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처
간체자 库车
번체자 庫車
위구르어 '''كۇچار'''
영어 Kuqa / Kucha / Kuchar / Kuche
중국 서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도시. 아커쑤지구에 속한 현급 도시로, 인구는 48만명이다. 아커쑤에서 동쪽으로 350km 떨어진, 타림 분지의 북쪽에 있는 녹지 중 가장 넓은 곳에 위치한 도시이다. 시내 북쪽에는 가느다란 산맥이 있고 그 뒤로 20km를 가면 천산 산맥이 나온다. (산맥 너머는 중국령 이리 계곡)
과거 월지인들이 거주하던 쿠차는 구자국(龜玆國)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기원전 138년 장건의 서역 원정기에 구자국의 도읍은 연성이라 불렸고 장안에서 7480리 거리이며 가구는 6970호, 인구는 81317명인데 그중 승려가 21716명이었다고 한다. (출처 : 한서) 기원후 1세기 무렵 구자국은 소륵 (카슈가르)을 격파, 쿠차인을 그 왕으로 세워 간접 지배를 하는 등 천산 남로를 장악하였다. 하지만 후한에게는 굴복해 서역 진출의 거점으로 쓰였고 서기 91년부터 107년까지 서역도호부가 설치되어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반초가 왕 우리다를 폐하고 로마계?인 백패를 옹립) 다만 반초가 사망한 후 구자국은 재차 독립하였고 선선, 소륵, 언기, 우전국과 함께 서역 5대국으로써 번영하였다.
구자국은 삼국시대 승려 백연(帛延 혹은 白延)이 구자국 왕자였고 382년 현지 승려 구마라집을 탐낸 전진이 침공해 올만큼 불교가 흥하였다. 진서에선 구자국이 낙양에서 8280리 떨어져 있고 성곽이 3중이었으며 불탑과 사원이 천여개였다고 한다. 현장에 의하면 도성의 둘레가 18리, 사찰이 100여개, 승려가 5천이 이르렀다 하며 서문 바깥 양편에 높이 90척 (27m)의 거대한 불상이 세워져 있었 춘붕 때마다 법회가 열렸다고 한다. 구자국은 647년 당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였고 658년 안서도호부가 설치되어 서역 경영의 중심이 되었다. 고선지의 본부이기도 했다. 왕오천축국전에 의하면 쿠차는 카슈가르에서 도보로 한달이 걸렸고 소승불교가 성행하지만 중국인 승려들은 대승불교를 믿었다고 기록하였다.
8세기 말엽 쿠차는 토번의 지배를 받았고 860년 위구르 제국이 점령, 이후로는 천산 위구르의 주요 도시로 기능하였다. 1226년 도시는 몽골군에 점령되었고 그후 원, 명, 청을 거쳐 현재에 이른다. 다만 직접 지배는 청나라 대에 들어서야 개시되었다. 이러한 깊은 역사 덕에 시내 주변에는 쿠처 고성, 스바시 고성, 한나라 시대의 봉화대와 키질 석굴 등 일명 천불동이 있다. 특히 키질 석굴은 간다라 양식의 유적으로서 그 미술사적 의미가 크다. 연구자의 말에 따르면 쿠차(구자국)은 월지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번체자 庫車
위구르어 '''كۇچار'''
영어 Kuqa / Kucha / Kuchar / Kuche
중국 서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도시. 아커쑤지구에 속한 현급 도시로, 인구는 48만명이다. 아커쑤에서 동쪽으로 350km 떨어진, 타림 분지의 북쪽에 있는 녹지 중 가장 넓은 곳에 위치한 도시이다. 시내 북쪽에는 가느다란 산맥이 있고 그 뒤로 20km를 가면 천산 산맥이 나온다. (산맥 너머는 중국령 이리 계곡)
과거 월지인들이 거주하던 쿠차는 구자국(龜玆國)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기원전 138년 장건의 서역 원정기에 구자국의 도읍은 연성이라 불렸고 장안에서 7480리 거리이며 가구는 6970호, 인구는 81317명인데 그중 승려가 21716명이었다고 한다. (출처 : 한서) 기원후 1세기 무렵 구자국은 소륵 (카슈가르)을 격파, 쿠차인을 그 왕으로 세워 간접 지배를 하는 등 천산 남로를 장악하였다. 하지만 후한에게는 굴복해 서역 진출의 거점으로 쓰였고 서기 91년부터 107년까지 서역도호부가 설치되어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반초가 왕 우리다를 폐하고 로마계?인 백패를 옹립) 다만 반초가 사망한 후 구자국은 재차 독립하였고 선선, 소륵, 언기, 우전국과 함께 서역 5대국으로써 번영하였다.
구자국은 삼국시대 승려 백연(帛延 혹은 白延)이 구자국 왕자였고 382년 현지 승려 구마라집을 탐낸 전진이 침공해 올만큼 불교가 흥하였다. 진서에선 구자국이 낙양에서 8280리 떨어져 있고 성곽이 3중이었으며 불탑과 사원이 천여개였다고 한다. 현장에 의하면 도성의 둘레가 18리, 사찰이 100여개, 승려가 5천이 이르렀다 하며 서문 바깥 양편에 높이 90척 (27m)의 거대한 불상이 세워져 있었 춘붕 때마다 법회가 열렸다고 한다. 구자국은 647년 당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였고 658년 안서도호부가 설치되어 서역 경영의 중심이 되었다. 고선지의 본부이기도 했다. 왕오천축국전에 의하면 쿠차는 카슈가르에서 도보로 한달이 걸렸고 소승불교가 성행하지만 중국인 승려들은 대승불교를 믿었다고 기록하였다.
8세기 말엽 쿠차는 토번의 지배를 받았고 860년 위구르 제국이 점령, 이후로는 천산 위구르의 주요 도시로 기능하였다. 1226년 도시는 몽골군에 점령되었고 그후 원, 명, 청을 거쳐 현재에 이른다. 다만 직접 지배는 청나라 대에 들어서야 개시되었다. 이러한 깊은 역사 덕에 시내 주변에는 쿠처 고성, 스바시 고성, 한나라 시대의 봉화대와 키질 석굴 등 일명 천불동이 있다. 특히 키질 석굴은 간다라 양식의 유적으로서 그 미술사적 의미가 크다. 연구자의 말에 따르면 쿠차(구자국)은 월지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