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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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최영의(崔永宜, Choi Young-Eui)
오오야마 마스타츠(大山倍達, おおやまますたつ)
마스 오야마(Mas Oyama)
신체
173 cm, 85 kg[1]
본관
전주 최씨
출생
1923년 6월 4일, 대한민국 전라북도 김제시 용지면
사망
1994년 4월 26일(향년 70세), 일본 도쿄 도 츄오구
국적
[image] 대한민국[image] 일본[image] 대한민국[2]
가족
슬하 3남 3녀
장남 최광범(1974년생)
차남 최광수(1976년생)
삼남 최광화(1982년생)[3]
1. 소개
2. 이름
3. 일대기
3.1. 20대 청년기
3.2. 30대
3.3. 40대
3.4. 40대 이후
4. 격투 관련
5. 카지와라 잇키와의 애증
6. 명언
7. 기타
8.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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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実践なければ証明されず、証明なければ信用されず、信用なければ尊敬されない。

실천이 없으면 증명할 수 없고, 증명이 없으면 신용받을 수 없고, 신용이 없으면 존경받을 수 없다.[4]

한국명 최영의(崔永宜), 일본명 오오야마 마스타츠(大山 倍達). 한국계 일본인 무도가극진공수도의 창시자.
전라북도 김제시 용지면에서 6형제중 넷째로 태어났고, 태어난 시기가 1920년대 일제강점기인 바람에, 큰 형(최일운)이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할 때(전 우석대 총장), 일본에 있는 항공정비학교[5]에 입학했다가 타쿠쇼쿠(拓殖) 대학에 진학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징집[6]되었다가 일본이 패전한 이듬해 치야코(智弥子)[7]라는 일본인과 결혼한 후에 일본에서 생애 대부분을 보냈다. 이후 무도가로서 성장하여 '''극진공수도가'''로 유명해졌는데 일본에서는 전설적인 격투만화 '공수도 바보 일대'의 주인공으로 알려지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더하게 된다.
1964년에 실전무도를 주창하며 극진회관을 설립, 지금도 일본을 대표하는[8] 무도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해있다. 실제로, 최영의가 창시한 극진공수도를 수련하는 제자들은 전세계에서 600만 명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2. 이름


한국에서는 본명 대신 '''최배달'''(崔倍達)로 더 알려진 감도 있지만, 이는 일본명 오오야마 마스타츠를 한국식 독음으로 읽은 '대산 배달' 의 배달과 원래 성인 최를 합친 것이다. 倍達이라는 이름은 그의 일본식 이름인 '마스타츠'를 말년에 한국으로 귀화하여 개명할 때 그대로 붙여서 지은 것으로, 실제로 최씨 성에 붙여 최배달이라고 사용한 적은 없다. 애당초 한국에선 스스로 '배달'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적이 없고 최영의라는 한국 본명으로 활동했다. 고우영대야망에서 최배달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하면서 실제로 사용된 적 없는 최+배달이라는 조합이 바람의 파이터 등 다른 작품에까지 영향을 준 듯하다. 바람의 파이터는 최영의를 영웅화하고자 사실과 다르게 묘사한 내용이 상당히 많으므로, 엄밀하게 얘기하자면 '''최배달은 최영의를 모델로 한 가상의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수도 있다. 참고로 고대 우리나라를 가리키거나 우리나라 전체,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쓰이는 '''배달'''을 한자로 표기할 때 '倍達'이라 적는데 최영의의 일본식 이름 마스타쯔(倍達)가 바로 그 배달이다.[9] 오야마 마스타쯔는 최영의가 스스로 지은 이름인데, 이름의 특이함 때문에 십중팔구의 일본인들은 그가 외지인(특히 조선 출신)이라는것을 단박에 알아맞췄다고 한다. 다만 이는 민족주의적 발로라기 보단 해외에서 활동하다 보면 자신의 본질을 쉽게 잊기 마련이고, 무도인으로서 초지일관 하지 못함은 정신적인 큰 결함요소가 되기에 '타지에서도 꿋꿋하게 나아가겠다' 라는 투쟁정신의 발로로서 지은 이름에 가깝다.[10]
만약 그 배달을 생각하며 지은 이름이라면 마스타쯔는 배달이라는 순우리말 한자 표기의 일본식 독음에 불과하고, 따라서 최배달이란 이름도 꼭 틀리다고 볼 수만은 없다. 성으로 지은 오오야마(大山) 역시 자신의 원래 성인 최(崔, 높을 최)를 파자하고(山 + 隹) '높다'는 원래 뜻을 살려 대산(大山)이라 지은 듯하지만[11] 이 역시 추측일 뿐, 현재로서 알 수는 없다. 아무튼 마스타츠는 일본인들이 듣기에는 어색한 이름이었으므로 주변 일본인들이 개명하라고 많이 권하였으나, 본인은 죽을 때까지 그 이름을 썼다. 영어권에서는 약칭인 마스 오야마(Mas Oyama)로 많이 알려졌다.

3. 일대기



3.1. 20대 청년기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일본 패전 후 이리저리 방황하던 중 산으로 들어가 공수도 수련을 했다고 알려졌으나 이건 만화 <공수도 바보 일대> 때문에 '''잘못''' 알려진 얘기고, 실제로는 항공학교 졸업 후 대학도 두 군데[12]를 다녔고 최초에는 송도관(쇼토칸;松涛館) 공수도를, 이후에는 강유류(고주류;剛柔流) 공수도를 수련했을 뿐더러 유도검은띠[13] 공수도 외 무술도 섭렵한 인사였다. 사실 산에 들어간 이유도 길거리에서 미군과 싸움을 하여 폭행으로 반죽음을 만들어 놓은 바람에 지명수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이후 무도수련을 위해 두 번째로 입산을 결심하는 시기가 있으나 첫 번째 입산은 도피성이 강했다. 이 시절 미야모토 무사시오륜서를 읽으며 무사시처럼 입산수도에 매진한다. 아마 도장 깨기도 무사시에게서 비롯된 행동이라 할 수도 있겠다.[14]
전일본 공수도 대회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자신의 무도철학을 언론에 밝혔으나 별로 호응이 좋지 않았던 데다 조선인 출신이라고 수시로 트집을 잡히며 도전을 받자, 차라리 본인이 직접 나서서 전 일본을 돌며 도장 깨기 시합을 벌였다. 이런 식으로 최영의는 자신의 실전공수 철학을 증명하려 했다. 대략 이때쯤에 아리아케 쇼고(본명은 다른 이름)를 제자로 들인 듯하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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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를 때려잡고 소뿔을 수도(手刀)로 꺾었다는 일화로 유명한데 정작 실제 영상은 없다. 현재 남아있는 영상은 최배달이 나이가 든 이후 홍보를 위해 촬영한 일종의 페이크 영상으로, 코뚜레를 해놓고 질질 끄는 장면이 전부이고 뿔을 내리치는 장면은 편집을 해놨다. 그래서 사기 아니냐는 말도 나오긴 한데[16], 반론 측에선 위 사진은 그가 소뿔을 손으로 자른 일화가 너무 유명해져서 만들어진 기록영화이고, 영상이 없다 뿐이지 실제로 소의 급소를 쳐서 쓰러뜨리고 나서 소뿔을 잘라내긴 했다고 한다.
사실 사람이 맨손으로 소를 때려잡으려면 한 방에 소의 관자놀이를 노려 뇌에 충격을 주어 말 그대로 즉사시켜야 된다는 주장도 있다.[17] 두개골이 깨져도 소는 미친 듯이 날뛸 수 있기 때문에 최영의 자신도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도축장의 소들을 대상으로 몇 번이고 실패를 거듭하며 연구한 끝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후로도 간간히 일본 내에서도 소를 몇 마리씩 죽였다는 기록이 있고 스페인에 가서도 투우장에서 투우 소와 싸우다 부상을 입었다는 것으로 봐서[18] 최영의가 맨손으로 소를 잡는 행위 전체가 최소한 모두 연출로 이뤄진 사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애초에 최영의의 실전 철학을 고려하면 안한건 안했다고 하는게 맞기도 하고. 후술되어있듯 자식들한테도 소 때려잡았다고 당당히 말한거 보면 진짜 소를 때려잡았거나 아님 희대의 허풍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저런 사항을 고려해서 정리하자면, 최영의가 소를 어찌저찌 잡아서 소뿔을 후드려팬건 맞아보이지만, 여느 유명 무술인들의 일화와 마찬가지로 현재로선 확실한 근거 자료가 남아있진 않다.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다른 무술인들의 일화와 비슷하게 실상은 알려진 내용과 많이 다를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자. 최영의의 업적은 이런 일화성 이야기의 진위나 사실유무보다 '''무술계에 남겨놓은 유산'''들이니 말이다. 최배달을 평가할 때는 당시 가라데 계에서 파격적이었던 풀 컨텍트 방식의 대련체계 도입과 이를 기반으로 한 격투기 인재 배출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것이지, 제대로 된 영상 자료 하나도 찾기 힘들었던 시대의 무용담을 신화처럼 떠받드는 것이 아니다.
최영의의 제자 겸 만화가 카지와라 잇키는 최영의가 사기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재산을 몽땅 날리고 가난에 시달리던 30대 시절의 일화[19]를 '사나이의 성좌'에서 그린 적이 있는데, 돈에 쪼들려서 푼돈이나마 만져보려고 젊은 시절 했던 소 잡는 이벤트를 다시 시도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소가 도대체 덤비지를 않고 죽어라 도망만 다녀서''' 도저히 대결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관객들은 사기라며 돌을 던지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카지와라는 이때 수모를 당하는 최영의의 낙담한 얼굴을 보면서 안타까움에 '차라리 소뿔에 받혀서 쓰러지기라도 했다면 적어도 저런 모욕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다.
2011년 2월 13일 방영된 SBS스페셜 '무림고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편에 최영의의 '소를 때려잡는 조건'이 나왔다.

1) 100 m를 11초에 뛸 수 있을 것.

2) 벤치 프레스 150 ~ 160 kg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을 것.

3) 단청을 손가락 세 개로 잡아끌어 배에 붙일 수 있을 것.

4) 한 손 새끼손가락으로 턱걸이 15개를 할 수 있을 것.

5) 엄지와 검지만으로 동전을 구부릴 수 있을 것.

이걸 다 할 수 있을 때 주먹으로 소를 때리면 소가 즉사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기가 막힌 아들들이 "그러면 아버지는 저 조건이 가능하십니까?"라고 묻자 '''"가능하니까 소를 때려잡았겠지"'''라고 대답했다. 동영상 5분 12초부터.[20][21]

3.2. 30대


해외의 격투기들을 체험한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자신의 공수도 도장인 대산도장(大山道場)을 열었지만 이 최초의 도장은 부지 사기사건을 당하며 문을 닫았다. 그전까지는 미국에서 모은 재산으로 꽤 풍족한 생활을 했지만, 사기사건 이후에는 전기도 끊긴 초라한 달동네에서 생활하며 힘든 시절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을 듣고 알음알음 찾아오는 젊은이들 때문에 다시 도장을 열었고, 이때 영문으로 쓴 가라테 기술서 'What is Karate?' 'This is Karate'를 출판했는데 이것이 해외에서 히트를 치면서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회복하고, 덕분에 일본인 제자들 뿐 아니라 해외에서 온 외국인 제자들까지 모여들면서 도장은 날로 번창했다. 일본에서는 그냥저냥한 수준의 인지도였던 최영의가 오히려 해외에서 먼저 인지도를 얻은 셈. 젊은 시절 미국 등 세계에서 싸우고 다녔던 덕분에 입소문 덕도 좀 보았을 듯하다.
이 당시의 도장 풍경은 변두리의 허름한 도장에 다양한 인종의 덩치들이 우글우글 몰려 거의 싸움 수준의 무지막지한 수련을 하는 살벌하고도 이색적인 모습이었다고 한다.

3.3. 4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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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일본의 유명 스포츠 만화가인 카지와라 잇키(梶原一騎)가 원작을 맡은 만화 공수도 바보 일대(空手バカ一代)의 대히트로 최영의는 단순히 격투기 관련 인물만이 아닌 일반 대중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일본 내에서도 초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이때 최영의는 상당한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극진공수를 단순한 무술도장 수준을 넘어서 사실상 거대기업 수준으로 성장시켰고, 최영의의 영향력도 어마어마하게 커지게 되었다. 허나 이렇게 극진공수가 성장하면서 자연히 이런저런 잡음도 생기게 되는데.. 최영의가 살아있을 때는 워낙 총수로서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니 큰 문제가 없었지만, 최영의 사후 극진이 파벌 싸움 등으로 분열되는 과정을 보면 이때 잡음을 짐작할 수 있을듯.
한편, 극진의 사업이 커지면서 자연스레 공이 있는 카지와라 잇키의 영향력도 커지게 되나, 본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듯 카지와라 잇키와 최영의 사이의 관계는 여러모로 애증이 뒤얽힌 복잡한 사이가 되어버린다. 기타 자세한 것은 카지와라 잇키와 그의 만화 인간흉기 항목도 참조.
공수도 바보 일대(한국명 무한의 파이터)는 지금도 일본에서 격투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추억의 만화지만 작가가 멋대로 최영의의 출생 배경에 대한 설명은 빼면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옹호를 집어넣거나[22] 실제 수련이나 대련 과정과는 관계없이 판타지적인 내용을 마구잡이로 그려넣어 왜곡이 많다는 비판도 받는다. 심지어 '''총알을 잡는 묘사까지 그려넣는 바람에'''(!) 최영의 스스로가 관련 질문을 받으면 매우 난처해 했다고. 이후 한국에서도 바람의 파이터대야망 같은 만화책 등으로 최영의라는 이름이 많이 알려지게 된다. 재미는 그나마 바람의 파이터가 좀 더 좋은 편인데 이것도 현실성은 저 멀리 가있고 사실과는 전혀 다른 판타지스러운 내용이 너무 많으니 주의. 만화니까 허구성이 어느정도 첨가되는건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래도 엄연히 실존인물이 모티브인데 너무 나갔다는 평도 있다. 나중에 오야마의 실제 생애를 다룬 자서전 등이 발간되어 그가 한반도 태생이며 작가의 왜곡에 의해 판타지적으로 과장된 부분들도 있음이 알려졌으나 여전히 극진회관의 대스승으로 존중받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도 잘못 알려진 일화들을 실제라고 믿는 경우도 존재한다.
어쨌든 이 만화의 영향으로 이후 일본매체 등에서 다뤄지는 격투기 바보 캐릭터는 최영의가 모티브인 경우가 압도적이 되었고[23], 가상의 실전 공수 유파는 극진회관을 모티브로 삼는 경우가 많게 된다. 만화 바키의 '오로치 돗포' 같은 경우는 아예 대놓고 이미지를 차용하기도 했다가 후반부로 가면 강력한 주먹에 대해서 이야기할때 하나야마 카오루를 이용해 최영희의 명언을 인용하고 있다.[24][25]

3.4. 40대 이후


40대 이후로는 제자들을 키우는데 매진하여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격투가 기질이 어디 가진 않았는지 하루에 최소 10명 이상과 대련을 계속했다고 한다. 최영의의 노익장 동영상이라고 도는 걸 보면 40대 중반 나이인데도 보다보면 정말 무섭다. 무섭다는 이유에는 크게 몇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약속된 대련이 아니라 실제 대련으로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실제 제자들의 낭심을 걷어차고 살짝이지만 눈을 찌르며 쓰러진 상대에게도 무의식적으로 주먹이 나가려는 모습'''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본인 몸을 혹사시키다 보니 이후 현직 의사인 장남 최광범도 증언했듯[26] 말년에는 관절염 등으로 이래저래 고생을 좀 했다고 한다. 밖에선 절대무술가 이미지가 있으니 격파도 하고 정정하게 돌아다니셨지만 집에 오면 몸이 아프다고 하소연을 했다고. 그래도 평생 현역을 추구했는지 사망 4~5년 전까지도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폐암에 걸려 치료를 받다 호흡부전으로 1994년 도쿄도 츄오구에 있는 세이루카국제병원에서 향년 만 70세로 사망했다.

4. 격투 관련


상기한 일대기에 적혀있듯 그의 무용담은 팩트와 과장이 섞여있는 편인데, 핵심만 말하자면 현대 무술에서 중요하게 평가할건 육체 단련의 중요성과 당시 가라데 계에서 파격적이었던 풀 컨텍트 방식의 대련체계 도입, 이를 기반으로 한 격투기 인재 배출 등이지 지금으로선 확실히 검증할 수도 없는 갑론을박성 무용담을 가지고 서로 뇌피셜 쓰는게 아니다.
일단 최영의의 명망은 확실히 낮다고 보긴 어려운데, 전 세계를 돌며 여러 사람들을 가르쳤고 그 제자 중에는 일회성 이벤트로 가르쳤긴 하지만 숀 코너리요르단 국왕 일가도 있고, 장관도 몇 명 있었던 듯하다. 이게 이후 그가 더 유명해지는데 도움이 된 측면도 있고.
사실 일본 사회에는 사무라이 전통이 남아있는지 최영의처럼 신격화, 영웅화된 무술가들이 꽤 있는 편인데, 미야모토 무사시(이천일류 창시), 카노 지고로(유도 창시), 마에다 미츠요(유도 전파, 브라질리안 주짓수), 우에시바 모리헤이(아이키도 창시)부터 시작해서 미후네 쿠조(유도 10단), 시오다 고조(아이키도 유파 양신관 창시), 와카키 다케마루(웨이트) 등 외에도 동시기에 살았던 기무라 마사히코(유도)나 역도산(프로레슬링 도입)에 이르기까지 많은 무도가들이 영웅화된 바 있다.
단, 종합격투기 PRIDE와 더불어 일본 격투기의 양대산맥이자 세계 입식타격기의 최고봉이었던 K-1의 출발이 극진공수도[27]인걸 생각해 보면 창시자인 최배달의 영향력 또한 결코 무시할 순 없다. 킥복싱 또한 실전공수 VS 무에타이 기획에서 시작하기도 했고 지금도 실전무술하면 극진가라데가 떠오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태극권의 진노인과 붙었다는 얘기가 꽤 유명하나 이는 루머가 현실이 돼버린 케이스다. 최영의가 태극권 고수가 있다는 소리에 대결을 하러 갔지만, 70세가 넘으신 분이라 대결은 못하고 일주일간 머물면서 서로의 무술을 보여주고 헤어진 케이스인데 그 이야기가 와전되어 흔히 무협소설의 은거 고수 VS 철부지 최영의의 대결이었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이 부분이야 딱히 그의 실력과 연관된 부분이 아니므로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최영의 무적 전설에서 한가지 고려해야 할 부분은 최영의가 세계를 돌며 강자들과 대결했던 당시에는 거의 '무명인물'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그가 대결을 할 수 있었던 상대도 당대의 진정한 최강자들인 복싱 헤비급이나 프로레슬링 챔피언이 아니라 어느 정도 네임밸류가 떨어지는 아마추어 수준인 상대들이 대부분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봐도 UFC 챔피언이 일개 무술가가 도전한다고 곧이곧대로 싸워줄 리가 없다. 게다가 최영의 본인이 밝힌 바로도 정말 강한 상대는 눈 찌르기나 불알깨기.. 등의 치사한 수법으로 겨우겨우 이긴 경우도 있다고 한다.[28] 그 예로 미국에서는 프로레슬러와 대결하다 도저히 뭐가 안 통해서 치사하게 반칙 써서 이겼다거나 10대 청소년에게 싸우다가 몇번 나가떨어지자 방심한 틈을 타 기습으로 이겼던 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긴 건 이긴 거라지만 덕분에 열 받은 관객들의 린치를 피해 도망다니기도 했다고. 일설에는 4~5번 패배했다는 말도 있다. 카포에라를 쓰는 브라질 출신의 노동자와 봉술을 쓰는 요르단 국왕의 보디가드와 10대 브라질 유술 견습생 등이 있다고 전해진다. 물론 UFC 챔피언도 패배 기록이 있는 마당에 컨디션이나 운 등도 중요하게 좌우하는 실전 무대에서 무패 신화가 더 거짓말 같긴 하지만.
자서전을 통해 프로 복서나 레슬러들을 상대로 싸웠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기록에 없는 선수들이라고 한다. 프로레슬링은 그렇다 쳐도[29] 복싱의 경우 프로는 물론 아마추어라도 19세기 선수들까지 연감으로 정리되었는데, 최영의와 싸웠다는 선수들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참고로 이소룡도 아마추어 복싱 경력을 찾아볼 수 있다.[30] 때문에 비판론자들은 특유의 마케팅으로 인기를 끌긴 했지만 과도한 신격화는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배달의 일생 최대 라이벌로 알려진 '톰 라이스'[31]의 경우 바람의 파이터의 작가 방학기가 무작정 월드클래스급의 복서 출신으로 살인 주먹으로 유명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론 하와이, 뉴욕 등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프로 레슬러였으며[32], 그와 경기를 치른 바도 있는 루 테즈[33]는 톰 라이스가 풋볼 선수 출신 선수였긴 했지만 아마추어 레슬링이나 유도, 가라데 등을 수련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으며 최영의와 톰 라이스가 겨루었다는 이야기 또한 금시초문이라 밝혔다. 물론 이 부분은 그가 몰랐을 뿐일 가능성도 있다. 방학기의 만화에서는 역도산과 최영의 사이의 감정의 골이 생긴 계기도 역도산 본인이 패배했던 톰 라이스를 최영의가 이겼기에 자존심이 상해서라는 식으로 설명하지만 역도산과 톰 라이스는 총 16번이나 경기했으며 5승 5패 5무의 전적을 사이좋게 나눠 가지고 있다. 이때의 프로레슬링은 지금처럼 WWE와 같은 메이저 단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각 지방 단체들이 순회하며 흥행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역도산, 최영의, 엔도 고기치 등이 이 즈음 미국에서 활동했으며,[34] 시대특성상 워크를 깨고 시멘트 매치[35]로 돌입하는 상황은 잦았으나 만화 등에서 묘사되듯이 지하에서 목숨 걸고 살인 경기를 펼치는(…) 상황은 없었으며, 규모만 작았다 뿐이지 오늘날과 같이 워크가 존재했다. 다만, 초기 프로레슬링은 서커스단과 함께 순회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과 함께 경기 중간중간 격파 시범 등의 기예를 선보였을 가능성은 있으며 비슷한 이야기를 자서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최배달 본인 말에 의하면 톰 라이스와 붙었다가 한대 맞았는데 나중에 보니 치아가 나갔다고.
참고로 의외라면 의외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실전 레슬링 무도와 같은 개념은 동시대에 남아시아에서 만연하게 퍼져있었다. 관련 얘기는 안토니오 이노키 문서에 가면 있을 것이다. 이곳도 동북아쪽과 비슷하게 서구열강에게 찢기면서 반서구적인 감정과 더불어서 민족심의 고취를 목적으로 이런 식의 맨몸격투에 대한 관심이 많았었다. 다만 동아시아와 다른 점은 동아시아는 오랫동안 폐쇄적으로 이어진 무술들에 대해 초점을 맞췄다면 남아시아는 기존의 전통무술보다는 지금의 무규칙 격투기와 프로레슬링 비슷한 포멧으로 경기장에서 말 그대로 '''무규칙으로 누구 하나 쓰러질 때까지 싸우는 것'''에 초첨이 맞춰진 곳이였다.
다만 최영의가 그렇다고 평범한 범인이었냐 하면 그건 또 결코 아닌 것이, 일단 그는 육중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100m를 11초대에 주파할 수 있었고, 150~160KG의 역기를 누운 상태에서 세트당 수십회씩 들어올렸다고 한다. 또 단청의 서까래를 잡고 몸을 끌어올려 배꼽이 닿게 할 수 있었으며 , 한 손의 새끼손가락 하나만으로 턱걸이를 15개 해보였다고 한다. 나중에는 자극이 되지 않아 여자나 11살짜리 사내아이를 2명씩을 올라앉게 한 상태에서 수십회를 했다고 한다. 다 떠나 떡대만 봐도 장난은 아니다.
주화 동전을 손가락 두개로 반으로 접는 등의 묘기를 지인들 앞에서 자주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다.[36] 다만 남들이 부탁하면 생각보다 쉽게 보여준 모습과는 달리 실제로는 몸에 무리가 가는 묘기였는지, 정말 친밀한 주위 사람에게는 '동전접기를 하고 나면 몸에 무리가 가서 다음날 몸에 두드러기(담마진)가 생긴다' 라고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나..
실제 최영의가 평가받을만한 부분은 체계적인 웨이트 트레이닝 훈련이나 방법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시대에 근력운동을 통해 근력과 파워를 강하게 만드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도 있다. 산 속에서 굶주리며 혼자 수련을 한 에피소드는 만화에서 과장한 것이고, 실제로는 닭꼬치를 몇십 개씩 먹어가면서 영양 보충과 근력 단련에 힘썼다고 한다. 심지어는 마을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을 추스리려고 눈썹을 밀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최영의의 저서들을 살펴보면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가 '무도의 원류를 따져보면 결국은 투쟁의 기술이다. 실전에서 써먹을 수 없는 무도는 과 다른 게 없다'이다. 또한 내공이나 의 존재같이 애매한 추상적인 개념은 죄다 집어 치우고 격투기 기술을 역학적, 합리적으로 체계화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 공수도 서적들을 다수 발간했다. 그리고 이런 점이 서양에서도 합리적으로 인정을 받아 많은 제자들을 얻게 된다.
물론 최영의 본인 입장에선 타고난 유전빨도 좀 있었던걸로 보이는데, 공수도를 배우기 전에도 맨손으로 싸워서 한 번에 7명까진 쓰러트릴 자신이 있었다고 하니.. 최영의의 아들들도 보면 유전이 어디 가진 않는지 젊은 시절 사진 보면 등빨이 장난이 아니다. 그런데다가 스스로도 무도밖에 모르는 바보라고 할 만큼 연습 매니아였으니 한 분야의 대가가 되었을 것이다.

5. 카지와라 잇키와의 애증


태평양 전쟁의 패전 건도 있어서 당시 미국인과 대결하여 승리한 최영의는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 때 마침 만화가 카지와라 잇키가 최영의에게 접근하여 둘은 친분을 나누었다. 꼴마초였던 카지와라는 최영의의 무용담에 감복하여 친하게 지냈고 그 인연으로 최영의를 작중 등장인물로 두 번 써보았다. 이게 반응이 좋았을 뿐 아니라 당시 격투기붐이 불고 있었기 때문에 카지와라는 최영의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매거진 편집부에서는 토론이 일었으나 이미 논픽션 작품을 다룬 적도 있으니 실존인물이 소재라도 안될 것은 없다는 이유로 연재가 결정되었다. 작화를 맡은 건 이미 작중에서 최영의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 '무지개를 부르는 주먹'을 그린 츠노다 지로였다. 제목은 공수도 바보 일대.
이 만화가 대히트하면서 최영의 개인의 유명세에 비해 정작 도장 자체는 그냥저냥한 수준이었던 극진공수도 도장에도 입문 희망자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최영의와 친분을 맺고 도장을 들락거리던 카지와라를 따르는 사람들도 꽤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작화 담당인 츠노다 지로가 오컬트에 흥미를 가져 연재를 끝내고 싶어했다. 사실 이미 그 시점에서 최영의의 에피소드는 다 써먹은지라 만화는 점점 더 황당무계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최영의는 이런 황당무계한 내용에 대해서 난색을 표했다고 하는데 사실 허황된 내용 중에 반절은 최영의의 저서에서 차용해 온 것이고 나머지 반절은 카지와라의 창작이었으니 최영의 측도 마냥 억울하다고만 호소할 수도 없긴 했다.
어쨌거나 츠노다의 강한 희망으로 츠노다는 작화 담당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당시 매거진은 내일의 죠가 연재가 끝나서 더 이상 히트작을 종료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작화 담당을 카게마루 죠야로 교체하고 연재를 계속했다. 그러나 전술한 것처럼 최영의의 에피소드는 이미 다 써먹었던 탓에 문하생이었던 아시하라 히데유키를 중심으로 작품을 계속했다. 당시 극진공수도는 해외 진출을 주장하는 아시하라파와 보수적인 최영의파로 갈려 있었을 뿐더러 카지와라가 아시하라편을 드니 최영의측에서는 이에 상당한 불만을 표했다.
여기에 최영의와 카지와라가 반씩 출자하여 만든 영화 '지상 최강의 가라테'의 수익분배 문제까지 터지자 두 사람은 결별한다. 최영의는 자기를 주인공으로 만화를 그렸던 츠노다를 포섭해서 카지와라를 뺀 상태로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 갓핸드를 그리게 했다. 이에 분노한 카지와라는 편집부에 압력을 넣었고 당시 작품 자체도 크게 히트하진 못했기 때문에 갓핸드는 고작 9주만에 끝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카지와라는 계속해서 츠노다를 괴롭혔고 이에 츠노다는 자기 작품에서 카지와라를 헐뜯는 말을 집어넣었다가 걸려서 카지와라에게 납치당해 사과장을 쓰는 사건(츠노다 지로 사과장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 후 내일(来日)한 격투가 윌리 윌리엄스와 안토니오 이노키의 매치에서 마침내 최영의가 문하생들과 카지와라를 습격한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실제로 습격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카지와라는 최영의에게 사과를 요구하였고 최영의가 묵살하여 의형제까지 맺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나고 말았다.
그러나 말년엔 화해의 기운이 돌기도 했는데, 카지와라가 병으로 쓰러지자 누군가가 익명으로 편지를 보냈고 그것을 받은 카지와라는 최영의가 보낸 편지라고 확신하였다. 그 후 카지와라는 병 때문에 은퇴하기로 하고 마지막이자 자전적 작품이기도 한 남자의 성좌에서 심혈을 기울여 최영의를 묘사했고 이것을 최영의도 마음에 들어했지만, 카지와라가 결국 1987년 병으로 죽는 바람에 살아생전 직접적인 화해는 하지 못했다.

6. 명언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상냥한 게 무도(武道)다.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없는 힘은 폭력이다.

강한 인간 보다는 약한 인간의 편, 다수 보다는 소수의 편이 되는게 나의 죽기 전까지의 신념입니다.

실천이 없으면 증명이 없고, 증명이 없으면 신용이 없으며, 신용이 없으면 존경받을 수 없다. - 극진의 이념

머리는 낮게, 눈은 높게, 말을 조심하며, 마음을 넓게 하고, 효(孝)를 원점으로 타인을 이롭게 한다. - 극진의 정신


7. 기타


현재 남아있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 그냥 인자하고 건장한 중년, 노년 아저씨로 보이지만 실제 만나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강력한 무술가처럼 보이는 그가 어딘가 아팠을 거라곤 상상조차 안 되지만 한국에 살고 있는 세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지는 예전에 스페인에서 투우 와 싸울 때 치여서 무릎도 안 좋으셨고, 단련을 너무 혹독하게 하셔서 팔꿈치 관절도 안 좋으셨고, 주먹도 맨날 어머니께서 주물러주셨고...'라고 했다. 사망 1년 전인 1993년 '주병진쇼'에 출연했을 때도 손가락 관절 문제 때문에 격파 수련은 안 한다고 술회한 바 있었다. 덕분에 당시 만화 바람의 파이터를 보고 환상을 품던 일부 사람들이 하이텔 등에서 성토하기도 했다고..
사실 의외라면 의외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일 수도 있지만 높은 수준의 격투가들조차도 격한 시합과 사고로 얻은 크고 작은 부상들을 달고 사는 경우가 많다. 태권도 선수들의 무릎, 유도와 레슬링 선수들의 손가락 골절, 무에타이 선수들의 갈빗대와 손 골절 등이 대표적 사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겠지만 확실하게 못박아 두자면, 그 어떤 사람도 평생 강하기만 할 수는 없고 전성기 시절 혹사 당한 사람일수록 부상이 많기 마련이다. 나이 들어서도 강한 것은 대부분 일생동안 쌓은 경험의 결과이며 이마저도 현역으로 뛰는 팔팔한 젊은이들과 진심으로 맞붙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이 성장과 노화를 거쳐 언젠가 죽는 생명체인 이상 당연한 것이다. 이런 모습 덕분에 큰아들은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2010년 2월 13일 방송된 SBS 스페셜에서 의사면서도 틈틈히 격투기 수련을 하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같이 연습을 한 동생은 셋째 아들인 최광화. 이 외에도 유튜브에 찾아보면 관련 인터뷰 영상들이 있다.
최영의의 세 아들 또한 학창 시절엔 주먹에 일가견이 있어 다들 큰 싸움으로 한 번 이상은 정학을 당했다고 한다. 큰아들인 최광범의 후배에게 들은 말로는 최광범이 고등학생 때 1살 위 복학생을 포함한 3명을 상대로 싸움을 했는데 압도적으로 3명을 때려눕혀 전설이 되었다카더라. 실제 당시 사진을 보면 등빨이 장난이 아니다. 그리고 둘째아들인 최광수는 2021년 현재 만 45세이지만 여전히 현역 주짓수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극진가라데 창시자지만 극진가라데만 최고라는 식의 편협한 사고관을 갖진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들 중 한명이 가라데를 배우고 싶다고 최영의에게 물었을 때,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제일 좋은 도장이라면서 집 근처 킥복싱 도장에 보냈다고 한다.
최영의가 일본에 귀화했지만 한국 국적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수국적(이중국적)자라고 아는 사람들이 있고 롯데 신격호 창업주와 비슷한 케이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애당초 신격호는 귀화 여부조차 불분명해서 의혹을 받고 있는 케이스고 한국의 경우 2010년 5월 3일까지는 그 어떤 경우에도 복수국적을 허용하지 않았던 나라다. 최영의는 단지 귀화 후 한국 대사관에 국적상실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국적말소 처리가 되지 않았을 뿐이고[37] 실제로는 최영의가 일본에 귀화한 순간 한국의 국적법상 한국 국적을 자동상실했다고 보아야 한다.[38] 다만 이 때 행정미비 등으로 실질적으로 행정처리가 되지는 않았다는 것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 당장 아들들은 한국 국적자라는 점을 본다면. 덧붙여서 일본은 국적법 개정 이후에도 브라질 출신으로 일본에 귀화한 야구선수 마츠모토 유이치처럼 국적포기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 출신이 일본에 귀화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복수국적을 인정하지만, 복수국적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ex:한국)출신이 일본으로 귀화한 경우(ex:최영의)는 해당되지 않는다. 다만 상기되어있듯 말년에 한국에 재귀화해서 국적회복을 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하여튼 이래저래 국적에서 초월한 삶을 산 양반인건 맞다.
중혼을 한 듯하다. 최영의의 세 아들은 한국 호적에 올랐다. 한국인 부인과의 정식 결혼에서 태어난 장남 최광범[39]은 최영의가 52살에 본 아들이다.# 이외에도 현역 가라데 선수로 활동 중인 차남 최광수를 포함하여 3명의 아들은 한국에서 출생하여 활동 중이다. 일본 호적에서는 치야코(智弥子) 사이에 딸 3명이 있다고 알려졌다. 일본에는 중혼죄가 있는데, 일본 위키에 따르면 일본 법원에서 한국 호적과 일본 호적에 기록된 생일이 다르므로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이었다면 불가능한 상황. 한국 프로필에는 생일이 1923년 6월 4일, 일본 프로필에는 1923년 7월 27일로 기재되었다.
2020년 최영의의 장남인 최광범의 회고에 따르면 1993년 자신이 재수를 하겠다고 했을 때 최영의는 "최선을 다해서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해라. 최선을 다해서라는 것은 한 발 빼는 것이다."라고 했었다고 한다. 삼수를 하여 1995년 최광범이 의대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그 전 해에 최영의는 세상을 떴다. 당시 최광범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일본 도쿄에 가려 했으나, 최영의는 이를 거부하고 부인만 오라고 했다고 한다.[40] 나중에 최광범은 자주 한국에 와서 본인들과 놀아주던 아버지였지만 그런 그였기에 마지막에 약한 모습은 더 아들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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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에서 오른쪽에서 맨 끝이 최홍희, 두번째가 최영의다.
믿기 어렵겠지만 창헌류 시절 초창기 '''태권도와 통합을 시도'''한 적도 있다. 초창기 태권도에 큰 영향력을 끼친 최홍희와 최영의는 서로 태권도와 극진 가라테의 교류를 논하기도 하였으며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심지어 통합까지 고려했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릴 것 같지만 의외로 그 당시엔 그렇게 이상할 건 아니었다. 사실 초창기 태권도 룰과 초창기 극진공수도 룰은 생각보다 비슷했다. 두 무술은 상당한 교류를 했으며 내려차기, 뒤돌려차기, 뒤차기 등 수련방식을 제외하면 사실상 두 무술의 차이점이 없다는 의견도 있을 정도. 다만 이후 태권도는 스포츠화를, 극진공수도는 격투기화를 하고 무에타이식 로우킥을 받아들이는 등 변화를 하면서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물론 이런 형태적 유사성에도 국가나 단체간 이익 문제 등이 있어 통합이 말처럼 쉽진 않았겠지만, 이런 일화도 있었다는 것.
허나 이래저래 해서 통합은 물건너갔고, 극진공수도도 20세기엔 한국에 크게 보급되지 못했는데, 이유는 태권도의 국내 보급을 위해 최배달이 일부러 자기 생애 동안엔 한국에 극진가라테를 보급하지 않기로 해서라고 한다. 1960년대 방한했을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최배달을 만나 "지금 한국에서는 태권도라는 한국 무술이 발전하고 있는데, 당신 무술이 들어오면 태권도가 망한다. 그러니 카라테로 소개하지 말고 태권도로 소개해 달라"라고 부탁하기도 했다고. 그래서 당시 대한뉴스 영상에는 '태권왕 귀국'(...)이란 제목으로 최영의가 한국의 태권도가들을 가르치는 웃픈 영상도 있었다. 그래서 태권도로 소개가 가능했던 것. 최영의는 이와 관련해 '''"태권도가 정착하기 전에는 한국에 진출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는데 이 에피소드는 일본의 격투가들 사이에도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덕분에 극진공수도는 한국계가 창시했고, 극진회관이나 극진관의 경우 지금도 한국계가 관장이지만,[41] 한국의 극진공수도 역사는 생각보다 짧은 편이다. 물론 이전에도 몇몇 도장에서 개인적으로 극진공수도를 가르친 적은 있었지만, 업계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한국에 극진공수도가 도입된 것은 최배달이 사망하고 나서 8년이 지난 '''2002년경''' 무렵부터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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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가라테 바보 일대의 영화판(주연은 치바 신이치)이나 기록영화인 '지상최강의 가라테' 등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한국에서 일본영화는 상영 금지였지만 예외적으로 이 영화는 국내에서도 개봉되었다고 한다.
공수도복의 디자인을 바꿔야한다고 오래전부터 주장을 했는데, 원래 오키나와 공수는 도복이 없이 편한 복장을 하고 수련을 했지만 일본 본토에서는 유도 도장을 통해 수련되던 시기라서 유도 도복의 디자인을 차용해 만들어진 게 가라테 도복이다. 그 때문에 공수도 수련 형태에 맞는 도복과 보호구를 개발하자고 주장했는데 수련용 보호구는 계속해서 개발이 되었으나 공수도 도복은 원래 형태 그대로다. 반면 태권도 도복은 1980년대 초반까지 공수도와 같이 유도복 형태이다가 이후 지금처럼 옷깃이 열리지 않는 티셔츠 형태로 바뀐다.

8.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


  • 공수도 바보 일대, 대야망, 바람의 파이터 - 세 작품 모두 최배달의 전기작품이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에서는 양동근이 최배달 역할을 연기했다. 물론 상기했듯 실제 최배달의 삶과는 다른 점도 많으니 유의.
  • 갓 오브 하이스쿨 - 일본팀 오야마 스기하라(극진공수도 수련생)의 차력이 최배달이다. 주역 중 하나인 한대위도 원래는 최배달을 차력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이미 누가 접신한 상태라서 해태로 바꿨다는 듯.[43]
  • 겟타로보 - 나가레 료마
  • 군계 - 다이토 테츠신: 주먹 하나로 전세계 격투가들과 싸워 전승무패, 권신이라 칭송받았으며, 작중 최초 실전공수유파인 반류회관 및 반류회 가라테를 창시했다.
  • 그래플러 바키 - 오로치 돗포: 모티브를 받은 이 캐릭터뿐만 아니라 진짜 최배달 자체도 작중에 따로 존재한다. 본편과 외전에서 짤막하게 등장.
  • 란마 1/2 - 사오토메 겐마 (물론 외모에서 모티브를 따와서 희화화한 것일 뿐이고, 만화만큼 바보가 아니다. )
  • 소녀더와일즈 - 최달달[44]
  • 수라의 문 - 류조우지 테츠신
  • 아랑전 - 마츠오 쇼잔
  • 용호의 권 시리즈 - 타쿠마 사카자키: KOF XIII에서 바뀐 도트를 보면 위의 노년기의 모습과 미묘한 싱크로율을 보인다.
  • 인간흉기(만화) - 최영의가 직접 나와 괴악하게 변형되는 괴작이다. 여기서 나온 짤방이 바로 귀여워다.
  • 주먹에 산다 - 야마모토 리쿠
  • 포켓몬스터 - 타격귀: 공수도 바보 일대에서 최영의가 한쪽 눈썹을 미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타격귀도 한쪽 눈썹이 없다.
  • 호혈사일족 - 오오야마 레이지
  • 격기 3반 - 권태영
  • 사신소년 - 주인공이 수명을 대가로 죽은 자의 능력을 사용하는데 44화의 제목이 극진가라데 창시자이다.
  • 외모지상주의 - 종건
  • 싸움독학 - 지연우
  • 영화 넘버 3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조폭 조필의 무대뽀 정신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1] 체중에 대해선 말들이 좀 나뉘는 편이긴 하다. 100kg에 육박했다는 말도 있고, 본인이 주병진쇼에서 한 말에 의하면 80kg대를 유지하다 말년엔 90kg대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2] 말년에 재귀화, 즉 국적회복을 했었다.[3] 한국 태생의 세 아들과 일본 태생의 세 딸이 있다.[4] 자신의 강함을 몸으로 실천하고 증명하여 신용을 얻은 최영의가 했던 말이자 극진의 이념. 다만 이건 증명이 아닌 철학적 의미로 보는 견해도 있다.[5] 현재는 일본 항공 고등학교.[6] 이 내용은 최배달의 저작들에서 나오는 내용으로, 내용도 책마다 모순이다. 징용이었느니 지원했다느니 학도병이었다느니 서로 엇갈린다. 실제로는 치바항공대에서는 신풍공격대가 출격한 일이 없다. 철저하게 증언을 바탕으로 과거사를 재구성한 고지마 가즈시(小島一志)와 츠카모토 요시코(塚本佳子)의 조사에 의하면, 최영의는 치바현 다테야마에 있는 건설현장 함바의 노동자로, 특공대원이 아니라 징용공이었다고 한다. 전후 일본 사회에서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지금 와서 보면 지원이 더 거시기하기도 하고.[7] 배우였던 후지마키 준(藤巻潤, 전격전대 체인지맨이부키 장관 역)의 누나로 2006년 사망.[8] 사실 인터넷이 활성화된 21세기 들어서는 한국에서 더 대접해주는 측면도 있다. 실제 혐한이 기본 모토인 일본 넷우익들에겐 재일이라고 조롱을 당하기도 한다. 다만 이건 키보드워리어 한정으로, 일본 무술계에선 여전히 존경받는 인사다.[9] 절대 물건을 전달한다는 뜻의 배달(配達)을 뜻하는게 아니다. 이 경우 일본어로는 하이타츠라고 읽는다.[10] 최영의의 장남의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배달의 민족의 배달을 뜻하는 그것이 맞다.[11] 당시 창씨개명하는 한국인들 중 완벽하게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였고, 대부분 원래 이름의 한자를 파자하는 식으로 지었다. 그 유명한 타카키 마사오(高木 正雄)도 자세히 보면 박정희(朴正熙)라는 이름의 한자에서 몇 자 따왔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창씨개명하는 사람들 중엔 조롱하는 뜻으로 '텐노 헤이카'와 발음이 비슷하지만 한자가 다른 덴노 헤이카(田農炳下)로 짓는 경우도 있었고,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南 次郎, 미나미가의 둘째 아들이라는 뜻)보다 자기가 형님이라는 뜻으로 '미나미 타로'(南 太郞, 미나미가의 큰아들)라 짓는 경우도 있었으며, 산천초목(山川草木, 야마카와 쿠사키), 청산백수(靑山白水, 아오야마 시로미즈), 강원야원(江原野原, 에하라 노하라) 등등 장난으로 짓거나, 성을 갈면 개자식이라 하며 스스로 '견자'(犬子, 이누코)라 짓는 사람도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창씨개명 참고.[12] 타쿠쇼쿠 대학과 와세다 대학(전쟁 징집으로 중퇴).[13] 사실 제국주의 시절 일본은 대학 등 학교에서 유도를 필수과목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다.[14] 그런데 정작 무사시는 실제로 도장깨기를 하고 다닌건지가 불명확하다.(...)[15] 최영의의 자서전/ 회고록 등에 따르면 한일혼혈로 다혈질적인 성격에 최영의 밑에서 배우기 전에도 싸움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훗날 제자 중에 비슷한 타입인 아시하라 히데유키 등이 있음을 보면 제자 복을 이런 쪽으로 타고난 듯.[16] 최영의가 소를 잡았다는 사실이 거짓말이었다면 당대에도 최영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태클을 걸었을 거라는 주장도 있는데, 사실 다른 라이벌들이 생겨난 시기는 이미 최영의가 어느 정도 유명해진 다음이고, 후폭풍을 생각하면 라이벌이라고 해서 과거의 경력에 대해 타인이 함부로 의심을 제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17] 다만 한국의 1세대 프로레슬러 천규덕의 경우 두방 때려 소를 죽이기도 했다. 심지어 15번 때리기도 했다.[18] 그때 그 시절 스페인에서 그것도 국기인 투우판에 맨손으로 들어갔는데 만약 거기서도 홍보영화에서처럼 연출 상황을 보였다면, 지금도 유럽에서는 피 뜨겁기로 유명한 스페인 사람들이 그 꼴을 가만 놔뒀을 리가 없다. 다만 애초부터 정말 소를 잡으려고 들어간 것인지 홍보성이거나 퍼포먼스성으로 들어간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투우 소는 애초부터 투우 경기를 위해 사육됐기 때문에 작은 자극에도 거칠게 반응한다. 이런 소를 잡겠다고 달려들기란 일반 가축장의 소에게 달려듦과는 차원이 달라서 스페인 사람들이 들여보내줬을지도 의문.[19] 사기사건 이전에는 미국에서 제법 돈을 벌어서 당시 기준으로 꽤 호화주택에서 살았다고 한다.[20] 일부에선 나열된 단련들을 차력과 연관짓기도 하는데, 차력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5번 정도나 차력과 연관 지을 수 있을 뿐, 나머지는 그냥 트레이닝이다. 달리기, 벤치프레스와 같은 웨이트, 턱걸이와 같은 기계체조식 일반적인 트레이닝은 다른 무술에서도 중요시하는 부분.[21] 다만 저 5번이 단지 차력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4번과 연관지으면 주먹으로 때리는 무도가에게 필요한 악력과 근력이 그만큼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22] 태평양전쟁에 병사로 징집된 시절에 미군을 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 비행기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나라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들'이라며 경례하는 장면이 1권에 있었다. 그 때문에 1권 보고 불쏘시개 취급한 사람도 꽤나 많다.[23] 물론 애초에 이 만화가 나온 계기 자체가 최영의가 젊은 시절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러 격투가들과 실전을 겨룬 팩트가 있기 때문이긴 하다. 그걸 제자였던 작가가 멋대로 감정이입해서 판타지를 창조했을 뿐. 실제 이 만화 전에도 상기되어있듯 최영의는 이미 해외에서 제자들이 올 정도로 업계에선 나름 알아주는 인물이었고, 이런 이력 때문인지 미국 수사기관에 초빙되기도 하였다. 사실 최영의는 2차 대전 이후 주일미군들에게 가라데를 훈련시킨 경력도 있었는데 이 인연으로 성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24] 총 2번 언급되었는데, 대강 "타격계 가라데의 아버지. 최영희는 예로부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체중x스피드x악력=파괴력' '''이다." 라면서 하나야마의 강펀치의 이론을 설명하는 식.[25] 스트리트 파이터 2 의 모델도 최영의라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정확하겐 류의 모델은 최영의가 아니라 그의 제자이자 극진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에노 요시지다.[26] 아내를 2명 두었는데 상기한 일본인 아내 소생에서 낳은 딸이 세명 있고, 50대 이후 결혼한 한국인 아내 소생에서 낳은 아들이 세명(최광범, 최광수, 최광화) 있다.[27] 정확하게는 극진회 아시하라 도장 출신의 이시이 카즈요시(石井和義)가 1980년 독립해서 설립한 정도회관.[28] 이런 점에서 보면 최영의가 했던 싸움이 UFC보다 더 실전스럽긴 하다.[29] 프로레슬링 또한 NWA 산하의 어지간한 지방단체의 경기들은 대부분 기록되며, 최배달의 최대의 라이벌이라던 톰 라이스는 물론 당시 최영의와 함께 미국에서 활동한 엔도 고키치의 경력 또한 상세히 남아있다. 톰 라이스의 경우 역도산과 경기한 기록은 전부 남았으나 최영의와 경기를 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30] 홍콩의 고등학교배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한 적이 있다.[31] 1914년 몬타나 출신, 1996년에 사망했으며, 루 테즈, 보보 브라질을 비롯한 당대의 레슬러들과 겨룬 선수이기는 하나 일방적으로 열세여서 무조건 3류 레슬러라 폄하받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결코 1류 프로레슬러는 아니였다. 물론 기록이 전부는 아니고 실전과 레슬링도 엄연한 차이는 있겠지만.[32] 주병진 쇼에 출연한 최배달 말에 의하면 복서였다가 레슬러로 전향했다고 한다.[33] '철인'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아마추어 레슬링 출신의 실력파 프로레슬러로, STF, 파워 밤, 루 테즈 프레스 등 여러 기술의 창시자이기도 하다.[34] 이 당시 일본에서 시장 초기 개척을 위해 프로레슬러로 전향한 운동선수들이 다수 있었으며, 최영의 또한 이 붐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크다.[35] 프로레슬링의 정해진 각본을 깨고 선수들이 실전으로 싸우는 상황. 현대 WWE 등을 통해 체계화되기 이전의 프로레슬링에선 꽤 잦은 일이었으며 덕분에 당시에는 그런 상황에서도 상대를 제압해야 하는 실전 강자들이 탑 프로레슬러의 위치를 지킬 수 있었다.[36] 최영의보다 훨씬 체격이 좋은 역도산 역시 이를 보고 기겁했다고 한다.[37] 국적 이탈·상실 반드시 신고 제때 안하면 불이익 당해요. 최영의뿐 아니라 외국에 귀화한 한국인들 중에도 잘 몰라서 혹은 귀찮아서 국적상실 신고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국적상실 신고는 당사자가 직접 해야 하기기 때문에 안 할 경우 한국 정부에서도 파악하기가 힘들다고 한다.[38] 국가법령정보센터 국적법 제 15조 1~2항[39] 현재 의정부 본 정형외과 원장으로 전문의 취득후 군의관으로 병역의무를 마쳤다. 큰동생 최광수도 장교로 의무복무했다.[40] 당시에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무비자가 없었다.[41] 극진회관 관장은 마쓰이 쇼케이, 한국명 문장규. 극진관 관장은 로야마 하쓰오, 한국명 노초웅. 물론 한국계임을 엄청 어필하는건 아니고 이미 국제화되어서 제자들은 다양한 국적이긴 하다.[42] 김경훈이 이때 도입을 주도했는데, 다만 김경훈은 이후 불미스런 일로 인해 극진회관으로부터 제명당했다.(...)[43] 단 패자부활전 당시 스기하라의 차력과 공명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최영의의 자아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했다.[44] 공수도가 아니라 태권도를 사용하긴 하지만 최배달과 태권도의 관계나, 무엇보다 최달달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보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