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테온(리그 오브 레전드)/배경
1. 장문 배경
전쟁의 성좌, 판테온의 별에서 이름을 딴 아트레우스는 타곤 산의 험준한 산비탈에서 태어났다. 아트레우스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전사의 운명을 타고났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부족 청년 대부분을 따라 라코어 부족의 전사 집단, 라호락의 일원이 되기 위해 훈련했다. 비록 힘이나 기술이 가장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아트레우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투에서 상처를 입고 멍투성이가 되더라도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얼마 후, 자신과 같은 신병이었던 필라스와 치열한 경쟁을 시작했다. 아트레우스는 몇 번이고 돌바닥에 내다 꽂혀도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 지칠 줄 모르는 끈기에 필라스는 감명을 받았고, 함께 훈련하며 고생한 두 사람은 형제처럼 가까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라코어 순찰대가 야만족의 습격을 받아 아트레우스와 필라스만 남기고 모두 전멸하는 일이 벌어졌다. 태양의 성위가 침략자들을 응징하길 거부하자 아트레우스와 필라스는 타곤 산 꼭대기에 올라 성위의 힘을 직접 얻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두 사람의 예상보다 훨씬 험난했다. 필라스는 꼭대기에 오르자마자 숨을 거두었고, 오직 아트레우스만이 하늘이 갈라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신성한 성위를 받아들여 복수를 이룰 힘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라코어로 돌아온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천상의 힘으로 빛나는 창과 방패를 든 그 존재는 전쟁의 성위 '판테온', 그 자체였다. 판테온은 항상 패배만 하던 아트레우스를 쓸모없는 전사로 여기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의 몸을 장악해 버린 것이다. 그 목적은 인간에게 맡기기엔 너무나도 막중한 임무였다. 구석으로 밀려나 버린 아트레우스의 정신은 판테온이 고대의 살아 있는 무기, 다르킨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흐릿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판테온은 타곤 산과 멀지 않은 곳에서 산 정상으로 향하던 다르킨 아트록스와 만나 전투를 벌였다. 둘의 싸움은 하늘을 뒤흔들었고, 땅 위의 군대를 휩쓸었다.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판테온이 아트록스의 검에 맞고 쓰러지자 하늘에서 전쟁의 성좌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판테온이 사라지자 패배자 취급을 받았던 인간, 아트레우스가 다시 깨어났다. 무기에 깃든 성위의 힘이 약해지자 아트레우스는 거친 숨을 내쉬며 아트록스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아트록스는 비웃으며 그가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몇 시간 후, 까마귀들이 내려앉자 아트레우스는 고통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힘겹게 라코어로 되돌아갔다. 전쟁 그 자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만, 평생을 패배밖에 모른 채 살아온 아트레우스의 삶에 대한 의지, 배신당한 분노는 그 죽음마저 물리치기에 충분했다. 아트레우스는 필라스의 집에서 죽은 친구의 아내, 이울라의 간호를 받고 건강을 회복했다. 그리고 자신이 평생 별을 쫓느라 아래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들과 다르게 인간들은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드시' 싸워야 했기에 싸웠고, 끝없는 위협 속에서도 어김없이 다시 일어섰다. 당시 야만족은 이울라의 농장이 있는 라코어의 북부 정착지를 노리고 있었다. 완전히 회복하려면 수개월이 더 필요했지만, 아트레우스는 싸움을 끝내기 위해 망가진 성위의 무기를 쥐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도착했을 때 야만족은 이미 공격받고 있었다. 울부짖는 소리와 지독한 피 냄새 덕분에 아트레우스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을 공격하는 존재는 바로 아트록스였다. 야만족을 타곤 산으로 이끈 것도 아트록스였다는 사실을 아트레우스는 깨달았다. 적인 줄 알았지만, 야만족 역시 라코어 부족과 다를 바 없는 신세였다. 막강한 존재들의 충돌로 인해 피해를 입는 필멸자일 뿐이었다. 아트레우스는 차갑게 분노했다. 그 분노는 서로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자 문제의 근원인 다르킨과 성위를 향하고 있었다. 아트레우스는 야만족과 아트록스 사이에 섰다. 죽은 판테온의 찌그러진 방패와 창을 알아본 아트록스는 코웃음을 쳤다. 성위의 힘이 없는 아트레우스는 전혀 승산이 없어 보였다. 아트록스의 일격에 아트레우스는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자 아트레우스는 자신의 의지만으로 창의 빛을 되살렸다. 그리고 하늘 높이 솟구치더니 아트록스의 검을 쥔 손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아트록스는 검을 놓치며 쓰러졌다. 오직 아트레우스만이 우뚝 선 채 자신과 이름이 같은 별이 하늘에서 빛을 되찾는 모습을 지켜봤다. 가끔 이울라의 농장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아트레우스는 그날의 맹세를 지켰다. 성위, 초월체, 악마, 그 누구든 파괴적인 힘을 다루는 존재와 맞서겠다는 맹세였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판테온이 되어 오직 결사의 의지로부터 힘을 얻는 성위의 무기를 휘두른다. 신성한 판테온이 사라진 지금, 전쟁의 성위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
2. 추락한 자들을 위하여
[image] 네리마제스 유적에 착지했을 때, 나는 천상의 마법 불꽃을 하늘에 새기며 도약한 게 아니라 마치 추락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나는 인간에 불과했으니까. 소용돌이치는 모래 언덕에 선 내 주위에는 타곤 산의 신전에서 먼 길을 떠나온 솔라리의 라호락 전사들이 싸우고 있었다. 나는 비록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했지만, 50명의 병사는 창으로 무장한 채 3주에 걸쳐 사막을 행군해야 했다. 쇠약의 길을 걷고 있던 라호락은 커져 가는 어떤 힘을 조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이들이 숭배하는 태양은 사막을 끝없이 내리쬐었다. 열기가 너무 뜨거운 나머지 과거의 그림자와 고대 제국의 흔적마저도 모래 속으로 녹아내린 듯했다. 건물은 모래 언덕에 파묻혀 있었고, 인간을 하늘로 이끌어 준다고 알려진 태양 원판은 빛을 잃은 채 땅에 떨어져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슈리마 제국이 피고 지었다. 첫 번째 초월체가 탄생한 곳도 바로 네리마제스였다. 위협으로부터 슈리마를 지키기 위해 탄생한 초월체는 제국이 몰락한 후에도 계속 존재했다. 하지만 수 세기 동안의 충돌로 인해 미쳐버렸고, 결국 다르킨이 되어 세상을 초토화하던 중 봉인되었다. 그러나 슈리마의 오만이 탄생시킨 그 괴물들 중 일부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때 금속음이 울려 퍼지더니 투창이 연이어 내 투구를 스치고 지나갔다. 금속음은 점점 커졌고, 곧이어 함성이 들리더니 라호락 전사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투창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날아가던 그때, 강력한 마법의 힘이 투창을 튕겨냄과 동시에 유적을 파괴했다. 흙먼지가 걷히자 초월체가 보였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이었다. 놈은 과거 자신이 다스렸을 제국처럼 불타고 부서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봐 왔던 초월체들과는 달랐다. 몰락한 도시를 장악해 다시 일으키려는 상처 입은 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초월체 역시 한때는 인간이었다. 나는 놈들에게 그 의미를 깨우쳐 줄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숨을 쉬는 그 느낌을 다시 일깨워 줄 것이다. "신성전사다!" 라호락 중 한 명이 말했다. "우린 승산이 없어!" "신도 '죽을' 수 있다는 걸 내가 보여주지!" 난 큰 소리로 대답하며 창을 치켜든 채 초월체를 향해 돌진했다. 창을 빛나게 하는 것은 '그들'의 힘, 바로 신들의 힘이자 별들의 힘이었다. 일그러진 형태의 초월체가 다시 공격하자 나는 안간힘을 써서 그 신비한 마법의 무게를 견뎠다. 라호락의 창과 달리 내 창은 불타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혜성처럼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더니 초월체를 땅에 고꾸라트리고 놈의 마법 공격을 하늘로 쳐냈다. 내 앞에, 초월체의 공격으로 인해 갈라진 틈이 보였다. 그 틈과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라호락 전사가 쓰러진 전우의 시체를 품에 안고 있었다. 마법 공격으로부터 친구를 지키느라 그녀의 팔은 시커멓게 그을어 있었다. "당신은... 성위이시군요." 그녀는 절박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내가 그녀 자신을, 그리고 '친구'를 구할 수 있는 성위라고 대답하길 간절히 애원했다. 난 주변을 둘러봤다. 라호락 전사들의 전열은 그들의 사기만큼이나 무너져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까 초월체의 몸에 찔러 넣었던 투창을, 그녀가 간절히 바라는 마법의 힘으로 다시 손에 가져왔다. 창끝에는 피가 아닌 모래가 묻어 있었다. 초월체의 몸은 마법과 돌로만 이뤄져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 본명을 알려주고 싶었다. 한때 나 역시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힘을 바라던 아트레우스라는 이름의 라호락 전사였다. 하지만 아트레우스는 전우 필라스와 함께 타곤 산 꼭대기에서 죽었다. 판테온과 나 자신의 약점 때문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트레우스와 필라스는 다시 살아날 수 없었다. 신조차도 죽어버린 후, 성좌는 하늘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난 다시 초월체를 향해 몸을 돌렸다. "싸워야 한다." 나는 라호락 전사에게 말했다. "모두 반드시 싸워야 한다." 폐허 도시는 불타올랐고, 초월체의 마법은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나는 녹아서 거울처럼 변해버린 모래 위를 달려갔다. 초월체가 마법을 발사할 때마다 지축이 흔들렸다. 마치 하늘만 남기고 전부 부술 듯한 기세였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닥에 버려진 노포를 발견했다. 라호락 전사들은 방패를 들어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건물 잔해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했다. "싸워라! '반드시 싸워야 한다!'" 난 더욱 크게, 신의 권위가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하늘로 뛰어올라 얼굴 대신 초월체의 몸에 달려 있던 부서진 석판에 창을 휘둘렀다. 놈의 마법 공격을 방패로 막자 몸이 뒤로 밀려났지만, 나는 계속해서 마법이 깃든 창을 찔러 넣었다. 오직 초월체의 분노를 방어할 때에만 방패를 들어 올렸다. 두 발이 모래 속으로 파묻혔다. 안간힘을 써 가며 놈을 막는 동안, 초월체의 마법과 의지는 잔혹성과 분노로 그 위력을 점점 더해 갔다. 내가 방패를 밀어붙이자 마법이 사방으로 튕기며 건물과 하늘, 그리고 움츠리고 있는 라호락 전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나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라호락 전사들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싸워라..." 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알아차린' 것이다. 발밑의 땅은 무너지려 하고 있었고, 내 힘도 한계에 다다랐다. 결국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창에 깃든 마법이 사라지고, 투구가 벗겨지면서 내 얼굴이 드러났다. 기침을 하며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들었지만, 네리마제스에는 오직 한 명의 라호락 전사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연기와 혼돈 속에서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성위가 아닌 내 모습을, 하얀색 입김을 내뿜으며 죽어가던 필라스를 안았던 한 인간을 보았다. 나는 그녀가 알아봤을지 궁금했다. 내 가슴팍에 아로새겨진 별들과 내 운명, 그리고 그 위를 가로지르는 흉터를 말이다. 그녀의 눈은 더 이상 내게 애원하지 않았다. 초월체가 힘을 모으는 동안 그녀의 얼굴에서 빛이 점점 강해졌다. 비록 팔은 엉망이 됐고 친구는 쓰러져 있었지만, 그녀는 방패를 들어 내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그 모습은 마치 죽음처럼 필연적이고 완강했다. 난 거친 숨을 쉬며 물었다. "이름이... 뭐지?" 그녀 얼굴의 빛은 더욱 밝아졌다. "에이소스예요."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초월체를 향해 방패를 들었다. 믿을 수 없이 밝은 빛이 유적을 밝혔다. 어둠만 남기고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기세였다. 에이소스가 서 있었던 곳에는 힘도, 성위도,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내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 흉터는 여전히 느껴졌다.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듯이, 나를 이곳으로 이끈 모든 순간을 상기시켜 주듯이 욱신거렸다. '자신의 승리를 더럽히지 말라던 내 전우 필라스, 둘 다 목숨을 잃을 뻔했던 야만족의 습격, 타곤 산 꼭대기를 향한 목숨을 건 등반, 나를 죽이고 또 되살렸던 다르킨의 검, 산에 나 있던 천상의 밀, 그리고 쟁기를 내려놓고 창을 집어 들던 흙 묻은 내 손까지...' 죽을 줄 알면서도 방패를 집어 든 그녀가 아니었다면 모두 사라졌을 기억이었다. 그녀의 힘과 희생은 별들보다도, 나와 나를 지켜준 성위의 무기보다도 훨씬 위대했다. 그녀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나는 몸을 일으키려고 애썼다. 그때 몸을 숨기고 있던 라호락 전사들이 유적 중앙의 태양 원판 받침대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일어섰다. 나 역시 신이 아닌, 한 사람의 전사로서 그들과 함께 일어섰다. 나의 신들, 쓰러진 전사들이 다시 내게 준 기회였다. 싸움의 명분, 사랑의 대상, 진정한 자아를 결정할 중요한 순간에 놓인, 태어나고 죽은 모든 이가 바로 내 신들이었다. 이러한 용기 앞에서 신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에이소스!" 나는 소리쳤다.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에이소스!" 돌무더기 위에 서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라호락 전사들이 복창했다. 초월체는 다시 마법 공격을 준비했다. 비록 난 만신창이가 됐고 신마저 죽었지만, 내 창의 힘과 투구의 깃털 장식이 다시 불타올랐다. 내게 전투를 시작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라호락 전사들이 다시 한번 투창을 던졌다. 그 순간, 전쟁의 성좌와 함께 사라졌던 별 하나가 태양보다 밝게 빛났다. 그 별의 이름은 에이소스였다. |
3. 타곤의 창
[image] 무장 호송대를 홀로 기다리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실루엣은 햇빛에 반사되어 아른거렸다. 몸에 걸친 무거운 망토와 투구에 꽂은 길쭉한 깃털 장식은 뜨겁고 메마른 사막의 바람 속에서 휘날렸다. 그의 옆에는 거대한 창이 들려 있었다. 호송대는 총 3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부분은 용병으로서 호전적이고 거친 성격에 쇠사슬 갑옷, 가죽, 쇠줄로 만든 복장을 하고 석궁과 미늘창, 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짐을 잔뜩 실은 노새를 끌고 모랫길을 걸어가다 가만히 서서 미동도 하지 않는 전사를 발견하자 멈춰서서 온갖 욕설과 거친 농담을 쏟아 냈다. 검은 복장을 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자신의 흑마를 멈춰 세우며 얼굴을 찌푸렸다. 다른 이들은 머나먼 타지 출신이었지만, 그는 이곳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곳과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산악 부족인 라코어인들에 의해 양육되었지만, 그들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이곳에 다시 찾아온 이유는 예언자의 신전에 있는 보물을 찾아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라코어인들이 싸움에 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능력을 존경했지만, 상대가 한 명이라면 제아무리 라호락이라 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위 꼭대기에 올라선 인물은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당신들은 살기를 품고 이곳에 왔군. 난 이 산에 속하는 자다.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기꺼이 처치해 주마. 선택은 당신들 몫이다." 전사가 강철처럼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병들은 히죽히죽 웃으며 전사를 조롱했다. "정신이 나간 놈이군. 비켜서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의 시체를 밟고 지나가 주마." 용병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자넨 고향에서 멀리 나와 있다네. 우린 우리대로 알아서 산으로 향할 테니 상관하지 말게. 굳이 여기서 피를 흘릴 필요는 없잖은가." 호송대 우두머리가 말했다. 라코어 전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린 그저 갈 길이 먼 순례자들에 불과하다네. 그리고 이젠 돌아갈 수도 없어. 우릴 싣고 온 배가 이미 떠나 버렸으니까. 자, 보게나." 우두머리의 손가락이 뒤를 가리켰다. 호송대 뒤쪽으로 약 1킬로 떨어진 곳에서 바닷물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불빛에 비쳐 용 비늘처럼 반짝였다. 그곳엔 세 척의 배가 돛을 펴고 북쪽 고향으로 머나먼 항해 길에 나선 모습이 보였다. "장담하건대 우린 악의를 가지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네. 우린 지혜를 찾기 위해 온 것뿐이야." "한 입으로 두말을 하는 뱀의 혀를 가지고 있군. 당신이 예언자의 피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이곳이 당신의 무덤이 될 거야. 이 산이 당신을 낳았고 이제 그 그림자가 당신을 거둬들일 때야." 우두머리는 더욱 심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뒤돌아서며 어리석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지. 처치해." 순간 용병들이 어깨 위로 석궁을 들어 올려 발사 자세를 취했고, 곧 공기를 가르는 화살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라코어 전사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화살은 전사의 육중한 원형 방패에 부딪혀 땅으로 떨궈졌다. 그리고 전사는 앞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서두르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햇빛을 등진 그는 적에게 창끝을 겨눈 채 단호한 걸음걸이로 나아갔다. 다시 한번 화살 세례가 퍼부어졌지만, 이번에도 그의 방패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고함을 치던 용병 중 한 명이 전사의 목을 향해 날카로운 시미터를 겨누며 돌진했다. 하지만 곧 전사의 창에 가로막혀 쓰러지고 말았다. 뒤이어 두 명의 용병이 다시 덤벼들었지만 처음에 쓰러진 용병처럼 순식간에 쓰러졌다. "놈을 쓰러뜨려라!" 우두머리가 허리춤에서 정교하게 맞춤 제작된 권총을 꺼내 들며 소리쳤다. 태양 위로 구름이 지나가자 전사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갑옷은 천상을 형상화하고 있었고, 푸른 밤하늘 색을 한 망토 위에는 마치 별들이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투구의 틈 사이로 보이는 그의 단호한 눈빛 속에서도 별들이 반짝였다. 순간 그의 갑옷과 창끝이 신성한 힘으로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우두머리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신성한 힘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지만 그는 이를 단순히 신화나 전설쯤으로 치부했었다. 전사는 마치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게, 효율적으로, 무섭게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은 도저히 인간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용병들이 차례로 쓰러지며 사막이 붉게 물들었다. 전사를 공격할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전투 내내 힘들이지 않고 움직이며 거침없이 우두머리에게 다가갔다. 용병들은 하나둘씩 쓰러졌다. 살아남은 자들은 도저히 멈출 수 없는 이 적을 뒤로하고 도망갔다. 우두머리는 권총을 전사에게 겨누고 발사했다. 믿을 수 없게도 전사는 몸을 살짝 기울여 총탄을 피했다. 빗겨 난 총탄은 투구 옆을 살짝 스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우두머리는 욕을 하며 다시 한번 총을 장전했지만 속도가 너무 느렸다. 전사의 방패가 우두머리의 가슴에 정확히 명중했고, 그는 안장에서 내동댕이쳐졌다. 쿵 하고 땅에 떨어지며 얼굴을 찡그리는 사이 다가온 전사는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발로 몸을 눌렀다. 전사의 얼굴을 쳐다본 우두머리는 아연실색했다. 아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라코어인들과 함께 살던 시절의 기억을 더듬자 그 전사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트레우스, 자네인가?" 라코어 전사는 우두머리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트레우스는 없다. 난 이제부터 영원히 판테온이다." 죽어 가는 우두머리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이내 그의 움직임이 멈추자 판테온은 창을 거둔 후 뒤돌아섰다. 황혼이 지나 어둠이 찾아오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며 밤하늘을 수놓았다. 곧 불타는 혜성 하나가 저 멀리 산등성이 뒤로 떨어졌다. 동쪽으로 백여 킬로 떨어진 곳이었다. "때가 됐군." 판테온이 눈을 가늘게 뜨며 어둠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리고 타곤 산으로 돌아가는 긴 여정을 떠났다. |
4. 구 배경
“진정한 전사를 데려오든지, 네놈 같은 자들을 백 명은 더 데려와라. 세상 마지막까지 전설로 남을 전투를 벌여보자.” 천하제일의 전사 판테온은 거의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전투의 화신이다. 타곤 산 자락에서 살아가는 호전적인 부족 라코어 출신인 그는, 위험천만한 타곤 산봉우리에 오름으로써 전쟁의 성위에게 선택받아 그 현신이 되었다. 언제나 쉬지 않고 타곤 산의 적을 쫓는 판테온의 강함은 인간을 아득히 초월해, 가는 곳마다 남는 것은 시체뿐이다. 아트레우스는 긍지 높은 라코어의 젊은이로, 그의 이름은 밤하늘을 수놓는 전사 별자리의 네 별 중 하나를 따서 지은 것이었다. 라코어 사람들은 이 별자리를 판테온이라 불렀다. 아트레우스는 비록 타곤 산에서 제일 날쌔거나 힘센 전사도 아니고 활이나 창, 검을 가장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대쪽 같은 투지는 대단했고 끈기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매일 해가 뜨기 전, 모두 잠들어 있을 시각에 아트레우스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타곤 산의 위험천만한 산길을 달렸고 밤에는 가장 늦게 훈련을 마쳤다. 그의 양팔은 검술 연습으로 잘 단련되어 있었다. 그런 아트레우스에게는 숙명의 라이벌이 있었다. 같은 라코어인인 그 청년의 이름은 필라스로, 이름 높은 전사 집안의 피를 물려받은 자였다. 필라스는 힘과 재주를 모두 갖추고 있었고 인기 또한 많았다. 누구든 그가 위대한 전사가 될 것이라 믿었고 동년배 중에 그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었다. 하지만 아트레우스만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맞아 쓰러지고 피와 멍으로 온몸이 물들어도 그는 계속해서 일어섰다. 그 끈기에 머리 희끗희끗한 교관들은 감탄했지만 필라스는 아트레우스의 끝없는 저항으로 자부심에 상처를 입었고 그를 끝내 증오하게 되었다. 아트레우스는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고 필라스와 그 패거리에게 계속 맞았지만 그 철저한 끈기로 버텨냈다. 따돌림이 점점 심해졌지만 가족이 알면 슬퍼할까 봐 비밀에 부쳤다. 그러던 어느 초겨울 날 순찰을 위해 마을을 벗어나 행진하던 젊은 전사와 교관 무리가 잿더미가 된 라코어 전초 기지를 발견했다. 흰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여기저기 시신이 흩어져 있었다. 순찰대는 급히 퇴각하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적은 이미 코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털가죽 옷과 육중한 철갑을 두른 이민족들이 눈 속에서 튀어나오더니 얼어붙은 도끼날을 휘둘렀다. 순찰대에는 훈련을 채 끝내지 못한 풋내기 전사와 전성기는 오래 전에 끝난 늙은 교관뿐이었지만, 잃은 목숨의 몇 배나 되는 적을 베었다. 하지만 적은 수적으로 우세했고 라코어 전사가 하나씩 쓰러져갔다. 마지막까지 남은 필라스와 아트레우스는 서로 등을 맞대고 싸웠다. 전투는 곧 끝날 것이었지만, 마을에 이 일을 알려야만 했다. 아트레우스와 필라스는 필사적으로 창을 휘둘러 이민족들의 무리에 잠깐의 틈을 열었다. 아트레우스는 필라스에게 가라고 외쳤다. 도망칠 수 있게 지켜주겠다고 맹세했다. 말씨름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아트레우스는 적을 향해 돌진했고 필라스는 질주했다. 아트레우스는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가슴에 일격이 적중하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저승이 아니었다. 그는 조금 전 쓰러졌던 곳에 누워있었다. 주변 봉우리 뒤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고 갓 내린 눈이 그를 덮고 있었다. 멍한 상태로 아트레우스는 가까스로 일어섰다. 쓰러진 라코어 전사들 사이로 걸어갔지만 살아남은 자는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 필라스도 쓰러져 있었다. 도끼에 당한 상태였다. 마을에 소식을 알리지 못한 것이다. 아트레우스는 절뚝거리며 기어가다시피 필라스에게 다가갔다. 한 때의 라이벌은 살아있었지만 만신창이었다. 그는 필라스를 어깨에 들쳐 메고 집으로 먼 발걸음을 옮겼다. 3일 후 마을 끝자락이 보이자 아트레우스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자신을 살펴보는 필라스의 얼굴이었다. 상처는 이미 치료받은 듯했다. 마을이 무사하다는 걸 알고 안도했지만 왜 라코어나 솔라리 장로들이 라호락을 보내 침략자를 찾아 격퇴하지 않는지, 어째서 마을에 머무르며 지킬 궁리만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몇 달 후 아트레우스와 필라스는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예전의 악감정은 모두 잊은 채, 두 사람은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활기차게 훈련에 임했다. 그러나 한편 아트레우스의 마음속에는 솔라리에 대한 분노가 자라고 있었다. 라코어 부족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적이 될만한 자들을 먼저 찾아내 부수어 버리는 것뿐이라 믿었지만 솔라리 전사의 새 지도자이자 한 때 같은 부족 사람이었던 레오나는 다른 방법으로 부족을 보호해야 한다 역설했다. 아트레우스의 눈에 레오나의 방식은 나약하고 소심하기 짝이 없었다. 여느 라코어 젊은이가 그러했듯, 아트레우스와 필라스도 타곤 산 정상에 올라 위대한 힘을 얻었다는 영웅의 신화를 들으며 자랐다. 두 사람은 라코어 전사가 되려면 거쳐야 하는 고된 의식을 함께 통과하곤 산을 오르기 위해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했다. 아트레우스는 라코어의 적을 직접 찾아 쳐부술 힘을 원했다. 솔라리가 나서지 않으니 스스로 나서려 했다. 오직 가장 강한 자만이 감히 산을 오르고자 했고 그중 천에 한 명도 안 되는 소수만이 정상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아트레우스와 필라스는 타곤 산기슭 곳곳에 흩어진 라코어 마을에서 모인 여러 전사와 함께 등정을 시작했다. 출발하자마자 태양이 검게 물들더니 은빛 달이 태양 앞을 가리고 지나갔다. 불길한 징조라고 두려워하는 이도 있었지만 아트레우스에게는 솔라리에 대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자신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징조로 보였다. 몇 주 후, 인원은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포기한 자도 있고 빙하의 틈으로 떨어졌거나 산사태에 묻혔거나 밤새 얼어 죽어 산에 목숨을 빼앗긴 자도 있었다. 이제 구름은 발밑에 있었고 하늘에는 알 수 없는 불빛과 환영이 흘렀다. 그래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몇 주가 몇 달이 되고 산소는 점점 희박해졌고 추위는 더욱 맹렬해졌다. 잠시 숨을 고르려 멈췄다가 얼어붙어 다시는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사람도 있었다. 산소 부족과 체력 고갈로 미쳐버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는 이도 있었다. 하나씩, 산은 자신을 정복하려는 이들을 굴복시켰고 결국엔 필라스와 아트레우스만 남았다. 신화 속의 도시도,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천상계의 영웅도 없었다. 그저 얼음과 죽음, 기이한 원을 그리고 있는 바위만 널브러져 있을 뿐. 마지막 남은 힘까지 동난 필라스가 주저앉았다. 아트레우스는 분노의 괴성을 질렀다. 필라스에겐 하산할 체력이 없다는 걸 알고 아트레우스는 옆에 앉았다.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아트레우스는 친구가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순간, 하늘이 열렸다. 공기가 파도치듯 일렁이고 아트레우스의 눈앞에서 문이 열리더니 황금빛이 쏟아져 나오며 얼굴을 따스하게 적셨다. 장막 너머로 비치는 도시는 웅장했고 꿈속에서조차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누군가가 아트레우스를 기다리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경외감에 찬 눈물이 아트레우스의 뺨을 타고 흘렀다. 친구를 버리고 갈 순 없었다. 하지만 내려다보니 필라스는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띠고 이미 그의 품속에서 숨을 거둔 후였다. 아트레우스는 일어서서 친구의 눈을 감겨주곤 녹아내리는 눈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그리곤 손을 내민 자를 향해, 현실의 장막을 넘어 진짜 타곤으로 걸어갔다. 그 후로 수개월이 흘렀다. 산기슭 마을 사람들은 아트레우스든 필라스든 산에 올랐던 이들이 모두 죽었다고 믿었다. 애통했지만 늘 있는 일이고 예상했던 일이었다. 산 정상에서 누군가가 힘을 얻어 돌아오는 건 수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다. 그즈음, 북쪽 야만족 무리가 별안간 타곤 산에 모습을 드러냈다. 라코어 족의 전초 기지와 아트레우스의 동료들을 무참히 도륙했던 녀석들이 거의 1년 만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야만족은 고립된 마을을 여럿 습격해 살육과 약탈을 벌이더니 산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솔라리 성지로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성지의 수호대는 수적으론 크게 뒤처졌지만 목숨을 걸고 유물과 사제를 지키리라 맹세했다. 적의 습격대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날카로운 바람이 맹렬하게 눈보라를 일으키며 불어 내려왔다. 소용돌이치던 구름이 쪼개지더니 폭풍의 중심에 선 타곤 산의 위용이 완전히 드러났다. 라코어와 야만족의 전사 모두 눈을 가리며 몸을 가누려 애쓰는 사이, 산 정상 하늘에선 도시의 형상이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판테온 별자리의 네 별이 빛을 뿜어내더니 어두워졌다. 그와 동시에 천상의 도시에서 타오르는 별똥별이 궤적을 그리며 땅을 향해 떨어졌다. 별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굉장한 속도로 신전으로 향했다. 야만족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교도의 신에게 빌었다. 빛줄기는 굉음을 내며 야만족과 라코어인들 사이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건 별이 아니었다. 빛줄기가 충돌한 자리에는 별빛에 휘감긴 전사가 전설의 황금 방패와 창을 들고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숙인 그 전사는 고개를 들어 신성한 타곤 산의 땅을 더럽히는 적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이 라코어 족에겐 낯익었다. 바로 아트레우스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가 달랐다. 아트레우스의 몸엔 전사의 성위가 깃들어 있었고, 이제 그는 필멸자인 동시에 불멸자였다. 아트레우스는 곧 전투의 화신이자 판테온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두 눈에는 천상의 빛이 불타올랐다. 적은 죽음이 코앞에 있음을 느꼈다.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판테온에 맞설 수 있는 자는 없었고 적은 모두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판테온의 갑옷과 무기는 전투의 흔적 하나 없이 별빛으로 반짝였다. 적을 물리친 판테온은 몰아치는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아트레우스의 가족은 슬픔 속에 장례를 치렀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번에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판테온의 성위에는 아트레우스의 인격이나 기억, 감정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육신은 전쟁의 성위를 담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아트레우스의 영혼은 이미 조상들과 함께 저승에 있었다. 판테온이 룬테라에 출현한 건 처음은 아니었다. 아트레우스 같은 이는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으리라. 지상에 현신한 판테온은 빌린 인간의 육신에 갇혀 불멸은 누릴 수 없고, 쉽진 않겠지만 죽을 수도 있다. 가장 최근에 판테온이 나타난 건 언제인가를 두고 솔라리의 장로들은 열띤 토론을 벌인다. 판테온의 출현은 암흑기의 전조일 때도 있으니 축복인 동시에 저주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