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1. 개요
서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암살하고 재위에 올랐으나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가 로마를 침공하자 도망치던 중 성난 군중들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페트로니우스는 대략 396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할아버지는 섹스투스 클라우디우스 프로부스로, 364년 일리리쿰의 총독이었고 366년 갈리아의 총독이었으며 368년에서 375년까지 이탈리아의 방위 담당자였고 371년에 집정관을 맡은 거물이었다. 페트로니우스는 411년에 치안관을 맡았고 415년경엔 군사 호민관이 되었으며, 416년에서 419년 사이에 왕실의 재정을 관장하는 직책을 맡았다. 이후 421년에서 439년 사이에 군사 방면의 여러 직책을 맡았고 433년에 집정관에 임명되었으며, 439년 8월부터 441년 2월까지 이탈리아 대관구의 총독을 맡았다. 443년 두 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된 페트로니우스는 445년에 귀족 칭호를 받았고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에 버금가는 서로마 제국의 권력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443년에서 445년 사이에 로마의 카에리우스 언덕에 포룸을 건설했다.
2.2. 황제 즉위
안티옥의 역사가 요한에 따르면, 페트로니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뜻을 받들어 아에티우스 암살에 가담했다고 한다. 그런데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자신에게 협조한 그를 배신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막시무스의 정숙하고 아름다운 아내인 루시나에게 연정을 품고 그녀에게 접근했다고 한다. 하지만 루시나가 번번이 거절하자,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계략을 꾸몄다. 6세기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황제의 계략은 다음과 같았다. 어느 날 막시무스는 황제와 내기를 했다가 패하자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반지를 내놓았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바로 이 반지로 인장을 찍은 소환장을 루시나에게 보냈다. 루시나는 남편의 반지로 찍힌 인장을 보고 남편이 부른 줄 알고 황궁으로 향했다가 황제에게 강간당했다. 반면에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황후 에우독시아의 명의로 루시나를 불렀고, 황후의 명에 따라 황궁에 왔던 루시나는 황제에게 강간당했다고 한다.
루시나는 남편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여기고 페트로니우스를 저주했다. 이에 페트로니우스는 분노했고 황제를 암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에티우스의 부하였다가 아에티우스가 살해된 후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호위병으로 복무하고 있던 옵틸리아와 트라우스틸라를 음모에 가담시켰다. 455년 3월 16일,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말을 타고 로마를 나와 마르티우스 들판으로 가서 사냥 연습을 하는 동시에 운동 선수들이 연습하는 것을 구경했다. 이때 옵틸리아와 트라우스틸라가 튀어나와 뒤에서 그를 덮쳐 검으로 베었다. 두 병사는 황제의 관과 가운을 가져다가 페트로니우스에게 바쳤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명확한 황위 계승자를 두지 못한 채 죽었기 때문에 후임 황제로 누구를 지명할 지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이집트 상인의 아들이자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측근이었던 막시미아누스, 후에 황제가 되는 마요리아누스, 그리고 페트로니우스가 황제 후보로서 경합을 벌였다. 이때 페르토니우스는 원로원, 황궁 관리, 그리고 군대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침으로써 지지를 확보하고 455년 3월 17일 황위에 올랐다.
페트로니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미망인인 에우독시아 황후와 즉시 결혼해 자신의 정당성을 공인받았다. 또한 페트로니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암살한 자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삼았고 에우독시아의 딸이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의 아들 후네릭과 약혼했던 걸 취소시키며 자신의 친아들과 결혼시켰다. 가이세리크는 이에 격분해 로마를 침공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한편, 당대의 또다른 사료에 따르면, 에우독시아 황후는 페트로니우스가 자신의 전 남편을 암살했다고 의심했고 페트로니우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가이세리크에게 구원을 호소했다고 한다. 가이세리크가 자신의 아들의 약혼이 거절된 것에 격분했는지, 아니면 에우독시아 황후가 구원 요청을 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가이세리크가 모종의 이유로 로마를 침공하기로 결심한 건 분명하다.
2.3. 최후
페트로니우스가 황위에 오른 지 2달 후인 455년 5월, 가이세리크가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다. 로마는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고 많은 주민들이 달아났다. 페트로니우스는 방어전을 펼쳐봐야 소용없다고 여기고 원로원에게 자신과 동행할 것을 촉구하면서 탈출 계획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의 경비병들과 수행원들은 죄다 도망쳐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455년 5월 31일, 페트로니우스는 홀로 도시를 떠나려고 바삐 움직였다. 이때 성난 군중들이 그를 발견하고 돌을 마구 던져댔고, 결국 페트로니우스는 돌에 맞아 죽었다. 그의 시신은 훼손되어 테베레 강에 던져졌다. 이때 그의 재위는 불과 74일이었다. 그의 아들이었던 팔라디우스 역시 이때 처형되었을 것이다.
페트로니우스가 비참하게 죽은 직후 로마에 도착한 가이세리크는 교황 레오 1세의 요청을 수락하고 2주 동안 로마를 약탈하면서도 건물에 불을 지르거나 사람들을 고문하거나 살해하는 걸 자제했다. 가이세리크는 에우독시아 황후와 두 딸을 비롯한 많은 시민들을 포로로 끌고 가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이후 에우독시아 황후는 가이세리크의 왕궁에서 7년을 지내다 동로마 황제 레오 1세의 노력으로 콘스탄티노플에 다시 돌아와 고향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