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펜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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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81년 1월 17일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카우펜스 근교에서 대륙군과 영국군이 맞붙은 전투. 대륙군이 영국군을 상대로 승리한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다.
2. 배경
1780년 10월 14일, 대륙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은 내더니얼 그린을 남부 일대 대륙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당시 남부 일대 대륙군의 사정은 매우 심각했다. 1778년 말 영국군이 남부 일대에 상륙한 이래, 대륙군은 영국군을 상대로 서배너 공방전, 찰스턴 공방전 등 연이은 전투에서 연전연패했다. 특히 1780년 8월에 벌어진 캠던 전투에서,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이 이끄는 대륙군은 영국군을 상대로 졸전을 벌인 끝에 참패당했고, 그 여파로 조지아와 사우스 캐롤라이나 일대가 영국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린이 막 부임한 대륙군은 이러한 연이은 패배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됐고 병력 규모는 1480명에 불과했다.
그린은 자신이 보유한 군대로는 영국군과 정면 대결을 해서는 안된다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영국군의 추격을 회피하면서 각지에서 민병대를 모집했다. 그러면서 소규모 분견대를 꾸준히 파견해 영국군 장교들을 암살하고 물자를 빼앗는 등 일련의 게릴라 작전을 수차례 성사시킴으로써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켰다. 이 일련의 작업이 마무리되어가던 12월 중순, 그린은 대니얼 모건 준장에게 400명의 메릴랜드 민병대와 200명의 버지니아 민병대를 주고 이들을 이끌고 카타우바 강 서쪽으로 진군해 그곳의 민병대와 합세하여 영국군을 상대로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모건은 12월 21일 출발해 크리스마스 무렵에 파코레 광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 및 조지아 민병대와 합세했다.
한편 콘월리스는 노스 캐롤라이나 주로의 공세를 준비했다. 이때 모건 준장이 이끄는 대륙군이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서부의 닌티 식스에서 영국군이 장악한 요새 하나를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에 콘월리스는 용기병대 지휘관 배니스터 탈턴 중령에게 이들을 격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틸턴은 명령에 따라 닌티 식스로 향했으나 모건이 그곳에 없다는 걸 확인하자, 그는 콘월리스에게 증원군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낸 뒤 모건의 행방을 추적했다. 모건은 적이 추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적에게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 북쪽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1월 16일, 모건은 브로드 강 인근에서 강이 범람해 건너기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모건은 강을 무작정 건너려다가 도중에 적군에게 따라잡힐 위험을 무릅쓰느니 차라리 회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양측의 대결이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 지휘관: 배니스터 탈턴 중령
- 병력: 1,100명
3.2. 대륙군
- 지휘관: 대니얼 모건 준장
- 병력: 1,800~1900명
4. 전투 경과
1781년 1월 16일 밤, 모건은 카우펜스의 주력 보병대를 언덕 위에 배치시키고 용기병대를 언덕 후편에 배치시켰다. 또한 전면에 조지아와 노스캐롤라이나 민병대를 배치했고, 라이플 부대를 보다 앞에 배치했다. 모건과 부하들은 그들의 위치를 사수하며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6시, 틸턴은 적이 언덕 위에 포진한 것을 보고 즉시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제17 용기병대를 파견해 적 라이플 부대를 격파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대륙군 라이플 부대는 자신들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는 적 기병대를 보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일제사격을 가해 적 용기병대를 패퇴시켰다. 이에 틸턴은 보병 대형을 편성했다. 우익엔 경보병대를 배치했고, 중앙엔 주력 보병대를 배치했으며, 좌익엔 제7 척탄병대를 배치했다. 또한 최좌익엔 용기병대가 배치되었고, 예비대로는 제71 하이랜드 연대와 틸턴 기병 연대가 편성되었다.
이후 영국군이 공세를 개시하자, 모건의 라이플 부대는 적 장교들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가해 상당한 피해를 입힌 뒤 적군이 바짝 다가오자 본대 전선 후방으로 후퇴했다. 이에 영국군 용기병대가 추격하자, 대륙군 용기병대가 즉각 반격해 이들을 격퇴시켰다. 그 후 영국군 보병대가 언덕을 거슬러 올라와 적과 총격을 주고받고 있을 때, 예비대로 편성되어 있던 제71 하이랜드 연대는 좌측면으로 진군해 적의 우측면을 찌르려 했다. 이때 모건의 부관인 존 에거 하워드 대령은 버지니아 민병대에게 제71 하이랜드 연대와 맞설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버지니아 민병대는 하워드가 후퇴 명령을 내렸다고 여기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 시간 동안 전투를 치르느라 피곤했던 영국군은 버지니아 민병대가 철수하는 걸 보고 적이 도주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그들은 대열을 허물고 '도주'하는 적을 향해 달려갔다.
그 순간, 버지니아 민병대는 몸을 돌리고 자신들을 쫓아오는 적을 향해 30야드 이하 거리에서 일제사격을 가했다. 그러자 대열을 허문 채 달려가던 많은 영국군 병사들이 한꺼번에 사살되었고, 영국군 장병들은 순식간에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 직후, 하워드는 "총검!"이라고 외쳤고, 그 말을 알아들은 중앙의 대륙군은 총검을 장착한 뒤 적을 향해 돌진했다. 적의 갑작스런 총검 돌격에 경악한 데다 언덕 위에서 아래로 쏟아져내려오는 적을 상대하기 버거웠던 영국군 장병들은 순식간에 대열을 허물고 도주했다. 이후 대륙군 용기병대가 방향을 틀어 제71 하이랜드 연대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했고, 버지니아 민병대 역시 하워드의 지시에 따라 하이랜드 연대를 공격했다. 하이랜드 연대는 자신들을 에워싸는 적을 상대로 장렬하게 맞서 싸웠으나 끝내 포위망을 풀 여력이 없자 결국 항복했다.
한편 탈턴은 영국 보병대가 적의 총검돌격에 일제히 붕괴되는 광경을 보고 경악한 나머지 한동안 망연자실해 하다가 제71 하이랜드 연대가 고립되었다는 걸 깨닫고 기병대에게 당장 그들을 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기병대는 이 명령을 거부하고 전장을 이탈해버렸고, 탈턴은 절망에 빠진 채 적 기병대의 추격을 뿌리치며 도주했다. 오직 왕립 포병대 만이 모두 죽거나 부상당할때까지 계속 싸우다가 와해되었고, 나머지 부대들은 전부 붕괴되었다. 이리하여 카우펜스 전투는 대륙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
영국군은 카우펜스 전투에서 39명의 장교와 60명의 병사가 전사했으며 829명이 사로잡혔다. 이는 탈턴이 이끌었던 군대의 86%가 죽거나 부상당하거나 사로잡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모든 대포를 상실하고 깃발 및 보급품을 대륙군에게 빼앗겼다. 반면 대륙군의 손실은 전사 12명, 부상 60명에 불과했다. 영국에겐 여러모로 치욕스러운 전투였지만, 특히 용기병대가 이 전투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고 포병대 또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륙군은 이 훌륭한 전과에 열광했고, 그린은 사기가 충천한 병사들을 이끌고 길퍼드 코트하우스 전투에서 영국군 본대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그 후 헨리 콘월리스 소장은 노스 캐롤라이나로의 북진을 중단하고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철수했다가 다시 버지니아 주로 진격했지만 적의 게릴라 전술에 시달리자 각지에 흩어져 있던 병력을 규합해 요크타운 요새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1781년 9월, 콘월리스는 요크타운 전투에서 자신의 그릇된 선택의 대가를 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