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필리오
[image]
1. 개요
극진공수도 IKO 1소속 선수이자 트레이너. 역사상 최초로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 세계 챔피언으로, 수련 중에 보여준 여러가지 퍼포먼스로 극진관련으로 최강 논쟁을 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선수. 가장 뛰어난 챔피언중 한 명으로 자주 언급되며, 극진회관 선수로선 최초로 K-1선수로 2000년대 초반까지 활약했다. K-1의 초기 선수중 한명인 앤디 훅과의 라이벌 관계로 유명한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앤디 훅과의 대전에서 연승했던 것으로 유명. 심지어 K-1대뷔 무대에서도 한방에 앤디 훅을 KO시켜버렸다(...). 그러나 그랬던 그가 K-1무대에서 제롬 르 밴너에게 KO패를 당하자 공수도 수련생들이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2. 극진공수도 시절의 에피소드들
강자가 많은 극진 브라질 지부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세계 대회에서 앤디 훅과 라이벌 구도를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5회 세계대회에서 앤디 훅과 시합 중 벌어진 에피소드가 일본에선 매우 유명했다. 앤디 훅은 4회 세계대회에서 현 극진회관 관장인 마쓰이 쇼케이(문장규)와 결승전에서 싸우다 패해 준우승했기 때문에 5회 대회에서는 우승자로 상당히 기대를 모았다. 프란시스코 필리오와 앤디 훅은 시합 내내 호각으로 싸웠는데, 공방을 주고받던 중 시합이 끝나는 북소리가 난 바로 직후 필리오의 상단 돌려차기에 앤디 훅이 KO 당한 것. 앤디 훅의 조국인 스위스 지부 코치들은 시합이 끝난 뒤에 쓰러진 것이니 KO는 무효라고 주장했으나, 시합 동영상을 보면 딱히 앤디 훅이 시합이 끝났다고 방심했다고 보기도 뭐한 상황. 심판진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었는데, 최고 심판 자격으로 자리를 지키던 최영의 총재가 "무도가가 시합이 끝났다고 방심하고 있다가 쓰러진 건 어찌 됐든 패배한 거다."라고 주장하여 필리오의 승리가 된다. 그 후 엔디 훅은 정도회관에서 전향 오퍼를 받고 K-1으로 향하게 되고, 필리오는 5회 대회에서 3위.
그런가 하면 100인 대련 당시의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100인 대련이란 100명의 유단자와 연속 대련을 하는 것으로, 극진공수도 역사상 완수자가 21명뿐이다.[1] 특히 극진공수도의 격렬한 스타일로 스파링을 하고 나면 이게 끝날 때쯤엔 도전자가 거의 초주검(...) 상태가 되어[2] 병원에 실려가거나, 최소 며칠 정도의 요양이 필요하거나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 그러나 필리오는 한판승 26, 우세승 50, 무승부 24로 무패 달성을 했을뿐더러, 대련 와중에는 '''"배고픈데 뭐 좀 먹고 하면 안 될까요?"'''라고 하다가, 대련이 끝나자 밥 먹을 수 있다는 기쁨에(...) 동료들과 치킨집으로 달려가 맥주를 곁들인 치킨을 먹었다. 이 에피소드 덕택에 그야말로 '''괴물'' '같은 체력을 지닌 것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동영상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는데 다른 도전자들은 마지막 즈음 가면 팔을 제대로 들어 올리지도 못한다. 더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필리오는 바로 전날 조국인 브라질에서 브라질의 극진가라데 유단자들을 상대로 100인 조수를 했지만 너무나 손쉽게 승리하였기 때문에 잔부상이나 체력 소모조차 거의 없어 바로 다음날 100인 조수를 다시 한 것이다.
그 이후 7회 극진 세계대회에서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우승하게 된다. 이게 어느 정도의 사건이었냐면, 올림픽 태권도 시합에서 금메달을 외국인 선수들이 전부 휩쓸었다면 한국 사람들이 받았을 만큼의 충격을 일본에 끼쳤다. 필리오의 우승을 기점으로 외국 지부 선수들의 기량과 육체 능력이 종가인 일본 선수들을 압도한 것으로 평가받기 시작한다.
이런 에피소드들로 인해 최영의가 생전에 필리오를 가리켜 '''"내 전성기 때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다."'''라고 까지 평가했다.[3]
3. K-1 선수 시절
일본에서 승승장구를 하던 시절, 2대 극진회관 관장인 문장규가 필리오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당시 필리오는 복싱 프로모터들이 프로 복싱 시합에 나가지 않겠냐고 물어오던 시절이다. 그러나 필리오는 자신의 기술 베이스가 가라데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가라데 기술을 살릴수 있는 격투기 시합에 나가고 싶어했다. 이 시기에 K-1 측에서도 극진회관에 선수 출전을 물어오고 있었기에, 문장규 관장도 출전에 동의... 이 덕분에 극진 사상 최강의 챔피언이 K-1에 나간다는 이슈거리가 되었고, 당시 일본을 비롯한 무술계에 상당한 충격을 던졌다.
데뷔 상대도 하필이면 앤디 훅(...)... 그러나 예상 밖으로, 필리오의 숏 훅 한 방에 앤디 훅이 다운되어서 데뷔를 KO승으로 장식하게 된다. 그 이후 어네스트 후스트에게 경기 내내 페이스에 밀리면서 첫 패배를 당하지만 K-1 Revenge '99에서 후스트와 다시 맞붙게 되는데 1라운드에서 후스트에게 라이트 펀치를 날리며 코너로 몰아 넣은 후 양훅으로 후스트를 KO시킨다. 그 이후 프랑스 마르세이유의 악동 시릴 아비디와의 시합에서는 아비디를 로킥 TKO로 이기고 우주 맷집 레이 세포와 무승부를 하더니 피터 아츠와의 시합에선 아츠의 정강이를 깨뜨렸다.[4]
그러나 안면방어에 약점을 드러내다가, 마이크 베르나르도에게 라이트 오버 핸드를 맞고 대자로 뻗더니 제롬 르밴너에게 1라운드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맞고 KO를 당한다. 게다가 이때 쓰러지면서 링줄에 고개가 걸렸는데 하필이면 그쪽에 있던 카메라가 필리오의 표정을 잡게 되면서 그야말로 처참한 KO패가 되었다. 이를 두고 천 년에 한 번 있을 KO 라는 평을 듣기도...
이 패배로 인해 일본의 전통무술계는 '''최강이라던 극진 공수도 선수가 킥복싱 선수한테 졌어!''' 라며 큰 충격을 받았는데, 이후 심지어 극진의 실전성에 대한 논란까지도 나온다. 한편, 극진에서는 가라데 챔피언이 입식격투의 전설적인 선수들과 싸워서 그 정도 성과를 보여준 것 자체가 이미 대단한 것이라고 보고 있는 편이었다. 맨손 격투기인 가라데를 기본으로 해서 그래도 나름 입식격투기에서 활약했으니..[5]
한편으론, 필리오는 이후의 경기에서 '''KO당하지 않는데 초점을 둔''' 방어형 플레이로 전환하는 바람에 시합이 매우 재미없어졌으며, 경기력도 떨어져서 그랑프리에서 매번 낙방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이후에는 나름 선전하여 '''2001년 월드 그랑프리에서 준우승을 차지한다.'''[6] 이후 무릎 수술을 하면서 한동안 쉬다가 2003년에 다시 K-1에 나왔으나, 시합스타일이 너무 정적으로 변해버린다. 2004년 일본 부도칸에서 열린 Kyokushin vs K-1 2004 All Out Battle에서 당시 챔피언인 레미 본야스키를 판정승으로 이긴 후 잠정적으로 은퇴.
그러나, 필리오의 뒤를 이어 K-1 월드 그랑프리 준우승자 글라우베 페이토자나 에베르톤 테세이라 등이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어 극진회관의 프로격투기 무대 출전은 오히려 탄력을 받은 편....이었지만 정작 K-1이 몰락해 버렸으니 말이다.
4. 기타
프로격투기 무대에서는 은퇴했으나, 굵직한 활약도 많았고, 현재에는 격투기 무대에 나서는 극진 선수들에게 조언 겸 코치로서 활약하고 있다. 여전히 공수도 수련자들에겐 최강의 챔피언으로 기억되고 있기에, 공수도 수련에도 자주 나타나는 편이다.
그밖에도, 브라질리언 킥이 워낙 인상적이던지라, 그는 몰라도 브라질리언 킥은 따라해보려는 사람들이 가득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골반과 무릎이 유연해야 되는 킥이라 개인차에 따라서는 비슷하게도 따라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기술 중 하나.
[1] 95년 필리오 이후 총 5명이 나왔다. 5명 중 일본인이 4명.[2] 100명이 돌아가면서 한 대씩만 때려도 100대다!-- 하물며 1인당 2분씩의 대련을 하게 되면 거의 2시간 동안 싸우게 되는데, 2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때린다 하더라도 체력소모가 엄청나다.[3] 안타깝게도 최영의는 필리오의 100인 조수를 보지 못하고 1994년 폐암으로 사망하고 만다.[4] 허리 부상도 있던 피터 아츠는 이 부상이 겹쳐서 몇 년동안 K-1을 결장한다.[5] 사실 무에타이와 킥복싱 이외에 다른 무술가가 나와서 그 정도 성과를 거둔 사례가 아예 없기도 했고, 지금도 태권도 선수나 중국무술 선수 출신으로 킥복싱 혹은 격투기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걸 감안하면...[6] 당시 우승자는 마크 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