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리오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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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Τιβέριος Γʹ, Tiberios III
라틴어: Tiberius Augustus; d
1. 개요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2.2. 황제 즉위
2.3. 최후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698년 레온티오스 황제를 폐위시키고 황위에 올라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선전했으나 705년 하자르 족과 불가르족의 지원을 받은 유스티니아노스 2세에게 패한 뒤 706년 2월 15일 레온티오스와 함께 참수되었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티베리오스의 전반적인 생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출생지조차 불분명하다. 다만 역사가들은 그가 아마도 팜필리아 출신일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아프시마르, 로마명으로 아프시마로스였고 해군 사령관이었다. 그는 고트족, 즉 동고트족의 후예, 혹은 크림 고트족으로서 '''1400여 년의 로마 제정사를 통틀어서 유일한 게르만계 황제였다.'''

2.2. 황제 즉위


698년, 아프시마로스는 카르타고 탈환을 위한 군사 작전을 지휘했으나 실패하고 크레타 섬으로 퇴각했다. 병사들은 크레타 섬에서 그를 황제로 추대했고, 아프시마로스는 이름을 티베리오스로 바꾼 후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다. 마침 청색당이 옹립한 레온티오스 황제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녹색당은 티베리오스에게 호응해 성문을 열고 그의 군대를 입성시켰다. 이리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고 레온티오스를 체포한 티베리오스는 레온티오스의 코와 혀를 자르고 달마티아의 수도원으로 보냈다.
황제에 즉위한 티베리오스는 북아프리카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 대신, 그는 동생 헤라클리오스를 동방 영토에 주둔한 동로마 제국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헤라클리오스는 탁월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이슬람 군대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아나톨리아의 방어를 강화한 뒤 700년과 701년에 북부 시리아를 급습하여 승리를 거뒀다. 이후 그의 군대는 아르메니아의 영토를 잠시 장악했고, 703년과 704년 이슬람 군대가 킬리키아를 급습해오는 것을 가볍게 물리쳤다.
동생의 활약으로 동방을 안정시킨 티베리오스 3세는 행정 체계를 재정비한 후 키프로스 섬의 부족한 인구를 늘리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있는 칼리파에게 사절단을 보내 포로로 잡힌 키프로스 출신 포로들을 풀어주라고 요청해 승인을 받아낸 뒤 키프로스 출신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또한 그는 키프로스 섬의 방어를 강화함으로서 동부 지중해의 재해권을 확보했다. 또한 티베리오스 3세는 콘스탄티노플의 해상 성벽을 수리해 수도의 방어 상태를 강화했다. 한편 티베리오스는 귀족 바르다네스[1]를 세팔로니아 섬으로 유배보냈다.

2.3. 최후


705년,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케르손에서 탈출해 불가르족과 슬라브족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다. 유스티니아노스는 사흘 동안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에게 성문을 열라고 요구했으나 조롱과 야유만 받을 뿐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자 성벽 아래에 오랫동안 버려진 수도관에 몇몇 병사들과 함께 들어가 황궁으로 잠입했다. 다음날 아침 황궁이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티베리오스는 비티니아로 달아났다.
706년 초, 티베리오스는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파견한 추격병에게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플로 끌려왔다. 그후 706년 2월 15일 자신이 지난날 폐위했던 레온티오스와 함께 원형 경기장을 한바퀴 돌며 시민들의 조롱을 받고 바닥에 엎드린 채 자신의 목이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발에 밟히는 수모를 겪었다. 그후 그는 형장에 끌려가 레온티오스와 함께 처형되었다.
얼마 후, 제국의 명장이었던 헤라클리오스는 티베리오스 3세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부하들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제국의 국방력은 약화되었고 이슬람 세력은 이틈을 타 제국의 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1] 훗날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참수하고 황위에 오르는 필리피코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