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현(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최대현은 1852년 1월 14일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전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한제국군 오위장(五衛將) 출신으로, 1907년 대한제국군이 정미7조약으로 인해 강제 해산되자 의병을 일으켜 부하 700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갈수록 심해지자 의병을 해산한 뒤 고향에 은거했다.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1월 13일 금곡능 앞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금품을 모금하기로 하고, 면사무소 등사기를 이용하여 금품 모금 문서를 제작하여 양평군 내 각 면장에게 배포했다. 그러던 3월 27일 학생들이 그의 집에 찾아와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나이가 68세로 이미 늙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1919년 3월 31일 강하면 운심리 강하면 사무소 앞에서 300명의 시위대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최대현은 이 시위를 구경삼아 참여했다. 이후 독립만세운동의 취지에 공감한 그는 4월 1일 양평군 양서면 도곡리의 2천여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에도 참여해 대탄리 헌병주재소 부근까지 나아가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했다.
1919년 4월 2일, 최대현은 경성에서 온 학생 2명과 함께 촌민들을 모아놓고 다음 날 시위를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4월 3일 윤기영, 리보원, 신우균과 함께 강상·강하·양서·고읍(古邑) 등 4면의 주민 약 4천여 명을 지휘한 그는 시위 방향을 양근 읍내로 정하고 행진했다. 그러던 중 시위대가 주춤거리자, 최대현은 시위대원들에게 "가자! 가자!"라고 외치며 읍내로 이끌었다.
시위대가 읍내 경계까지 진출하였을 때 출동한 양평헌병분견소 헌병들이 시위대에게 해산을 명령하고 공포탄을 발포하였다. 시위대원들이 동요하자 최대현은 단호하게 “공포탄이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나아가자 나아가자“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깃발을 높이 쳐들고, 시위대를 앞으로 나가게 만들었다. 이에 호응한 시위대원들은 헌병을 향해 맹렬히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둘러서 헌병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양근리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본 헌병의 총격을 받아 시위대원 5명 내지 6명이 순국하였고 다수가 부상을 입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11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 및 벌금 20원을 받고 이에 불복 공소하여, 11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및 벌금 20원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양평군에서 종용히 지내다 1931년 11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최대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