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년

 

1. 조선의 의병장
2. 대한민국의 관료


1. 조선의 의병장



이강년 / 한자: 李康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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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image]
생몰년도
1858년 12월 30일[1] ~ 1908년 10월 13일 (향년 49세)
출생지
조선 경상도 문경현 가은면 도태리
(현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 도태마을)[2]
사망지
일제강점기 경성부 서대문 형무소
사인
교수형
국적
조선대한제국
본관
전주 이씨(全州 李氏)[3]
별칭
자(字)는 낙인(樂寅 또는 樂仁)
호(號)는 운강(雲崗)
직업
의병장, 독립 운동가, 무관
가족
이덕의(조부), 이기태(부), 의령 남씨(모)

종교
유교(성리학)
복무
동학군
복무 기간
1894년 ~ 1908년
최종 계급
도창의대장(호서 지역 대장)
근무
호서 지방
참전
까지성 전투, 금수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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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은 1858년(철종 9) 12월 30일 경상도 문경현 가은면 도태리(현재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 도태마을)에서 부친 이기태(李起台)[4]와 모친 의령 남씨 남복영(南福永)의 딸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효령대군의 18대손이지만 9대조 이성민(李聖民)이 안동으로 낙향한 뒤에는 5대조 이윤욱(李允郁)이 1749년(영조 25) 춘당대시 문과에 병과 2위로 급제하여# 사간원정언을 지냈으며 그 밖에 종9품의 감역(監役)을 지낸 8대조 이혜(李蕙)와 정5품의 통덕랑(通德郞) 품계를 가진 고조부 이제참(李齊參)을 제외하면 대체로 벼슬길에서 멀어졌고 생활 환경도 명문사족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안동에서 학문을 닦고 도의를 숭상하는 전통적인 가풍을 유지해온 것으로 보인다.
전주 이씨 족보에 따르면, 모친이 이강년을 낳을 때 태양을 삼키는 꿈을 꾸었으며, 이때문에 아명이 출양(出陽)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장성하면서 8척 2촌의 장신이었고 용력이 출중하고 병서에 조예가 깊어 일찍부터 장군의 재목으로 지목되었다고 한다. 그가 성장하면서 어떤 학문을 닦았으며 스승이 누구였는지를 알려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효행으로 이름난 조부 이덕의(李悳儀)[5] 아래에서 그의 부친이 일찍부터 학자로 명성을 이름을 날렸던 점, 백부 이기택(李起宅)[6]이 삭주부사를 지낸 점 등을 미뤄볼 때 유년기부터 집안에서 학문을 닦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22살이 되던 1879년(고종 16) 2회 정시 무과에 병과 51위로 급제한# 그는 관직에 나아가 선전관이 되었지만 갑신정변 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학문에 더욱 매진했으며, 때로는 영남과 호남 등지를 두루 여행다고 한다.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이 발발하자, 그는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문경에서 거병했다. 이후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을 처단한 뒤 안동으로 들어가 의병장 권세연을 만나 군사작전을 논의했다. 이때 유인석과 만난 그는 유인석의 문인이 되었고, 유인석에게 글을 올려 "난적을 토벌하고 원수 오랑캐를 멸해 나라의 옛 법도를 회복하고자" 의병을 재기했다고 밝히면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 하늘과 땅 사이에 옳을 '義' 한 자가 있음을 알아 굳게 가슴에 간직하고 한 몸 있음을 알지 못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강년은 유인석 휘하에서 제천의진의 유격장에 임명되었고, 문경, 수안보 등지에서 관군과 맞서 싸웠다. 그는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하는 한편, 영남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상렬 부대를 엄호하였으나 수안보를 공격하면서 호응하기로 한 전군의 작전이 원활하지 않아 실패하였다. 1896년 5월 하순 제천성이 장기렴(張基濂)이 이끄는 관군에게 공략된 뒤, 유인석이 양서지방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망명할 때 그 뒤를 따르려 했지만 영월에서 진로가 막혀 부득이 소택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1896년 8월 소백산에서 의병을 해산시킨 뒤 단양 금채동(현재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상원곡리 김치골)로 들어가 부모를 봉양하며 은거했다.
1897년, 이강년은 유인석을 만나기 위해 단신으로 서간도에 건너 수개월 동안 요동을 유랑한 뒤 귀국했다. 그가 서간도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는 귀국 후 학문수양에 진력했으며, 화서 문파의 공동사업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는 호남, 여남 각지를 유람하며 이름난 선비들과 교유하며 성리와 예악 등에 대한 토론을 통해 자기수양에 진력했다. 한편 1899년 충주에서 화서문집이 간행되었을 때 그도 여기에 참가했으며, 문집이 왅간되자 평북 봉천까지 올라가 그 일대의 동문들에게 문집을 배부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넘어가자, 이강년은 의병을 일으키려 했지만 뜻밖에 병을 얻어서 즉시 거병하지 못했다. 이후 1907년 5월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이후로 1년 3개월 동안 단양, 제천, 원주, 영월, 횡성, 강릉, 청풍, 충주, 문경, 에천, 영주, 봉화, 안동 등 경북과 강원, 그리고 충북 일대를 돌며 일제 군경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그동안 전력이 극도로 소모되어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할 필요성이 생기자, 그는 북상하여 가평군 일대에서 겨울을 난 뒤 영월을 거쳐 청풍으로 남하해 까치성에 유진했다. 그러던 1908년 7월 2일, 일본군이 기습을 가해왔다. 그는 이들을 맞아 최후의 일전을 벌였지만 끝내 대패하고 자신도 총상을 입은 채 포로가 되었다.
이강년은 체포 직후 일본군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려 하자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그들이 제공하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무정하다 탄환이여

발목을 상하여 나아갈 수 없구나

차라리 심장에나 맞았으면

욕보지 않고 요경(瑤京)에 갈 것을

이후 그는 충주, 수원을 거쳐 7월 8일 서울 용산의 일본군 사령부로 압송되었고, 19일에는 다시 평리원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는 충주에 잠시 감금되었을 때 주민과 이속(吏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들은 나를 아는가? 내가 거의한 이유는 토적복수(討賊復讐)코자 함에 있었다. 지금 불행히도 포로가 되었으니 반드시 죽게 될 것이나, 이후 나보다 더욱 유위(有爲)한 인물들이 반드시 등장하리라. 성인의 이른바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곧을 직(直)이니 거짓으로 사는 것은 다만 죽음을 면했을 따름이라'한 말을 어찌 의심하리요."

또한 일본군 사령부에서 심문을 받을 때 "보고 싶은 자는 이토 히로부미 뿐이다. 너희 무리와는 말하지 않겠다."고 호령했고, 평리원에서는 원장 박제선(朴濟璿)의 물음에 ‘더러운 자’와는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글로서 답하였다.

내가 거의한 것은 먼저 5적과 7적을 단죄하고 왜적을 박멸해 위로 나라의 철천지 원수를 갚고 아래로 도탄에 빠진 생민을 구하고자 함에서였다.

이강년은 1908년 9월 23일 사형을 선고받았고 10월 13일 오전 10시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죽기에 앞서 장자 이승재(李承宰)와 종제 이강수(李康壽)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너의 아비는 평생에혈충(血衷)을 품어 나라를 위해 죽고자 하였다. 이제 뜻대로 되었으니 무슨 여한이 있으랴. 너는 놀래지 말고 정신을 차려 동생과 함께 나 죽은 뒤 3일 안으로 박장(薄葬, 박하게(간소하게) 장례)토록 하라.

또한 전국의 의병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고결문(告訣文)을 남겼다.

강년(康秊)은 양심이 격동함을 참을 수 없어 병신년(1896) 이래로 13년간에 두 번 의기(義旗)를 들고 일어나 30여 회전에서 적추(賊酋) 백여 명을 참수하였다. (중략) 이 몸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니, '하루를 더하더라도 그치는 것보다 낫다'는 것도 이제는 그만이 되었다. (중략) 동지들에게 바라는 것은 적세(賊勢)가 성하다 하여 본래의 뜻을 어기지 마시고 더욱 큰 의리로 매진하시어 광명한 날을 기다리시라.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강년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이강년의 아들 3형제 이승재(李承宰), 이긍재(李兢宰), 이명재(李明宰) 역시 부친의 뒤를 이어 독립운동에 나섰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이승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고, 이긍재와 이명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또한 이강년의 종제 이강수(李康壽) 역시 의병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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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민국의 관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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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康年 / 1941년 ~
전라북도지사, 해양경찰청장을 역임하였다.

[1] 양력 1859년 2월 2일.[2] 독립유공자 심거벽도 이 마을 출신이다.[3] 효령대군파-유성군파 18대손 강(康) 항렬. 초명은 이정원(李鼎源).[4] 족보명 이종태(李鐘台).[5] 초명 이완효(李完孝).[6] 초명 이종구(李鐘九). 족보상으로는 이기택이 이강년의 종조부 이담효(李聃孝)에게 입양됐으므로 이강년에게는 당숙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