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다하르
1. 도시
카불에 이어 아프가니스탄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이자 칸다하르 주의 주도이다. 인구는 대략 50만 명. 파슈툰 족이 거주하고 있다.
1.1. 지리
남쪽으로는 파키스탄의 퀘타, 동북으로는 카불, 서북으로는 헤라트로의 교통로가 이어지며 파슈툰 족 거주 지대의 교통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1.2. 역사
1.2.1. 상고대
칸다하르 도시 외곽에는 문디가크라는 거주지가 있었고, 메디아와 아케메네스 제국의 아라코시아 총독부가 위치하였다.
1.2.2. 헬레니즘 시대
칸다하르는 기원전 329년에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알렉산드리아 식민도시 건설의 일환으로 '아라코시아의 알렉산드리아' 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칸다하르에서는 마우리아 제국의 아소카 왕의 각석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후 인도 그리스 왕국 하에서의 번영과 쿠샨 왕조의 지배를 거친 후, 칸다하르는 지방 샤시 왕조의 지배를 거쳐 사산 제국의 손에 들어갔다.
1.2.3. 이슬람 정복과 저항
에프탈의 침입이 가신 6세기 말부터 칸다하르는 시스탄 지방의 중심부로 성장하지만 7세기 중반에 아랍 군대에게 점령당했다. 그러나 이슬람 내전(피트나)을 틈타 카불 샤시의 힌두교도인 준빌 왕조가 칸다하르를 통치하였다.
그 후 우마이야 왕조가 8세기 초에 잠깐 지배하기도 했지만 곧 쫓겨났고, 결국 870년에 이란 계의 사파르 왕조가 도시를 정복하며, 칸다하르의 이슬람 화가 진전되었다.
1.2.4. 몽골의 침입과 재건
이후 칸다하르는 가즈니 왕조, 구르 왕조의 지배를 받은 후 몽골 군대에게 점령된 후 대대적으로 파괴되었다.
다만 그 후로 재건되어 한 세기 후인 1333년에 이 곳을 지나간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칸다하르를 크고 부유한 도시라고 기술하였다.
이후 티무르 제국 치하에서 칸다하르는 번영하였고, 티무르 대왕의 손자 피르 무함마드는 1383년부터 이 곳에 궁정을 차렸고, 짧은 치세(1405 - 1407년) 동안 제국의 중심부가 되기도 하였다.
1.2.5. 무굴 vs 사파비
16세기 초에는 카불의 바부르가 칸다하르를 점령하였고, 1521년에는 시크교의 창시자 구루 나나크가 힌두스턴에서 메카로 가는 여정에서 도시를 지나기도 하였다. 무굴 제국에게 인도로의 관문인 칸다하르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바부르의 아들 후마윤은 수르 왕조에게 북 인도를 뺏기고 이란의 사파비 왕조로 피신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후마윤의 선물로 칸다하르는 사파비 조의 동쪽 변경 도시거 되었다. 다만 1590년에 그의 아들 악바르 대제의 협상으로 칸다하르는 다시 무굴 제국령이 되었다.
악바르 대제가 죽자 사파비 군대는 칸다하르를 포위하였으나(1605 - 1606년) 격퇴당하였다. 그러나 1649 - 1653년에 걸친 무굴 - 사파비 전쟁에서 도시는 다시 이란의 영토가 되었다. 부하라 칸국의 카불 공격이 결정적.
1.2.6. 아프가니스탄의 중심지
도시는 1709년에 파슈툰 - 길자이 족의 반란과 함께 호타키 왕조의 수도가 되었으나 1738년에 나디르 샤에게 함락되어 구도심이 크게 파괴되었다. 나디르 샤는 자신이 파괴한 구도심 옆에 자신의 이름을 딴 나데라바드라는 신 시가지를 조성하였다.
1747년에 나디르 샤가 죽은 후 호타키 왕조의 왕자였던 아흐마드 샤가 현 아프가니스탄의 전신인 두라니 왕조를 개창, 칸다하르를 수도로 삼았다.
비록 1776년에 두라니 조의 수도가 카불로 옮겨졌지만, 칸다하르는 여전히 아프간 지역의 중요한 도시였다. 두라니 왕조의 멸망 후 벌어진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영국 군대의 침입을 받았다.
1.2.7. 현재
아프간 전쟁에서 미군의 주요 기지가 위치하였다. 그래서인지 칸다하르 학살 사건이란 참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이 사건의 여파와 기나긴 전쟁에 도저히 이길 기미가 없어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느낀 미군이 철수하여 상당수 기지는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주둔하고 있다. 다만 이 철수의 반작용으로 안 그래도 개떡 같던 치안이 더 개떡 같아져, 현재 아프간 제1의 막장이라는 헬만드 주 급의 지역이 되어버렸다.
2. 아프가니스탄의 주
아프가니스탄 남부에 위치해 있다. 주도는 칸다하르이고 주민의 대부분이 파슈툰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