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코마급 호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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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해군 임진함
'''영어: Tacoma Class Frigate'''
1. 개요
타코마급 호위함은 1943년 부터 미국 서부 워싱턴 주에 있는 타코마시에서 건조되기 시작하였다. 타코마시에서 선박을 제조할 경우 대륙 횡단 철도의 서쪽 종점이며 북쪽에 새롭게 건설된 항구도시 시애틀과도 가까워 선박 재료 수급 및 함정 발주에 용이하였다.
2. 상세
제 2차 세계대전 중, 대서양 전투에서 넓은 해역을 커버하기 위해선 주력함선 외에도 호위함 세력도 충분한 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미 해군에서, 영국에서 만들어진 리버급 호위함을 2척 넘겨받아 운용하기 시작했는데, 급한데로 받긴 했지만 문제점도 많은 배였기 때문에[2] 결국 이 리버급(미국내 함선명은 애쉬빌급)을 전면 재설계해서 탄생한 것이 이 타코마급 호위함이다.[3]
오리지널인 리버급 자체가 상선 선체를 이용해 만든 호위함이다 보니 일반 조선소에서도 쉽게 건조가 가능했고, 실제로 건조된 대부분이 여러 민간 조선소에서[4] 만들어져 총 96척이 취역(원래 100척을 주문했지만 4척은 취소)했다.
기본적으로 미 해군에서 사용하는 엔진(주로 증기터빈 아니면 디젤)과는 다른 왕복식 증기엔진(직렬 3단 팽창식 증기기관)을 사용했기에 운용상의 문제를 들어[5] 대부분 미 해안경비대에서 운용했으며, 이 중 21척이 영국으로 공여되어 콜로니급으로 재명명되어 사용되었고, 랜드리스를 통해 소련에도 28척이 공여되었다.
3. 타국으로 공여
3.1. 한국
'''한국에서 부르는 명칭은 두만급 호위함.'''
1950년 미군 장교인 엘런 스미스 제95 기동부대 사령관이 UN해군의 해상봉쇄와 호송임무를 수행하기에는 한반도의 해역을 가장 잘아는 한국해군이 필요하고 그에따라 전력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그에따라 1950년 10월 23일에 일본 요코스카항에 정박해있던 PF급 호위함 두척을 한국에 첫 도입되고 1970년대 말쯤 마지막으로 퇴역하여 해체된다.
전쟁 기간 동안 총 5척을 인수받았는데 이 전함들에는 독특한 이력이 있다. 이 함선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소련에 렌드리스 무기대여법으로 대여된 30척의 함정들 중 일부로, 2차 대전이 종료되고 27척을 돌려받았는데 미국까지 끌고 가느라 돈을 쓸 바에는 그냥 한국에 공여하는 게 낫겠다 싶어 넘겨준 것.[6] 처음 받은 함정은 PF-48, 49함으로 대한민국 해군에 인도되면서 61함, 62함으로 이름이 바뀌고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1000톤 이상의 전투함이 됐다. 참고로 이 타코마급 호위함은 전쟁 발발전 손원일 제독이 돈주고 산다고 했는데도 미국이 안 판다고 했던 전투함이다. 원래 손 제독은 백두산함 구입 이후 샌프란시스코의 통칭 배무덤이라고 불리던 곳에서 퇴역하여 다른 나라에 팔리던 전투함들중 이 함선을 백두산함 구입 이후 남은 4만 달러로 구입하려 했다. 하지만 미국이 PF함을 한국에는 팔지 않겠다고 해서 대신 PC급 구잠함 3척을 구입한 것.
그리고 6.25 때 이 전함들을 미국에게서 빌려 쓰다가 1970년대 초쯤에 돈을 주고 산다.[7]
그중 압록(PF-62)함은 1951년 4월 5일 신미도 해역에서 추락한 소련제 MiG-15 전투기를 인수해오라는 지시로 소해정들을 이끌고 인수하러 갔다. 그런데 북한 공군 Yak-9 4대로 구성된 1개 편대가 접근해오면서 처음으로 함대공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압록함 승무원들은 물론 대한민국 해군 자체가 당시 함대공 전투를 경험한 적도 없고 대공무기 또한 변변치 못해 불리한 싸움이었다. 거기다 동행한 소해정들은 적 공군기에 대해 대응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 불리한 상황 속에서 압록함은 뜻밖의 결과를 냈다. Yak 전투기가 폭탄을 떨어트리고 다시 상승할 때를 노려 압록함에서 포를 발사하자 그로 인해 1대가 격추되고 1대가 큰 손상을 입어 Yak 전투기 편대는 후퇴하였다. 이때 압록함은 8명의 부상자와 선체에 약간의 균열이 간 게 피해의 전부였다. 처음 겪은 함대공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자도 없고 사망자도 없었으며 함선에 큰 피해도 없는 상태로 1기 격추에 1기 손상이라는 전과를 거둔 것은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미그 전투기를 예인해오는 건 두만함이 대신 맡았고 미그 전투기까지 가져오자 미국은 한국해군의 실력을 인정하고 네임쉽인 PF-3 Tacoma와 PF-5 Hiquiam을 추가로 원조해주었다. 한국해군에 편입되면서 Tacoma는 PF-63 대동함으로, Hoquiam은 PF-65 낙동함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당시 미국은 한국해군의 실력을 낮게 평가하여 압록함과 두만함 인수 후 PF함의 추가지원을 미루고 있었는데 이때의 전과를 계기로 PF급을 추가 지원했다.
하시만 좋은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PF-62 압록함은 1952년 5월 21일 미국의 AO-3급 보급수송함을 호위하다가 통신착오로 인해 해당 함과 충돌하고 말았다. 다행히 침몰은 면했지만 이 사고로 21명이 전사했고 10명이 부상당했으며 압록함은 복구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다행히 미해군 구조예인함 ATF-105 USS Moctobi 함에 구조되어 부산항으로 옮겨졌지만 복구 불가능한 상태였던 압록함은 미군에게 반환되어 표적연습함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한국해군은 마지막함인 PF-4 Sausalit 함을 인수해 PF-66 임진함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호위함들에는 독특한 점이 있는데, 미해군에서 운용했을 때는 대동함이나 낙동함같이 일찍 만들어진 배들이 함번을 빨리 받았으나 한국해군에서는 한국에 도입된 시기에 맞춰 함명을 부여했기 때문에 미해군의 도입시기와 관련없이 함번은 우리나라에 맞춰 불렀다.
총 5척의 PF함 중 두 척은 공짜로 원조되고 1척은 미군이 표적함으로 격침시켰으며 두척은 전쟁이 끝난 뒤 구매했다.
압록(PF-62)함은 1973년 2월 28일 미국으로 돌려보내졌다가 1973년 4월 2일에 기증되었는데 연습선으로 쓰이다가 퇴역된다.
3.1.1. 함정 목록
3.2. 일본
1953년에 소련에서 반환된 배들 중 18척의 타코마급이 일본 해상자위대에 대여되었다.
일본명은 くす型護衛艦(쿠스급 호위함).
3.2.1. 함정 목록
3.3. 기타 국가
아르헨티나, 벨기에, 프랑스, 도미니카 공화국, 에콰도르, 쿠바, 콜롬비아, 멕시코, 네덜란드, 페루, 태국등에 공여되었다. 특히 소련에 공여되었다 반환된 함선들은 거의 대부분 타국행 루트를 탔다.[8]
[1] 수면아래 잠기는 부분[2] 결정적으로, 미해군에 넘겨진 배는 캐나다에서 건조된 물건이었다. 덕분에 원 제조국인 영국제, 건조국인 캐나다제, 실 사용국인 미국제 장비들이 혼합된 형태라 운용 및 정비에 애로사항이 꽃폈다고 한다(...)[3] 추가 도입하려던 리버급은 도입 취소해서 결국 영국군이 대신 도입해 운용했다고 한다.[4] 미국 위키피디아 자료에 의하면, 건조에 참여한 조선소만 9개나 되며, 지역도 오하이오, 캘리포니아, 밀워키, 위스콘신, 로드 아일랜드 등 여러 지역에 퍼져있다[5] 왕복식 증기엔진은 힘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구조적으로 고속을 내는데는 굉장히 불리하다. 위의 재원에 나와있듯이 최고 속도가 20노트에 불과하다. 선단호위 같은 임무에 사용이 아주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지만 사용하기 불편한 것은 사실이고 이것말고 사용할 함정이 없었다면 이거라고 선단호위에 써야 했겠지만 미국에는 호위구축함이라는 호송선단의 호위에 딱 맞는 함정이 우글우글했다.[6] 당시 미국은 PF함 이상의 구축함, 순양함, 항공모함까지 퇴역시켜 연습표적으로 삼거나 폐선처리했다. 그러니 그보다 아래인 PF함들을 공짜로 넘겨준 것.[7] 대동(PF-63)함, 압록(PF-62)함은 제외.[8] 반환식 자체는 일본에서 이루어졌는데, 일본에서 미국까지 끌고오는데 돈 들이느니 그냥 공여 형식으로 그 자리에서 넘겨버리게 된 것. 아예 운송비가 들지 않는 일본이 28척 중 18척이나 받게 된 것도 이런 이유가 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