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셀스도르프 전투
[image]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45년 12월 15일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을 드레스덴 근처의 케셀스도르프에서 격파한 전투. 이 전투에서 패한 오스트리아는 더이상 프로이센과 전쟁을 지속할 의욕을 상실하고 드레스덴 협정을 체결해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점유를 인정했다.
1745년 후반, 오스트리아는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와 조르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에게 잇달아 패배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국왕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과 강화를 맺으라는 신하들의 권유를 듣지 않고 슐레지엔 탈환을 위한 새로운 공세 작전을 시행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은 이번에는 슐레지엔에 주둔한 적을 우회하여 프로이센의 수도인 베를린을 공격하는 작전을 세웠다.
우선 육군 원수 루토프스키가 지휘하는 작센 주력군이 오스트리아 분견대와 합세해 작센에서 출발해 남쪽에서 진군하고, 보헤미아에서는 로트링겐 공작 카를 알렉산더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주력군과 작센 분견대가 남동쪽에서 진군해 베를린을 협공하기로 했다. 여기에 러시아도 프로이센을 공격하겠다는 약속을 해주어서, 일이 잘 풀린다면 프로이센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계획은 얼마 안가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누설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작센의 재상 하인리히 폰 브륄이 정보를 누설했다는 루머가 돌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다. 적국의 재상으로부터 정보를 입수받았는지 아니면 첩보를 통해 적의 계획을 파악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이 적의 계획을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에 대왕은 적을 각개격파하기로 마음 먹는다. 대왕은 마그데부르크에 안할트-데사우 공작 레오폴트 1세와 3만 병력을 남겨 작센에서 올라오는 적을 치게 한 뒤 자신은 보헤미아에서 오는 적을 기습해 헨넬스도르프 전투에서 격퇴한다.
이 무렵 작센에서 올라오고 있던 루토프스키 장군은 합류하기로 했던 아군이 헨넬스도르프 전투에서 패배하고 본국으로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자 급히 작센으로 회군했다. 이에 안할트-데사우 공작은 그 뒤를 추격해 작센의 라이프치히를 점령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안할트-데사우 공작에게 당장 작센의 수도인 드레스덴으로 진군할 것을 요구했으나 공작은 보급로의 안전을 고려해 천천히 진군했다. 그러던 중 헨넬스도르프 전투에서 패배한 카를 알렉산더가 드레스덴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공작은 그 전에 루토프스키의 작센군을 무찌르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양측은 드레스덴 근처 케셀스도르프에서 격돌한다.
안할트-데사우 공작은 케셀스도르프 마을에서 엘베강의 지류인 즈스노어-바흐 강을 따라 작센군 주력을 향해 진군했다. 이때 루토프스키 원수는 케셀스도르프 마을을 요새화하고 강력한 보병대와 포병대를 배치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작센 보병대를 강줄기를 따라 좌우에 기병대를 둔 채 배치했으며, 오스트리아군을 후방에 배치했다. 안할트-데사우 공작은 자신의 안할트 연대를 포함한 프로이센 보병대를 이끌고 정면 공격을 강행했지만, 요새화된 케셀스도르프 마을에 배치된 포병대의 강력한 포격에 큰 피해를 입고 혼란에 빠진 채 뒤로 물러났다. 이후 공작은 두번째 공격을 감행했으나 이 또한 격퇴되었다.
그런데 작센군은 적이 패주하는 것을 보고 들뜬 나머지 어떠한 명령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요새에서 나와서 적을 추격했다. 이에 좌익의 프로이센 드래곤 연대와 우익의 프로이센 보병대가 역습을 가해 작센군 양 측면을 격파하고 작센군 중앙을 포위했다. 작센군은 혼란에 빠졌고, 안할트-데사우 공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군에 돌격을 명령했다. 결국 작센군은 허물어졌고 병력의 절반을 상실한 채 도주했다. 한편 후방에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작센군이 궤주하는 것을 보고 철수했다.
프로이센군은 이 전투에서 5천명의 사상자를 입었고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은 6,630명의 사상자와 많은 포로를 기록했다. 케셀스도르프 전투에서 승리한 안할트-데사우 공작은 사흘 뒤 드레스덴을 점령했다. 다음날 드레스덴에 입성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공작의 공적을 치하했다. 이로서 작센은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도, 의지도 상실하고 프로이센과의 화평을 요청했다. 한편 마리아 테레지아 역시 작센이 무너지면서 더이상 프로이센과 맞설 여력이 없다는 걸 깨닫고 프로이센과 드레스덴 조약을 체결해 슐레지엔에 대한 프로이센의 영유권을 인정했다.
1. 개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45년 12월 15일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을 드레스덴 근처의 케셀스도르프에서 격파한 전투. 이 전투에서 패한 오스트리아는 더이상 프로이센과 전쟁을 지속할 의욕을 상실하고 드레스덴 협정을 체결해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점유를 인정했다.
2. 배경
1745년 후반, 오스트리아는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와 조르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에게 잇달아 패배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국왕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과 강화를 맺으라는 신하들의 권유를 듣지 않고 슐레지엔 탈환을 위한 새로운 공세 작전을 시행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은 이번에는 슐레지엔에 주둔한 적을 우회하여 프로이센의 수도인 베를린을 공격하는 작전을 세웠다.
우선 육군 원수 루토프스키가 지휘하는 작센 주력군이 오스트리아 분견대와 합세해 작센에서 출발해 남쪽에서 진군하고, 보헤미아에서는 로트링겐 공작 카를 알렉산더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주력군과 작센 분견대가 남동쪽에서 진군해 베를린을 협공하기로 했다. 여기에 러시아도 프로이센을 공격하겠다는 약속을 해주어서, 일이 잘 풀린다면 프로이센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계획은 얼마 안가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누설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작센의 재상 하인리히 폰 브륄이 정보를 누설했다는 루머가 돌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다. 적국의 재상으로부터 정보를 입수받았는지 아니면 첩보를 통해 적의 계획을 파악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이 적의 계획을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에 대왕은 적을 각개격파하기로 마음 먹는다. 대왕은 마그데부르크에 안할트-데사우 공작 레오폴트 1세와 3만 병력을 남겨 작센에서 올라오는 적을 치게 한 뒤 자신은 보헤미아에서 오는 적을 기습해 헨넬스도르프 전투에서 격퇴한다.
이 무렵 작센에서 올라오고 있던 루토프스키 장군은 합류하기로 했던 아군이 헨넬스도르프 전투에서 패배하고 본국으로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자 급히 작센으로 회군했다. 이에 안할트-데사우 공작은 그 뒤를 추격해 작센의 라이프치히를 점령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안할트-데사우 공작에게 당장 작센의 수도인 드레스덴으로 진군할 것을 요구했으나 공작은 보급로의 안전을 고려해 천천히 진군했다. 그러던 중 헨넬스도르프 전투에서 패배한 카를 알렉산더가 드레스덴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공작은 그 전에 루토프스키의 작센군을 무찌르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양측은 드레스덴 근처 케셀스도르프에서 격돌한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 총사령관: 안할트-데사우 공작 레오폴트 1세
- 병력: 보병 21,000명, 기병 9,000명, 대포 33문
3.2.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
- 총사령관: 프레드릭 루토프스키 원수
- 병력: 보병 24,000명, 기병 7,000명, 대포 42문
4. 전투 경과
안할트-데사우 공작은 케셀스도르프 마을에서 엘베강의 지류인 즈스노어-바흐 강을 따라 작센군 주력을 향해 진군했다. 이때 루토프스키 원수는 케셀스도르프 마을을 요새화하고 강력한 보병대와 포병대를 배치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작센 보병대를 강줄기를 따라 좌우에 기병대를 둔 채 배치했으며, 오스트리아군을 후방에 배치했다. 안할트-데사우 공작은 자신의 안할트 연대를 포함한 프로이센 보병대를 이끌고 정면 공격을 강행했지만, 요새화된 케셀스도르프 마을에 배치된 포병대의 강력한 포격에 큰 피해를 입고 혼란에 빠진 채 뒤로 물러났다. 이후 공작은 두번째 공격을 감행했으나 이 또한 격퇴되었다.
그런데 작센군은 적이 패주하는 것을 보고 들뜬 나머지 어떠한 명령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요새에서 나와서 적을 추격했다. 이에 좌익의 프로이센 드래곤 연대와 우익의 프로이센 보병대가 역습을 가해 작센군 양 측면을 격파하고 작센군 중앙을 포위했다. 작센군은 혼란에 빠졌고, 안할트-데사우 공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군에 돌격을 명령했다. 결국 작센군은 허물어졌고 병력의 절반을 상실한 채 도주했다. 한편 후방에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작센군이 궤주하는 것을 보고 철수했다.
5. 결과
프로이센군은 이 전투에서 5천명의 사상자를 입었고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은 6,630명의 사상자와 많은 포로를 기록했다. 케셀스도르프 전투에서 승리한 안할트-데사우 공작은 사흘 뒤 드레스덴을 점령했다. 다음날 드레스덴에 입성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공작의 공적을 치하했다. 이로서 작센은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도, 의지도 상실하고 프로이센과의 화평을 요청했다. 한편 마리아 테레지아 역시 작센이 무너지면서 더이상 프로이센과 맞설 여력이 없다는 걸 깨닫고 프로이센과 드레스덴 조약을 체결해 슐레지엔에 대한 프로이센의 영유권을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