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코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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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레이아의 프로코피우스(Procopius of Caesarea, Προκόπιος ο Καισαρεύς, AD.500? ~ AD.554?)
동로마 제국 초기의 그리스인 학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전쟁에서 활약한 명장 벨리사리우스의 원정에 참가하면서, 『전사』,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건축물』 등을 집필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하면서도 악명 높은 그의 저서 『비사』는 6세기 동로마 제국의 역사 사료이다.
그 자신의 저작과는 별도로, 프로코피우스의 생애를 추적할 수 있는 주요 출처로는 975년 이후에 집필된 것으로 추측되는 로마 백과사전 『수다』(Suda)를 들 수 있다. 수다에 따르면, 프로코피우스는 동로마 팔레스티나 지방의 카이사레이아 출신이었다. 그는 아마도 가자의 유명한 학교에서 그리스 고전과 수사학 등 전통적인 엘리트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베레투스(현재의 베이루트)나 콘스탄티노플에서 법률 학교를 다녔을 것이다. 그는 법정 변호사가 되었고 라틴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즉위한 해인 527년 프로코피우스는 제국의 명장 벨리사리우스를 위한 법률 고문관이 되었다. 그후 그는 동부 전선에서 벨리사리우스와 함께 531년에 칼리쿰 전투에 참가했으나 패배했고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었다. 얼마 후 그는 532년 1월 니카의 반란을 목격했으며 533년 벨리사리우스의 반달 왕국 정벌에 종사관으로서 동행해 카르타고 함락을 지켜봤고 벨리살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갈 때 그의 후계자 솔로몬과 함께 북아프리카에 남았다.
프로코피우스는 535년에서 536년 사이의 극단적인 기상 현상에 대해 기록했는데, 이는 카르타고 근방의 반란과 같은 동로마 내 군사 활동의 배경으로 제시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을 정벌하려는 벨리사리우스의 원정에 함께하였고 1년 9일 동안 지속된 동고트군의 로마 포위를 경험했다. 그는 540년 벨리사리우스가 한때 서로마 제국의 중심지였지만 이후 동고트족의 수도가 된 라벤나에 입성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의 저서 『비사』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전쟁사』에 묘사된 것을 볼 때, 그와 벨리사리우스 간의 관계가 이 때부터 냉각된 것으로 보인다. 벨리사리우스가 544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동고트족의 국왕 토틸라와 전쟁을 벌였을 때, 프로코피우스는 더이상 벨리사리우스를 따르지 않았다.
프로코피우스가 언제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제임스 하워드 존슨, 에버릴 카메론, 제프리 그레프리 그렉스 등 많은 역사가들은 그의 죽음을 554년으로 추산한다.
프로코피우스의 저서는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통치에 대한 1차 기록들로 취급되고 있다. 그는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벌인 전쟁에 관해 8권의 책을 집필했고 공공 건축물에 대한 판례, 그리고 제국에서 벌어진 스캔들을 기술한 '비사'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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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전쟁』은 『비사』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의 가장 중요한 작품임에 분명하다.
처음 7권의 책은 545년 완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출판되기 전에 551년 초기까지에 벌어진 기록들이 추가된 것으로 추측된다. 첫 2권의 책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아르메니아, 나지카 및 조지아에서 벌어진 사산 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다룬다. 이 책들은 카바드 1세의 침공, 532년 니카 반란, 카바드 1세의 후계자 호스로 1세의 전쟁, 540년 안티오키아 파괴와 메소포타미아 주민들의 추방, 그리고 542년 전염병[3] 콘스탄티노플이 황폐해진 이야기 등을 자세히 다룬다. 또한 여기서는 프로코피우스 본인의 초기 경력을 상세하게 다룬다.
다음 두 권의 책들은 벨리사리우스가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정복한 이야기를 다루며, 나머지 책들은 고트 전쟁과 이탈리아를 탈환하기 위한 벨리사리우스와 다른 사람들이 노력한 이야기, 그리고 나폴리와 로마가 동고트족에 포위된 상황에 대해 설명한다. 프로코피우스는 나중에 환관 나르세스가 지휘하는 로마 군단이 동고트 왕국을 정복했을 때 여덟 번째 책을 추가했다. 이 여덟 번째 책은 이탈리아와 동부 국경에서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전쟁』은 나중에 동로마 역사가들의 저술에 영향을 미쳤다. 프로코피우스의 작품은 그의 사후 시인이자 역사가인 미리나[4] 의 아가티아스(Agathias of Myrina/Ἀγαθίας σχολαστικός)에 의해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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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건축물』은 유스티니아누스의 건축 활동에 대한 기록이다. 첫 번째 책은 557년 하기아 소피아의 첫 번째 돔이 붕괴되기 전까지 기록되어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저서가 550년대 후반에 산가리우스에 다기를 건축할 무렵에 저술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저서는 벨리사리우스에 대해 논하지 않지만,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 대해 상당히 색다른 태도를 취한다. 그는 황제를 신의 영광을 위해 성당을 짓고 물 공급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이상적인 그리스도인 황제로 묘사한다. 또한 그는 황제가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쓰레기로 변한 거리를 복구했다며 찬사를 보냈다. 이 책이 저술되었을 때 이미 사망한 테오도라 황후는 간략하게 언급되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는 별로 없다. 이 저서는 황제의 요청에 의해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책에 쓰여진 황제에 대한 찬사가 진실한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역사가들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건축물』에 쓰인 기록과 다른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 관한 1차 사료 간의 불일치를 여러 차례 발견했다. 예를 들어,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518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통치를 시작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삼촌인 유스티누스 1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또한 525년 홍수가 난 후 에데사의 성벽 보수 공사를 유스티니아누스가 집행했다고 기록되었지만, 이는 유스티누스 황제에 의해 주도되었다. 또한 프로코피우스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로마 제국 간의 국경을 따라 요새들을 광범위하게 설치한 유스티누스 1세의 업적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업적으로 둔갑시키기도 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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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저서들 중 가장 유명한 『비사』는 그의 사후 수세기 후에 바티칸 도서관에서 발견되었고 1623년 프랑스의 리옹에서 니콜로 알라마니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 책의 존재는 이미 서기 10세기 경에 출판된 백과사전 『수다』로부터 "출판되지 않는 저작"이라고 명시되면서 알려졌다.
『비사』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전쟁』의 처음 7권과 거의 같은 시기를 다루고 있으며,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전쟁’ 출판 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이 책이 550년이나 558년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며, 어쩌면 562년까지 늦춰질 수도 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비사』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그 아내 테오도라#s-2.1 뿐만 아니라 프로코피우스 본인의 후원자인 벨리사리우스와 아내 안토니나에 대한 깊은 환멸이 담겨 있다고 평가한다. 이 책에 기술된 일화들은 황제, 황후 및 측근들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잔인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이며 유스티니아누스의 아내이자 공동통치자(아우구스타)였던 테오도라는 저속하고도 탐욕스러운 성욕에 사로잡힌 여성이자 모든 일을 주도면밀하면서도 계산적으로 판단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 『비사』에 기술된 매우 자극적이면서도 의심스러운 내용 중에는 테오도라의 성취에 대한 프로코피우스의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재되었다.
비사는 프로코피우스의 저서로는 유일하게 한국어 번역이 나와 있는데, 2015년 도서출판 들메나무에서 ‘비잔틴 제국 비사’라는 제목으로 나왔으며 역자는 곽동훈으로, 그리스어 원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영문 번역판을 다시 중역한 것이다.
프로코피우스는 후기 고대주의 전통을 계승한 문파에 속한다. 이 문파는 고대 그리스어를 사용했고 그들의 모델은 헤로도토스, 폴리비우스, 그리고 특히 투키디데스였으며, 그들이 다루는 주제는 세속적인 역사였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어에 없는 어휘를 피했고 현재의 그리스어를 사용해야 할 때 설명을 삽입했다. 또한 프로코피우스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기독교 교회를 의미하는 에클레시아는 사원이나 신전과 동등하다고 설명한다. 사실 고대 아테네에서 에클레시아는 아테네 시민의 집합체였다. 이 세속적인 역사가들은 기독교 교회의 역사를 회피했다. 하지만 역사가 에버릴 카메론은 프로코피우스의 작품이 6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팽배했던 그리스 고전과 기독교 역사 모델 간의 긴장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카이사레이아의 프로코피우스(Procopius of Caesarea, Προκόπιος ο Καισαρεύς, AD.500? ~ AD.554?)
1. 개요
동로마 제국 초기의 그리스인 학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전쟁에서 활약한 명장 벨리사리우스의 원정에 참가하면서, 『전사』,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건축물』 등을 집필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하면서도 악명 높은 그의 저서 『비사』는 6세기 동로마 제국의 역사 사료이다.
2. 생애
그 자신의 저작과는 별도로, 프로코피우스의 생애를 추적할 수 있는 주요 출처로는 975년 이후에 집필된 것으로 추측되는 로마 백과사전 『수다』(Suda)를 들 수 있다. 수다에 따르면, 프로코피우스는 동로마 팔레스티나 지방의 카이사레이아 출신이었다. 그는 아마도 가자의 유명한 학교에서 그리스 고전과 수사학 등 전통적인 엘리트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베레투스(현재의 베이루트)나 콘스탄티노플에서 법률 학교를 다녔을 것이다. 그는 법정 변호사가 되었고 라틴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즉위한 해인 527년 프로코피우스는 제국의 명장 벨리사리우스를 위한 법률 고문관이 되었다. 그후 그는 동부 전선에서 벨리사리우스와 함께 531년에 칼리쿰 전투에 참가했으나 패배했고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었다. 얼마 후 그는 532년 1월 니카의 반란을 목격했으며 533년 벨리사리우스의 반달 왕국 정벌에 종사관으로서 동행해 카르타고 함락을 지켜봤고 벨리살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갈 때 그의 후계자 솔로몬과 함께 북아프리카에 남았다.
프로코피우스는 535년에서 536년 사이의 극단적인 기상 현상에 대해 기록했는데, 이는 카르타고 근방의 반란과 같은 동로마 내 군사 활동의 배경으로 제시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을 정벌하려는 벨리사리우스의 원정에 함께하였고 1년 9일 동안 지속된 동고트군의 로마 포위를 경험했다. 그는 540년 벨리사리우스가 한때 서로마 제국의 중심지였지만 이후 동고트족의 수도가 된 라벤나에 입성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의 저서 『비사』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전쟁사』에 묘사된 것을 볼 때, 그와 벨리사리우스 간의 관계가 이 때부터 냉각된 것으로 보인다. 벨리사리우스가 544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동고트족의 국왕 토틸라와 전쟁을 벌였을 때, 프로코피우스는 더이상 벨리사리우스를 따르지 않았다.
프로코피우스가 언제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제임스 하워드 존슨, 에버릴 카메론, 제프리 그레프리 그렉스 등 많은 역사가들은 그의 죽음을 554년으로 추산한다.
3. 저서
프로코피우스의 저서는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통치에 대한 1차 기록들로 취급되고 있다. 그는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벌인 전쟁에 관해 8권의 책을 집필했고 공공 건축물에 대한 판례, 그리고 제국에서 벌어진 스캔들을 기술한 '비사'를 집필했다.
3.1.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전쟁(Ὑπὲρ τῶν πολέμων λόγο)[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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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전쟁』은 『비사』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의 가장 중요한 작품임에 분명하다.
처음 7권의 책은 545년 완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출판되기 전에 551년 초기까지에 벌어진 기록들이 추가된 것으로 추측된다. 첫 2권의 책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아르메니아, 나지카 및 조지아에서 벌어진 사산 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다룬다. 이 책들은 카바드 1세의 침공, 532년 니카 반란, 카바드 1세의 후계자 호스로 1세의 전쟁, 540년 안티오키아 파괴와 메소포타미아 주민들의 추방, 그리고 542년 전염병[3] 콘스탄티노플이 황폐해진 이야기 등을 자세히 다룬다. 또한 여기서는 프로코피우스 본인의 초기 경력을 상세하게 다룬다.
다음 두 권의 책들은 벨리사리우스가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정복한 이야기를 다루며, 나머지 책들은 고트 전쟁과 이탈리아를 탈환하기 위한 벨리사리우스와 다른 사람들이 노력한 이야기, 그리고 나폴리와 로마가 동고트족에 포위된 상황에 대해 설명한다. 프로코피우스는 나중에 환관 나르세스가 지휘하는 로마 군단이 동고트 왕국을 정복했을 때 여덟 번째 책을 추가했다. 이 여덟 번째 책은 이탈리아와 동부 국경에서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전쟁』은 나중에 동로마 역사가들의 저술에 영향을 미쳤다. 프로코피우스의 작품은 그의 사후 시인이자 역사가인 미리나[4] 의 아가티아스(Agathias of Myrina/Ἀγαθίας σχολαστικός)에 의해 기록되었다.
3.2.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건축물(Περὶ Κτισμάτω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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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건축물』은 유스티니아누스의 건축 활동에 대한 기록이다. 첫 번째 책은 557년 하기아 소피아의 첫 번째 돔이 붕괴되기 전까지 기록되어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저서가 550년대 후반에 산가리우스에 다기를 건축할 무렵에 저술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저서는 벨리사리우스에 대해 논하지 않지만,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 대해 상당히 색다른 태도를 취한다. 그는 황제를 신의 영광을 위해 성당을 짓고 물 공급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이상적인 그리스도인 황제로 묘사한다. 또한 그는 황제가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쓰레기로 변한 거리를 복구했다며 찬사를 보냈다. 이 책이 저술되었을 때 이미 사망한 테오도라 황후는 간략하게 언급되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는 별로 없다. 이 저서는 황제의 요청에 의해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책에 쓰여진 황제에 대한 찬사가 진실한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역사가들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건축물』에 쓰인 기록과 다른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 관한 1차 사료 간의 불일치를 여러 차례 발견했다. 예를 들어,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518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통치를 시작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삼촌인 유스티누스 1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또한 525년 홍수가 난 후 에데사의 성벽 보수 공사를 유스티니아누스가 집행했다고 기록되었지만, 이는 유스티누스 황제에 의해 주도되었다. 또한 프로코피우스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로마 제국 간의 국경을 따라 요새들을 광범위하게 설치한 유스티누스 1세의 업적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업적으로 둔갑시키기도 했다.[5]
3.3. 비사(Ἀπόκρυφη Ἱστορί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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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저서들 중 가장 유명한 『비사』는 그의 사후 수세기 후에 바티칸 도서관에서 발견되었고 1623년 프랑스의 리옹에서 니콜로 알라마니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 책의 존재는 이미 서기 10세기 경에 출판된 백과사전 『수다』로부터 "출판되지 않는 저작"이라고 명시되면서 알려졌다.
『비사』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전쟁』의 처음 7권과 거의 같은 시기를 다루고 있으며,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전쟁’ 출판 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이 책이 550년이나 558년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며, 어쩌면 562년까지 늦춰질 수도 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비사』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그 아내 테오도라#s-2.1 뿐만 아니라 프로코피우스 본인의 후원자인 벨리사리우스와 아내 안토니나에 대한 깊은 환멸이 담겨 있다고 평가한다. 이 책에 기술된 일화들은 황제, 황후 및 측근들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잔인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이며 유스티니아누스의 아내이자 공동통치자(아우구스타)였던 테오도라는 저속하고도 탐욕스러운 성욕에 사로잡힌 여성이자 모든 일을 주도면밀하면서도 계산적으로 판단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 『비사』에 기술된 매우 자극적이면서도 의심스러운 내용 중에는 테오도라의 성취에 대한 프로코피우스의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재되었다.
반면, 테오도라의 남편 유스티니아누스는 프로코피우스의 묘사에 따르면 머리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괴물(...)이었다.그녀는 종종 극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의상을 벗고 사타구니를 가린 무화과 나뭇잎을 제외하고는 누드 상태로 서 있었다. 관객들에게 너무나 강렬한 모습이었지만, 무대에서 완전히 벗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거리낌없이 벗었다. 그녀는 무대 바닥에 누워있었고 노예는 그녀의 사타구니를 가린 무화과 나뭇잎에 보리 알갱이를 뿌렸다. 그후 거위는 보리 알갱이를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프로코피우스가 혹시나 음모가들이 제국을 뒤엎은 뒤 유스티니아누스의 측근인 자신마저 화를 입을까봐 두려워해 사전에 유스티니아누스를 과장되게 비하하는 문서를 적어뒀다가 제국이 뒤엎어질 때 이를 공개함으로서 목숨을 건지려 했다고 주장한다. 이 가설이 맞다면, 『비사』는 프로코피우스가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를 미워했다는 증거로 볼 수 없다.늦은 밤 궁전에서 유스티니아누스와 함께 있었던 순수한 정신력을 가진 몇몇 사람들은 이상한 악마 형태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은 황제가 갑자기 왕좌에서 일어나 걸어다녔으며 오랫동안 앉아있지 못하더니 얼마 후에 황제의 머리가 사라지고 몸의 나머지 부분은 녹아 흘러나가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목격자는 그의 눈이 그를 속이고 있는지 의심했다. 그러나 그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사라진 머리를 채우고 다시 흘러나갔던 몸이 합쳐지는 것을 목격했다.
비사는 프로코피우스의 저서로는 유일하게 한국어 번역이 나와 있는데, 2015년 도서출판 들메나무에서 ‘비잔틴 제국 비사’라는 제목으로 나왔으며 역자는 곽동훈으로, 그리스어 원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영문 번역판을 다시 중역한 것이다.
4. 서술 스타일
프로코피우스는 후기 고대주의 전통을 계승한 문파에 속한다. 이 문파는 고대 그리스어를 사용했고 그들의 모델은 헤로도토스, 폴리비우스, 그리고 특히 투키디데스였으며, 그들이 다루는 주제는 세속적인 역사였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어에 없는 어휘를 피했고 현재의 그리스어를 사용해야 할 때 설명을 삽입했다. 또한 프로코피우스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기독교 교회를 의미하는 에클레시아는 사원이나 신전과 동등하다고 설명한다. 사실 고대 아테네에서 에클레시아는 아테네 시민의 집합체였다. 이 세속적인 역사가들은 기독교 교회의 역사를 회피했다. 하지만 역사가 에버릴 카메론은 프로코피우스의 작품이 6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팽배했던 그리스 고전과 기독교 역사 모델 간의 긴장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5. 관련 문서
[1] 번역될 때는 제목이 전사(戰史) 내지 전쟁사(戰爭史)로 짧게 번역되기도 한다.[2] 번역될 때는 제목이 전사(戰史) 내지 전쟁사(戰爭史)로 짧게 번역되기도 한다.[3] 일명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라 불린, 동로마 제국의 성장을 꺾고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고토 회복 야망을 좌절시켰다. 현대에는 이 병의 정체가 페스트였다고 보고 있다.[4] 지금의 터키령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의 한 도시인 미리나(Myrina)이다.[5] 사실 군인 출신으로 황제로써의 행정업무에는 밝지 못했고 글도 몰랐던 데다 나이도 고령이었던(즉위 당시 나이가 여든여덟이었다) 유스티누스였기에 즉위 초기부터 조카인 유스티니아누스를 수도로 불러서 국정의 실무를 맡겼고, 유스티누스 말년에는 사실상 유스티니아누스가 황제의 직무를 대행했다. 프로코피우스로써는 유스티누스가 유스티니아누스를 시켜서 했거나 유스티누스가 했거나 별 차이가 없어 보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