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투지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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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3.2. 오스트리아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42년 5월 17일 보헤미아의 코투지츠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맞붙은 전투. 프로이센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후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지배를 용인한다.

2. 배경


1740년 5월 31일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사망한 뒤 국왕이 된 프리드리히 대왕은 아버지가 즉위 내내 갈고 닦아온 군대를 활용해 프로이센을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세우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그러던 1740년 10월 20일 오스트리아 황제 카를 6세가 사망하고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의 주변국들은 여자는 왕위에 오를 수 없다는 살리카법을 근거로 삼아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려 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재빨리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한 뒤 1740년 12월 16일 슐레지엔을 침공했다. 그는 오데르 강 서쪽으로 남하한 후 1741년 1월 3일 슐레지엔의 수도 브레슬라우에 입성했다. 이후 프로이센군은 1741년 3월까지 슐레지엔 남쪽 국경까지 진군해 여러 고을들을 점령했지만 나이세등 여러 도시들은 오스트리아군이 계속 점령했다.
한편,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빼앗긴 것에 분노해 빌헬름 라인하르트 폰 나이페르크 휘하의 2만 병력을 파견해 슐레지엔을 되찾게 했다. 그러나 1741년 4월 10일 몰비츠 전투에서 패배한 나이페르크는 본국으로 돌아가 방어전에 치중할 뿐 슐레지엔을 노리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바이에른 왕국과 프랑스까지 오스트리아를 전격 침공하는 바람에 오스트리아로선 이들을 막느라 슐레지엔에 더이상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한편 프리드리히 대왕 역시 몰비츠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아군 기병대의 형편없는 전투력에 경악해 이들을 재조직하는 데 온 힘을 쏟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당분간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는 걸 원치 않았다. 결국 1741년 10월 9일, 양국은 클라인-슈넬렌도르프에서 밀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점유를 용인했고 프로이센은 그 대신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합의했다.
1742년 1월,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와 맺었던 비밀 협정을 파기하고 전쟁에 다시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베를린을 떠나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작센 선거후를 설득해 작센군을 자신의 지휘하에 배속시키게 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모라비아와 북부 보헤미아로 진격했다. 그러나 작센군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작센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진격하라는 요구에 지쳐서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5월,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 대군이 모라비아를 통해 자신을 향해 서쪽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그는 보헤미아 북부의 코투지츠 마을 인근에서 전투를 벌이기로 한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3.2. 오스트리아군



4. 전투 경과


1742년 5월 15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로이센 호위병들과 함께 주둔지를 떠나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동생 레오폴트 왕자 더러 본대를 이끌고 뒤따라오게 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츠샤슬라우 마을 근처의 한 지점에서 남쪽 방향에서 야영하고 있는 오스트리아군을 목격했다.또한 레오플트 왕자도 형의 뒤를 따라가다가 적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급히 메시지를 보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5월 16일 오전 5시에 본대로 돌아오다가 세인트 자코브 마을에 잠시 들러서 마을 교회의 첨탑에 올라가 전장을 살펴봤다.
그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본대로 귀환한 뒤 레오폴트 왕자에게 보병대를 이끌고 코투지츠 마을을 점령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발도우 중장이 이끄는 기병대를 코투지츠 남쪽으로 흐르는 브슬레카 계곡에 주둔시켜 아군의 좌익으로 삼았다. 또한 버든브록 중장이 이끄는 기병대를 커크비츠 호수의 남쪽 둑에 배치해 우익으로 삼았다. 한편 오스트리아군은 남쪽 방향에서 진군해왔는데, 중앙에는 보병이 두 줄로 늘어섰으며, 좌익에는 다수의 기병대가 포진했고 우익에는 소규모 기병대가 배치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버든브룩 중장에게 적을 공격하고 진격을 방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버든브룩은 이 명령을 받들어 적의 좌익으로 쳐들어갔지만 그곳에 배치된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거센 역습을 가했고, 양측은 전장의 서쪽 지역을 둘러싼 난투극을 벌였다. 한편, 오스트리아 보병대는 코투지츠 마을에 배치된 레오플트 왕자의 프로이센 보병대를 향한 강력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때 마을의 집들은 목조 건축물이기 때문에 쉽게 불이 붙어서 프로이센군에게 불리했다. 이에 프로이센군은 적의 화공으로 고전하다가 코투지츠 마을에서 떨어져야 했다. 이에 발도우 중장은 좌익의 기병대를 이끌고 적의 우익을 격퇴해 프로이센 보병대가 받는 압박을 완화시키려 했다. 그는 앞을 가로막은 적의 소규모 기병대를 격파하고 오스트리아군의 후방을 가로지른 뒤 보든브룩 중장의 기병대와 합세해 오스트리아군 좌익 기병대를 패퇴시켰다.
오스트리아군이 코투지츠 공격에 열을 올리는 사이,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의 보병대를 코투지츠 서쪽의 전장 한가운데에 있는 고원에 일부 보병대를 은밀히 이동시켰다. 이후 그는 적이 코투지츠 마을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사이 고원에 포진한 보병대를 정렬시킨 뒤 적의 측면을 공격했다. 이 보병 연대의 공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였고, 오스트리아 보병대는 남쪽으로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이에 부하들은 적을 추격하자고 제의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아군 기병대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렇게 해서 코투지츠 전투는 프로이센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


프로이센군은 코투지츠 전투에서 4,8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으며 포로 천 명을 상실했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6,400명의 사상자를 입었고 대포 18문을 상실했으며 포로 12,000명이 발생했다. 전투가 끝난 뒤 카를 알렉산더는 프로이센의 동맹국인 프랑스군과 맞서기 위해 오스트리아군을 서쪽으로 이동시켰고, 프리드리히 대왕과 그의 군대는 코투지츠 전장에서 약 30마일 떨어진 쿠텐부르크에 주둔지를 건설했다. 그로부터 한달 후인 1742년 6월 11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와 브레슬라우 조약을 맺기로 했다. 이리하여 프리드리히는 슐레지엔 지배권을 인정받는 대신 오스트리아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바이에른을 압도하는 걸 지켜보며 언젠가는 저들이 슐레지엔을 되찾으려 들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1742년부터 1744년까지 군대를 재편성하고 강한 훈련을 실시했다. 그리고 1744년 8월,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이 라인강에서 프랑스군과 교전을 벌이는 틈을 타 보헤미아를 전격 침공했고, 이후 오스트리아군과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를 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