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백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최영백'''
'''崔榮百'''

[image]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21년 6월 8일
충청북도 청주군 사주면 화흥리
(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모충동)
<color=#fff> '''사망'''
2005년 7월 19일
충청북도 청주시
<color=#fff>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color=#fff> '''호'''
청운(靑雲)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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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최영백은 1921년 6월 8일 충청북도 청주군 사주면 화흥리(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모충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구사범학교에 재학중이던 1941년 2월 15일 동교생 권쾌복·문홍의·배학보 등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부 대봉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소재 유흥수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고, 앞서 대구사범학교에 조직되었던 비밀결사 문예부(文藝部)와 연구회(硏究會)를 흡수하고 항일정신을 계승하여 조직을 확대·개편하였다.
이 조직은 문학·미술·학술·운동 등 각 분야에 걸쳐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조국독립을 촉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또한 조직을 교내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까지도 포섭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결사의 명칭도 당(黨)이라 했으며, 조직으로는 당수·부당수 아래 총무·학술·문예·연구·경기부 등 각 부서를 두었는데 이때 권쾌복은 당수 겸 예술부장을 맡았다.
한편 다혁당은 당원의 비밀엄수 및 절대 복종·주 2회 회합과 하급생 지도 등을 당의 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같은 해 5월까지 세 차례 모임을 갖고 당의 활동상황과 조직 확대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민족차별 교육에 반대하여 주로 일본인인 교내 연습과 학생과 대부분 조선인인 심상과 학생에 대한 학교 측의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토의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에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된 그는 그후 미결수로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 8.15 광복 직후 석방되었다.
이후 청주시에서 평범하게 지낸 그는 2001년 11월 16일 중부매일과의 인터뷰에서 "국가유공자 연금을 받고 있는 유족이나 유공자들은 노인 연금이나 기타 연금에는 수혜의 기회조차 없는 실정이다."라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들의 유족에게 합당한 연금 지급이 필요한 실정이다."라고 밝혔다.# 2005년 7월 19일 청주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최영백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