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균

 


1. 봉화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우균
2. 양평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우균


1. 봉화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우균


성명
신우균(申佑均)
이명
신우균(申祐均), 신사견(申仕見)
생몰
1880년 ~ ?
출생지
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청양리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신우균은 1880년생이며 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청양리 출신이다. 그는 1907년 10월 경북 일대에서 유시연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하였고, 1908년 음력 11월 21일 오후 11시경 5명의 의병과 함께 화승총과 검을 휴대하고 경북 진보군 북면 연담동에 거주하는 정승모(鄭承模)의 집에 찾아가 "의병의 의류를 제작할 것이므로 금품을 내놓아라. 만일 그에 응하지 않는다면 군율에 따라 처단할 것이다"라고 하여 금 2원 및 금건(金巾) 2건 등을 모집했다.
그러나 얼마 후 체포된 그는 1910년 9월 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징역 7년을 받았다. 1912년 11월 2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신우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양평군 출신 독립운동가, 신우균


성명
신우균(申祐均)
이명
신유균(申裕均)
생몰
1889년 6월 12일 ~ 1921년 1월 25일
출생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
사망지
중국 상하이
추서
건국포장
신우균은 1889년 6월 12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4월 양평에서 양평교회 장로인 한덕리, 신도 이용준(李容俊)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했다. 이후 4월 3일 양평군 고읍면에서 동지 최대현·윤기영(尹璣榮)·이보원(李輔元)과 함께 강상, 강하, 양서, 고읍 등 각 면에서 모인 약 4,000명의 주민들 속에 뛰어들어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이후에는 군중을 이끌고 읍내를 향해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서울로 도피한 그는 같은 해 10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등의 혐의로 태형 90도를 언도받았다. 그 후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1920년 5월 초순경 비밀리에 양평으로 돌아와 동지 한덕리를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현재 상황, 서울의 독립운동 상황과 전망 등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임시정부의 여운형 휘하에 있는 재무관(財務官) 여중현(呂仲鉉)·박성명(朴聖明) 등의 참모로 활동하고 있는데 경기도 동부(東部) 지방이 아직 조직화되어 있지 않아서, 한덕리를 대한독립단 경기도지단장으로 임명해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키려 한다고 설명하였다. 한덕리가 이를 수락하자, 같은 해 6월 16일 서울에서 독립단의 인장(印章) 2개·『독립신문』 등의 문서·지단장 임명장·등사판 등을 가지고 와서 한덕리에게 건네준 뒤 다시 상하이로 피신했다. 그러나 얼마 후 병에 걸려 1921년 1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신우균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