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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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최욱영은 1854년 10월 7일 충청북도 제천군 제천면 고명리(현재 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고명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와 어린 시절은 자료가 부족해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907년 8월, 민긍호가 원주진위대를 포섭하여 의병 항쟁을 일으켰다. 최욱영은 이 소식을 듣고 원주로 향해 민긍호 의진에 가담했다. 그는 민긍호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아 원주 신님면 안강리에서 별도로 의병을 일으켰고, 영월, 제천, 단양 등 10여 지역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했다. 횡성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던 중 총탄이 대퇴부 상단에 관통하는 부상을 입어 한동안 요양해야 했다.
1907년 9월 이강년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하여 군사장(軍師長)에 임명된 그는 충주, 제천, 단양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섰다. 1907년 12월 부대를 이끌고 제천 부근에서 머물러 있다가 일본군에게 기습을 당하자 전열을 재정비한 후 적을 피해 단양으로 진을 옮겼다. 이후 단양 복상골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이중봉(李重鳳) 등 주요 의병장이 체포되는 피해를 입었다.
1908년 봄 강원도, 충청도, 경상북도 일대에 걸쳐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호남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7월에 제천 작성산에 유진했다. 그러다 일본군의 급습을 받고 크게 패했고, 의병대장 이강년이 부상을 입은 채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의병을 해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후일을 도모하던 최욱영은 이름을 권태준(權泰俊)으로 바꾸고 함께 이강년 부대에서 활동했던 동지들을 모아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후 그는 경북 문경군 영순면 백포리(현재 경북 문경시 영순면 이목리)로 거처를 옮기고 재기의 기회를 엿봤다.
그러던 1913년, 김재성(金在聖)으로부터 비단에 쓰인 밀서를 받았는데, 바로 고종의 칙명(勅命)이었다. 이때부터 국권회복에 뜻을 두고 군자금 모집 계획을 세웠다. 그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류승만(柳承晩)·이중화(李重和)·조감역(趙監役)·김병연(金秉淵)·이인화(李仁和)를 비롯한 동지 17명을 규합하였다. 그리고 동지들과 함께 경북·경남·강원도 등지를 근거지로 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군자금 모금 계획을 실행하였다.
1913년 8월 동지 노병식(盧炳植)의 소개로 이중호를 찾아가 항일투쟁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후 돈을 마련하여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화승총 19자루와 군도 2개, 철퇴 1개 등의 무기와 검은 양복 10벌을 확보하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활발한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12월에 군자금 100원과 김숙헌(金淑憲)으로부터 받은 100원 등 200원으로 동지들이 입을 옷을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하헌병파견소(大下憲兵派遣所) 헌병에 의해 검은 양복과 고종의 칙명을 압수당하는 곤경에 처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안동, 제천 등지에서 동지 및 부하들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1914년 9월 문경에서 결성된 민단조합(民團組合)에 참여하였다. 민단조합은 의병세력을 규합하여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 조직으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나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민단조합은 의병적 활동을 통해 동지 규합과 군자금 모금을 활동 목표로 삼고, 만주의 독립운동기지건설을 지원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몇 차례 군자금 모금에 나서 성공하기도 하였다. 민단조합의 결성을 전후하여 단원들은 의병세력과 연계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활동과정에서 복벽주의 성향을 드러냈다. 군자금을 모금할 때 고종의 칙명을 내세웠고, 모금 대상자를 의군부 정위(正尉)·참위(參尉)·참령(參領)에 임명하였으며, 이들에게 준 사령장에는 덕수궁 인장을 사용하였다. 1914년 11월 이식재, 강병수 등 9명과 함께 강원도 원주 백양산(白陽山)에 모여 군자금 모금 방안을 협의한 뒤 제천 근북면 소재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군자금 100여 원과 공용지(公用紙) 100장을 마련하였다. 또한 면장의 집에서 30여 원, 면서기의 집에서 70여 원을 빼앗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4년 12월 부하 안교봉, 염석룡 등과 함게 안동·제천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과 동지 규합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15년 6월 공주지방법원에서 강도교사죄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다. 그러나 이해 7월 경성복심법원에서 항고가 기각되고 원심이 확정되었다. 그는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병을 얻어 1919년 8월 1일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최욱영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의 묘소는 1984년 조성된 제천시 고암동 순국선열묘역으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