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다하르 공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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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다하르 공성전을 표현한 그림
'''뛰어난 정보력의 가치를 입증한 전투'''
칸다하르 공성전(Siege of Kandahar)은 아프가니스탄 남부지역에 있는 칸다하르에서 일어났으며, 1737년 4월부터 1738년 3월 24일까지 거의 1년동안 일어난 장기전이다. 나디르 샤는 이 공성전의 승리로 인해 길자이 세력들의 본거지를 장악하여 반란의 열기를 약화시키는 성과를 올렸다.[1]
나디르 샤는 몇 년 전 호타키 왕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었는데, 이때 호타키 왕조의 핵심세력이었던 길자이 부족들이 대부분 잡히거나 동쪽으로 도주했었다. 그러나, 나디르 샤는 도주하던 길자이 세력들을 완전히 섬멸시키지는 못했으며, 도주에 성공한 길자이 세력들이 다시 모여서 동쪽에 자리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마침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유리하게 조약을 맺은 나디르 샤는 이란 동부지역의 반란을 진압할 기회를 얻었다.
1736년 11월 21일, 이스파한에서 모종의 사건 이후로 나디르 샤는 8만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출발하였다. 도중에 반란세력들에게 지지했던 마을이나 지역은 모조리 파괴당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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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다하르 성채의 지도.
나디르 샤는 공성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가지 준비를 했다. 우선, 중포를 충분하게 확보하지 못했기에 중포가 도착할때까지 기다렸으며[2] , 가축들을 먹일 건초나 풀을 구하기 위해 일부 병사들을 북쪽의 초원지대로 보냈다.
그날 밤에 칸다하르 요새에 있던 길자이 병사들 일부가 야간 기습전을 시도하였으나, 페르시아군 내에 있던 압달리 부족[3] 병사들이 사전에 길자이 척후병을 잡아 야습 정보를 알았던지라 야습을 막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건초 문제를 해결한 이후, 나디르 샤는 본격적으로 칸다하르 요새를 포위하였다. 적극적인 공성을 하기엔 아직 충분한 중포를 확보하지 못했기에 또다시 포위전을 하려는 의도였던것 같다. 나디르 샤는 포위망 구역마다 일정하게 탑을 쌓았으며, 더불어 포탑을 쌓아 총구도 뚫어놓았다. 그리고 바그다드에서 그랬듯 주변 마을을 장악하거나 초토화시켜 칸다하르 요새를 완전히 고립시켰다.
나디르 샤는 칸다하르 요새 남쪽에 나디르샤바드(Nadershabad)라는 마을을 건설하였다. 나디르샤바드 마을에 각종 다양한 편의시설들이 들어섰는데, 마을에는 시장, 마굿간, 커피숍, 공용목욕탕, 모스크 등등이 들어섰다고 한다. 이는 나디르 샤가 병사들의 컨디션 관리를 위해 공들여 건설하게 한 것이었으며, 장기전의 의지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포위전은 시간이 지나 10달이 넘게 진행되었다. 그 10달이 지나가는 도중에 타 지방에서 여러 군사적 성과를 낸 덕분에 시간을 허망하게 보낸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칸다하르 요새를 점령해야 길자이 세력들의 본거지를 없애버릴수 있었다. 칸다하르 요새 내에선 가축을 잡아먹기 시작하였으나, 그렇게 궁핍한 상황은 아니었던지라 항복할 가능성은 여전히 낮았다.
결국 참다못해 짜증을 내던(...) 나디르 샤는 공성 전술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우선, 포위한 병력들은 계속해서 압박을 하고, 일부 병력을 뽑아 별동대를 구성하여 칸다하르 요새 북쪽에 있는 탑을 점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나디르 샤는 요새 북쪽의 여러 언덕지대와 지나(Zineh) 탑을 장악하는데 성공함으로서 시야가 넓어지고 사격 범위가 확대되면서 한 층 유리해지게 되었다. 그 다음 목표이자 결정적인 목표는 바로 다베흐(Davveh) 탑이었는데, 다베흐 탑을 장악한다면 탑과 이어진 성곽까지 장악할 수 있게되며, 이는 도성을 매우 수월하게 해주는 효과를 노릴수 있었다.
1738년 3월 13일, 나디르 샤는 별동대 900명을 구성하기 위해 바크티아리족, 쿠르드족, 압달리족에서 뽑았다[4] . 별동대 900명은 다베흐 탑을 공격하였으나, 사전에 별동대의 이동을 파악한 길자이 병사들의 대비로 인해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다.
1738년 3월 23일, 나디르 샤는 3000명의 새로운 별동대를 구성하여 다시 다베흐 탑을 공략하고자 했다. 저번의 실패를 받아들여 이번에는 별동대를 주변 숲속이나 동굴, 바위더미에 숨겨 이동을 은폐하였다. 나디르 샤는 그날 밤 별동대에게 공격이 성공할 시 각각 1000루피씩 제공해주겠다고 하였으며, 동시에 도망친다면 자신의 칼에 죽을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나디르 샤는 칸다하르 요새에 침투시겨놓은 스파이들로부터 고급 정보를 얻었다. 바로 금요일(3월 24일) 낮에 기도회 때문에 탑 내부의 병력이 줄어들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이를 기회삼은 나디르 샤는 금요일 정오가 되자 기다렸다는듯 병력을 다베흐 탑에 투입시켰다[5] . 다베흐 탑에는 병력이 별로 없었기에 순식간에 페르시아군의 수중에 떨어져버렸다. 페르시아군은 다베흐 탑을 도성의 거점으로 삼아 성곽까지 차례대로 장악해나가기 시작하였다. 길자이 병사들이 저항하였으나, 나디르 샤의 엘리트 보병대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탑에서부터 성곽까지 페르시아군의 손에 들어가버리고 있었다.
결국 칸다하르 요새는 거의 페르시아군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나디르 샤는 동쪽 성벽에 맹렬한 포격을 함으로서 그동안 참아온 짜증을(...) 분출하였다. 길자이 세력의 대장인 술탄 후세인은 시타델로 모였다가 몇몇 신하들과 자신의 딸 지납(Zeinab)과 함께 동쪽으로 빠져나갔다. 얼마 후 술탄 후세인은 자신의 딸을 사절단으로 보내 나디르 샤에게 항복을 청하였고, 나디르 샤는 이를 수락했다고 한다.
칸다하르 공성전은 나디르 샤의 공성전 실력을 제대로 입증해준 유일한 공성전이기도 하 ~다. 무엇보다 스파이를 활용한 정보 수집으로 공성에 성공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이는 나디르 샤가 단순히 전술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넘어 정보력 또한 뛰어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칸다하르 공성전 이후 길자이 세력의 대장이던 술탄 후세인과 그의 가족들, 신하들은 전부 호라산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반란의 주역이었음을 감안하면 나름 관대한 조치였다.
칸다하르 공성전을 표현한 그림
1. 개요
'''뛰어난 정보력의 가치를 입증한 전투'''
칸다하르 공성전(Siege of Kandahar)은 아프가니스탄 남부지역에 있는 칸다하르에서 일어났으며, 1737년 4월부터 1738년 3월 24일까지 거의 1년동안 일어난 장기전이다. 나디르 샤는 이 공성전의 승리로 인해 길자이 세력들의 본거지를 장악하여 반란의 열기를 약화시키는 성과를 올렸다.[1]
2. 배경
나디르 샤는 몇 년 전 호타키 왕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었는데, 이때 호타키 왕조의 핵심세력이었던 길자이 부족들이 대부분 잡히거나 동쪽으로 도주했었다. 그러나, 나디르 샤는 도주하던 길자이 세력들을 완전히 섬멸시키지는 못했으며, 도주에 성공한 길자이 세력들이 다시 모여서 동쪽에 자리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마침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유리하게 조약을 맺은 나디르 샤는 이란 동부지역의 반란을 진압할 기회를 얻었다.
1736년 11월 21일, 이스파한에서 모종의 사건 이후로 나디르 샤는 8만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출발하였다. 도중에 반란세력들에게 지지했던 마을이나 지역은 모조리 파괴당했다고 전해진다(...).
3. 전투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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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다하르 성채의 지도.
나디르 샤는 공성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가지 준비를 했다. 우선, 중포를 충분하게 확보하지 못했기에 중포가 도착할때까지 기다렸으며[2] , 가축들을 먹일 건초나 풀을 구하기 위해 일부 병사들을 북쪽의 초원지대로 보냈다.
그날 밤에 칸다하르 요새에 있던 길자이 병사들 일부가 야간 기습전을 시도하였으나, 페르시아군 내에 있던 압달리 부족[3] 병사들이 사전에 길자이 척후병을 잡아 야습 정보를 알았던지라 야습을 막아내는데 성공하였다.
3.1. 지체되는 시간
건초 문제를 해결한 이후, 나디르 샤는 본격적으로 칸다하르 요새를 포위하였다. 적극적인 공성을 하기엔 아직 충분한 중포를 확보하지 못했기에 또다시 포위전을 하려는 의도였던것 같다. 나디르 샤는 포위망 구역마다 일정하게 탑을 쌓았으며, 더불어 포탑을 쌓아 총구도 뚫어놓았다. 그리고 바그다드에서 그랬듯 주변 마을을 장악하거나 초토화시켜 칸다하르 요새를 완전히 고립시켰다.
나디르 샤는 칸다하르 요새 남쪽에 나디르샤바드(Nadershabad)라는 마을을 건설하였다. 나디르샤바드 마을에 각종 다양한 편의시설들이 들어섰는데, 마을에는 시장, 마굿간, 커피숍, 공용목욕탕, 모스크 등등이 들어섰다고 한다. 이는 나디르 샤가 병사들의 컨디션 관리를 위해 공들여 건설하게 한 것이었으며, 장기전의 의지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포위전은 시간이 지나 10달이 넘게 진행되었다. 그 10달이 지나가는 도중에 타 지방에서 여러 군사적 성과를 낸 덕분에 시간을 허망하게 보낸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칸다하르 요새를 점령해야 길자이 세력들의 본거지를 없애버릴수 있었다. 칸다하르 요새 내에선 가축을 잡아먹기 시작하였으나, 그렇게 궁핍한 상황은 아니었던지라 항복할 가능성은 여전히 낮았다.
3.2. 새로운 전술
결국 참다못해 짜증을 내던(...) 나디르 샤는 공성 전술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우선, 포위한 병력들은 계속해서 압박을 하고, 일부 병력을 뽑아 별동대를 구성하여 칸다하르 요새 북쪽에 있는 탑을 점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나디르 샤는 요새 북쪽의 여러 언덕지대와 지나(Zineh) 탑을 장악하는데 성공함으로서 시야가 넓어지고 사격 범위가 확대되면서 한 층 유리해지게 되었다. 그 다음 목표이자 결정적인 목표는 바로 다베흐(Davveh) 탑이었는데, 다베흐 탑을 장악한다면 탑과 이어진 성곽까지 장악할 수 있게되며, 이는 도성을 매우 수월하게 해주는 효과를 노릴수 있었다.
1738년 3월 13일, 나디르 샤는 별동대 900명을 구성하기 위해 바크티아리족, 쿠르드족, 압달리족에서 뽑았다[4] . 별동대 900명은 다베흐 탑을 공격하였으나, 사전에 별동대의 이동을 파악한 길자이 병사들의 대비로 인해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다.
3.3. 첩보전이 가져온 승리
1738년 3월 23일, 나디르 샤는 3000명의 새로운 별동대를 구성하여 다시 다베흐 탑을 공략하고자 했다. 저번의 실패를 받아들여 이번에는 별동대를 주변 숲속이나 동굴, 바위더미에 숨겨 이동을 은폐하였다. 나디르 샤는 그날 밤 별동대에게 공격이 성공할 시 각각 1000루피씩 제공해주겠다고 하였으며, 동시에 도망친다면 자신의 칼에 죽을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나디르 샤는 칸다하르 요새에 침투시겨놓은 스파이들로부터 고급 정보를 얻었다. 바로 금요일(3월 24일) 낮에 기도회 때문에 탑 내부의 병력이 줄어들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이를 기회삼은 나디르 샤는 금요일 정오가 되자 기다렸다는듯 병력을 다베흐 탑에 투입시켰다[5] . 다베흐 탑에는 병력이 별로 없었기에 순식간에 페르시아군의 수중에 떨어져버렸다. 페르시아군은 다베흐 탑을 도성의 거점으로 삼아 성곽까지 차례대로 장악해나가기 시작하였다. 길자이 병사들이 저항하였으나, 나디르 샤의 엘리트 보병대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탑에서부터 성곽까지 페르시아군의 손에 들어가버리고 있었다.
결국 칸다하르 요새는 거의 페르시아군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나디르 샤는 동쪽 성벽에 맹렬한 포격을 함으로서 그동안 참아온 짜증을(...) 분출하였다. 길자이 세력의 대장인 술탄 후세인은 시타델로 모였다가 몇몇 신하들과 자신의 딸 지납(Zeinab)과 함께 동쪽으로 빠져나갔다. 얼마 후 술탄 후세인은 자신의 딸을 사절단으로 보내 나디르 샤에게 항복을 청하였고, 나디르 샤는 이를 수락했다고 한다.
4. 결과
칸다하르 공성전은 나디르 샤의 공성전 실력을 제대로 입증해준 유일한 공성전이기도 하 ~다. 무엇보다 스파이를 활용한 정보 수집으로 공성에 성공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이는 나디르 샤가 단순히 전술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넘어 정보력 또한 뛰어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칸다하르 공성전 이후 길자이 세력의 대장이던 술탄 후세인과 그의 가족들, 신하들은 전부 호라산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반란의 주역이었음을 감안하면 나름 관대한 조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