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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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Flavius Aëtius)[1]#
'''396–454'''
서로마 제국의 장군. 20년에 걸쳐 최고 군사령관을 역임한 장군으로서 아틸라의 갈리아 침공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격파해 훈족의 세력 팽창을 저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전 세대 장군인 플라비우스 스틸리코와 더불어 '''서로마 제국을 지탱한 '최후의 로마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꽤 유력한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군사부문 최고 책임자였던 기병대장을 지낸 플라비우스 가우덴티우스[2] 였고 어머니 역시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고작 9살일 때인 405년에 또다른 로마의 고관 요비누스의 아들 이아손과 함께, 이후 로마를 약탈하게 될 알라리크 휘하 비시고트족[3] 에 볼모로 끌려갔고,[4] 3년 후 알라리크는 로마로의 재진군을 앞두고 후방의 위협이 될 수 있는 훈족에게 그를 볼모로 넘겼다. 아에티우스는 첫 결혼을 하고, 425년까지 훈족에 붙잡혀 있으면서 '''훈족들과 교분을 두텁게 하고 훈족의 군사력에 대해 상세히 체험'''할 수 있었으며, 17년의 세월간 훈족과 같이 지낸 것 때문에 거의 언제든 '''훈족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이런 외교적 입지 덕에 로마의 유력한 군사령관들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된다. 인질 생활을 한 것이 나름 전화위복이 된 셈.
당시 로마의 상황을 보자면 423년에 서로마의 황제 호노리우스가 사망하였고 424년 당시 집정관이었던 카스티누스에 의해 로마의 치안장관 요하네스가 황제로 옹립되었다.[5][6] 동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2세는 요하네스의 황제등극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하네스 등극 1년후인 서기 425년에 서로마에 군대를 파견했다. 당황한 요하네스는 훈족과 안면이 있는 아에티우스에게 훈족을 용병으로 동원해 달라고 부탁하였고 아에티우스는 이에 호응해 많은 수의 훈족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왔으나 이미 요하네스는 라벤나에서 포위당한 끝에 동로마군에게 붙잡혀 살해된 후였고, 호노리우스의 배다른 여동생이자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친딸이였던 갈라 플라키디아 공주가 호노리우스 황제의 공동 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 3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동로마에 의해 황제로 임명된 상태였다.
하지만 아에티우스는 군대를 철수하지 않고 그대로 라벤나를 공격했는데, 이에 동로마에서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황제로 세우기 위해 파견된 군대가 맞섰다. 하지만 아에티우스는 군세가 우세하다고는 하나 동로마를 적대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갈라 플라키디아는 아에티우스를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 타협하기로 했다.
아에티우스는 자신이 군대를 물리는 조건으로 '마기스테르 밀리툼'[7] 이라는 직위를 요구하였고[8][9] 갈리아의 최고 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훈족을 돌려보낸뒤 남은 군대와 함께 갈리아에 눌러앉았고 주목할만한 활약을 보이며 명성을 쌓았는데 서기 426년엔 비시고트(서고트)족을 격파하고 2년 뒤 프랑크족을 격파하여 라인강 일대의 통치권을 획득했다. 다시 2년뒤인 서기 430년엔 게르만족의 하나인 유툰기족을 격파했고 지원나온 비시고트족의 족장을 사로잡았다. 432년엔 프랑크족과 싸워 그들을 또다시 격파했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보니파키우스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보니파키우스와 아에티우스는 국가 정책에 대한 결정에서 의견 차이를 자주 보이는 편이었다. 황제의 어머니인 갈라 플라키디아는 과거 요하네스를 옹립하려 한 아에티우스의 전력 때문에 보니파키우스를 더 신임했으며, 결국 아에티우스는 이런 보니파키우스와 대립하게 되었고 그를 몰락시키기 위해 모략을 꾀하게 되었다.
그 결과 갈라 플라키디아는 보니파키우스를 의심하게 되어 그를 반역죄로 처단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보니파키우스는 반달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니파키우스에 대한 혐의가 아에티우스의 모략이라는 것이 발각되고 말았다. 보니파키우스와 황실은 화해하게 되었지만 보니파키우스의 요청을 핑계로 반달족이 대거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 북아프리카에 침입하였다. 이를 보니파키우스는 군사적으로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종교문제로 갈등을 빚은 많은 수의 주민들이 반달족에 협력했으므로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 북아프리카를 떠나게 되었다. 그 결과 카르타고의 멸망 이후 500여 년간 지배해왔던 속주 아프리카는 반달족이 점령하게 된다.
원래부터 서로마 황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데다가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아에티우스가 서로마 황실의 신뢰를 잃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질적으로 갈리아를 통치하는 아에티우스의 군사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처벌하지 못하였으나 반달족에게 쫒겨난 보니파키우스를 서로마 전체의 최고 군사령관에 임명함으로써 명백히 아에티우스에 대한 적의를 보였다.
이에 아에티우스는 선수를 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에 침입했다. 이를 요격하기 위해 보니파키우스도 군대를 이끌고 나와 둘은 서기 433년 라벤나 근처의 도시인 리미니라는 곳에서 맞붙었다. 이곳에서 보니파키우스는 아에티우스군을 격파했지만 이때 입은 부상[10] 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보니파키우스의 사위인 세바스티아누스가 직위를 이어받았다.
아에티우스는 '''리미니 전투'''에서의 패배 뒤 갈리아로 달아났다가 그곳에서도 입지가 불안해지자 훈족에게로 달아나 있었는데 보니파키우스의 죽음을 듣자 곧장 훈족의 군대와 함께 라벤나로 진군해 황실을 위협했다. 그렇게 해서 세바스티아누스가 가진 직위를 양도받은 뒤 그를 이탈리아에서 추방해 버렸다. 그리고 보니파키우스의 미망인인 펠라지아와 결혼하여 절대권력을 손에 쥐게 된다.
이후에 그는 본거지인 갈리아를 재평정하기 시작했는데 서기 436년, 부르군트족의 왕인 군터와 싸워 그를 격파하고 평화협정을 강요했다. 다음해 아에티우스는 평화협정을 무시하고 훈족의 병사들을 보내 20,000여 명의 부르군트족을 살해했다. 서기 437년에는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438년엔 수에비족 및 서고트족과 싸워 이들을 무찌르는 등의 군사적 성과를 거두어 이탈리아에 그의 동상이 세워지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443년에 아에티우스는 자신이 격파한 뒤 장악한 부르군트족을 제네바 호수 근처에 정착시켰고[11] 그밖에도 복속시킨 알란족과 오르레앙족을 각각 갈리아 동부와 갈리아 서부 노르망디 지역에 정착시켰다. 또 450년에는 프랑크 왕이 죽은 후 벌어진 그의 아들들의 계승분쟁에 개입하여 그중 한 명을 양자로 삼고, 로마로 보내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갈리아의 게르만 족을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이는 훈족의 새로운 왕 아틸라의 경계를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틸라는 서기 434년에 훈족의 지도자로 등극한 상태였는데 이 시기 아에티우스가 갈리아에서 세력을 키우자 이를 경계하고 있었고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12] 로부터 서로마 침공을 부추김 받고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여동생 호노리아 공주의 구혼 편지를 받자[13] 이를 빌미로 서기 451년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를 침략했다. 물론 아에티우스도 훈족의 무서움을 알았기에 그를 선물 등으로 달래보기도 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아틸라는 기세좋게 여러 성을 점령한 뒤 아우렐리아눔(오를레앙)으로 향했다. 이에 아에티우스는 갈리아계의 원로원 의원이었던 아비투스의 도움으로 서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 1세와 연합하고, 아틸라의 휘하에 있는 상기바누스족과 접촉하여 그들로 하여금 훈족과 연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렇게 뒷공작을 통해 입지를 다진 후 서고트족의 군대와 합류한 뒤 아틸라가 포위하고 있는 아우렐리아눔으로 향해 진군하였고 이에 아틸라는 연합군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포위를 풀고[14] 마침내 카탈라우눔 평야에서 아에티우스의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후일 '''카탈라우눔 전투'''로 불리게 된 이 전투에서, 아에티우스와 서고트군은 아틸라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였고, 아에티우스는 전사한 테오도리크 1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모든 전리품을 독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 해에 아틸라는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그는 아퀼레이아를 폐허로 만드는 등의 파괴와 약탈 행위를 자행하였으며 공포에 빠진 서로마 황제는 라벤나를 떠나 로마로 달아났다.[15] 이 지경인데도 아에티우스는 갈리아에서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군대가 아틸라군을 막을 만한 전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 아에티우스의 군대라는게 훈족에게서 데려온 용병을 주력으로 삼아왔는데 아틸라와의 싸움에선 이들을 쓸 수 없었고 따라서 아틸라군을 상대할 만한 전력이 되지 못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16]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그래도 아에티우스는 일부의 병력을 동원, 아틸라의 진군과 보급에 훼방을 놓으며 그의 진군 속도를 늦추었다고 한다. 그 사이 아틸라는 포 강에 이르렀고 이곳에서 로마 수도장관 트리게티우스, 전직 집정관 아비에누스 그리고 교황 레오 1세로 구성된 로마 사절단과 교섭을 한 뒤 물러났다.
서기 453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이 아에티우스의 아들과 결혼했다. 이렇게 아에티우스의 아들이 테오도시우스 황실과 연결되자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에티우스가 자신의 아들을 새로운 황제로 등극시키지 않을까 불안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었던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와 황제의 환관이었던 헤라클리우스가 황제의 의중을 눈치채고 아에티우스 암살 음모를 꾸미게 되었으며, 다음해였던 서기 454년에 황실 궁전에서 아에티우스가 황제를 알현하던 도중, 황제가 휘두른 칼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로써 아에티우스는 볼모 생활, 전쟁, 권력 투쟁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게 되었다.
아에티우스의 죽음으로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권력이 공고해 진 듯했으나[17] , 그 발렌티니아누스 3세도 그로부터 단 1년 만에 암살당하고 말았다.[18]
막시무스는 아에티우스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최고 군사령관의 직위를 요구하고 있었는데 다른 살해 공모자였던 헤라클리우스는 황제에게 또 다른 아에티우스가 나올 것이므로 누구에게도 최고 군사령관의 직위를 주어선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때문에 황제는 이 요구를 거부하였고 이에 앙심을 품은 막시무스는 황제가 근위병으로 삼았던 아에티우스의 옛 부하 둘을 부추겨 황제가 성당을 방문하러 로마로 행차하였을때 황제가 말에서 내리자 암살케하고 헤라클리우스도 더불어 살해하였다.(...)[19]
암살을 단행한 막시무스는 원로원에 황제 선출을 의뢰하였다. 황제에겐 자식이 없었고 또한 아무도 정통성이 없던 상태였기 때문에 과거 로마 공화정 시대로 돌아간 것처럼 원로원 의원 투표로 황제를 선출키로 했지만 사실상 명분상의 일일 뿐이었고, 막시무스가 황제로 선출되었으며, 황제의 미망인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결혼함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은 그의 황제 등극을 인정하지 않았다.
황제가 된 막시무스는 과거 아에티우스에게 서고트족을 연합하게 함으로써 아틸라와의 싸움에 도움을 준 바 있는 아비투스를 최고 군사령관으로 임명한 뒤 갈리아로 보냈다. 아비투스로 하여금 갈리아에 있는 아에티우스가 이끌던 병력들을 이끌고 서고트족을 방문하여 새로 왕위를 계승한 젊은 왕의 왕위를 인정하고자 하는 목적에서였다. 이때 리키니아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이 북아프리카를 지배하는 반달족의 왕인 가이세리크(겐세리크)의 아들에게 시집가기로 되어있는데 막시무스는 이를 파기해버렸고 이에 분노한 가이세리크는 직접 군을 이끌고 로마를 공격했다.
하지만 로마에는 더이상 아에티우스의 군대가 없었고, 군사령관인 아비투스는 갈리아에서 서고트족을 방문 중이었으므로 이에 무방비로 공격받게 되었다. 막시무스는 혼란에 빠져 원로원 의원들을 데리고 로마에서 달아나려고 하다가 이것이 시민들에게 발각되어 분노한 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고(...) 로마는 410년에 알라리크에게 약탈당한 이후 45년 만에 두 번째로 약탈당했다.[20]
아에티우스에 대한 서구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호의적이다. 그는 우선 '''서로마의 멸망을 20~30여 년 뒤로 물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또한 아틸라를 격파함으로써 훈족의 무적 신화를 산산조각내었다. 그가 아틸라를 격파한 것이 아틸라의 죽음으로 이어지진 않았으나 훈족 아래에 복속되었던 게르만족이 훈족을 더 이상 겁내지 않게 하였고 그 결과 아틸라가 죽자마자 이들은 훈족에 반기를 들어 그들을 유럽에서 몰아내게 된다.
특히 에드워드 기번은 아에티우스를 '''최후의 로마인'''[21] 이라고 평가하였고 그가 아틸라를 격파한 카탈라우눔 전투를 두고 '''서로마 제국의 이름으로 이룩한 최후의 승리'''라고 평했다. 이러한 시각은 대체로 많은 역사학자가 동의하며 로버트 페널의 경우 "이미 서로마는 수많은 야만족들의 난입으로 통치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를 유지할 재정도 없었고 군대도 없었다. 하지만 아에티우스라는 걸출한, 그리고 최후의 로마인이 서로마에 존재하였고 바보같은 황제에 의해 암살되기 전까지 그는 이 무너져가는 제국을 지탱하였다." 라고 평했다.
물론 스틸리코가 그러하듯이 아에티우스 역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북아프리카의 상실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한 실책이 있었다는 것. 이에 대해 기번은 '''로마엔 해군이 없는 상태'''로 북아프리카의 상실은 시간 문제였으므로 이를 아에티우스의 책임으로 돌릴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아에티우스와 보니파키우스의 내분은 단지 계기만 마련해 주었을 뿐이었고, 만일 이러한 계기가 없었더라도 다른 계기로 이민족의 누군가가 북아프리카를 침공했을 것이며 이렇다면 종교문제로 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심한 북아프리카는 그들에 의해 점령당했을 것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어느 정도는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보니파키우스가 결코 아에티우스에게 밀리지 않고 오히려 뛰어넘는 재능을 가진 걸출한 장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아프리카를 반달족으로부터 지켜낼 수 없었다는 점을 본다면 분명 북아프리카를 지킬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북아프리카에서의 대규모 이민족 침공은 스페인 내에서의 이민족 간의 세력 다툼이 우열이 정해진 뒤 곧바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봐도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하지만 보니파키우스와 같은 뛰어난 장군이 아에티우스와 협력하여 국가를 지키는 데 쓰이기보단 둘이 내분을 벌여 한 명이 죽어야 했다는 점은 서로마 제국으로서는 상당히 안타까운 손실임에 틀림없다.
비록 아에티우스 역시 보니파키우스를 제거하는데 열중하였기 때문에 이 점에서 아에티우스를 비난할 수 있는 소지가 있어 보이나 이는 아에티우스 때문이라기보단 당시 서로마 제국 정치구조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의 로마는 무능한 지도자들이 지배하였으며 이들은 위기를 타파할 능력도, 그리고 위기임을 인식할 능력조차 갖추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과거 서로마를 홀로 지탱한 것이나 다름없던 스틸리코를 단지 정치적으로 위협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처형하였고 아에티우스와 보니파키우스가 유능하고 군부내의 유명한 인사라 하여 둘의 사이를 오가며 한쪽을 제거하려 들었다. 위의 두 걸출한 장군들은 멸망 직전의 서로마 제국으로서는 귀중한 자산임이 틀림없었으나 서로마 정부는 이런 것은 아랑곳 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두 장군을 화해시킨 뒤 둘을 전선에 내보내야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당연했을 서로마 정부는 둘을 부추겨 싸우게 하였다. 이로써 보니파키우스는 그의 뛰어난 재능을 고작 아에티우스를 격파하는데 쓰다가 죽고 만다.
또한 아에티우스는 이렇게 망해가는 현실은 보지 못하고 내부의 유능한 장군을 제거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무능하고 무지한 황실과는 달리 서로마의 안보를 책임지는 책무에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사실상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으면서도 이탈리아에 머물지 않고 계속 갈리아에 있으면서 30년에 걸쳐 이민족들과 전쟁을 벌여왔고 이 때문에 갈리아의 이민족들은 이탈리아를 전혀 넘보지 못했다.
게다가 아에티우스는 어쨌든 간에 당대 1급 군인이었다. 서로마보다 상태가 훨씬 양호했던 동로마 제국조차 감당하지 못했던[22] 아틸라가 직접 이끄는 훈족과 맞서 게르만 연합군을 규합하여 그 지휘를 맡았다는 것은, 그의 군사적 능력이 당대 로마와 그 주변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아에티우스가 아틸라를 직접적으로 막지는 않았으나 그가 배후에서 아틸라군을 노림으로써 아틸라가 포강까지만 전진하고 교황 성 레오 1세와의 강화를 받아들인 뒤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게 되었던 것이었다.[23] 이는 불과 5년 뒤에 가이세리크가 로마를 약탈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분명 가이세리크보다 아틸라의 세력이 더 막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틸라가 그냥 물러난 것은 그만큼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아에티우스의 존재를 신경썼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즉 '''망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고 이민족에 의해 누더기가 된 서로마 제국을 한 개인의 능력으로 지탱'''한 것이다. 따라서 많은 역사가들은 아에티우스에게 '''최후의 로마인'''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그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현재도 옛 서로마 제국 땅이었던 유럽의 라틴계 국가들(루마니아는 동로마 제국이 있었던 발칸 반도의 북동쪽에 위치한 나라이므로 제외)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특히 프랑스인들은 지금의 프랑스 땅인 갈리아를 적극적으로 수호했다는 점에서 자국의 위대한 영웅으로 여긴다. 한편 자신들을 훈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그에 따라 아틸라를 자국의 위인으로 추앙하는 헝가리와 터키, 몽골에서는 조상들의 리즈시절에 찬물을 끼얹은 적이자 철천지 원수의 이미지가 강하다. 동아시아 고대사로 치면 국수주의 성향 중국인들과 중국공산당 입장에서의 을지문덕 및 안시성주와 비슷한 위치고, 동아시아 중근세사로 치면 일본 우익사관론자들과 혐한 성향 일본인들 입장에서의 이순신, 권율, 곽재우와 비슷한 위치이며 근현대사로 치면 북한, 중국 등 반서방 국가들과 친중파 및 종북주의자들 시점에서의 한국전쟁 당시 한국과 UN군참전용사들과 비슷한 위치라 할 수 있다.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Flavius Aëtius)[1]#
'''396–454'''
1. 개요
서로마 제국의 장군. 20년에 걸쳐 최고 군사령관을 역임한 장군으로서 아틸라의 갈리아 침공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격파해 훈족의 세력 팽창을 저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전 세대 장군인 플라비우스 스틸리코와 더불어 '''서로마 제국을 지탱한 '최후의 로마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2. 생애
2.1. 유년시절
꽤 유력한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군사부문 최고 책임자였던 기병대장을 지낸 플라비우스 가우덴티우스[2] 였고 어머니 역시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고작 9살일 때인 405년에 또다른 로마의 고관 요비누스의 아들 이아손과 함께, 이후 로마를 약탈하게 될 알라리크 휘하 비시고트족[3] 에 볼모로 끌려갔고,[4] 3년 후 알라리크는 로마로의 재진군을 앞두고 후방의 위협이 될 수 있는 훈족에게 그를 볼모로 넘겼다. 아에티우스는 첫 결혼을 하고, 425년까지 훈족에 붙잡혀 있으면서 '''훈족들과 교분을 두텁게 하고 훈족의 군사력에 대해 상세히 체험'''할 수 있었으며, 17년의 세월간 훈족과 같이 지낸 것 때문에 거의 언제든 '''훈족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이런 외교적 입지 덕에 로마의 유력한 군사령관들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된다. 인질 생활을 한 것이 나름 전화위복이 된 셈.
2.2. 군권을 잡다
당시 로마의 상황을 보자면 423년에 서로마의 황제 호노리우스가 사망하였고 424년 당시 집정관이었던 카스티누스에 의해 로마의 치안장관 요하네스가 황제로 옹립되었다.[5][6] 동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2세는 요하네스의 황제등극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하네스 등극 1년후인 서기 425년에 서로마에 군대를 파견했다. 당황한 요하네스는 훈족과 안면이 있는 아에티우스에게 훈족을 용병으로 동원해 달라고 부탁하였고 아에티우스는 이에 호응해 많은 수의 훈족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왔으나 이미 요하네스는 라벤나에서 포위당한 끝에 동로마군에게 붙잡혀 살해된 후였고, 호노리우스의 배다른 여동생이자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친딸이였던 갈라 플라키디아 공주가 호노리우스 황제의 공동 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 3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동로마에 의해 황제로 임명된 상태였다.
하지만 아에티우스는 군대를 철수하지 않고 그대로 라벤나를 공격했는데, 이에 동로마에서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황제로 세우기 위해 파견된 군대가 맞섰다. 하지만 아에티우스는 군세가 우세하다고는 하나 동로마를 적대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갈라 플라키디아는 아에티우스를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 타협하기로 했다.
아에티우스는 자신이 군대를 물리는 조건으로 '마기스테르 밀리툼'[7] 이라는 직위를 요구하였고[8][9] 갈리아의 최고 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훈족을 돌려보낸뒤 남은 군대와 함께 갈리아에 눌러앉았고 주목할만한 활약을 보이며 명성을 쌓았는데 서기 426년엔 비시고트(서고트)족을 격파하고 2년 뒤 프랑크족을 격파하여 라인강 일대의 통치권을 획득했다. 다시 2년뒤인 서기 430년엔 게르만족의 하나인 유툰기족을 격파했고 지원나온 비시고트족의 족장을 사로잡았다. 432년엔 프랑크족과 싸워 그들을 또다시 격파했다.
2.3. 보니파키우스와의 갈등
당시 북아프리카는 보니파키우스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보니파키우스와 아에티우스는 국가 정책에 대한 결정에서 의견 차이를 자주 보이는 편이었다. 황제의 어머니인 갈라 플라키디아는 과거 요하네스를 옹립하려 한 아에티우스의 전력 때문에 보니파키우스를 더 신임했으며, 결국 아에티우스는 이런 보니파키우스와 대립하게 되었고 그를 몰락시키기 위해 모략을 꾀하게 되었다.
그 결과 갈라 플라키디아는 보니파키우스를 의심하게 되어 그를 반역죄로 처단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보니파키우스는 반달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니파키우스에 대한 혐의가 아에티우스의 모략이라는 것이 발각되고 말았다. 보니파키우스와 황실은 화해하게 되었지만 보니파키우스의 요청을 핑계로 반달족이 대거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 북아프리카에 침입하였다. 이를 보니파키우스는 군사적으로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종교문제로 갈등을 빚은 많은 수의 주민들이 반달족에 협력했으므로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 북아프리카를 떠나게 되었다. 그 결과 카르타고의 멸망 이후 500여 년간 지배해왔던 속주 아프리카는 반달족이 점령하게 된다.
원래부터 서로마 황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데다가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아에티우스가 서로마 황실의 신뢰를 잃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질적으로 갈리아를 통치하는 아에티우스의 군사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처벌하지 못하였으나 반달족에게 쫒겨난 보니파키우스를 서로마 전체의 최고 군사령관에 임명함으로써 명백히 아에티우스에 대한 적의를 보였다.
이에 아에티우스는 선수를 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에 침입했다. 이를 요격하기 위해 보니파키우스도 군대를 이끌고 나와 둘은 서기 433년 라벤나 근처의 도시인 리미니라는 곳에서 맞붙었다. 이곳에서 보니파키우스는 아에티우스군을 격파했지만 이때 입은 부상[10] 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보니파키우스의 사위인 세바스티아누스가 직위를 이어받았다.
아에티우스는 '''리미니 전투'''에서의 패배 뒤 갈리아로 달아났다가 그곳에서도 입지가 불안해지자 훈족에게로 달아나 있었는데 보니파키우스의 죽음을 듣자 곧장 훈족의 군대와 함께 라벤나로 진군해 황실을 위협했다. 그렇게 해서 세바스티아누스가 가진 직위를 양도받은 뒤 그를 이탈리아에서 추방해 버렸다. 그리고 보니파키우스의 미망인인 펠라지아와 결혼하여 절대권력을 손에 쥐게 된다.
2.4. 갈리아에서
이후에 그는 본거지인 갈리아를 재평정하기 시작했는데 서기 436년, 부르군트족의 왕인 군터와 싸워 그를 격파하고 평화협정을 강요했다. 다음해 아에티우스는 평화협정을 무시하고 훈족의 병사들을 보내 20,000여 명의 부르군트족을 살해했다. 서기 437년에는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438년엔 수에비족 및 서고트족과 싸워 이들을 무찌르는 등의 군사적 성과를 거두어 이탈리아에 그의 동상이 세워지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443년에 아에티우스는 자신이 격파한 뒤 장악한 부르군트족을 제네바 호수 근처에 정착시켰고[11] 그밖에도 복속시킨 알란족과 오르레앙족을 각각 갈리아 동부와 갈리아 서부 노르망디 지역에 정착시켰다. 또 450년에는 프랑크 왕이 죽은 후 벌어진 그의 아들들의 계승분쟁에 개입하여 그중 한 명을 양자로 삼고, 로마로 보내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갈리아의 게르만 족을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이는 훈족의 새로운 왕 아틸라의 경계를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2.5. 아틸라와의 싸움
아틸라는 서기 434년에 훈족의 지도자로 등극한 상태였는데 이 시기 아에티우스가 갈리아에서 세력을 키우자 이를 경계하고 있었고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12] 로부터 서로마 침공을 부추김 받고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여동생 호노리아 공주의 구혼 편지를 받자[13] 이를 빌미로 서기 451년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를 침략했다. 물론 아에티우스도 훈족의 무서움을 알았기에 그를 선물 등으로 달래보기도 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아틸라는 기세좋게 여러 성을 점령한 뒤 아우렐리아눔(오를레앙)으로 향했다. 이에 아에티우스는 갈리아계의 원로원 의원이었던 아비투스의 도움으로 서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 1세와 연합하고, 아틸라의 휘하에 있는 상기바누스족과 접촉하여 그들로 하여금 훈족과 연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렇게 뒷공작을 통해 입지를 다진 후 서고트족의 군대와 합류한 뒤 아틸라가 포위하고 있는 아우렐리아눔으로 향해 진군하였고 이에 아틸라는 연합군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포위를 풀고[14] 마침내 카탈라우눔 평야에서 아에티우스의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후일 '''카탈라우눔 전투'''로 불리게 된 이 전투에서, 아에티우스와 서고트군은 아틸라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였고, 아에티우스는 전사한 테오도리크 1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모든 전리품을 독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 해에 아틸라는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그는 아퀼레이아를 폐허로 만드는 등의 파괴와 약탈 행위를 자행하였으며 공포에 빠진 서로마 황제는 라벤나를 떠나 로마로 달아났다.[15] 이 지경인데도 아에티우스는 갈리아에서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군대가 아틸라군을 막을 만한 전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 아에티우스의 군대라는게 훈족에게서 데려온 용병을 주력으로 삼아왔는데 아틸라와의 싸움에선 이들을 쓸 수 없었고 따라서 아틸라군을 상대할 만한 전력이 되지 못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16]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그래도 아에티우스는 일부의 병력을 동원, 아틸라의 진군과 보급에 훼방을 놓으며 그의 진군 속도를 늦추었다고 한다. 그 사이 아틸라는 포 강에 이르렀고 이곳에서 로마 수도장관 트리게티우스, 전직 집정관 아비에누스 그리고 교황 레오 1세로 구성된 로마 사절단과 교섭을 한 뒤 물러났다.
서기 453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이 아에티우스의 아들과 결혼했다. 이렇게 아에티우스의 아들이 테오도시우스 황실과 연결되자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에티우스가 자신의 아들을 새로운 황제로 등극시키지 않을까 불안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었던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와 황제의 환관이었던 헤라클리우스가 황제의 의중을 눈치채고 아에티우스 암살 음모를 꾸미게 되었으며, 다음해였던 서기 454년에 황실 궁전에서 아에티우스가 황제를 알현하던 도중, 황제가 휘두른 칼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로써 아에티우스는 볼모 생활, 전쟁, 권력 투쟁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게 되었다.
3. 사후
아에티우스의 죽음으로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권력이 공고해 진 듯했으나[17] , 그 발렌티니아누스 3세도 그로부터 단 1년 만에 암살당하고 말았다.[18]
막시무스는 아에티우스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최고 군사령관의 직위를 요구하고 있었는데 다른 살해 공모자였던 헤라클리우스는 황제에게 또 다른 아에티우스가 나올 것이므로 누구에게도 최고 군사령관의 직위를 주어선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때문에 황제는 이 요구를 거부하였고 이에 앙심을 품은 막시무스는 황제가 근위병으로 삼았던 아에티우스의 옛 부하 둘을 부추겨 황제가 성당을 방문하러 로마로 행차하였을때 황제가 말에서 내리자 암살케하고 헤라클리우스도 더불어 살해하였다.(...)[19]
암살을 단행한 막시무스는 원로원에 황제 선출을 의뢰하였다. 황제에겐 자식이 없었고 또한 아무도 정통성이 없던 상태였기 때문에 과거 로마 공화정 시대로 돌아간 것처럼 원로원 의원 투표로 황제를 선출키로 했지만 사실상 명분상의 일일 뿐이었고, 막시무스가 황제로 선출되었으며, 황제의 미망인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결혼함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은 그의 황제 등극을 인정하지 않았다.
황제가 된 막시무스는 과거 아에티우스에게 서고트족을 연합하게 함으로써 아틸라와의 싸움에 도움을 준 바 있는 아비투스를 최고 군사령관으로 임명한 뒤 갈리아로 보냈다. 아비투스로 하여금 갈리아에 있는 아에티우스가 이끌던 병력들을 이끌고 서고트족을 방문하여 새로 왕위를 계승한 젊은 왕의 왕위를 인정하고자 하는 목적에서였다. 이때 리키니아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이 북아프리카를 지배하는 반달족의 왕인 가이세리크(겐세리크)의 아들에게 시집가기로 되어있는데 막시무스는 이를 파기해버렸고 이에 분노한 가이세리크는 직접 군을 이끌고 로마를 공격했다.
하지만 로마에는 더이상 아에티우스의 군대가 없었고, 군사령관인 아비투스는 갈리아에서 서고트족을 방문 중이었으므로 이에 무방비로 공격받게 되었다. 막시무스는 혼란에 빠져 원로원 의원들을 데리고 로마에서 달아나려고 하다가 이것이 시민들에게 발각되어 분노한 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고(...) 로마는 410년에 알라리크에게 약탈당한 이후 45년 만에 두 번째로 약탈당했다.[20]
4. 평가
아에티우스에 대한 서구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호의적이다. 그는 우선 '''서로마의 멸망을 20~30여 년 뒤로 물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또한 아틸라를 격파함으로써 훈족의 무적 신화를 산산조각내었다. 그가 아틸라를 격파한 것이 아틸라의 죽음으로 이어지진 않았으나 훈족 아래에 복속되었던 게르만족이 훈족을 더 이상 겁내지 않게 하였고 그 결과 아틸라가 죽자마자 이들은 훈족에 반기를 들어 그들을 유럽에서 몰아내게 된다.
특히 에드워드 기번은 아에티우스를 '''최후의 로마인'''[21] 이라고 평가하였고 그가 아틸라를 격파한 카탈라우눔 전투를 두고 '''서로마 제국의 이름으로 이룩한 최후의 승리'''라고 평했다. 이러한 시각은 대체로 많은 역사학자가 동의하며 로버트 페널의 경우 "이미 서로마는 수많은 야만족들의 난입으로 통치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를 유지할 재정도 없었고 군대도 없었다. 하지만 아에티우스라는 걸출한, 그리고 최후의 로마인이 서로마에 존재하였고 바보같은 황제에 의해 암살되기 전까지 그는 이 무너져가는 제국을 지탱하였다." 라고 평했다.
물론 스틸리코가 그러하듯이 아에티우스 역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북아프리카의 상실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한 실책이 있었다는 것. 이에 대해 기번은 '''로마엔 해군이 없는 상태'''로 북아프리카의 상실은 시간 문제였으므로 이를 아에티우스의 책임으로 돌릴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아에티우스와 보니파키우스의 내분은 단지 계기만 마련해 주었을 뿐이었고, 만일 이러한 계기가 없었더라도 다른 계기로 이민족의 누군가가 북아프리카를 침공했을 것이며 이렇다면 종교문제로 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심한 북아프리카는 그들에 의해 점령당했을 것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어느 정도는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보니파키우스가 결코 아에티우스에게 밀리지 않고 오히려 뛰어넘는 재능을 가진 걸출한 장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아프리카를 반달족으로부터 지켜낼 수 없었다는 점을 본다면 분명 북아프리카를 지킬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북아프리카에서의 대규모 이민족 침공은 스페인 내에서의 이민족 간의 세력 다툼이 우열이 정해진 뒤 곧바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봐도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하지만 보니파키우스와 같은 뛰어난 장군이 아에티우스와 협력하여 국가를 지키는 데 쓰이기보단 둘이 내분을 벌여 한 명이 죽어야 했다는 점은 서로마 제국으로서는 상당히 안타까운 손실임에 틀림없다.
비록 아에티우스 역시 보니파키우스를 제거하는데 열중하였기 때문에 이 점에서 아에티우스를 비난할 수 있는 소지가 있어 보이나 이는 아에티우스 때문이라기보단 당시 서로마 제국 정치구조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의 로마는 무능한 지도자들이 지배하였으며 이들은 위기를 타파할 능력도, 그리고 위기임을 인식할 능력조차 갖추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과거 서로마를 홀로 지탱한 것이나 다름없던 스틸리코를 단지 정치적으로 위협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처형하였고 아에티우스와 보니파키우스가 유능하고 군부내의 유명한 인사라 하여 둘의 사이를 오가며 한쪽을 제거하려 들었다. 위의 두 걸출한 장군들은 멸망 직전의 서로마 제국으로서는 귀중한 자산임이 틀림없었으나 서로마 정부는 이런 것은 아랑곳 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두 장군을 화해시킨 뒤 둘을 전선에 내보내야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당연했을 서로마 정부는 둘을 부추겨 싸우게 하였다. 이로써 보니파키우스는 그의 뛰어난 재능을 고작 아에티우스를 격파하는데 쓰다가 죽고 만다.
또한 아에티우스는 이렇게 망해가는 현실은 보지 못하고 내부의 유능한 장군을 제거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무능하고 무지한 황실과는 달리 서로마의 안보를 책임지는 책무에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사실상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으면서도 이탈리아에 머물지 않고 계속 갈리아에 있으면서 30년에 걸쳐 이민족들과 전쟁을 벌여왔고 이 때문에 갈리아의 이민족들은 이탈리아를 전혀 넘보지 못했다.
게다가 아에티우스는 어쨌든 간에 당대 1급 군인이었다. 서로마보다 상태가 훨씬 양호했던 동로마 제국조차 감당하지 못했던[22] 아틸라가 직접 이끄는 훈족과 맞서 게르만 연합군을 규합하여 그 지휘를 맡았다는 것은, 그의 군사적 능력이 당대 로마와 그 주변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아에티우스가 아틸라를 직접적으로 막지는 않았으나 그가 배후에서 아틸라군을 노림으로써 아틸라가 포강까지만 전진하고 교황 성 레오 1세와의 강화를 받아들인 뒤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게 되었던 것이었다.[23] 이는 불과 5년 뒤에 가이세리크가 로마를 약탈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분명 가이세리크보다 아틸라의 세력이 더 막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틸라가 그냥 물러난 것은 그만큼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아에티우스의 존재를 신경썼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즉 '''망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고 이민족에 의해 누더기가 된 서로마 제국을 한 개인의 능력으로 지탱'''한 것이다. 따라서 많은 역사가들은 아에티우스에게 '''최후의 로마인'''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그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현재도 옛 서로마 제국 땅이었던 유럽의 라틴계 국가들(루마니아는 동로마 제국이 있었던 발칸 반도의 북동쪽에 위치한 나라이므로 제외)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특히 프랑스인들은 지금의 프랑스 땅인 갈리아를 적극적으로 수호했다는 점에서 자국의 위대한 영웅으로 여긴다. 한편 자신들을 훈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그에 따라 아틸라를 자국의 위인으로 추앙하는 헝가리와 터키, 몽골에서는 조상들의 리즈시절에 찬물을 끼얹은 적이자 철천지 원수의 이미지가 강하다. 동아시아 고대사로 치면 국수주의 성향 중국인들과 중국공산당 입장에서의 을지문덕 및 안시성주와 비슷한 위치고, 동아시아 중근세사로 치면 일본 우익사관론자들과 혐한 성향 일본인들 입장에서의 이순신, 권율, 곽재우와 비슷한 위치이며 근현대사로 치면 북한, 중국 등 반서방 국가들과 친중파 및 종북주의자들 시점에서의 한국전쟁 당시 한국과 UN군참전용사들과 비슷한 위치라 할 수 있다.
[1] 아이티우스라고 발음하기도 하나 아에티우스가 더 정확한 발음. 게르만어의 ae는 e와 다른 발음을 낸다. 인명을 쓰고 있는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아이티우스의 발음이 잘못된 표현이고 아에티우스라고 발음하는 것이 맞는다고 하고 있다.[2] 스키타이족 출신이었다고 한다.[3] 서고트족이라고도 함.[4] 그의 아버지는 서로마의 최고위 군사책임자였던 기병대장을 420년까지 역임하였기 때문에 친아들인 아에티우스는 볼모로서 큰 가치가 있었다.[5] 서로마 말기긴 했어도 공화정의 흔적인 집정관 직위는 이때도 꽤 인기직이었는데 이는 스틸리코가 호노리우스 황제와 공동으로 집정관을 지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집정관'이라는 직함이 갖는 권위의 힘을 무인 출신의 권력자들이 빌리려 했기 때문이었다.[6] 요하네스는 순수한 문관 출신으로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황제들과는 달리 아리우스파를 비롯한 모든 종파의 기독교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이는 당시 여러 종파들이 난립하고 있던 서로마의 정치가들에게는 매력적인 조건으로 비춰졌다.[7] 영어로 번역하면 Master of Military, 즉 군대의 최고 책임자라는 뜻이다. 최고 군 사령관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8] 본래 존재하지 않은 직위였는데 콘스탄티누스 1세가 근위대를 해체하면서 보병대장(Magister Peditum), 기병대장(Magister Equitum)이라는 직위를 신설하였고 각 속주의 주둔군에 두게 되었다. 로마 말기에 들어서 보병대장과 기병대장의 구분없이 한 지휘관이 기병과 보병을 한꺼번에 지휘하는 일이 잦아졌고 때문에 그 지휘관을 그냥 최고 군사령관이라고 부르게 된다.[9] 동로마 제국에서는 황제 아래에 여러 명의 마기스테르 밀리툼들이 있었지만, 서로마에서는 그 사이에 '마기스테르 우트리우스퀘 밀리툼'(최고 사령관이라고 번역된다)이 있었다. 서방 제국의 모든 군대를 통솔할 수 있는 직위였고 서로마의 황제들 대부분이 무능하거나 너무 어렸기에 이들 최고사령관들은 자연스럽게 제국의 실세가 된다. 스틸리코, 아에티우스, 리키메르, 그리고 오레스테스가 모두 이 직위에 있었다.[10] 기번의 기록에 의하면 아에티우스와 보니파키우스는 1대 1의 대결 을 벌였고, 여기서 아에티우스는 패배하여 낙마하였으나, 보니파키우스는 옆구리에 창상을 입었다고 한다.[11] 이들은 훗날 스위스인들의 조상이 되는 헬베티아 족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 부르고뉴인들이 된다.[12] 겐세리크/게이세리크로도 불린다.[13] 본인의 결혼 지참금으로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약속했다고... [14] 아틸라 역시 당시에 꽤 고전하고 있었는데 아틸라의 공격을 받던 아우렐리아눔의 주민들이 주교 아니아누스(Anianus)의 독려하에 필사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이었다. 아틸라가 진격하면서 갈리아의 도시들을 쑥대밭으로 만든 게 되려 역효과를 불러 일으킨 셈.[15] 이때 라벤나를 비롯한 북이탈리아가 폐허가 되었고 또 다른 북침을 겁낸 황제는 아예 로마에 눌러앉았다. 즉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 명목상 수도로 전락했던 로마가 아틸라의 침공 이후 황제가 거주하는 진정한 수도로 다시 복귀한 셈이었다. 이 시점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느냐만(...).[16] 갈리아에서 아틸라군을 격파했을 땐 서고트족과 연합하여 간신히 맞먹는 전력을 갖추었으나 이탈리아에서는 단독으로 상대해야 했다.[17] 이때 원로원에 출석한 황제가 아에티우스의 죽음을 합리화하는 발언을 하자, 원로원 의원인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폐하, 전 폐하의 정확한 동기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제가 아는 건 '''폐하께서 자신의 왼손으로 폐하의 오른손을 잘라버리셨다'''는 것입니다."라고 발언했다고 한다.[18] 이렇게 된 이유가 매우 복잡한데, 아에티우스의 암살을 부추긴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전에 막시무스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전차경주 내기를 하였고 여기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이기자 막시무스는 우선 반지를 주어 돈을 갚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는데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이 반지를 이용하여 막시무스의 아름다운 부인을 불렀고 남편이 부른다고 생각한 부인이 황제의 안뜰로 나오자 그녀를 범해버렸다(…). 당연히 부인이 집으로 돌아가 막시무스를 상대로 황제에게 자신을 팔았다며 저주한건 당연지사였고 극도로 분노한 막시무스는 황제에게 복수하겠다고 맹세했던 것.[19] 이때 옆에 있었던 로마 병사는 모두가 예전 아에티우스를 따랐던 병사들로 그들 가운데 아무도 황제나 헤라클리우스를 도우려 나서지 않았다고.[20] 다만 약탈 자체는 그렇게 심각하거나 위협적인 수준도 아니었다. 하지만 한때는 세계를 제패하던 제국의 심장부가 야만족에게 털렸다는 것은... 반달리즘 참조.[21] 이건 누구라고 확실하게 정의된 바가 없는 별칭이다. '최후의 로마인'이라고 불리는 인물은 많다.# 다소 '문학적' 으로 붙여진 경우, 동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물론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도 '최후의 로마인' 이라 불린다. 콘스탄티노스 11세의 경우 고대 로마 제국에서 그대로 이어져 온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라는 점에서, 니콜라이 2세의 경우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 라고 불렸다는 점에서.[22] 그러나 이것은 동로마 제국이 사산 왕조 페르시아로 대표되는 강적들을 동방에 두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로마 제국 입장에서 동방 속주들은 어지간한 서방 속주들 다 합친 것보다도 귀중한 돈줄이었으며, 이러한 동방 속주에 대한 위협에 느낀 위기감은 상당했다. 막말로 서북방 일대는 하다못해 콘스탄티노플 삼중성벽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동방에는 그런 절대 방어선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틸라의 힘이 동로마 제국 전체를 압도하진 못했으며, 동로마와 서로마의 관계는 생각처럼 양호한 편이 아니었다. 동로마는 서로마에 공작활동을 벌이고 서로마는 동로마를 공격하려 하는 의혹을 받는 등(스틸리코만 하더라도 학자에 따라서는 '서방 속주들 개판되고 있는데 동로마 공격에만 골몰했다'고 까는 경우가 왕왕 있다.) 서로 우위에 서기 위해 물밑에서 상당한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관계가 좋을 때에도 이 시기 동로마군 관련 기록을 보면 평화 시에도 최소 1/4, 위기시엔 거의 절반 이상의 군대가 '''상시적으로''' 동방 속주 방호에 투입되어 있어 동로마도 할 만큼 했지만 여력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신창이의 서로마군이 꾸역꾸역 외적을 막아내고 평화를 강요하는 모습은 놀라울 따름.[23] 전염병이나 사기 저하 등 영 좋지 못한 사정이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