다' 하여 세나라 역사서를 따로따로 집필했다.

6. 내용


삼국을 다룬 시각에선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아 조조를 무제(武帝)로, 조비를 문제(文帝), 조예를 명제(明帝) 등으로 호칭했고, 촉한유비, 유선을 각각 선주(先主), 후주(後主)로 불렀다. 그러나 오나라는 얄짤없이 모두 그냥 이름으로 불렸다.(...) 이렇게 위나라가 정통이지만 촉나라는 오나라보다는 더 권위있게 표현했다.[14] 조조가 위왕(魏王)에 오를 때는 깔끔하게 위왕이 되었다고만 썼지만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될 때는 신하들과 유비 본인이 한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글들을 자세히 실어 좀 더 비중 있게 표현한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후대의 촉한정통론을 주장하는 유학자들에게는 불만이 있었는지, 촉의 군주를 더욱 높이고(선주 → 소열제), 위의 군주는 그냥 조조, 조비 등으로 표기한 판본이 나오기도 했다.
인물의 알려진 일대기를 작성한 뒤 마지막에 각 인물의 평을 적는데, 조조는 시대를 초월한 영걸(英傑), 유비유방의 풍모가 있는 효웅(梟雄) 등으로 묘사하며 하후돈조운, 한당은 거의 결점이 없는 모범적인 장수로 표현되는 점으로 볼 때 ≪삼국지≫는 서진 사서의 핵심인 조위정통론의 한계를 제외한 서술에서는 비교적 공정하게 저술한 편으로 위나라 편애라는 설은 좀 억울할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조위정통론과 별개로 진수의 삼국지 정사는 조조와 사마의의 굵직한 '''패배나 과실을 고의로 누락하거나 애매하게 기술하고 넘어가는 모습'''을 한두번도 아니고 상당히 자주 보여주는데 이부분에서는 위나라, 진나라 편애라고 충분히 생각할수 있다. 이 부분은 오류부분에 후술되어 있으나 대략 적어 보면 조조가 패한 여양전투가 생략되었고, 조조가 패한 적벽전투는 애매하게 기술되었으며(적벽대전이 실존했는지나 이 전투에 유비가 얼마나 참전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일었던 적이 있는 것도 진수가 애매하게 적어 놓은것에 기인한다.), 순욱의 최후도 병사인지 조조와의 불화로 죽었는지 애매하게 기술되었고, 조조가 패한 한중공방전은 기술하였으나 조조의 참전이 생략되었고, 강유의 막판 촉한부흥 시도 또한 생략되었다 마지막으로 사마의가 패한 노성전투 또한 생략되었다.자세한것은 후술될 정사 삼국지의 오류 부분을 참고하도록 하자.
위나라를 비호하는 모습이 좀 있긴 한데, ≪삼국지≫가 나온 시기가 위나라의 후예인 서진이 집권하던 시대이다 보니 시대상 어쩔 수가 없다. 공명정대하게 찬양할건 찬양하고, 비판할 건 비판한다는 태도로 글을 쓰려면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필요한 시대였다. 지금처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군주제 시대에 쓰여진 사서라는 한계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래도 그런 것 치고는 나름 균형이 잡힌 편이라는 평을 듣는다. 최고의 역사서 중 하나로 칭송 받는 ≪사기≫ 역시 당연하게도 이런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니, 훗날의 사람들이 감안해야 할 요소라고 하겠다.
또 오서의 경우에는 오나라에 대해 편파적이라는 지적이 있는데 <지림>에 따르면 <지림>의 저자 우희가 박물군자 유성숙에게 정사 삼국지에 오나라의 초대 승상인 손소전이 없는 까닭을 묻자 '<오서>의 편찬자 위소가 손소와 사이가 나쁜 장온의 당이기 때문이오'라고 답했다. 위소가 편찬한 <오서>는 오나라의 공식 관찬 사서로 진수가 정사 삼국지를 편찬할 때 그대로 인용했기에 손소의 기록이 없었던 것이다. 즉, 진수가 그대로 인용한 <오서>는 오나라의 관찬 사서로서 오나라의 입장만을 중점적으로 반영했으므로 당연히 오나라에 기록이 편파적이거나 왜곡이 있을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후세 학자들 가운데서는 오서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는 학자들도 나타난다. 대표적인 학자가 청나라 시대 유명한 고증학자 조익이다.
한편 촉서는 촉나라 출신인 진수가 썼으니 촉나라 편파적이냐고 질문할 수도 있는데 진수는 촉나라 신하 입장이 아닌 서진의 신하 입장에서 삼국지를 썼으므로 촉나라에 편파적으로 쓸 수가 없었다. 밑에서도 나오지만 오히려 촉서 제갈량전에도 포함된 제갈량집을 지을때 올린 표를 보면 적국의 재상에 대해 책을 지어 죽을 죄를 지었다며 황제 사마염에게 사죄하고 있다. 이를 보면 촉서의 편찬은 서진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서술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아무래도 진수가 촉나라 출신인 만큼 위에서도 나왔지만 촉나라는 위나라만큼은 아니지만 오나라보다는 더 권위있게 표현했다.
서진 때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사마염본명으로 부르지 않는다. 사마의를 사마선왕 또는 선제, 사마사를 사마경왕 또는 경제, 사마소를 사마문왕 또는 문제라고 지칭하며 사마염은 무제라고 지칭한다. 따라서 이들의 전기는 ≪삼국지≫에는 없으며 ≪진서(晉書)≫에 있다.
삼국시대 이전, 즉 후한 말 군웅할거 시기의 군벌들에 한해서는 대체로 기록이 간략한 편이고, 좀 심하게 까이는 경우가 많다.[15] 따라서 후한 말 군웅들에 대해서는 후한서랑 같이 참고해서 보는 것이 좋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삼국시대 후반부의 사마의, 양호, 가충, 나헌 등 사마씨나 서진과 관련된 여러 인물들은 이 책보다는 진서에 더 자세하게 수록돼 있으므로 삼국지 중후반부에 관심이 있다면 진서까지 참고하는 것이 좋다.

7. 한국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


삼국의 이야기 말고도 <위지>의 끝 부분에는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이라고 하여 오환, 선비, 동이, 등 중국 밖의 이민족 세력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더 이전 시대 사서인 ≪사기≫·<조선열전>에서 위만조선에 대한 내용이 있긴 하지만 그 내용은 한무제의 조선 원정과 그 멸망 과정만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한반도 일대의 고대 국가에 관한 위치와 사회상, 풍속까지 기록한 가장 오래된 사료는 ≪삼국지≫의 <동이전>이 된다. 게다가 '''한국의 삼국시대와 가장 인접한 시기에 작성되었으므로 더할 나위 없이 한반도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부여, 옥저, 동예, 초기 고구려, 삼한 등의 정치사, 문화 등이 여기에 있는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다.'''
한국에서 직접 집필한 역사서 중에서 현재까지 남은 것 중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지금은 유실된 옛 기록을 참고해서 썼다고는 하나, 편찬연대로 따지면 동시대에 집필된 삼국지의 내용과는 거의 800~1,000년이나 차이가 나는 데다가, 초기 기록 중 많은 부분이 삼국지를 참고하여 쓴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예전(일제강점기~대한민국 초기)의 역사 학계에선 삼국시대 초기는 ≪삼국지≫ <위지>의 기록을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우선적인 연구 대상으로 간주했다.
예를 들어 마한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온조왕 시기, 즉 기원전 시점에 이미 백제에 의해 멸망하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한참 뒤인 3~4세기에도 마한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 발견의 결과는 6세기까지도 전라남도 지역에 백제와는 독자적인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입증하고 있으므로, 삼국사기 기록보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 쪽이 더 신빙성이 있다. 물론 지금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도 기록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다수 발굴됨에 따라서, 100%까지는 아니라도 일제강점기에 거의 무시되던 것에 비하면 어느 정도는 신뢰를 받게 된 상태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왜인전>을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다만 ≪삼국지≫에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일단 바다 건너의 정보들을 모아 쓴 것이므로 그리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많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 있고, 가장 큰 단점은 1차 자료가 아니라 고대 중국인이 자국의 시점으로 가공한 자료라는 점. 특히, 주석을 단 배송지가 원래 ≪위략≫에 실려있던 기사들을 편집 축약한 내용을 달아았다는 것이 상당히 아쉬운 점이다.
간략하게 내용을 설명하면, 거의 같은 계통의 민족이라고 볼 수 있는 부여고구려의 나라 묘사 내용이 극과 극을 오간다. 부여 사람들의 풍습은 호의적으로 묘사하는 반면, 고구려 사람들은 대놓고 성질이 흉악하고 노략질에 맛들인 음탕한 족속으로 적어 놓았다. 아무래도 중국과의 관계가 우호적인지 적대적인지 여부에 따라 설명을 다르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 당시 고구려는 만주벌판을 달리는 그런 강한 나라가 아니라 국내성 일대의 험한 산골짜기에 자리잡은 나라라서 관구검에게 발린 이야기 정도만 나와 있다. 풍습을 보고 "음란하다." 라고 서술한 대목들이 있지만, 이런 표현들은 이민족을 경시하는 중화사상, 체통머리 없는 것을 혐오하는 유교사상의 관점에서 나왔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또한 단순히 '음(淫)'의 또 다른 뜻들인 '방종하다', '지나치다', '어지럽다' 등의 뜻으로 쓰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삼한 또한 이러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아서 한군현에 가까운 곳의 나라들은 예의를 알았지만 먼 곳의 나라들은 죄수나 노비와 같은 자들이 모여살았다고 서술[16]되어있다.

書籍有五經、三史、三國志、晉陽秋。

책으로는 오경, 삼사[17]

, 삼국지, 진양추[18]가 있다.

≪주서(周書)≫권 49·<이역상(異域上)>·<고구려>[19]

《북주서》(즉 ≪주서≫)에 따르면, '''후대의 고구려 사람들도 삼국지를 읽었다.'''[20]

8. 주의점



8.1. 명백한 오류들


기전체 사서이기 때문의 개인의 공은 강조하고 과는 대충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 오서,위서,촉서 끼리 같은 사건을 다른 년도로 기술한 경우가 많다.
  • 오나라는 후한이 멸망하고도 그대로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진수는 모두 위나라의 연호로 고쳤다.
  • 무제기에서는 손권이 먼저 합비를 공격하고 그 후에 적벽전투가 있었다고 하지만 오주전에서는 유비가 먼저 조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 후에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다고 나온다.
  • 공손찬전에선 장순, 장거와 삼군오환의 난 때 공손찬이 5, 6년이나 오환의 침공을 막지 못했다고 쓰고 있지만, 후한서와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 당시 삼군오환의 침공은 2년만에 평정된 전쟁이었다.
  • 공손찬전에선 유우가 유주에 오기전에 속국오환의 탐지왕이 종족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 항복한 후 기도위에서 중랑장이 되고 도정후에 올랐다고 나오나 후한서에는 유우가 온 후 공손찬이 기도위에서 항로교위, 도정후가 되었다고 나오고 자치통감도 공손찬이 유우가 오기전에는 기도위로 기록하고 유우가 부임하고 나서 공손찬이 중랑장이 아니라 항로교위였다고 기록한다.
  • 선주전에서는 유비가 동탁 토벌에 종군하고 적에게 격파되자 중랑장 공손찬에게 달아났다고 되어 있는데 삼국지 공손찬전 기준으로 당시 공손찬은 분무장군이고, 후한서 공손찬전 기준으로도 항로교위라 관직이 맞지 않는다.
  • 선주전에서는 여포의 뒤통수로 유비가 서주를 빼앗길때 소패로 가면서 관우에게 서주의 치소인 하비를 맡긴다는 오류가 나온다.
  • 상랑전에는 상랑이 승상장사의 직책을 떠난 이후부터 한가하게 노닐며 하는 일 없이 30년을 보냈다는데 배송지는 제갈량한테 면직당한게 228년이고 그가 졸한 게 247년인데 30여 년이 말이 되느냐고 이 기록이 잘못이라고 깠다. 또 장황후전을 보면 238년경에 상랑이 지절로서 장황후에게 옥새(玉璽)와 인수(印綬)를 주고 황태자 유선에게는 인수를 주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때 상랑의 직책은 행승상사(行丞相事, 승상 직무대행) 좌장군(左將軍)이었다. 명예직일 가능성은 높지만 하는 일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 고귀향공기에서는 사마씨의 주홍글씨인 고귀향공 시해사건을 빼고는 그냥 조모가 죽었다고만 썼다. 진태전에서도 진태가 사마소에게 조모를 시해한것을 책임지라고 한 부분이 생략되었다. 이 부분은 배송지가 한진춘추, 위씨춘추, 간보진기 등 다른 사서를 통해 보충하여 진상을 기록했다.
  • 여포전에서 여포가 동탁 살해 후 60일 후에 패했다고 하는데 배송지는 영웅기를 인용해 동탁 사망이 4월 23일이고 장안성 함락과 여포 패주가 6월 1일로 윤월이 없었다고 하니 60일은 되지 않는다고 본전을 비판했다. 후한서 효헌제기의 기술도 영웅기와 같다.
  • 하후돈전에서 하후돈이 대장군이 되기 한참전에 일어난 하후돈 인질사건 중 한호는 하후돈을 대장군이라고 부르고 있다. 삼국지집해에서는 하후돈전에서 이후 한호가 '어찌 일개 장군 때문에 너희를 풀어 주겠느냐?'라고 말했다고 쓰고 있기 때문에 '대'자가 잘못 들어간 글자라고 본다, 혹은 그냥 대장이 잘못 쓰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 하후돈전에서 '태조가 하북을 평정하고 하후돈을 대장군의 후군으로 삼았다'라고 쓰고있는데 이 당시 대장군은 공석이고 조조는 사공이다.
  • 하후돈전에서 '건안 24년 태조의 군이 여포의 군을 마피에서 격파했다'고 쓰고있다. 이때는 이미 여포가 죽은지 20년 후다.
  •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초주전에서 등애가 음평(陰平)에 들어올 때부터 백성들이 동요한것은 후대에 잘못 쓰여진 것으로 음평에서 '음(陰)'자를 빼서 등애군이 '평지(平)'에 들어오자 백성들이 동요한것이라 적어야 한다.
  • 선주전에는 한중 공방전 당시 하후연군을 대파하며, 하후연, 장합과 조조가 대행하게 한 익주자사 조옹 등을 벴다고 나오는데 장합은 후일 제갈량에게 죽으니 오류다. 삼국지집해에 실린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장합 부분은 잘못 들어간 글자이다.
  • 선주전에는 유비의 황제즉위를 권하는데 권학종사 초주가 참가했다고 되어 있으나 초주전에서는 초주가 권학종사가 된 것은 유비가 죽은 건흥 연간에 제갈량이 명한 것이며 초주의 나이를 상고하면 당시에는 겨우 20대 초반이라 이런 중대사항에 참여하지는 못했을 것인데 있다.

8.1.1. 오류일 가능성이 높은 기술


이후의 시대를 다룬 사서인 진서의 신뢰성이 낮은 탓에 그에 대한 오류나 잘못된 사료 선택에 대한 지적에 가려지지만 정사 삼국지도 사람의 작품이라 여러 자질구레한 오류가 있다. 게다가 필사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글자가 들어간 경우도 많이 있다. 또한 진수는 송문제가 기록이 간략하다고 지적하고 배송지에게 사료보충을 명했을 정도로 정사 삼국지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썼으며 후한시기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정사 삼국지보다 후한서가 더 자세하고 정확한 부분도 많다. 또 아무래도 서진시기에 쓰여진 사서다 보니까 위진에 불리한 부분은 생략이나 왜곡된 부분이 있다. 또 이를 보완하기 위해 배송지가 광범위한 사서를 인용한것으로 유명하지만 여기서도 오류가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삼국지집해 같은 서적은 이런 오류나 빠진 부분을 사료를 이용해 교정하거나 보충하고 있다.
  • 조조와 사마의의 불리한 부분을 생략하거나 얼버무리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으로 원상에게 패한 여양전투를 빼먹었다. 기존에는 기전체 사서라서 그렇다는 식으로 얼버부리는 식으로 적혀있지만. 무제기에서만 빠진게 아니라 무제기를 제외한 다른 인물의 기전에서도 전혀 언급이 안 된것은 명백한 누락이다. 역사서는 후세에 객관적인 사실을 알리는 것이 목적인데 중요한 사건을 누락시키고 아예 안 적는 것은 역사서로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것이고 이걸 기전체의 경향이 그러니까 따위로 누락 한다는 건 역사가로서 자질이 의심되는 짓이다. 후한서는 그냥 대놓고 여양전투는 조조가 패배한 전투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한중 공방전에서는 유비가 조조와 교전하지 않았다고 쓰지만 배송지가 인용한 여러 다른 사서들에 따르면 유비의 본진까지 화살이 떨어질 정도로 격렬한 교전이 있었다.
  • 공손찬이 분무장군을 받은 시기는 정사 삼국지와 후한서 중 어느쪽이 맞는것인지 불분명하다. 자치통감도 이 문제를 판단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적지 않았다. 원나라의 대학자 학경의 저서 속후한서에 인용된 영웅기에서는 유비가 동탁 토벌전에 종사하다가 적에 의해 격파당하니 '분위장군' 공손찬에게 갔다고 하고 있다. 분무장군과 분위장군은 서로 다른 잡호장군 관직이긴 한데 같은 급의 관직인데다가 무(武)자와 위(威)자는 붓으로 써놓으면 얼핏 비슷하기 때문에 학경 속후한서가 인용한 영웅기의 '분위장군'이 '분무장군'의 오기라고 보면 공손찬이 분무장군을 받은건 정사 삼국지에서 나온대로 동탁이 낙양에 들어간 직후가 될 것이다.
  • 강유전에선 강유가 촉한부흥을 노리다 죽었다는 부분을 생략했다. 이 부분은 배송지가 한진춘추, 화양국지, 진양추 등의 사서로 보충했다.
  • 제갈량전에서 북벌 당시 사마의를 격파한 노성전투를 생략해버렸다. 이 부분은 배송지가 한진춘추를 이용해 보충했다.
  • 선주전에서는 유봉, 맹달, 이평(李平)등을 보내 상용에서 신탐을 공격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삼국지집해에 인용돤 조일청의 글에선 '이엄전에서 이엄이 평(平)이라 개명함은 후주 건흥 8년으로, 이 때는 아직 이름이 엄(嚴)이고, 한중왕표의 대열에서 받들며 여전히 엄이라 하니, 대응되지 못하고 가지런하지 않음이 이와 같다. 그리고 이엄전에서 또한 신탐(申耽)을 공격한 일이 없으니, 이는 다른 사람으로 의심된다'고 하였고 반미가 이르길 '이엄은 건안 19년에 건위태수(犍爲太守)가 돼, 장무(章武) 2년에 이르러 징소돼 영안궁(永安宮)에 이르렀으니, 응당 유봉, 맹달이 상용을 공격할 때, 이엄은 계속 건위에 있었다. 촉에서 또한 두 이평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으니, 아마도 이는 군더더기 글자다'라고 했다.

8.2. 다른 역사서와의 비교


진수의 삼국지가 가장 재미난 부분은 중국에 정사로 꼽히는 24사는 대개 유가적 사관에 의해 씌여졌어요. 그런데 진수의 삼국지는 정말 특이한 책인게, 그런 게 없어요. 요즘 말로 하면 무한 경쟁의 시대에 누가 승리를 했느냐, 도덕, 착하고 그런 게 없어요. 정말 하드보일드 해요. 중국역사책에 이런 하드보일드(한 성향의 책이) 없어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영상 11:29 부터.

기전체 사서는 인물 단위로 전기를 기록하는 구조이며, 해당하는 인물의 전기에서 그 인물의 공적은 강조하고 과오는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여러 명이 관련된 큰 사건은 한 인물의 전기만 읽어서는 사건의 전체상을 잘못 파악할 위험이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무제기>만 읽으면 적벽대전은 없었던 것 같다. 실제 2000년대 초 삼국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드러내고자 하는 몇몇 책들을 보면 무제기의 기록을 들어 적벽대전이 실제하지 않았던 것처럼 쓴 경우가 있다. 하지만 <선주전>, <주유전> 등을 읽으면 적벽대전은 분명히 존재했으며 조조는 대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다른 인물의 열전에 다른 사건이 기록돼 있는 경우도 있으므로 하나의 사건을 파악하려면 기, 전을 앞뒤로 열심히 뒤져봐야 한다.
삼국지는 정사이기는 하나, '표'와 '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결함이 있다. 이 부분은 ≪후한서≫나 ≪진서(晉書)≫를 참조하여 보충해야 한다.
후한 말의 인물(헌제, 왕윤 등)에 관한 것은 ≪후한서≫의 기록이 더 자세한 경우가 많으므로 ≪후한서≫도 구할 수 있다면 참조하는 것이 좋다. ≪삼국지≫만 참조해서는 기록 누락으로 전체적인 그림을 잘못 그릴 수 있다. 그리고 ≪삼국지≫는 원소공손찬같이 이름을 떨쳤던 후한말의 군벌들에 대해서 대차게 까기 때문에 《후한서》를 참조해야 그들의 좀 더 참된 모습을 알 수 있다.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예가 바로 원소다.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후한서≫의 범엽의 평과 ≪삼국지≫의 진수의 평은 아주 때깔부터 다르다. 촉한의 인물에 관해서는, 이복에 대한 기록은 있는데 그 아들 이양에 대한 기록이 없어 고의로 누락한 것이 의심되고 있다. 거기에 몇몇 사건 기록이 간소하다. 따라서 촉한의 역사는 고대부터 성한 시기까지의 촉 지역의 역사와 지리를 다룬 ≪화양국지≫도 같이 참고하는게 좋다. 서진의 인물의 기록은 물론 ≪진서(晉書)≫가 더 자세하지만, ≪진서≫ 역시 신뢰성에 의문이 가는 사서인지라 주의해서 봐야 한다.
그리고 특히 위나라와 진나라의 인물의 패배를 언급 안하고 불리했다고만 적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자면 <무제기>에선 조조유비와 싸웠는데 '''불리했다'''고만 적혀 있지 패배를 언급 안 하고, <하후연전>에서 마초와 싸울 당시 '''불리했다'''고 적혀 있지만 패배는 언급 안 한다. 이러한 패배를 언급 안 하고 불리했다라고 적는 방식은 유독 위나라와 진나라 인물에 집중되어있는데 의도가 있었는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지는 진수 본인만이 알 듯 하다. 반면 ≪자치통감≫은 편년체로 작성되어 있어서 이 또한 참고하면 수많은 기, 전을 참조할 것 없이 한 번에 사건을 이해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관우의 북진을 세세하게 이해하려면 <관우전>, <무제기> 말고도 <조엄전>, <동소전>, <서황전> 등의 열전을 뒤져봐야 하는데 ≪자치통감≫은 이를 하나로 엮어서 간편하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자치통감≫도 사건을 간략하게 축소하거나 나라의 정세에 큰 영향이 없는 일화들은 기록을 안 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하후연의 죽음도 <하후연전>과 <장합전>을 보면 꽤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자치통감에선 그냥 하후연이 황충한테 죽었다는 식으로 짧게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예로, 전예의 활약상을 알고 싶다면 <위지>·<전예전>을 보는 게 ≪자치통감≫에서 자료를 얻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 많다. 전예가 마성(馬城)에서 가비능에게 포위된 것까지는 나오는데, 포위를 뚫고 나온 것이 기록되지 않아서 위나라가 불리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화친을 구걸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세세하게 사건을 파헤치고 싶다면 ≪자치통감≫을 뼈대로, ≪삼국지≫의 열전으로 살을 붙이는 식으로 살펴보면 매우 좋다. 다만 삼국시대 연구에 매우 중요한 사료이지만, 기전체로 쓰여 있는 데다가 너무 오래된 서적이라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이 있다. 다른 기록과의 교차 대조나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오히려 역사왜곡에 빠질 수 있다.
심화과정으로 가고 싶으면 학자들의 추가자료와 고증을 주석으로 덧붙인 왕선겸의 ≪후한서집해≫, 노필의 ≪삼국지집해≫, 오사감, 유승간의 ≪진서각주≫ 같은 주석서를 참고해도 좋지만 여기 달린 주석도 틀리거나 개인의 생각이 들어가 부분이 있어 주의깊게 봐야 할 구석이 많다, 또 한국에서는 이 주석서들의 접근성도 떨어지니 어려운 면이 있다.

8.3. 주석 문제


진수는 ≪삼국지≫를 유려하고 간결한 명문장으로 썼지만 워낙 간결해서 후대에 이 정사에 주석을 달았다. 이것이 송나라(유송) 문제 유의륭의 명령으로 배송지가 단 주석이며 부족한 정사에 추가를 한 것이다. 배송지의 주석은 100여 년 뒤에 붙여진 것이지만, 주석으로서 기록된 사료 중에는 왕찬의 ≪영웅기≫를 비롯하여 ≪삼국지≫보다 시대가 앞선 1차 사료도 풍부하게 있으므로 가치가 높다. 배송지는 주석을 달 때 150가지 사서를 인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신뢰도가 낮은 책의 기록이 주석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으므로 기록의 출전을 살펴보고 책에 따라서 신용도를 달리하는 것이 좋다. 이에 대해 논란이 가장 많은 주석이 ≪위략≫이다. 그리고 ≪수신기≫나 ≪세설신어≫는 실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당시 이런 이야기가 돌았다.' 라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8.4. 저자 본인에 관한 문제


진수와 관련된 오해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첫째로, 진수의 아버지가 진식인데, 진식이 제갈량에게 처형당해서 진수가 제갈량에 대해 안 좋게 썼다는 설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식은 진수의 아버지가 아니다. 진식은 229년 3차 북벌에 종군한 걸 마지막으로 더이상의 기록이 없고 진식이 제갈량에 의해 처형당하는 것은 연의에서만 나온다. 정확히 말하면 진수의 아버지는 1차 북벌 당시 마속의 부장이었는데, 패배의 책임으로 머리카락을 깎이는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22사차기(二十二史劄記)≫(1795년)를 지은 청나라 고증학자 조익(趙翼; 1727년 ~ 1814년)은 <진수전>에서 제갈량이 진수의 아버지를 욕보였기 때문에 진수가 제갈량의 병법을 까내렸다는 기록에 대해서, '''"이것은 진짜로 무식한 소리다!"'''[21]라고 평했다.
다음은 조익의 해당 평가.

이십이사차기 진수론제갈량(陳壽論諸葛亮):

(진서) 진수전(陳壽傳)에서 "진수의 부친은 마속(馬謖)의 참군(參軍)으로, 마속이 제갈량에게 주살당하며, 진수의 부친 또한 곤형을 당했기에, 진수는 제갈량전을 쓰며, 장수의 지략이 장기가 아니라고 일렀다." 라고 하는데, 이는 진실로 무식한 견해다! 제갈량의 미칠 수 없는 점은, 원래 반드시 용병으로 장기를 보이는 것이 아니다. 진수가 제갈집(諸葛集)을 교정하고 상표한 것을 보면, 말하길 "제갈량은 법과 가르침이 엄명하고, 상벌은 반드시 신용할 수 있으며, 악한 이는 징계하지 않는 게 없었고, 선한 이는 드러내지 않는 게 없었습니다. 심지어 관리는 간사함을 용납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스스로 힘쓰길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양(梁), 익(益)의 백성들은, 비록 감당(甘棠)의 소공(召公)을 읊는 거나, 정인(鄭人)들이 자산을 칭송하는 것도, 넘을 수 없습니다."

또한 제갈량전의 후미에 평하길 “제갈량의 다스림은, 성심을 펴고, 공평한 도리를 베풀며, 선한 이는 숨겨 상을 주지 않는 일이 없었고, 악한 이는 아끼며 물리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마침내 나라 안에선, 모두 그를 경외하며 사모하였다. 형벌과 정치는 비록 엄하나 원망하는 이가 없었으니, 그의 마음 씀이 공평하고 권계함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가 공명을 칭송함은, 유독 그의 대단함을 보인 거라 이를 수 있다! 또한 양홍전(楊洪傳)에서 이르길 “서쪽의 땅에선 모두 제갈량이 당시 사람들의 기량을 다하게 할 수 있음에 감복했다." 요립전(廖立傳)에서 이르길 "제갈량이 요립을 폐해 서민으로 삼았다. 제갈량이 죽으니, 요립이 울며 이르길 '나는 결국 미개인이 됐구나!'" 이평(이엄)전(李平傳)에서 또한 이르길 "이평이 제갈량에게 폐해졌다. 제갈량이 죽으니, 이평은 마침내 발병해 죽었다. 이평은 항상 제갈량이 있으면 마땅히 저절로 개선돼 돌아갈 거라 기대하며, 후인들은 할 수 없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진수가 또한 맹자(孟子)의 말을 인용하니 "편안한 도리로 백성을 부리면, 비록 힘들어도 원망하지 않고, 살아갈 도리로 백성을 죽이면, 비록 죽어도 죽인 이를 원망하지 않는다." 이는 진실로 왕좌(王佐)의 심사(心事)라 말할 수 있다.

심지어 용병하여 이길 수 없던 것도, 또한 명백히 말하길 "대적한 바가, 어떤 이는 인걸(人傑)이라 할 만하고, 거기다 무리가 적어 같지 않고, 공수의 입장이 다르고, 또한 당시에 명장이 없었기에, 공업이 성하다 쇠하게 한 것이고, 또한 천명이 돌아감이 있어, 지력으로 싸울 수 없었습니다." 진수는 사마씨에 관해 피하고 보호한 것이 가장 많았기에, 제갈량이 사마의에게 건괵을 보내고,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한 일 등을, 열전 안에 모두 감히 쓰지 못했다.

그러나 지론이 유독 이와 같으니, 그가 제갈량에게 탄복함이 깊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니 그가 부친이 곤형을 당한 까닭에, 이를 구실로 폄하했다고 이르는 것은, 진실로 경중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로, 제갈첨에게 무시를 당해 제갈량과 제갈첨에 대해 안 좋게 썼다는 것인데 이는 오해다. 특히 제갈량 같은 경우 진수는 '해마다 군사를 일으켰어도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아마도 임기응변의 용병술은 그의 장점이 아닌 것 같다.' 라고 그의 전술적 역량이 정치력에 비해서 못했을 뿐이라고 했고, 이조차도 모자랐다나 무능했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다 좋았는데 아쉬운 점이 있었다는 뉘앙스다. 정치에 관해서는 관중소하에 버금간다고 하는 등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했다. 재상으로서 두 인물이 중국 역사상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를 생각하면 진수가 제갈량을 편애한다고 볼 수도 있는 부분이다. 게다가 제갈량전 분량 자체도 다른 열전에 비교해봐도 서술량이 상당히 많다.[22] 오히려 이것 때문에 진수가 사마염에게 사죄와 해명을 하기도 하였다. 제갈량을 높이 평가하고 죽을 죄를 지었다는 내용이 상주문(上奏文)에 있다. 제갈량전 말미 상소문에서 진수는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옛 성인을 힘써 본받으시고 호탕하여 꺼리는 바가 없으시니, 이 때문에 비록 적국(敵國)의 비방하는 말일지라도 모두 싣게 하고 고치거나 숨기는 바가 없어 이로써 대통(大通)의 도를 밝히셨습니다. 삼가 베껴 적어 저작국에 올렸습니다. 신 진수는 실로 두렵고도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립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 태시(泰始) 10년(274년), 2월 1일 계사일, 평양후 상(平陽侯相) 신 진수(陳壽)가 올립니다."고 하여 제갈량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제갈첨에 관해서도 안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다만 부정적인 면을 기록한 것은 사실이다. 아버지(제갈량) 덕에 본인의 공적이 아닌 것에 대해서도 칭송을 받는다고 기록했다. 뒤집어 말하면 알려진 것보다 실속이 없는 인물이라는 평가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제갈첨의 승진이 워낙 빠른 것도 있고 미처 재주를 펼치기 전에 젊은 나이로 전사했으니 그의 위치에 비해 공적이 부족했던 건 어쩔 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삼국지 정사에서 이례적으로 특별 대우를 받았던 두 사람이라는 고찰글도 참고하면 좋다.
저자 본인에게도 문제점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예컨데, 정의, 정이 형제는 의 이름난 사람인데, 진수가 정의와 정의의 자식들에게 쌀을 주면 아비와 숙부의 열전을 써주겠다고 했다가 거절당해 ≪삼국지≫에 이 '정씨 형제'의 전(傳)이 없다는 설이다. 다만 정의를 비롯한 그의 가문은 남자들이 모두 다 조비에게 제거되었기 때문에 후손이 있을 수가 없어서 모순되는 내용인지라 처음부터 꾸며진 이야기라든가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진수와 정의 형제의 이야기로 와전되었거나 살롱문학처럼 후대의 호사가들이 당시에 도는 이야기를 과거의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로 개작하는 등 진실과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오히려 진수는 정씨 형제보다는 친구였다가 원수가 된 이양이나 진수와 동시기 촉한에서 관료로 일했던 관헌, 동문들과 관련된 문제가 있었다. 단적으로 나헌이나 이밀 같은 사람들은 다른 사서에 거의 열전급의 기록이 있음에도 진수가 기록하지 않아서 배송지나헌은 양양기에서, 이밀은 화양국지에서 주석을 따와서 붙여야 했을 정도. 화양국지에 진수의 동문들이나 같이 이동했던 촉한의 관료들에 대한 기록이 많은데 진수가 이양 등을 비롯해 낙양에 동행했던 촉한의 관료, 동문들과 사이가 틀어졌다는 기록들이 있으며 이 때문에 이들의 기전을 적지 않은 게 아니냐는 의심을 둘 수 있는 부분이다.[23] 한편으로는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은 촉서에서도 스승인 초주극정을 비롯한 학자들의 열전과 역사의 큰 흐름과는 거리가 있는 해당 학자들의 학문적 업적과 논의들을 기술한 것이 의외로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진수가 사관으로서 편파적이고 공정치 못한 태도를 지닌 것이 아닌가 의심을 더하기도 하는 모양.
다만 양희의 계한보신찬전을 그의 열전에 전문 게재하면서 촉서 본편에서 다루지 못한 이들의 출신과 행적을 꼼꼼하게 덧붙인 것을 살피건대 본디의 출신이자 망국으로서의 촉한에 그 나름대로의 애정이 뚜렷함을 느낄 수 있다. 진수의 어쩔 수 없는 소심함과 그로 인해 발생했던 분쟁이 그와 정사 삼국지를 휘감고 공정성 논란을 빚게 했지만, 일단은 그 소심한 성격과 지인들과의 불미스러운 다툼 그 자체가 역사로서의 정사 삼국지의 격을 떨어뜨린 일은 딱히 없었기 때문에 장화의 격찬을 받고 하후담 또한 시원하게 패배 선언을 할수 있었던 것이다. 정사 삼국지 공정성의 문제는 주로 삼국이 각자 황제와 천의를 자처하고 있던 전제군주제라는 시대적 배경과 진수가 패배한 반역의 망국 출신이라는 사관으로서 몹시 위태로운 출신 배경이었던 데에서 발생하는 전형적인 '승자의 역사'에 의한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24] 저자에 얽힌 문제들은 진수 문서에서 '≪삼국지≫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 항목도 참조하자.

8.5. 결론


결론을 내자면, 충분한 사전 지식이 필요한 역사책이다. ≪삼국지≫는 어디까지나 역사서이며, 때문에 연의 읽듯이 가볍게 읽을 책은 아니다. 사실 '천 년도 더 전에' 쓰인 책을 그냥 읽기만 한다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그렇게 쉽게 된다면 역사학자들이 있지도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옛날의 일화'를 예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삼국시대 관련 기록만 읽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괜히 ≪삼국지≫를 번역하고 있는 파성넷에서 예전 일화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결국 당대의 사회와 문화, 고전에 정통하지 않으면 ≪삼국지≫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따라서 ≪삼국지≫를 읽고 이해하는 것은 전문적인 학술 영역에 들어가는 작업이다. 실제로 ≪삼국지≫·<위지>·<동이전>만 가지고도 한국에서는 논문이 몇 개씩 나올 정도다.
2000년대 이후에 정사 ≪삼국지≫를 인터넷에서 어설프게 주워 들은 것 갖고 정사드립치면서 삼국시대의 유명인들을 까는 경우가 크게 늘어났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왜곡하거나 무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삼국지 관련 책에선 촉의 명신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동윤이 간신 진지를 총애하며 코드인사를 단행했다고 깠는데, 실제로 진지를 좋게 보고 중용한 건 비의다. 또 제갈량의 후계자인 장완과 관련된 일화를 앞뒤 잘라먹고 가져와 장완을 복지부동 공무원이라고 깐 적도 있는데, <장완전>을 처음부터 읽어 보면, 제갈량이 죽은 뒤 장완이 제갈량만 못하다며 못 미더워 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유연하게 받아넘겨 죽은 제갈량의 권위를 더욱 높여주고 자신의 평판도 올리는 장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위의 사례들은 대체로 ≪삼국지≫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유리한 내용만을 취사선택하여 주장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인터넷이나 대중 작가들이 흔히 그러듯이 그냥 이거 훑어보고 정사가 이렇다 저렇다 하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물론 다른 시대의 역사서에 비해서는 관련 연구가 풍부한 편이므로 참고할 만한 것이 많다. 질 좋고 연구가 잘된 정사 삼국지 관련 자료를 보고 싶다면, 일단은 도서관, 서점에서 책으로 출판된 자료들을 찾아보는 것이 최선이다. 그 외에 어느 정도 검증된 사람들의 블로그를 찾아가서 읽거나, 삼국지 팬카페 등을 들어가서 둘러보면좋다. 나무위키 항목 중에서도 군데군데 링크가 있으니 참고해 보도록 하자.

9. 번역


대한민국에 최초로 번역된 ≪정사 삼국지≫는 김원중 역인데 '''평가는 매우 좋지 않다.'''
우선, 오역이 많다. 예를 들면 <손호전>의 다음 구절을 보자.

八月。以軍師張悌爲丞相,牛渚都督何植爲司徒。執金吾滕循爲司空,...

("8월, 군사 장제를 승상으로 삼고, 우저도독 하식을 사도로 삼았다. 집금오 등순을 사공으로 삼았지만 ...")

번역하면 이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김원중 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8월, 군사 장제를 승상으로 임명하고, 우저를 사공으로 임명하였지만 ...”
이 번역은 문장을 이렇게 본 꼴이다.

八月。以軍師張悌爲丞相,牛渚爲司空,...

("8월, 군사 장제를 승상으로 임명하고, 우저(를) 사공으로 임명하였지만 ...")

중간을 이유 없이 잘라먹은 상황이다. 같은 역자의 ≪사기≫ 번역본이 좋은 번역으로 인정받는 걸 생각해 보면, 왜 이런 결과물이 나왔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오류가 여러 군데 존재한다. 예를 들어 위서 서황전에 조조가 서황에게 그대에게 주아부의 모습이 보인다라고 칭찬해놓은 장면에서 주아부를 초한시대의 범증(?)으로 해석하는 오류가 있다.
등애가 유선의 항복을 받은 후에 촉한의 관료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하며 광무제 휘하의 공신이며 공손술을 토벌할 때 잔혹한 모습을 보인 오한의 사례와 대조하는데 김원중 역에서는 오한의 이름을 분리해 오나라와 한나라로 분리해버리는 오역을 했다. 오나라는 그러려니 해도 뜬금없이 한나라[25]를 언급해 이해가 안되는 대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중국 사서를 번역할때는 그 시대뿐만이 아닌 중국사 전체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데 광무제 시대에 대한 이해 없이 삼국지를 번역하니 이런 오역이 나왔다. 반면 권중달 역 자치통감은 오한이라 제대로 번역하고 오한이 누구인지 주석까지 잘 달아놓았다.
또, 배송지 주석을 일부만 번역했다. 물론 다른 이십사사 번역본도 주석은 잘 번역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단순히 주석을 다 번역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건 지나친 처사지만, 할 거면 다 하든지 아니면 아예 하질 말든지, 어떤 건 하고 어떤 건 안 해서 중간중간 구멍이 숭숭 나버렸다. '주석 하나'를 중간에 잘라먹은 사례도 하나 있다. <여범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강표전>을 인용해서 손권여범노숙을 칭찬하고, 엄준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손권이 이유를 설명해 주어 엄준을 설득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걸 뒤에 나오는 손권의 설득을 빼먹고 엄준의 말에서 번역을 끝맺는 바람에 결론이 이상하게 나버렸다. 차라리 배송지 주석을 번역하는 데 들일 수고로 본문 번역에 더 정성을 들이는 게 나았을 것 같다. 심지어 김원중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정사의 절반이라 할 수 있는 배송지 주석을 안 좋게 평가했다. 배송지의 주석은 "번잡하고 초점이 없다"고 깠는데, 그래놓고선 자기의 번역은 자기만의 연구가 들어간 정본이라는 엉터리 논리를 내세웠다. 그의 책이 국내에서 유일한 ≪삼국지≫ 번역본인 게 현실이긴 하나, 이것이 어느 한 번역본이 정본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인 "엄밀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소설'인 ≪삼국지연의≫가 "역사흐름을 왜곡"한 것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맥을 같이" 한다는 드립은 매우 뜬금없다.[26]
일부 팬들은 국역 ≪자치통감≫은 번역이 괜찮은 편이라면서 국역 ≪삼국지≫보다 차라리 국역 ≪자치통감≫의 삼국시대 부분을 읽는 것을 권하기까지 한다. 가격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편년체라서 읽기 편하다는 장점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기본 뼈대는 정사이므로 ≪자치통감≫은 보조적으로 참조하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자치통감≫의 중립적 관점이 문제가 될 수 있겠는데, 연호 같은 경우는 ·의 연호를 쓰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연도를 세기 위해서 위·진의 연호를 기준으로 삼은 것일 뿐이다. 공식적으로 헌제가 양위한 후에 바로 위 문제가 황제로 즉위했고, 역시 조환을 폐위하고 사마염이 진의 황제로 즉위했으니 위·진의 연호를 따르는 것이 편년체로 서술한 ≪자치통감≫에 어울렸기 때문이다. 사마광도 직접 '삼국 중 어느 쪽도 정통으로 삼지 않았다.' 라고 ≪자치통감≫에 명시해 놨다. 다만 사마광의 조상이 사마부라는 점 때문에, 현대인들 중에선 ≪자치통감≫이 '위·진정통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참고로 남송 시대 주희가 ≪자치통감≫을 재분류한 ≪자치통감강목≫에서는 사마광의 견해를 까내리며 '촉한정통론'을 내세웠다.
인터넷에서는 한때 파성넷에서 번역을 꾸준히 해서 일단 정사 원본의 번역을 끝내고 데이터베이스를 꾸렸으나, 운영자가 관리 안 하는 사이에 사이트가 폭파되었다. 여기서 끝났으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문제는 홈페이지가 야후에 계정을 두었다는 것이었다. 즉, 야후코리아의 철수로 정보가 모두 날아가 복구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백업해둔 곳이 있어 파성넷 운영자 견초와 함께 사이트를 하나 새로 세웠다는 것이다. 김원중 역 ≪삼국지≫를 바탕으로 시작을 했기에 오류가 많아 번역이 미진한 부분도 있어서 주의가 필요하긴 하나, 이 부분은 오래전부터 발견 즉시 오류를 수정하는 사후 작업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2019년 8월 31일 고전 시리즈로 유명한 명문당 출판사에서 한서, 후한서에 이어 두 책을 번역한 진기환 씨 번역으로 삼국지도 출간되었다. '원문역주'를 내세우고 있는데 배송지 주를 소수만 번역하고 빼놓았다. 다만 역자 자신의 설명은 충실한 편.해당 홈페이지

10. 참고 링크


  • 정사 삼국지 원문
  • 삼국지집해 원문
  •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중국정사조선전: 링크에 있는 중국정사조선전은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역주(譯註) 중국정사외국열전 시리즈로 낸 바 있으므로 도서관 등에서 열람할 수 있다. 단, 이 기사들은 철저하게 당대 중국인들의 관점에서 쓰인 것들이라는 것을 사전에 염두에 두어야한다. 게다가 국한문혼용체로 번역되어 있어 가독성이 떨어진다.
  • 파성넷: 한국의 ≪삼국지≫ 원문 및 기타 역사 등 한문 고전 번역 데이터베이스. 전체 검색은 오른쪽 위에 있고 원문 번역문만을 검색하기 위해서는 삼국지 자료실 탭을 클릭하면 나오는 창을 사용하면 된다.

[1] ≪청사고≫를 넣어 25사, 25사에 ≪신원사≫를 넣어 26사라고도 한다.[2] 모종강삼국지연의도 모본이라고 부르는데 당연히 다르다.[3] 저자 진수는 233년생이고 삼국지의 시작이라고 할수 있는 황건적의 난이 184년이니 대충 따져봐도 반세기는 넘게 차이가 난다. 즉 진수는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서 쓴 것. 그것도 전란 중이라 기록을 하기도 힘들고, 보존하긴 더더욱 힘들었던 때이다. 특히나 촉한의 인물들은 중원 천지를 종횡하며 다녔던 인물이니 기록이 더 희귀할 수밖에 없다.[4] ≪삼국지≫권 33·<촉서>·<후주전> : 國不置史,注記無官 ...출처[5] ≪정사 삼국지≫·<촉서>·<선주전>에 '(장무 2년, 222년) 여름 6월, 누런 기운이 자귀에서부터 10여 리 되는 곳에서 보였는데 그 넓이가 수십 장에 이르렀다.'라는 기록을 두고 하는 말이다.[6] ≪정사 삼국지≫·<촉서>·<후주전> 주석 <한진춘추>에 '겨울 10월, 강양(江陽)에서 강주(江州)에 이르기까지 강남에서 강북으로 날아 건너려는 새가 있었는데, 건너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은 새가 천 마리를 헤아릴 정도였다.'라는 기록을 두고 하는 말이다.[7] ≪정사 삼국지≫·<촉서>·<후주전>에 '경요 원년(258년), 강유가 성도로 돌아왔다. 사관(史官)이 경성(景星, 도가 있는 나라에서 보인다고 하는 상서로운 별)이 보였다고 말하자 이에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라는 기록을 두고 하는 말이다.[8] ≪정사 삼국지≫·<촉서>·<비의전>에 '연희(延熙) 14년 여름에 (비의가) 성도로 돌아왔는데, 성도의 망기(望氣; 안개·구름을 살펴 길흉을 점침)하는 이가 도읍에 재상(宰相)의 자리가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겨울에 다시 북쪽으로 가서 한수(漢壽)에 주둔하였다.'라는 기록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 十四年夏,還成都,成都望氣者云都邑無宰相位,故冬復北屯漢壽。) [9] 곤형(髡刑): 고대에 죄인의 머리카락 전부 또는 일부분을 밀어버리는 형벌.[10] 출처[11] 또 유지기는 <사통(史通) 곡필(曲筆)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또 <삼국지 촉서>에는 왕숭(王崇)을 동관랑(東觀郞: 동관랑이 바로 사관임)의 자리에 넣고, 허자(許慈)에게 예의를 관장하게 했다. 또 극정(郤正)은 비서랑이 되어 익주에 있는 서적들을 널리 찾았는데, 이는 참고자료를 충분히 준비하여 사적을 기록하는 근거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도 진수가 촉한에 사관을 두지 않았다고 하다니, 이 어찌 제갈량을 심하게 모욕한 말이 아니란 말인가?'[12] 군주가 아니면서도 단독 열전이 있는 인물은 제갈량을 포함해 2명뿐이다. 다른 하나는 육손. 그마저도 육손전엔 육항전이 딸려있다..[13] 반면 비슷하게 세 나라가 대치했고 그 나라들을 모두 다룬 역사서인 한국사의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대등하게 본기에 서술했다. 다만 막판의 후고구려후백제는 삼국지에서 촉오를 처리한 것처럼 열전에 실었다.[14] 아무래도 촉한은 제갈량 사후에 위나라에 항복하지만 오나라는 정통성에서도 위촉에 비하면 영 딸리고 끝까지 싸웠으니 당연하다.[15] 가장 좋은 예는 원소다. ≪후한서≫의 <원소전>을 참고하면 원소도 뛰어난 군벌에 우유부단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진수의 평에선 유표와 더불어 엄청나게 까인다.[16] '그 나라 북방(北方)의 군(郡)에 가까운 제국(諸國)은 그런대로 약간의 예속(禮俗)이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은 흡사 죄수와 노비(奴婢)가 모여 사는 곳과 같다. (其北方近郡諸國差曉禮俗, 其遠處直如囚徒奴婢相聚)'[17] 사기, 한서, 후한서.[18] 진(晉)나라의 손성(孫盛)이 쓴 진나라 역사서[19] 출처[20] 북주서는 628년에 지어진 책이므로 고구려 사람들도 배송지주 삼국지를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21] ≪22사차기≫권 6·<삼국지>: ... 此真無識之論也!출처[22] 어느 정도 수준이냐면, 제갈량전은 선주전보다도 길다. 제갈량전보다 긴 것은 무제기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23] 다만 나헌의 경우는 촉에서는 황호와의 불화 때문에 커리어가 꼬여서 촉한 멸망 이후 위의 관리로서 영안 방어에 큰 공을 세웠고, 이밀 역시 진에서 요직에 오른 인물이라 촉서에 적기에는 지나치게 후대의 사람이라 판단해서 넣지 않았을 확률도 있다. 촉서의 인물들 중 그나마 후대의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게 초주극정인데, 초주의 경우는 촉한 멸망 이후 별활약 없이 병에 걸려 270년에 사망했고, 그나마 극정이 진에서도 요직을 맡았지만 촉에서 훨씬 오랫동안 주요 관직에 있었고, 촉한 멸망 후에도 한동안 유선의 곁을 지킨 인물이다.[24] 그러한 한편 신하인 사마소에게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시해된 황제 조모의 죽음 또한 위략어환이 그러했던 것처럼 적극적으로 역사 왜곡에 동참할 수 있었음에도 그 나름대로 에둘러 표현해 남기고 읽는 이로 하여금 의문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똥배짱도 저지른 의외의 면모도 있다.[25] 당시 촉한의 국명 자체가 한나라이기도 했다.[26]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