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비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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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3.2. 오스트리아군
4. 전투 경과
4.1. 대왕의 실책
4.2. "우리는 적의 본대를 넘어 퇴각한다"
4.3. 프로이센군의 역전승
5. 결과


1. 개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41년 4월 10일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슐레지엔의 몰비츠(현재 폴란드의 마우요비체(Małujowice))에서 맞붙은 전투.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신의 인생 첫번째 전투인 이 전투에서 온갖 실책을 범했지만 슈베린 백작 덕분에 승리를 거뒀다.

2. 배경


1740년 5월 31일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사망한 뒤 국왕이 된 프리드리히 대왕은 아버지가 즉위 내내 갈고 닦아온 군대를 활용해 프로이센을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세우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그러던 1740년 10월 20일 오스트리아 황제 카를 6세가 사망하고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의 주변국들은 여자는 왕위에 오를 수 없다는 살리카법을 근거로 삼아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려 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재빨리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한 뒤 1740년 12월 16일 슐레지엔을 침공했다. 그는 오데르 강 서쪽으로 남하한 후 1741년 1월 3일 슐레지엔의 수도 브레슬라우에 입성했다. 이후 프로이센군은 1741년 3월까지 슐레지엔 남쪽 국경까지 진군해 여러 고을들을 점령했지만 나이세등 여러 도시들은 오스트리아군이 계속 점령했다.
한편,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빼앗긴 것에 분노해 빌헬름 라인하르트 폰 나이페르크 휘하의 2만 병력을 파견해 슐레지엔을 되찾게 했다. 나이페르크는 슐레지엔 국경을 넘은 뒤 프로이센군의 경계를 회피한 채 우회 기동하여 나이세의 오스트리아군 수비대와 합세하려 했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프리드리히 대왕은 군대를 집결해 나이페르크를 따라갔다. 당시 날씨는 매우 추웠고 눈바람이 심하게 몰아쳐 양측 모두에게 많은 손실을 입혔지만, 나이페르크는 프리드리히 대왕보다 한발 앞서 나이세에 먼저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나이페르크는 프로이센 왕국과 프로이센군 사이에 위치해 적의 보급을 끊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들을 격퇴하기로 결심하고 나이세 남쪽의 몰비츠 마을 인근에서 적과 격돌한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3.2. 오스트리아군


  • 총사령관: 빌헬름 라인하르트 폰 나이페르크
  • 병력: 보병 10,000명, 기병 8,000명

4. 전투 경과



4.1. 대왕의 실책


전투 전날인 1741년 4월 9일부터 내린 폭설은 이튿날까지 계속 되었다. 프로이센군은 이 날씨에 적을 급습하기 위해 5열 대형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우익을 그라이닝겐 마을 부근에 배치했고 좌익에 팜피츠 마을에 둔 채 전열을 갖췄다. 그러나 이번이 첫 전투였던 대왕은 진형을 잘못 배치하는 실수를 범했다. 오스트리아군을 정면에서 맞서 싸울 군대의 대열을 너무 적게 배치한 데다 기병대가 출격할 공간을 협소하게 둬 버린 것이다. 한편 프로이센 포병대는 전선 앞으로 전진해 오스트리아군 진지를 포격했으나 눈보라 때문에 시야가 극도로 좁아진 상황에서 시행한 이 포격은 적에게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군이 눈보라를 뚫고 난데없이 나타나자 깜짝 놀라며 급히 전투대형을 갖췄다. 그 후 나이페르크 장군은 뢰머 장군에게 좌익 기병대를 이끌고 적의 우측면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 뢰머 장군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기병대를 이끌고 프로이센군 우익 기병대를 공격했다. 프로이센 기병대는 즉각 응전하려 했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이 기병대가 출격할 공간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뒀기 때문에 보병대에게 막혀서 제 때에 출격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들은 적 기병대의 돌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금방 패주하고 말았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흉갑 기병연대를 이끌고 친히 전투에 뛰어들었으나 결국 패퇴했다.

4.2. "우리는 적의 본대를 넘어 퇴각한다"


이렇듯 프로이센군 우익 기병대가 허물어지자, 슈베린 백작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돌아온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아군이 패배 일보직전인 상황이니 전장에서 물러날 것을 조언했다. 대왕은 그의 조언에 잠시 고민했다가 이내 수락하고 수행원 몇명만 데리고 전장에서 달아나 오펠른 마을을 향해 도주했다. 그는 그 와중에 적 기병대에게 추격당해 잡힐 상황에 몰렸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 한편 중앙의 프로이센 보병대는 적 기병대가 아군의 우익 기병대를 패퇴시킨 뒤 자신들의 측면을 공격해오자 일제 사격을 퍼부으려 했지만 눈보라가 극심하게 몰아치는 상황에서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기에 적에게 별 타격을 입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군을 오인사살하는 등 혼란에 휩싸였다.
그러던 중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오스트리아 기병대 지휘를 맡아 적군을 마구 짓밟던 뢰머 장군이 적병이 쏜 유탄이 머리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전사해버린 것이다. 여기에 양익의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고 있던 장군들 역시 전사해버렸다. 이때 마침 퇴각할 준비를 하던 슈베린 백작은 한 장교로부터 이 소식을 들었다. 장교가 어디로 퇴각해야 하냐고 묻자, 슈베린 백작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우리는 적의 본대를 넘어 퇴각한다.


4.3. 프로이센군의 역전승


슈베린 백작은 적 기병대가 뢰머 장군의 전사로 주춤해 있는 사이 군대의 대열을 새로 배치한 뒤 아군의 좌측면을 공격해온 적의 공세를 격퇴했다. 그 후 그는 전군에 전진 명령을 내렸다. 잘 훈련된 프로이센 보병대는 분당 4발에서 5발의 사격을 가해 분당 한발 내지 두 발만 쏠 수 있는 오스트리아군 보병대를 화력에서 압도했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은 궤주했고, 나이페르크 장군은 생존자들을 모아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퇴각했다. 한편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펠른 마을에서 숨어 있다가 아군이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본대로 돌아왔다.

5. 결과


프로이센군은 이 전투에서 4,850명의 사상자를 입었고 오스트리아군은 4,25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사상자 수에선 프로이센군이 더 많긴 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이 패퇴하면서 승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로이센 기병대의 전투력이 형편없는 것에 경악하고 다음 몇달 동안 몰비츠에 있는 주둔지에서 프로이센군을 재조직하고 전쟁 이론을 연구했다. 이 때문에 슐레지엔에서는 1741년 8월까지 더 이상의 군사 작전이 이뤄지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후에 다시는 군대를 남겨두고 혼자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이를 그의 일생 내내 지켰다. 또한 그는 몰비츠 전투에서 많은 교훈을 얻어 "몰비츠는 나의 학교다."라는 말도 남겼다. 이후 그는 공세적인 전략을 선호해 당대 최고의 장군 중 하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