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능찬

 


성명
최능찬(崔能贊)
생몰
1891년 6월 8일 ~ 1932년 5월 26일
출생지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망지
평안남도 강서군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경찰, 정치인이었던 최능진의 형이다.

2. 생애


최능찬은 1891년 6월 8일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에서 부유한 지주이자 기독교도인 최경흠(崔敬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반석교회에 다니던 중 1919년 3월 초 최능현·송현근 등의 설득을 받아들여 반석면 상사리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그러던 중 3월 2일 상사리 모락시장의 만세운동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주동자들이 헌병대에 갇혀 있다는 말을 듣고, 3월 4일 오후 1시경 원장장터에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여 서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는 모락시장으로 가서 동지를 구출하기 위하여 행진하였다.
그들은 대형 태극기와 나팔수를 선두에 세우고 청년들이 앞장서며 모락시장에 거의 도착했다. 이때 한 청년이 반석면장 김종화(金宗化)가 밀고하여 일본 헌병들이 시장입구에 매복하여 시위군중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최능찬을 비롯한 시위 주동자들은 계속 강행할 지, 아니면 물러날 지를 논의한 끝에 강행 돌파하기로 결의하고 모락장 입구에 들어섰다. 이때 대기하기 있던 일본 헌병들이 발포해 곳곳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이에 맞서 투석으로 대항했고, 형세가 불리함을 깨달은 주재소장 좌등(佐藤) 상등병은 총을 쏘아대며 도망가다가 시위군중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또 먼저 달아나던 보조원 3명도 붙잡아 살해하고 구금중이던 동지 전원을 무사히 구출하였다. 이날 모락장 시위의 목적은 일단 성공하였으나 일본 헌병과의 충돌로 13명이 피살되였고, 4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일제 측도 헌병과 보조원 등 4명이 살해되었다.
이 일로 체포된 최능찬은 1919년 12월 6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살인·방화·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5년형을 받고 복역 중 병보석되었으나 형기를 마치기도 전인 1932년 5월 2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최능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