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주크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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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세기에 트란스옥시아나에 진출해 11세기 수니파 이슬람 세계를 통일했으나 얼마 못가 12세기에 멸망한 제국.
지배 계급은 튀르크계 부족들이었지만 정치 체제는 페르시아식을 지향했으며, 궁정과 관료들의 언어로 페르시아어를 사용했다.
셀주크 제국의 등장으로 중동 이슬람 세계는 오랜만에 다시 통일되었으나 그 기간이 그리 길지는 못했다. 다만 셀주크 방계 가문이나 휘하의 공국들은 몽골 침공기까지 열심히 제국의 후계 자리를 두고 투쟁을 벌였다.
셀주크란 명칭은 중앙 아시아의 튀르크계 부족인 오우즈족에 속한 장군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과거에는 주로 셀주크 투르크 라는 명칭으로 불렀지만, 요즘 들어서는 대부분 셀주크 왕조나 셀주크 제국이라 부른다. 후대의 여러 방계 셀주크 국가들, 특히 룸 셀주크와 구분하기 위해 통일 제국 시기를 대 셀주크(Great Seljuks)라고 부른다.
아나톨리아, 즉 현재의 터키 지방에 튀르크인이 세력을 굳히기 시작한 것도 이 셀주크 제국 때의 일이다.
2. 초기 역사
역사가 알 아시르에 의하면 셀주크 베이의 부친 두카크는 오우즈국의 장군이었다고 한다. 일부 아랍 문헌들은 그가 셀주크조가 이슬람화 되는 최초의 인물이라 묘사했다. 하여튼 두카크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셀주크가 등장하여 오우즈족 사이에서 이름을 떨쳤으나[3] , 오우즈족의 야브구(왕)와 싸우고는 자신의 무리들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지금의 크즐오르다에 정착했다. 대충 이 시기는 960년대로 예측되고, 역사가들은 셀주크 가문이 이때 즈음해서 이슬람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
이즈음 트란스옥시아나는 사만 왕조와 카라한 왕조가 패권을 다투고 있었고, 본래의 고향에서는 오우즈 족속들이 킵차크인들과 전쟁 중이였다. 셀주크인들은 강대 세력들 사이에서 실익을 추구하여 세력을 자주 바꾸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사만 왕조의 편을 들어 카라한 왕조를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에서 몰아내고, 그 보답으로 사만 왕조에게 그 땅에 정착할 권리를 보장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셀주크는 일족이 이곳에 정착하는 도중에 본래의 정착지인 크즐로르다에서 죽었다.
셀주크가 죽은 뒤에 그 세력은 중앙 아시아적인 관습에 따라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이 아들들의 이름이 미카일, 이스라일, 무사, 유누스인데, 참고로 말하자면 이 이름들은 성경에 나오는 미카엘, 이스라엘, 모세, 요나에서 유래한 이름들이다.[4]
어쨋든 이들 중에 역사에 이름을 진하게 남긴 것은 미카일과 이스라일이다. 미카일의 아들이 투으룰 베이와 차그리 베이로, 후일 대 셀주크라 불릴 셀주크 제국을 건국했다. 이스라일은 그 본인이 아르슬란 야브구(사자왕)라는 호칭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 후손들은 룸 술탄국이라 불리우는 국가를 소아시아에 만들었다.
셀주크의 아들들은 서로 다른 진영에 가담해 싸웠던 것 같다. 이 과정을 간략히 적자면, 사만 왕조는 결국 카라한 왕조에 의해 호라산에서 쫓겨났다. 이때 사만 왕조는 가즈나 왕조을 호라산으로 불러들였고, 이후 호라산에는 가즈나 세력과 카라한 세력의 전쟁을 치렀다. 이 틈을 타 셀주크인들은 호라산에 침입, 승기를 잡고 있던 가즈나 세력을 단다나칸 전투에서 격파하고 가즈나 술탄국을 가즈나로 밀어내 버렸다.
여기서 미카일의 아들인 투으룰은 이란 서부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했고, 그 동생 차그리는 호라산을, 그 외 친척들이 각지를 장악했다. 그들은 각각 완전히 독립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면서도 가문의 수장인 투그룰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금요 예배의 설교에서 자신들의 이름보다 투으룰의 이름을 먼저 언급했다.
3.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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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라이에 위치한 투그릴 영묘
1대 술탄, 투으룰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동생의 아들인 쉴레이만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그러나 그의 형제인 알프 아르슬란(용감한 사자)과 아르슬란 야브구(이스라일)의 아들이었던 쿠탈므시는 이에 불복하였다. 여기서 결국 알프 아르슬란이 협상에 의해 술탄직을 승계하고, 1064년에는 쿠탈므시를 격파하였다. 이를 통해 알프 아르슬란은 삼촌인 투으룰을 능가할 권력을 얻었다.
2대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휘하의 튀르크멘 지도자들이 이란의 영지를 파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외국, 특히 동로마 제국의 세력권으로 침입하는 것을 장려했다. 그러는 한편, 그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전쟁을 개시했다. 이에 위협을 받은 동로마의 황제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디오예니스)는 군대를 이끌고 만지케르트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알프 아르슬란은 군대를 물려 북쪽으로 향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군은 궤멸당했고, 황제는 생포되었다. 알프 아르슬란은 포로가 된 황제와 조약을 맺고 그를 풀어 주었으나, 황제는 제국에서 되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 이후 알프 아르슬란은 트란스옥시아나의 말 안 듣는 카라한 왕조에 대한 원정을 나섰으나, 여기서 한 포로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그는 죽기 직전에 재상 니잠 알 물크를 불러 후계자로 3대 술탄이 되는' 말리크 샤'를 지목하고 죽었다.
알프 아르슬란이 죽자 그의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말리크 샤는 우선 군대를 물려 이란으로 가서 그들을 토벌했다. 그리고 다시 트란스옥시아나로 돌아와 카라한 왕조의 지방 수령들을 제압했다. 그러면서 동생 투투쉬 1세를 시리아로, 또 다른 동생 무슬림을 이라크로 보내 지방의 튀르크멘 지도자들을 제압했다. 이즈음 말리크 샤에게 패배한 쿠탈미쉬의 아들 쉴레이만이 아나톨리아로 도망쳐 니케아에서 룸 술탄국을 세우면서 말리크 샤와 적대했다.
그는 계속해서 전쟁을 치루었는데, 이는 대부분 지방의 튀르크멘 영주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는 결국 튀르크멘 지도자 대부분을 복속시켰고, 그 제국의 최대 영토를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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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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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셀주크 제국의 분열
3대 술탄 말리크샤의 치세는 셀주크 제국에 있어 황금기인 동시에, 몰락의 씨앗이 심어진 시기였다. 그의 치세 동안 칼리파였던 압바스 왕조와 셀주크 왕가의 사이가 멀어졌고, 치세 말에는 후계 문제로 튀르크인들과 페르시아 관료계의 사이가 멀어졌다. 이 절정은 1092년에 술탄이 칼리프를 폐위시킨 것이였다. 그리고 술탄과 그의 재상은 바그다드로 향했는데, 재상은 가는 도중에 암살당했고[5] , 그에 따르듯 말리크 샤 역시 죽었다[6] .
말리크 샤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들 중 성인은 없었다. 그의 장자인 베르키야루크는 겨우 12살이었다. 이때 그의 아내인 테르켄 하툰이 자신의 아들인 마흐무드 1세(당시 4살)를 4대 술탄으로 즉위시켰다. 페르시아 관료층은 이에 반발해 말리크 샤의 장자인 베르키야루크 술탄으로 선언했고, 말리크 샤의 형제인 투투시는 반란을 일으켰다.
격렬한 내전 끝에 베르키야루크은 5대 단독 술탄이 되었다(1097년). 하지만 그 권력이 완전하지는 않아서, 각지에 친척들이 지방 정권을 세우는 것을 용인했다.
그런데 그의 동생 무함마드 타파르가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각지의 총독들이 호응했던 데다, 본래의 지지기반이던 관료계층도 그에게서 돌아섰다. 베르키야루크은 여기에 투쟁을 벌여 많은 성과를 보았으나, 결국 병마로 인해 무함마드와 제국을 나누기로 합의했다(1104년). 그는 이듬해에 결핵으로 인해 죽었고, 그의 술탄위는 아들인 6대 술탄, 말리크 샤 2세에 넘어갔으나 곧 7대 술탄, 무함마드 타파르가 술탄위를 탈취했다.
5. 부활?
7대 술탄, 무함마드 타파르는 우선 총독들의 물갈이를 단행하고, 캅카스의 조지아를 토벌했다. 이후 시리아로 들어가 십자군을 토벌하려 하였으나, 그 지방의 영주들의 불협조로 인해 패퇴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무함마드는 "내가 여길 다시 오면 사람이 아니다"고 다짐했고, 후손들까지 평생을 지켰다.
1117년에 그는 이란 각지에서 준동하는 하산 사바흐 무리를 소탕하였다. 1118년에 그는 병사하고, 8대 술탄위는 그의 아들 마흐무드 2세(당시 13살)에게 넘어갔으나, 그의 동생 아흐마드 산자르가 반란을 일으켜 9대 술탄위를 꿀꺽했다(1119년).
9대 술탄, 산자르는 "마지막 셀주크"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데, 그에 걸맞는 능력을 38년간의 치세 내내 보여주었다. 우선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제국의 국경을 침범하는 가즈나 왕조와 카라한 왕조를 재복속시켰다. 그리고는 바그다드에서 슬슬 깝치기 시작하는 칼리프 들도 사뿐히 즈려밟아 주었다[7] .
역사가들은 산자르가 그의 아버지의 제국을 복구했다고 믿었다.
6. 몰락
산자르의 치세들어 중국 화베이(華北) 지방에서 새로운 패자 금나라에 의해 쫓겨난 요나라 유민들이 중앙 아시아에 대규모로 정착했다. 그 이름은 카라 키타이(이란식 발음. 거란어로는 카라 키탄).[8] 이들은 산자르의 하수인이자 조카인 서카라한 왕조 술탄이었던 마흐무드 2세를 공격해 호라산으로 쫓아내버렸다. 산자르는 서카라한 왕조와 연합해 군대를 이끌고 트란스옥시아나로 향했으나, 카트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9]
이 소식이 퍼지자 호라즘 총독(후일 호라즘 샤) 아트시즈가 반란을 일으켜 후라산을 약탈했다. 하지만 산자르가 돌아 온다는 소문을 듣고 냅다 도망쳤다. 이후 12년간 산자르는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최선을 다했고, 대부분 성과를 거두었다.
1152년, 산자르의 중앙 집권화 정책에 반발한 오우즈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걸 별것 아니라 평가한 산자르는 총독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술탄이 직접 나섰다. 모두가 산자르의 승리를 확신했고, 오우즈인들도 그랬다. 오우즈인들은 술탄에 사신을 보내 복종의 뜻을 표했지만, 조건이 마음에 안 든 산자르는 거절했다. 결국 두 군대는 격돌했다.
여기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산자르의 군지휘관들이 그를 배신한 것이다. 버림받은 산자르는 오우즈인들에게 붙잡혔다. 오우즈인들은 당황했지만, 곧 호라산으로 침입했다. 그들은 동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땅을 유린했다. 산자르는 이 광경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10]
3년 후인 1156년, 산자르는 탈출해 수도인 마르브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세력을 일으켜보려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1157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제국과 함께. 야사에 따르면, 오우즈인들에 의해 유린 당한 마르브를 본 뒤 충격을 받아 병을 얻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산자르가 죽은 뒤에도 이라크 지역과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셀주크에 의한 통치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름만 지배자이고, 실제로는 아타베그들이 정치를 주도했다. 그들은 결국 1194년에 결국 셀주크 지방 총독들에 의해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혼란기를 끝낸 것이 호라즘 왕조였으나, 결국 이 국가도 무리수를 남발하다 몽골 제국에 의해 붕괴했다.
7. 역대 술탄
- 1대 술탄: 토그릴 베그(투그룰 베이) (1038년 - 1063년)
- 2대 술탄: 알프 아르슬란 (1063년 - 1072년)
- 3대 술탄: 말리크 샤 1세 (1072년 - 1092년)
- 4대 술탄: 마흐무드 1세 (1092년 - 1094년)
- 5대 술탄: 바르키야루크 (1094년 - 1105년): 제1차 십자군 원정
- 6대 술탄: 말리크 샤 2세 (1105년)
- 7대 술탄: 무함마드 타파르 (1105년 - 1118년)
- 8대 술탄: 마흐무드 2세 (1118년)
- 9대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 (1119년 - 1157년)
8. 방계 왕조와 계승 국가들
8.1. 방계 왕조
8.2. 계승 국가
- 살구르 아타베그 정권
- 일데니즈 아타베그 정권
- 보리 아타베그 정권
- 장기 왕조
- 우카일 왕조
- 호라즘 왕조
- 오스만 제국
- 카라만 공국을 비롯해 아나톨리아 반도의 여러 투르크계 공국들
9. 역사보기 틀
10. 둘러보기
[1] 오우즈어는 터키어와 아제르바이잔어의 조상어. 단, 셀주크는 튀르크계의 오우즈족이 세운 나라지만 궁정 공식어는 페르시아어였으며 오우즈어는 주로 민간, 군대에서 통용되었다.[2] 송사(宋史) 열전에 등장. 1071년 북송 신종대에 중국에 처음 조공하였고 왕의 이름은 아미라아미란(亞美羅亞眉蘭)이라 하였다. 알프 아르슬란으로 추측된다.[3] 하자르 국가에서 경력을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4] 이 때문에 몇몇 역사가들은 셀주크가 하자르 유대교도거나 네스토리우스 그리스도교도라고 추측하였다. 하지만 르네 그루쎄는 이 이름들은 무슬림들도 쓰는 이름이라며 이 주장을 무시했다.[5] 배후에 대해서는 아사신파란 이야기도 있고, 말리크 샤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6] 독살이라는 설도 있다.[7] 이 과정에서 칼리프를 암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8] 요나라의 왕족인 야율대석이 세운 서요(西遼)를 말한다.[9] 당시 정황을 묘사한 기록에 의하면 군대의 수는 산자르가 이끈 셀주크군이 더 많았으나, 서요군은 지략을 발휘해 셀주크군의 선두와 후방을 동시에 공격하여 교란시키는 전술로 승리했다고 전해진다.[10] 야사에 의하면, 산자르는 철창으로 둘러싸인 수레에 갇혀서 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