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이드 윌리엄 톰킨스
1. 개요
미국의 목사.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플로이드 윌리엄 톰킨스는 1850년 2월 7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는 뉴욕 신문사 사장 제임스 톰킨스의 아들로, 1872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뒤 1875년 종합 신학 세미나에서 신학 학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같은 해 뉴욕 올드 삼위일체 교회에서 호레이쇼 포터 주교로부터 부제에 선임된 그는 콜로라도에 선교사로 파견되었고, 1876년 존 프랭클린 스팔딩 주교에 의해 사제로 임명되었다.
톰킨스는 1883년부터 뉴욕 뉴햄프셔, 하트포드, 콘, 시카고, 일리오리, 프로비덴스 등지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리고 1899년 3월 5일 필라델피아 성 삼위일체 교회의 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펠실베니아 교구에서 시민의 삶 개선을 위한 모든 종류의 종교 활동에 열성적이었다. 그는 1913년 총회 부대표로 선출되었고, 설교가 있을 때마다 설교자로 요청받았으며, 가능한 모든 교회에서 설교를 수행했다. 그리고 종교적 주제와 신앙심에 관한 많은 논문을 집필했다.
그러던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대회에 연사로 초대받은 톰킨스는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고, 같은 해 5월 서재필과 함께 한국친우회를 설립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후 1919년 6월 워싱턴에서 일제의 반기독교적이고 비인도적인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했으며,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대중 집회 및 대외 교섭 활동을 벌였다.
1920년 5월, 톰킨스는 필라델피아에서 한국친우회 행사를 개최해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한국 문제에 관한 미국의 거중조정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체택해 미국 대통령과 상원에 보냈다. 그리고 워싱턴 군축회의 개막 직전인 1921년 11월에는 미국 각지의 한국친우회 25,000여 명의 회원을 대표해 미국 대표단 단장 휴즈에게 한국 문제를 중요한 의제로 다뤄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했고, 필라델피아에서 대중집회를 열어 한국 문제 취급과 미국 정부의 거중조정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해 미 국무장관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일제와 마찰을 빛고 싶지 않았던 미국 정부의 무대응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23년 11월, 톰킨스는 관동 대지진 당시 일본인의 한인 학살에 대한 항의서를 증거자료와 함께 미 국무장관에게 제출했다. 이후 목회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1932년 3월 24일 필라델피아에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소천했다. 그가 죽었을 때 신문들은 "그의 강하고 훌륭한 기독교적 성격"에 대해 많은 찬사를 보냈다. 미국 개혁교회 총회장 셰퍼 목사는 그에 대해 "훌륭한 설교자이자 강인한 성격에 다정했고, 준비된 작가로서 두려움 없이 신앙을 굳게 다진 고결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플로이드 윌리엄 톰킨스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