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해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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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
Alexander Hamilton
'''
'''출생'''
<colcolor=#000000> 1755년 or 1757년 1월 11일[1]
영국령 서인도 제도 네비스 섬 찰스타운
(現 세인트키츠 네비스 네비스 섬 찰스타운)
'''사망'''
1804년 7월 12일 (47 or 49세)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재임기간'''
초대 재무부 장관
1789년 9월 11일 ~ 1795년 1월 31일
미합중국 육군 사령관
1799년 12월 14일 ~ 1800년 6월 15일
연합회의 뉴욕 주 대표
1788년 11월 3일 ~ 1789년 3월 2일
'''서명'''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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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제임스 A. 해밀턴
어머니 레이첼 포셋
'''배우자'''
엘리자베스 스카일러 해밀턴
'''자녀'''
필립 해밀턴, 안젤리카 해밀턴,
알렉산더 해밀턴 주니어, 제임스 알렉산더 해밀턴,
존 처치 해밀턴, 윌리엄 스테판 해밀턴,
엘리자 해밀턴 홀리, 필립 해밀턴 2세[24]
'''종교'''
성공회
'''학력'''
컬럼비아 대학교[25]
'''신장'''
170cm
'''정당'''
연방당
'''주요 경력'''
초대 재무부 장관
미합중국 육군 사령관
연합회의 뉴욕 주 대표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미국 독립 전쟁
2.3. 독립 이후
2.4. 초대 재무장관
2.5. 적이 많은 사나이
3. 평가
4. 사상
5. 관련 어록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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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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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 군인, 법률가, 정치가, 사상가이며, 미국 초대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초대 재무부 장관으로 미국의 금융, 경제체계를 확립했다고 평가받는다. 덕분에 현 미국 10달러 지폐의 모델이기도 하다.[2] 정치가로서는 독립 당시 13개 주의 느슨한 연방제를 개편하여 보다 강력한 중앙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다만 엘리트주의적 성향으로 반대파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2. 생애



2.1. 유년기


알렉산더 해밀턴은 카리브 해영국 식민지 서인도 제도 네비스 섬의 찰스타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귀족 가문의 사남이자 상인인 제임스 A. 해밀턴, 어머니는 프랑스 위그노와 영국인의 혼혈인 레이첼 포셋[3]이다. 손위형제로 형인 제임스 해밀턴 2세(1753–1786)가 있다. 다만 해밀턴의 출생년도는 다소 애매한데, 1755년생 또는 1757년생로 보여진다. 처음 아메리카 식민지에 왔을 때에는 1757년 1월 11생으로 신고했지만, 서인도 제도에 머물던 시절 그의 삼촌은 그를 1755년생으로 신고하는 등 자료가 서로 엇갈린다. 어느 쪽이든 나이를 속일 당위성은 있지만 기존의 학설은 1757년생을, 최근 학설은 1755년생을 지지하는 편이다. (여기서는 1757년생설을 기준으로 나이를 표기하겠다.)
아버지 제임스 해밀턴이 가족을 버리고 떠나자[4] 레이첼은 두 아들을 데리고 세인트크로이 섬으로 이사해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살림을 꾸렸다. 사생아기 때문에 교회 부속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해밀턴은 따로 개인 교습이나 유대인 학교에서 공부했고, 가게 일을 도우며 살았다. 해밀턴이 11살이 되던 해 2월 19일, 레이첼이 황열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해밀턴 형제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레이첼의 유산은 라비엔과 그 아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나마 돌려받은 것이라곤 몇몇 은식기와 지인이 경매에서 건진 책 몇 권 뿐이었다.
빈털털이 고아가 된 해밀턴 형제는 사촌 집에 거두어졌다. 그러나 얼마 뒤 사촌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두 형제는 각자도생의 길을 걸어야 했다. 제임스 해밀턴 2세는 목수 일을 배우러 떠났고, 해밀턴은 무역상의 점원으로 일했다. 이 때부터 해밀턴은 경제, 무역, 금융, 신용에 대한 실무 지식을 쌓아간 것으로 추측된다.
1772년 8월 30일, 15세의 해밀턴은 강력한 허리케인이 자신이 사는 크리스천스테드를 휩쓰는 모습을 보았다. 해밀턴은 이 때의 종말론적인 광경을 편지로 써 아버지에게 보냈는데, 휴 녹스라는 지역 유지가 이 글을 읽어보고 신문에 기고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로열 대니시-아메리캇 가젯이라는 지역지에 실린 허리케인 편지는 해밀턴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해밀턴의 글 솜씨와 재능을 눈여겨 본 지역 주민들이 돈을 모아 그를 미 대륙 본토로 유학 보낸 것이다. 1772년 10월, 아메리카 식민지 보스턴에 도착한 해밀턴은 엘리자베스 타운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2.2. 미국 독립 전쟁


혁명 직전 격동기의 사회를 접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 13식민지들과 본토 영국정부와의 대립이 거세지자, 해밀턴은 독립파에 가담했고 미국 독립전쟁기에는 조지 워싱턴의 부관이 되었으며, 독립군 내부의 알력다툼 속에서도 버텨내서[5] 요크타운 전투에도 참가하는 등의 전공을 세우며 입지를 쌓아갔다.

2.3. 독립 이후


독립 이후에는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지가 미국 내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미국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전쟁이나 차후 영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과 싸워야 할 강력한 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한 이들도 있는 반면, 영국의 억압을 기억하라며 중앙정부 권한 축소, 각 주의 강력한 자율권 요구 등 다양한 의견들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1787년에 결국 어떤 정부를 구성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는 제헌 협의회가 열렸는데 해밀턴은 '''종신 대통령'''이 주지사까지 임명할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정부안을 구상하였다.[6][7]
이후 구체적인 헌법 초안이 완성되고 각 주의 비준만이 남아 있었으나 새로운 헌법은 강력한 중앙정부가 주와 인민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며 반발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자 알렉산더 해밀턴과 제임스 매디슨, 존 제이[8]는 후대에 『연방주의자 논고(The Federalist Papers)』라고 불리는 에세이[9]를 신문에 기고하면서 연방 헌법 비준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연방 헌법은 비준이 된다.

2.4. 초대 재무장관


정부 수립 이후에는 조지 워싱턴의 요청으로 초대 재무장관이 되어 미국 재정문제 해결과 정부 체계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나, 재임 중 유부녀 마리아 레이놀즈와의 불륜 스캔들이 터졌고, 그렇게 미국 역사상 최초의 성 스캔들 주인공이 되어(...) 이런 여파로 재무장관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2.5. 적이 많은 사나이


해밀턴은 성격과 이념 문제로 인해 정적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에런 버[10]와의 관계는 버가 해밀턴의 장인 지역구에 출마해 이기면서 틀어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결국 3대 대통령 선거에서 해밀턴이 '''버를 대통령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성향이 정반대였던 토머스 제퍼슨을 지지하면서 극으로 치닫게 된다.[11] 이후로도 해밀턴이 공개적으로든 비공개적으로든 버의 치부를 비난하는 글들을 기사화하고 버를 향한 정치적 공작을 펼친다는 의혹까지 나오면서 결국 분노한 버가 해밀턴에게 결투를 신청하면서 1804년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초유의 결투'''가 벌어졌고[12] 해밀턴은 버의 '''총을 맞은 다음날 결국 사망한다'''(...). 그가 죽을 당시의 나이는 기껏해야 쉰을 바라보던 정도였다.
성격적으로도 사교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인물이었고 강력한 중앙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부의 권력보다는 주와 인민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중시하던 토머스 제퍼슨[13]을 비롯한 반연방주의자들과는 사이가 당연히 안 좋았고, 같은 연방주의자였던 존 애덤스도 자기만큼이나 꼬장꼬장하기 그지없던 해밀턴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예 결투까지 벌인 에런 버와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건국의 아버지들 중에 사교성이 안 좋다고 평가받은 인물들은 많았지만 해밀턴은 당대 거물급 인사들에게 유독 비난과 비판,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반면 해밀턴은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전쟁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당대 최대 정치거물 조지 워싱턴의 오른팔 역할을 하면서 총애를 받았던 이유로 워싱턴 은퇴 전까지 다들 비난의 수위조절을 해야해서 해밀턴의 초기성장을 견제하지 못했던 면도 있다. 오죽하면 '해외에서 태어난 이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는 조항이 해밀턴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나왔을 정도.

3. 평가


'''분명한 것은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 역사상 대통령에 오르지 않은 정치적 인물들 중 가장 중요한 존재일 뿐 아니라, 심지어 수많은 역대 대통령들보다 더욱 크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해밀턴은 건국의 아버지들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여러 역할을 해냈다. 그는 사상가임과 동시에 행동가였고, 재기 넘치는 이론가임과 동시에 수완 좋은 집행자였다. (중략) 제퍼슨이 미국 정치 담론의 정수가 될 만한 시를 썼다면, 해밀턴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경영에 대한 산문을 쓴 인물이다. 다른 그 어떤 건국의 아버지들도 장래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국력에 대해 그토록 명확하고 선지적인 전망을 내놓지 못했으며, 국가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그토록 기발한 메커니즘 역시 제시하지 못했다.'''

전기《알렉산더 해밀턴》서문 중

우선 정치사적으로 해밀턴은 그가 기고한 에세이들이나 문서들이 당대 건국의 아버지들의 사상을 연구하는 주요 자료로 쓰이고 있으며, 현대 헌법 해석 이론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가 구상했던 강력한 중앙정부에 대한 이론은 차후 미 행정부 체계를 만들 때 반영이 되었다. 특히 미국이 주들의 연합체가 아닌 연방정부를 구성하게 된 것은 해밀턴 본인이 강력한 중앙정부에 대한 구상을 하고 이를 지지하는 이들을 모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해밀턴을 인격적으로는 싫어했어도 연방주의안을 지지한 인사들이 있었던 것[14]과 해밀턴의 선언만으로도 연방주의자들이 버가 아닌 제퍼슨을 대통령으로 지지한 점 등 그가 정치적으로나 학술적으로나 상당한 능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한편, 기존 그의 평가는 정치사적인 측면에 많이 집중되어 있지만, 사실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초대 재무부 장관으로서 미국에 시장경제체제를 확립한 인물이라는 점이 있다. 그의 경제사적 업적은 비교적 근래에 재조명되고 있는데, 해밀턴은 독립전쟁 이후 남은 채무를 여러 정파들과의 협상 속에서, 남부의 입김이 닿는 워싱턴 DC를 수도로 하는 대신 중앙은행의 설립과 중앙정부가 진 빚을 각 주가 균등하게 갚게 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펼쳐 미국의 산업을 발전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기반을 닦았다.
이러한 조치는 반연방주의자들에게 소수 부자들과 공업 기반의 북부에게만 유리한 정책이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고, 채무를 탕감하는 과정에서 세수 확보를 위해 연방정부가 위스키에 세금을 매기자 분노한 농민들의 반발로 위스키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15][16],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해밀턴은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였고 초기 미국의 경제 기반을 닦았다. 지금도 미국의 경제사를 다룰 때 해밀턴의 정책은 반드시 언급이 될 정도. 그리고 이런 중상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해밀턴은 상선들을 보호하기 위한 미 해군 창설을 지지했는데, 미영전쟁과 남북전쟁 등을 거치며 성장한 미 해군은 이후 전 세계를 주름잡는 강군으로 거듭난다.
익히 알려진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벤저민 프랭클린, 제임스 매디슨에 비하면 인지도는 떨어지고[17] 미국사를 배울 때도 빨리 넘어가는 감이 있지만, 그가 생전 이룬 업적은 '''훗날 세계 초강대국으로의 미국 성장의 포석'''을 마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사상


비록 독립전쟁에서는 적으로 싸우기는 했으나 해밀턴은 강력한 영국의 국력을 동경했고 그 비결을 강력한 중앙정부의 존재와 귀족과 엘리트로 통치되는 정치체제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해밀턴은 대중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으며 교육받은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 통치되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허나 이 주장은 대중에게 권력을 주어야 한다는 파와 각 주의 자율성을 중시하던 파에게 반발을 샀고, 결국 제임스 매디슨의 조정에 의해 지금의 삼권 분립 체계가 확립된다.
이러한 사상적 차이는 외교 문제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프랑스 혁명이 터지고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에 돌입하자, 해밀턴을 비롯한 연방파는 자코뱅당의 악명 때문에 프랑스 혁명을 폭도들의 반란으로 봐 영국과의 관계개선을 중시한 반면, 제퍼슨을 비롯한 반연방파는 혁명을 미국을 이은 대중민주주의 정권의 탄생으로 봤고 과거 독립운동에 도움을 받은 과거 를 잊으면 안된다는 이유로 프랑스를 지지했다. 일단 조지 워싱턴 당시엔 중립주의 정책을 펼쳤지만 이때도 정파간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고 이는 훗날 미영전쟁의 불씨가 된다.

5. 관련 어록


How does a bastard, orphan, son of a whore and a

Scotsman, dropped in the middle of a forgotten

Spot in the Caribbean by providence, impoverished, in squalor

Grow up to be a hero and a scholar?

'''어떻게 사생아에, 고아에, 창녀와 스코틀랜드 놈 사이에서 태어나'''

'''카리브해 한가운데 잊혀진 섬에 떨어져'''

'''신에게도 버림받아 빈곤과 비참함 속에 자란 아이가'''

'''영웅이자 위인으로 자랄 수 있었을까?'''

뮤지컬 해밀턴의 오프닝 넘버 中

Alexander Hamilton smote the rock of the national resources, and abundant streams of revenue gushed forth. He touched the dead corpse of the public credit, and it sprang upon its feet.

'''알렉산더 해밀턴이 국가자원의 바위를 치니 세입의 물줄기가 콸콸 솟구쳐 나왔다. 그가 공공신용의 시체를 만지자 공공신용이 제발로 벌떡 일어났다.'''

대니얼 웹스터[18]

If Jefferson provided the essential poetry of American political discourse, Hamilton established the prose of American statecraft.

'''제퍼슨이 미국의 정치적 담론을 본질적 운문으로 규정했다면, 해밀턴은 미국의 경영을 산문으로 확립했다.'''

론 처노[19]

When America ceases to remember his greatness, America will no longer be great.

'''미국이 그의 위대함을 망각하는 때에, 미국은 더는 위대한 국가로 남지 못할 것이다.'''

캘빈 쿨리지

Hamilton was not only the greatest administrative genius of his generation in America but one of the great administrators of all time.

'''해밀턴은 당대 미국에서 가장 빼어난 행정 천재였을 뿐 아니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행정가의 일원이었다.'''

레너드 D. 화이트(미국의 역사학자)

A national debt, if it is not excessive, will be to us a national blessing

'''국가 부채란 너무 많지만 않다면 국가적인 은총이다.'''

The voice of the people has been said to be the voice of God; and, however generally this maxim has been quoted and believed, it is not true to fact. The people are turbulent and changing, they seldom judge or determine right.

'''민심은 천심이란 말이 있다. 널리 인용되고 사실로 믿어지는 것과 달리, 이 금언은 사실이 아니다. 인간은 난폭하고 변덕스러워, 올바르게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이 드물다.'''

The sacred rights of mankind are not to be rummaged for among old parchments or musty records. They are written, as with a sunbeam, in the whole volume of human nature, by the hand of the divinity itself; and can never be erased or obscured by mortal power.

'''인류의 신성한 권리는 낡은 문서나 케케묵은 기록을 뒤져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본성의 총체에서 신의 손이 한 가닥 햇살로 써낸 것이다. 이는 인력으로 지우거나 흐려질 수 없다.'''

<농부 반론(The Farmer Refuted)>[20]

In politics, as in religion, it is equally absurd to aim at making proselytes by fire and sword. Heresies in either can rarely be cured by persecution.

'''종교에서도 그렇듯, 정치에서 불과 칼로 전향자를 만들려는 시도는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박해는 이단을 해결할 수 없다.'''

<연방주의자 논고> 1번 중에서

When the sword is once drawn, the passions of men observe no bounds of moderation.

'''한 번 칼을 뽑으면, 인간의 격정은 중용의 경계를 보지 못한다.'''

<연방주의자 논고> 16번 중에서

I never expect to see a perfect work from imperfect man. The result of the deliberations of all collective bodies must necessarily be a compound, as well of the errors and prejudices, as of the good sense and wisdom, of the individuals of whom they are composed.

'''나는 불완전한 인간에게서 완전한 작품이 나오리라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모든 집단이 숙고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오류와 편견, 양식과 지혜, 그리고 이를 자아낸 개인의 혼합물이기 마련이다.'''

<연방주의자 논고> 85번 중에서

Men give me credit for some genius. All the genius I have lies in this; when I have a subject in hand, I study it profoundly. Day and night it is before me. My mind becomes pervaded with it. Then the effort that I have made is what people are pleased to call the fruit of genius. It is the fruit of labor and thought.

'''사람들은 나를 천재라 부른다. 모든 천재에 대한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어떠한 사안을 다루어야 할 때면 이를 깊게 공부한다. 낮이고 밤이고 쉴새 없이. 머릿속이 그 주제로 가득 차는 것이다. 그 다음에야 사람들이 천재성의 결과물이라며 감탄하는 결과물을 내놓는다. 이는 노력과 사고의 결실이다.'''


6. 기타


  • 그의 장남 필립도 결투로 목숨을 잃었다. 그가 죽기 3년 전이었으며, 결투 장소도 해밀턴 본인이 죽은 곳과 같은 장소였다. 장남의 결투 상대자는 아버지를 비난하던 정적이었다. 장남이 죽은 지 약 1년 후에 태어난 그의 막내 자식은 장남의 이름을 따서 필립이라 이름 붙었다.
  • 그의 묘는 뉴욕 월스트리트의 명소인 트리니티 교회에 있다.
  • 몇몇 다른 건국의 아버지들처럼 노예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21]
  • 직접 혁명의 수장이 되기보다는 각자의 건국자를 도와 국가의 기틀을 다졌으며, 그 국가의 운영 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면, 그리고 강력한 중앙정부를 희망했다는 점에서 정도전과 어느정도 비교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다른 점도 있지만, 작품을 통한 재조명이란 점에선 비슷한 부분도 있긴 하다.
  • 10달러 지폐에 그려진 초상화에도 표현되었듯이 당대에서도 인물 하나는 잘 빠졌다고 평가받았다고 한다.[22] 론 처노의 전기에 의하면 호리호리한 체형에 혈색좋고 적갈색 머리카락과 남자색(藍紫色 - violet-blue) 눈동자를 가진, 딱 스코틀랜드인처럼 생긴 외형이었다고 한다. 유년 시절의 그를 기억하던 서인도 제도의 유력자는 책벌레에 유약해보이는 소년으로 회고하기도 했다. 어떤 의미로는 얼굴값을 못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성격이 성격이니까.
  •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는 정치적 업적에 비하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23] 심지어 미국 내에서도 대통령까지 한 정적들이 있어서 '10달러에 나온 사람', '결투하다 죽은 사람'(...)으로만 알던 사람이 많을 정도로 정적들에 비하면 유명한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활약한 분야도 정치, 행정, 경제 관련 분야라서 그런지 과학 관련 교양서적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벤자민 프랭클린과는 인지도가 넘사벽으로 차이가 날 정도.
  • 2015년 그의 일대기를 조명한 해밀턴이라는 힙합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에 올라오며 신드롬을 일으켜, 해밀턴이라는 인물 자체의 재평가를 불러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심지어 뮤지컬 개봉 당시 인지도가 떨어지는 해밀턴은 10달러에서 탈락하고 다른 사람의 초상화를 넣자고 연방정부 차원에서 구체적인 계획이 진행되고 있던 터였는데, 이 뮤지컬이 히트친후에 해당 계획이 전면 백지화 되는일까지 벌어졌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 주인공 보정으로 실존인물처럼 다혈질이고 좀 찌질하긴 하지만 본성은 선인이며 애국자로 묘사되었다. 가끔 교활한 면도 묘사되는데, 특히 정적 애런 버의 시점인 "The Room Where It Happens"에서 부각된다.
  • 미국에선 해밀턴 평전이 책으로 나와있다. 전미비평가협회상(National Book Critics Circle Awards) 수상 후보에 지목되고, 조지워싱턴도서상(George Washington Book Prize)을 수상한 수작. 문제라면 분량이 818쪽(...)에 달해 어마어마한 두께를 자랑한다는 점. 린 마누엘 미란다가 뮤지컬 해밀턴의 영감을 얻은 전기가 바로 이 책. 국내에도 번역, 발매되었는데, 원서가 원서인지라 대단한 두께를 자랑한다.

[1] 출생신고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어느 문서에는 1755년이라고 적혀 있고 어느 문서에는 1757년이라 적혀 있어서 정확한 출생년도는 불명이다(...). 정황 증거는 1757년쪽이 더 많고 본인은 13식민지에 처음 상륙하고 작성한 서류에 1757년이라고 적었다.[2] 다만 후술되어있듯 미국내에서도 엄청 주목받는 인물은 아니었는데, 2015년 뮤지컬 해밀턴이 성공한 이후 재조명받은 케이스.[3] 레이쳇 포셋은 본디 독일 또는 덴마크 상인 요한 미하일 라비엔의 아내였다. 라비엔 사이에서 아들을 낳은 후,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제임스 해밀턴과 네비스 섬으로 다른 살림을 차렸다. 혼외자이자 사생아로 태어난 해밀턴 형제는 이러한 출생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불이익을 받았다.[4] 그런데 제임스 해밀턴이 친부가 아니라는 추측도 있다. 양친을 모두 잃은 뒤엔 어머니의 남자 지인 집에 의탁했는데, 친구 관계로 지낸 그 집 아들과 형제처럼 빼닮았기 때문. 어머니인 레이첼 포세는 강인한 여성이었지만 남자가 은근 많은 마성의 여인이었다나. 어쨌거나 해밀턴은 제임스가 가출한 후에도 꾸준히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며 애정을 표했다. [5] 워싱턴의 새 부관이었던 찰스 리가 워싱턴을 모함하는 사건이 벌어진 와중에 해밀턴의 뛰어난 외국어 실력으로 친분을 쌓은 프랑스 지원군 라파예트 후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6] 해밀턴은 대륙의회 의원 시절 독립전쟁 직후 각 주의 이해관계가 얽혀 군인들이 봉급도 제대로 못받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그래서 군인 시절 상관이었던 워싱턴에게 편지를 보내 군의 불만과 쿠데타 조짐을 알리며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기도 했는데, 이런 일도 그의 중앙집권적 정부 추구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7] 이시기 토머스 제퍼슨과도 독립전쟁으로 인해 생긴 채무를 각 주가 균등하게 짊어지냐(해밀턴) 아님 각 주가 쓴만큼 알아서 자율적으로 해결하냐(제퍼슨) 문제로 다투었다. 결국엔 후술되어있듯 워싱턴을 수도로 하는 대신 채무는 각 주가 균등하게 지는 중립안이 채택되긴 하지만.[8] 나중에 최초의 연방대법원장이 된다.[9] 단순히 헌법을 옹호한 것 뿐만이 아니라 이 헌법을 어떻게 적용하고 이렇게 탄생한 국가의 권한은 어떻게 해야 하고 등의 이론적인 내용도 전부 설명하는 글이다.[10] 부통령 자리에 오르고 의회에서의 탄핵 절차를 고안하는 등 당대 정계에서 거물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해밀턴은 그나마 지폐에라도 나오기라도 해서 이름이라도 들어보기라도 하지 이 인물은 미국 밖에서는 인지도가 거의 없다.[11] 선거인단 투표에서 과반수가 안 나와서 하원으로 넘어갔는데 35번이나 투표를 하고도 결과가 안 나오다가 해밀턴이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제퍼슨 지지로 돌아서서 36번째 투표에서 에런 버가 패하고 제퍼슨이 당선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연방주의자들은 애덤스가 재선에 실패하자(3등) 하원에서 그나마 성향이 가까워보이는 버를 지지했다. 이때 버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연방파든 반 연방파든 가리지 않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철새로도 볼 수 있는 행적을 벌였다.[12] 당시엔 이런 결투가 불법이 아니었다. 물론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판국에 대중의 인식이 좋진 못했고, 주마다 차이도 있어서 결투하려면 불법이 아닌 주에서 벌여야 했지만.[13] 이념적으로나 세력 싸움에서나 가장 양극단에 있던 존재였다. 허나 해밀턴이 죽자 정략적이긴 했지만 대선에서 자기를 지지해주기도 했고, 이런 결투 방식에 화가 나기도 한 제퍼슨은 에런 버를 속된 말로 조진다(...).[14] 당대에는 연방주의자들을 해밀턴의 이름을 따 '''해밀터니안''', 반연방주의자들을 정적인 제퍼슨의 이름을 딴 '''제퍼스니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대통령이 된 제퍼슨만큼이나 해밀턴이 당시 정계에서 중요한 인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15] 미국인들이 문제삼은 것은 세금 자체가 아니라 "대표자 없는 세금", 즉 의회에 대표자도 파견을 못하는데 중앙정부가 일방적으로 세금을 매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영국인들의 정부가 세금을 매기는 것과 미국인들의 정부가 세금을 매기는 것은 취급이 다르기는 하다.[16] 위스키 세금 문제는 폭동을 일으킨 농민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참전 용사 상당수가 전쟁에 끌려다닌 데다 급여도 제대로 나온 것도 아니라서 경제적으로 허덕였다. 이들에게 몇 안되는 수입원이 위스키 판매였는데 위스키에 세금을 물리는 것은 이들의 몇 안되는 생계를 위협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세수는 늘어 중상주의의 기반을 닦지만 많은 농민들이 견디지 못하고 에팔레치아 이서로 이주하면서 원주민과 충돌하게 된다.[17] 10달러 지폐에 나온 사람, 혹은 그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다.[18] 민수기 20장 11절과 열왕기(하) 13장 21절을 차용한 문장이다. 이 말은 재무부 남쪽에 자리한 해밀턴 동상에도 새겨져 있다.[19] 후술할 해밀턴 평전을 지은 전기 작가다.[20] A. W. 파머(Farmer)란 필명의 인물이 대륙회의를 글로 비난하자, 이에 반박하기 위해 발표한 글이다. 파머의 정체는 성직자인 왕당파 새뮤얼 시버리로, 독립 후 미국 성공회의 초대 주교가 된다.[21] 이건 그가 뉴욕 사람인 것도 있다. 당시 미국의 노예제는 지역(주)마다 달랐는데, 뉴욕은 그중 산업에 가까운 주였기 때문에 노예제를 운영하는 다른 주에 비하면 노예의 필요성이 떨어졌다. 노예제를 유지하는데 높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차라리 임금 노동자들이 더 많이 필요했던 것.[22] 요즘도 외모에 대한 평가는 여전한지 가장 섹시한 건국의 아버지를 랭크하면 항상 상위권 안에 든다(...).[23] 심지어 이 위키에서도 애런 버와의 결투나 그의 일생을 다룬 뮤지컬 해밀턴 항목이 훨씬 먼저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