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트

 

아랍어 : قرامطة‎
영어 : Qarmat

1. 개요


10세기 아라비아 반도 동부(알 하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일곱이맘파 공동체. 이슬람의 한 분파지만 5대 의무 중 하나인 성지순례를 미신으로 여겨 부정하였으며 930년 메카를 습격, 잠잠 샘물을 순례자들의 시체로 막아버리고 검은 돌을 탈취하였다. 또한 바그다드를 위협하고 다마스쿠스를 점령하는 등 중세 이슬람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카르마트는 파티마 왕조, 부와이흐 왕조와 함께 10세기 쉬아 이슬람의 전성기를 상징한다. 그렇다고 서로 연대하진 않았고 열두이맘파인 부이 조는 물론, 같은 일곱이맘파인 파티마 조와도 마흐디[1] 교리를 두고 반목하더니 카르마트 군대가 이집트까지 쳐들어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성기도 한때, 11세기 들어 쇠퇴한 카르마트는 하나둘 거점을 상실하더니 1077년 셀주크 제국-우윤 왕조 연합군에게 수도 알 무미니야가 함락되며 멸망하였다.

2. 역사


압바스 왕조가 쇠퇴해 가던 9세기 후반, 이라크 남부에서 일어난 잔즈 반란으로 바레인 일대에 대한 바그다드 중안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시아파의 활동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그중 일곱이맘파, 즉 이스마일파는 시리아 중부의 살라미야에 본부를 두고 각지에 다이 (선교사)를 파견해 세력을 구축해갔다. 그중 이라크 남부 (사와드)에 파견된 다이 알 후세인 알 아흐와지에 의해 쿠파의 짐꾼이던 함단 카르마트가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였다. 870년대 뛰어난 능력으로 조직을 장악해나간 함단 카르마트는 알 후세인이 사망 혹은 전임되자 그를 이어 사와드의 다이가 되었다. 잔즈 반란[2]으로 압바스 왕조는 이미 수도 근처에서조차 지배력이 흔들렸고 따라서 함단 카르마트는 바그다드 남쪽의 칼와다에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884년, 마지막 이맘 알 마흐디가 사라진 후 열두이맘파 역시 흔들렸고 함단 카르마트는 마흐디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3] (이스마일파 한정 7대 이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설교를 통해 기존 정부와 열두이맘파에 실망감을 느끼던 베두인과 농민들 사이에서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일약 이라크 지역 시아파 대부분을 흡수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세력은 '카르마티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에는 이스마일파 자체가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함단 카르마트는 제자이자 처남인 아부 무함마드 아브단과 함께 다이들을 양성해 이라크는 물론 바레인과 예멘, 이란 남부 방면으로 파견하였다. 바레인과 이란 남부에는 아부 사이드 알 잔나비, 예멘에는 알리 이븐 알 파즐과 이븐 하우샵 및 아부 압둘라 알 쉬이 등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마흐디의 재림을 위한다며 개종자들에게 무려 수입 1/5에 달하는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렇게 마련된 자금으로 쿠파 인근에 다르 알 히즈라 성채가 세워져 새로운 거점이 되었고 이 소식을 접하고 나서야 바그다드 정부는 카르마티야에 대해 심각히 다루기 시작하였지만 별다른 무력 행동을 취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던 899년, 본부인 살라미야의 이맘 후세인 (압둘라 알 라디)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라 알려진 사이드가 스스로를 마흐디로 칭하였다. (압둘라 알 마흐디) 이에 함단 카르마트는 동료 아부 무함마드를 살라미야로 보내 진상을 파악하게 하였고 사실로 드러나자[4] 살라미야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였고 이라크 다이들을 소집하여 선교를 중단시켰다. 하지만 그 조치 이후 함단 카르마트는 사라져버렸다. 여러 설이 있는데, 이븐 말리크는 그가 바그다드에서 처형되었다 하였고 이븐 하우칼은 그가 사이드와 화해한 후 아부 알리 하산으로 개명하곤 파티마 조의 다이가 되었다고도 한다. 여기선 후자의 설을 택하였다.
아부 알리 하산은 스스로 초대 이맘 알리의 조카 무슬림 이븐 아킬의 후손을 자처하였다. 그는 이집트의 푸스타트의 다이가 되었고 옛 제자들, 즉 기존 카르마티야 세력을 마흐디에게 복속시키려는 의도로 연락을 취하였다. 이들 중 예멘의 다이들과 이프리키야에서 쿠타마 베르베르인들을 개종시키던 아부 압둘라 알 쉬이가 호응하였으나 바레인에 세력을 구축한 아부 사이드 알 잔나비는 반발하였다. 전자는 파티마 왕조의 개국 세력이 되었고 후자가 바로 기존 이스마일파의 마흐디 관념을 고수하는 카르마트파가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함단 카르마트는 자신이 열심히 키워 놓은 세력을 두고 전향해버린 꼴이 되었다. 이때부터 '카르마티야'는 파티마 조에 반대하는 이스마일파를 일컫는 용어가 되었고, 때떄로는 이스마일파가 아님에도 파티마 조를 적대하는 이들에게도 쓰였다. 한편 함단 카르마트가 사라진 후 얼마되지 않아 아부 무함마드 아브단마저 다이 중 한명이던 자크라와이 이븐 미흐르와이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후 카르마트 지지자들의 위협을 받아 이라크를 떠난 자크라와이는 시리아의 이스마일파를 규합해 반압바스 반란을 일으켰으나 902년 하마 전투에서 격파되었다. [5]
카르마트는 시리아를 침공하여 살라미야를 점령하였고 미처 피신하지 못한 마흐디의 가족들을 참살하였다. (902년) 이에 마흐디가 북아프리카로 피신하여 세운 것이 파티마 왕조인 것이다.
905년 아불 카심이 이끄는 카르마트 군대는 다마스쿠스를 포위하였고 툴룬 왕조의 원군을 격파하였다. 그들은 도시로부터 막대한 연공을 받고 나서야 회군하였다. 이로써 시리아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툴룬 왕조는 그해 결국 압바스 왕조에 의해 정복되었다. 이에 카르마트는 권력 교체기를 노리고 이듬해 재차 시리아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급조된 침략 때문에 보급이 길어져 다마스쿠스 앞에서 후퇴하였다. 한편 카르마트의 준동과 함께 알레포 등의 시리아 도시들은 물론 칼리파가 소재한 바그다드에서조차 시아파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하지만 9세기 후반에 이미 4개의 법학파를 중심으로 체계화된 수니파 이슬람은 이들에게 흔들리지 않았다. 시리아와 이라크 어느 곳에서도 시아파가 집권하지 못하였다.
966년 카르마트는 메카로 향하는 무슬림 순례 카라반을 습격하였고 968년에는 시리아를 재차 공격하여 레반트 일대에 대혼란을 야기하였다.

2.1. 쇠퇴와 멸망


1058년 압둘 카이스 부족의 족장 아불 바흘룰 알 아왐 이븐 무함마드 알 자와즈가 카르마트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쉬아파에 속했음에도 반란을 위해 카르마트의 대척점인 바그다드의 칼리파 알 카임을 쿠트바에 언급하는 방식으로 인정하고 동생 압둘 왈리드 무슬림과 바레인 섬을 장악하였다. 같은해 아라비아 반도의 카티프에서도 반란이 일어났고, 카르마티야는 알 하사 (호푸프) 일대로 축소되었다. 1066-67년 카르마트 해군이 바레인 탈환을 시도했으나 격퇴되었고, 이후 또다른 압둘 카이스 부족의 우윤 왕조셀주크 제국의 도움을 받아 카르마트의 수도 알 하사를 포위하였다. 7년 간의 포위 끝에 1076-77년 알 하사가 함락되었고, 한세기 반동안 동부 아라비아를 호령하던 카르마트는 멸망하였다.

[1] 카르마트파는 정통 이스마일파 교리대로 7번째 이맘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을 마흐디로 여겼는데 파티마 조는 창건자인 압둘라를 마흐디로 여겨 양립할 수 없었다[2] 880년 세력이 어느정도 확립되었다 여긴 함단 카르마트는 잔즈 반란군의 주모자이자 '마흐디'인 알리 이븐 무함마드에게 동맹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그 때문인지 3년 후 반란은 진압된다[3] 재림하여 이슬람의 숨겨진 지식 (바틴)을 알려줄 것이라고[4] 사이드는 그에게 마흐디는 무함마드 이븐 이스마일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주장, 함단 카르마트의 복종 요구[5] 아부 알리 하산은 904년 푸스타트로 피신해온 마흐디를 보좌하였다. 909년, 파티마 조가 공식적으로 건립되자 그는 푸스타트를 두고 새 정부에 참가하였다. 이후 동로마령 아나톨리아에 이슬람 전도를 위해 파견되었으나 사로잡혀 5년간 옥고를 치르고 이프리키야로 귀환하였다. 마흐디의 세자인 알 카임은 그를 대 카디로 임명하였다. 그제서야 위치에 어울리는 관직을 받은 아부 알리 하산은 파티마 교리를 설명하는 '밥 알 압와브'를 저술하고 933년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아불 하산 무함마드가 대 카디로 임명되어 대대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