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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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5월 9일 이탈리아 남동부 바를레타에서 출생 ~ 2005년 6월 15일 사망
이탈리아 출신의 지휘자
롬바르디아 출신 아버지와 나폴리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티롤 지방의 주도 볼차노(보첸)에서 자랐다. 줄리니 가족이 보첸에 정착했을 때 그곳은 오스트리아 영토였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승전국인 이탈리아 영토로 넘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볼차노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인들이 사는 지역이었고[1] 줄리니도 집 밖에서는 독일어 방언을 쓰면서 자랐다고 한다. 이렇게 줄리니는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독일-오스트리아 문화권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다섯 살 때인 1919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바이올린을 선물받고 브람스라는 예명을 쓰던 지역 음악가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1928년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 레미 프린치페가 볼차노에서 리사이틀을 열기 위해 방문했을 때, 그의 앞에서 연주할 기회가 있었는데 줄리니의 연주를 본 프린치페는 이탈리아 최고의 음악원인 산타 체칠리아 국립 음악원에 줄리니가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고 한다. 줄리니는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는 프린치페에게, 작곡은 알레산드로 부스티니, 그리고 지휘를 베르나르디노 몰리나리,알프레도 카셀레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냥 음악 공부만 하기엔 가정 형편이 좋지않아 산타 체칠리아 국립 음악원 오케스트라 오디션에 합격해 비올라 파트 말단으로 프로 음악가 생활을 시작하였고 그 자리에서 당대 최고의 지휘자들의 지휘를 경험할 수 있었다. 특히 그 중 줄리니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건 브루노 발터로 줄리니는 발터의 오케스트라를 존중하며 같이 음악을 만들어가는 지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한다. 그리고 1940년 지휘 콩쿠르에 우승해서 지휘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된다.
줄리니는 음악원에서 자신에게 지휘를 가르친 스승 몰리나리의 고압적인 스타일을 싫어하였고 당시 이탈리아를 장악한 무솔리니의 파시즘 또한 매우 혐오했다고 알려져있다. 세계 2차대전으로 인해 군인으로 징집되었으나 결코 사람을 쏘지않았고 전쟁 막바지에 이탈리아가 동맹이였던 나치 독일과 오히려 전쟁을 하는 상황에도 사람을 다치거나 쏘지않는다는 원칙을 유지 9개월간 처삼촌집 지하땅굴에서 유태인가족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과 숨었다고 한다. 당시 로마시내에는 줄리니의 현상수배사진이 붙어있었고 발견즉시사살하라는 무시무시한 문구가 적혀있었다고한다.
1944년 연합군이 로마를 해방시키자 파시스트 정권에 협조하지않은 지휘자로 음악활동을 재개하여 같은 해 7월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의 전후 첫 연주회 지휘를 맡게 되었고 이때 올림 브람스 교향곡 4번은 줄리니가 지휘 생활중 가장 많이 올린 레퍼토리로 180번의 연주회 3개의 레코딩[2]을 남긴바 있다. 이탈리아에서 지휘자로 활동하던 당시 이탈리아의 레전드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줄리니의 지휘를 좋게보았는지 토스카니니는 줄리니를 만나보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게되고 큰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깊은 친교를 나누었다고한다.
토스카니니는 라스칼라의 수석 지휘자 빅토르 데 사바타에게 줄리니를 추천하게 되었고 덕분에 줄리니는 사바타의 어시스턴트 지휘자로 일하다가 1953년 사바타가 심장마비로 인해서 음악활동을 그만두자 라스칼라 수석 지휘자 자리를 이어 받게되었다. 그러나 1956년 라스칼라를 떠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라스칼라의 청중들이 너무 저급했고[3] 라스칼라에서의 정치질에 못이겼다고한다.
라스칼라를 떠나면서 줄리니는 런던으로 주 활동무대를 옮겼고 특히 필하모니아와 수많은 연주와 레코딩을 남길 수 있었다. 이 시기에 EMI에서 녹음활동으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게된다. 1969년에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가 되었는데 줄리니는 시카고 심포니와의 관계를 매우 각별히 생각했다고하며 시카고 심포니와의 레코딩 중에 줄리니의 유명한 9번 시리즈 연주가 많다.[4]
줄리니가 시카고 심포니의 수석 객원 지휘자가 된건 여러 이해 관계가 엮여있는데 1963년부터 1968년까지 시카고 심포니의 음악감독이던 장 마르티농이 그만두자 시카고 심포니 경영진은 게오르그 솔티에게 음악 감독을 제안했다. 솔티는 그 자리에 관심은 있었지만 이미 코벤트 가든 오페라 음악감독 등의 직위를 맡고 있어 너무 바쁜 일정으로 자신이 시카고 심포니 음악감독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 같자 솔티는 줄리니와 공동으로 음악감독을 하면 어떻냐고 제안했다. 한 해는 솔티가 음악감독으로 한 해는 줄리니가 수석 객원 지휘자로 다음 해는 역할을 바꾸어서 하자는 식이였는데 너무 복잡하고 난해한 방법에 줄리니가 먼저 시카고 심포니 경영진에게 자신은 솔티만큼 조직을 이끄는 리더 역할을 하지못하니 솔티가 음악감독을하고 자신이 수석 객원 지휘자를 하겠다고 해서 솔티가 음악감독으로 줄리니가 수석 객원 지휘자자리를 얻게된 것이다.[5]
시카고 심포니의 수석 객원 지휘자 활동이 어느정도 안정되자 유럽의 오케스트라를 맡아보기로 결심한 줄리니는 1973년에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석 지휘자를 맡게 되었다.[6] 3년간 수석 지휘자를 맡으며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등의 주요 레퍼토리를 공연했고 이 시절에 미켈란젤리와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레코딩(DG)이 특히 유명하다.
줄리니의 두 번째 전임 포스트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직이였는데 줄리니는 LA의 환경이나 음악생활에 매우 만족했다고한다. 그러나 음악감독 자리에 오른 6년째 음악감독 자리를 그만두게되는데 그 이유가 부인 마르첼라의 몸 상태가 위급해지자 아내가 그간 자신을 돌봐주었으니 이제 자신이 아내를 돌봐줄 시간이라고 말하며 유럽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밀라노로 돌아온 줄리니는 아내의 병간호를 하면서도 밀라노와 가까운 유럽도시들에서 연주회나 레코딩 작업을 종종했는데 이때 나온 레코딩중 줄리니의 유명한 빈 필과의 브람스 교향곡 전집이라던가 브루크너 후기 교향곡 연주[7]가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 DG에서 SONY로 음반사를 옮기게되는데 이미 지휘자로서의 능력이나 해석이 감퇴하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좋은 평가는 받지못한다. 결국 1998년 슈투르가르트 방송악단과의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정식 연주회를 더 가지지 않고 2005년 6월 14일 이탈리아 브레시아에서 91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여담으로 1978년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그에게 베를린 필의 상임을 제안했다고 한다. 당시 두번의 수술로 건강이 악화된 카라얀이 제의를 했으나 그는 자신의 나이와 실력을 이유로 들어 거절했다고(...)
[1] 나중에 무솔리니가 강제 이주 정책을 펼치며 이탈리아 동화정책을 펼쳤지만 지금도 볼차노는 독일-오스트리아 언어와 문화가 우세한 지역이다.[2] 필하모니아와의 브람스 교향곡 전집(emi), 시카고 심포니와의 레코딩(emi) 그리고 가장 유명한 빈 필과의 브람스 교향곡 전집(DG)[3] 연주중에 뮤지션을 희롱할 뿐 아니라 마리아 칼라스에게 야유를 보냈다고한다.[4] 말러 교향곡 9번(DG), 슈베르트 교향곡 9번(DG), 드보르작 교향곡 9번(DG)등[5] 솔티가 1997년 발표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혔다고한다.[6] 유명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는 다른 악단이다.[7] 9번은 대다수가 인정하는 명반이지만 7번과 8번은 줄리니의 이름값을 못한다는 평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