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선반점 일가족 학살 사건
[image]
사건의 배경이 된 팔선반점 식당.
1. 개요
1985년 포르투갈령 마카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한 요리사가 자신과 얽힌 사람과 그의 가족들을 몰래 살해하고 식당(사업체)까지 차지한 사건인데, 범인의 직업과 불분명한 시신 행방 때문에 '''인육 요리를 팔았다는 도시전설'''이 돌았던 사건이다. 해당 식당에서 만두를 주로 팔았던 탓에 도시전설이 돌 당시 마카오에서 만두 판매량이 급감하기까지 했을 정도.
2. 사건의 전개
1985년 8월 8일 마카오 해안가에서 수영을 하던 사람들이 절단된 사람의 팔다리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였다. 경찰은 오른발 네 개, 왼발 두 개, 손 두 개로 총 8개의 토막을 건져내었다. 이후 연달아서 토막 3개가 더 발견되었다. 경찰은 처음에 밀항을 시도하다 상어에게 잡혀먹힌 사람의 시체로 생각했으나, 절단면이 칼로 자른 듯이 매끈하고 지문이 고의적으로 훼손된 듯 보인다는 점에서 살인사건으로 판단, 수사에 착수했다. 전담 수사팀을 조직하고 중국 본토의 법의학자까지 초빙했으나 이미 시신은 바다에 버려진 지 수일이 지나 썩어 문드러져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지지부진하던 수사는 1986년 4월 팔선반점의 식당 주인인 정린(鄭林, 광동어로 '''쳉람''')의 동생이 경찰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낸 후 탄력이 붙었다. 편지 내용은 자신의 형 내외가 실종되었고 식당은 황즈헝(黃志恆, 광동어로 '''웡치항''')이라는 요리사가 차지하였다는 것, 그리고 85년에 발견된 시신 토막과 어떠한 연관점이 있을지도 몰라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경찰 수사 결과 실제로 85년에 건져냈던 토막들 중 여성의 잘린 손의 지문과 팔선반점에서 실종된 여성(정씨의 처인 천씨의 이모)의 지문이 흡사함을 인지하고는 집중적으로 사건을 파해쳐 황씨를 체포했다.
팔선반점에서 실종된 사람은 총 10명으로 정린, 천, 딸 4명과 아들 1명, 천의 어머니와 이모, 당시 팔선반점 주방장이기도 했던 정의 사촌형이었다.
1986년 10월 황씨는 정식으로 기소되었고 재판을 받다가 자살을 기도해 잠시 재판이 중단되었다. 황씨는 이후 동년 12월 법원 판결을 앞두고 다시 한번 자살을 기도했는데, 이번에는 성공하여 법을 피해 죽음으로 영원히 도피하고 말았다.
사건 종결 후 1989년 2월 20일 마카오 타이파(氹仔)섬의 한 청소부가 쓰레기더미에서 죽은 지 오래 된 사람 해골을 다량 발견했다. 경찰은 수사한 뒤 팔선반점 사건 피해자들의 남은 유해라고 결론지었다. 그 후로 더 이상 사체가 발견되지 않았다.
3. 피의자 황즈헝
황즈헝(黃志恆)은 본래 중국 본토 출신으로, 1970년대에 일거리를 찾아 영국령 홍콩으로 건너간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홍콩에서 천슈량이라는 가명으로 일을 했지만, 중간에 범죄를 저질러 홍콩에서 5년간 교도소에 복역한 적이 있었다. 사기도박에 재능이 있던 황씨는 다른 사람들과 마작을 했다 하면 항상 이겼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와 마작을 한 사람들은 상당한 돈을 잃었다. 개중에는 그에게 빚까지 진 리허(李和)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1973년 황씨는 이 사람과 싸우다 리씨와 그의 처, 처형까지 세 명을 묶은 후 리씨를 죽이고 LPG 통에 불을 질러 방화를 저질렀다. 다행히 리의 처와 처형은 도망쳐 나오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 이들의 진술로 황씨의 홍콩에서 악행이 드러났다. 팔선반점 사건 당시에도 황씨 본인은 몰랐겠지만 그는 이미 홍콩에서 살인죄로 수배 중이었다.
살인자가 된 황씨는 법의 추적을 피해 홍콩을 떠나 고향인 중국 본토로 돌아가, 광저우에서 몇 년 동안 칩거했는데, 이 시기에 집주인의 딸과 눈이 맞은 듯하다.[1] 그러나 집주인이 결혼에 반대하자 황씨와 집주인의 딸은 포르투갈령 마카오로 도주했다. 도주하기 전 황씨는 자신의 지문을 스스로 불로 지져 없애 홍콩에서 저지른 살인에 대해 증거인멸을 꾀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마카오에 가서도 황씨는 사기도박판을 벌였다. 그러다가 도박 중독자 정린과 그의 처 천씨와 같은 도박장에서 만난 인연으로 아는 사이가 되었다. 1984년 이 둘은 서로 거금을 걸고 도박하다 황씨가 기술을 써서 이겼다. 이 과정에서 정씨는 황씨에게 18만 8천파타카를 빚졌다. 이 돈을 당장 갚을 여력이 없던 정과 천은 1년 내에 빚을 갚지 못하면 자신이 운영하는 팔선반점의 경영권을 황에게 넘기기로 서약하고 황씨도 동의했다. 그러나 추후에 경찰에 황씨가 진술한 바에 따르면 정씨는 빚을 갚을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 뒤로도 1년간 황씨와 여러 번 도박을 했지만 매번 지는 바람에 빚이 60만 파타카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결국 1985년 8월 4일 밤, 황씨는 식당 영업을 마치고 셔터를 내린 정씨에게 찾아가 당장 3만 파타카라도 내놓으라고 채근했지만, 정씨는 돈도, 식당의 경영권도 내놓지 않겠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분노하여 황씨는 옆에 있던 맥주병을 깨뜨려 만든 흉기로 정씨 일가를 협박하고 마침 가까이에 있던 정씨의 아들을 인질로 잡았다. 황씨는 정씨 일가에게 서로를 묶고 재갈을 물리도록 지시했지만, 잠시 방심한 사이 천씨가 비명을 질러대며 아들을 데리고 도망치려고 하는 바람에 천씨의 목을 맥주병 파편으로 찔러 살해했다.
이후 황은 정씨와 그의 아들, 딸 넷을 포함한 일가족을 살해하고, 식당에 찾아온 정씨와 천씨의 친척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사체를 8시간에 거쳐 토막 내고, 업소용 쓰레기를 담는 두꺼운 검정 비닐봉지에 이중으로 넣어 하나씩 쓰레기통에 유기했다. 쓰레기차가 쓰레기를 실어나가면서 일단 증거인멸에도 성공한 듯 보였다. 이후 수개월간 황씨는 팔선반점의 새 주인으로 행세하며 식당을 경영하였는데, 손님들도 대부분 정씨가 황씨에게 빚을 갚지 못하면 식당을 넘기겠다고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황씨가 정씨 일가는 고향 마을로 내려갔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았다. 황씨는 이후 정씨의 원래 집을 세놓고 집세도 받기 시작했다.
경찰의 수사가 좁혀오자 황씨는 1986년 9월 28일 오후, 음식점의 문을 평소보다 일찍 닫고 중국 본토로 도주를 시도했으나 도주 직전 경찰에 검거되었다. 10월 2일 황씨는 기소되어 미결수 신분으로 교도소에 들어갔다. 교도소 수감 이틀째인 3일 그는 재소자들에게 집단으로 구타를 당해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입원 기간을 연장해달라고 요구했으나 4일 새벽 치료가 끝나자마자 교도소에 다시 수감되었다.
그러자 황씨는 10월 4일 오전 교도소 내의 금속제 쓰레기통의 테두리를 날카롭게 갈아 왼쪽 손목의 동맥을 끊는 방식으로 자살을 기도했으나 다른 수감자가 발견해 신고, 병원으로 이송되어 5시간 동안 수술을 받았다. 이후 동년 12월 황씨는 마지막으로 가족을 접견했다. 아내를 만났을 때는 서로 울었으나 같이 살던 장남을 만났을 때는 서로 엄숙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12월 4일 새벽, 황씨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이불 수 겹을 위아래로 덮고, 기존에 베려 한 왼쪽 손목의 동맥을 음료수 캔의 뚜껑으로 후벼파 자살했다. 아침 8시에 간수가 이미 숨이 끊어진 황씨를 발견했는데, 시신 주변에서는 천식약과 포르노 잡지 여러 권, 그리고 유서가 나왔다. 황씨는 유서에서 '법망을 피하려 한 것이 아니다. 천식이 괴로워 빨리 편해지고 싶었을 뿐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4. 대중매체에서
- 위 사건은 후에 영화화되었다. 팔선반점의 인육만두 참조.
- 2005년에 지금은 없어진 홍콩의 지상파 방송국 aTV의 '위험인물(危險人物)'에서도 이 사건을 재연하였다.
5. 기타
2018년, 태국에서 이 사건과 매우 흡사한 사건이 발생하여 화제가 되었다. # 그러나 오보인 만큼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1] 그 전에도 홍콩에서 얻은 전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고, 체포 당시에도 당시 20대인 장남과 함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