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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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문신.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 미국 국적의 한국 독립운동가, 군의관[5] , 의학자. 미국에서는 해부학자, 시인, 소설가, 혁명가, 교육인, 병리전문의, 작가, 상인, 중추원 고문, 농상공부 고문,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과대학 초빙교수로 활동했다.
1882년 문과 증광시에 최연소 합격하는 기염을 토한 후 21살이던 1884년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실패해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찬밥 대우를 받자 다시 1885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갑신정변 실패로 조선에 있던 친지들이 대부분 죽고 자신도 역모자가 되어 귀국조차 할 수 없던 상황이니 미쳐서 거지같이 거리를 떠돌았다고 한다. 그러다 미국 독지가의 도움으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해서 대학에 진학해 의사가 되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의대 강사가 되어 강의까지 했으나 그만두고 의사로 개업한다. 영어 한마디 못했던 이민자 출신의 동양인이 미국에서 의사가 된 것이니 대단하다.
갑신정변 10년 후인 1894년 갑오개혁 때 갑신정변 연루자들에 대한 징계가 풀리자 박영효의 제안으로 귀국해 조선 신하가 아닌 미국 시민으로서 고종과 수구파 앞에 나타났다.[6] 고종과 미국을 연결해 줬고 조선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민중을 바탕으로 한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의회 설립과 입헌군주제를 주장했으나 고종의 반대로 실패한 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고 독립 협회도 해산된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는 미국에서 언론 활동으로 3.1 운동을 지원했다.
1945년 광복 이후 미군정의 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와 일부에서 대통령 제의를 받기도 했으나 미국 국적을 가지고있어 출마하지 못했다. 이후 정세가 어지럽자 미국으로 돌아갔고 미국에서 노후를 보내다 1951년 86세에 사망했다.
2. 생애
2.1. 갑신정변 이전
1864년 1월 7일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7] 가내마을에 있는 외가 성주 이씨 집안에서 동복 현감[8] 서광효[9] 와 이씨 부인의 셋째 아들 서재필로 태어났다. 그러다 아버지 서광효의 6촌 형제인 서광하의 양자로 가게 된다. 충청남도 은진에 살던 서광하는 처가가 안동 김씨로 세도가 집안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이때 서재필은 양어머니의 오빠인 예조 참판 김성근의 집에 갔다가 김옥균을 만나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1879년에 임금이 친히 주관하는 전강에서 1등을 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그동안에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동대문 밖 절에 모여 일본 책들을 돌려보면서 서구화에 대한 꿈을 꿨다. 그러다 1882년 임오군란이 진압되면서, 명성황후의 환궁과 군란 진압을 축하하는 증광시가 열린다. 고종이 개화파들을 등용하면서 서재필도 문과에 최연소 합격한다.
1882년 합격은 했지만 집안 배경이 좀 약했던 데다가, 온건개화파가 급진개화파들을 견제하면서 약 6개월 가까이 보직을 받지 못하고 성균관 전적으로 있었다. 이후 교서관 부정자, 훈련원 부봉사 등을 지내다가 김옥균의 특명을 받고 일본으로 유학, 1884년 토야마 소년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했다. 양어머니 김씨의 상을 당해 3년상을 치러야 할 것을 고종이 나라의 명을 받으라 명해서 복상을 멈춘다. 곧바로 그는 신식 사관학교를 창설할 목적으로 설립된 병조 예하 신식 군대 훈련소인 조련국의 사관장으로서 생도들을 양성한다. 그러나 얼마 안있어 온건개화파의 방해로 훈련소가 폐지되고 해방영이 설치되면서 그 역시 보직이 없어진다.
1884년 견디다 못한 급진개화파는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그는 생도들을 데리고 무사로서 활약했다. 갑신정변 당시 약관이었던 그는 실패 후 말그대로 집안이 박살나는 멸문지화를 겪는데, 아내는 자살하고 하나 있던 두 살된 아들은 돌봐주는 이가 없어 굶어죽는다. 음독한 어미의 젖을 빨다가 같이 죽었다는 설도 있다. 양가(養家), 친가(親家) 가릴 것 없어 양아버지 서광하는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했고,[10] 생부 서광효는 자결하였다. 생가 형제들 중 맏형 서재춘은 감옥에 갇혔다 독약을 먹고 자살했고 이복 형 서재형은 관군에 붙잡혀 참형을 당했다. 생모 이씨는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고 서모와 이복 동생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이미 다른 집으로 양자로 간 동생 서재창 역시 도주하다 잡혀 처형당했으며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함경도로 피신한다. 화를 피한 사람들은 아직 어렸던 남동생 서재우와 큰 형 서재춘의 아들 서명원, 서재창의 유복자 서O석[11] 등이 있었고 결혼한 누나들도 출가외인이라 하여 화를 피했다. 한편, 당시 급진개화파를 지원해 주던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는 당사자들은 몰라도 가족들까지 연좌제로 몰살당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조선을 포함한 여러 아시아 국가들을 미개국이랍시고 경멸하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사건으로 갑신정변 연루자들의 가문은 대부분 항렬자를 바꾸었다고 한다. 때문인지 '''110년''' 뒤에 태어난 타이거JK(본명 서정권)가 '''같은 항렬'''이다. 타이거JK의 부친 서병후도 서광범과 같은 항렬.
이후 서재필은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과 함께 제물포로 도망가 일본 상선에 오른다. 그렇게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1년간 생활하다가 미국으로 다시 건너간다.[12]
2.2. 갑신정변 이후
갑신정변 실패 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지만[13] 이용 가치가 없어진 그들은 일본에서도 찬밥 대우를 받는다. 그래서 자신들이 토사구팽당한 것을 알게 된 서재필은 서광범, 박영효와 함께[14]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한다.[15] 참고로 김옥균은 청으로 건너갔다가 이후 암살당한다.
미국에 갔을 초기만 해도 서재필은 당연히 영어를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1년여 동안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 청년회에서 영어를 배우는 고단한 생활을 하였다. 초반에는 영어 실력 때문에 일자리조차 제대로 구하기 힘들어 전단지를 붙히는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흑인을 상대로 한 노예제도가 폐지되지 고작 20년 밖에 지나지 않았던 미국 사회에서의 인종차별도 그의 삶을 힘들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심지어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기차 짐칸으로까지 밀려날 정도로 멸시당했다. 참고로 함께 미국에 건너온 박영효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버렸고, 서광범은 서재필과 함께 미국에서 지내다가 잠시 일본으로 돌아가버리면서 서재필은 홀로 미국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조선에서는 끊임없이 자객을 보내 그를 감시하고 제거하려 했기 때문에 그는 항상 신분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그러다가 1886년 행운이 따랐는지 존 홀렌벡 (John Hollenback) 이라는 미국인 독지가의 후원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펜실베니아 주 윌크스베어 시로 이주한 뒤, 이곳에 있는 해리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역사, 철학, 과학 등 서구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16] 서재필은 마땅히 지낼 거처가 없어 교장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학교를 다녔는데, 마침 교장의 장인이 갓 퇴임한 법관이었고 그와 같이 살며 서재필은 미국의 민주주의와 역사, 사회제도에 대해 학습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서재필은 수학, 헬라어, 라틴어 등에서 우등상을 받으며 졸업하게 된다.
해리힐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재필은 코크란 단과대학에서 물리학과를 다녔다. 그러던 중 홀렌벡은 서재필에게 라파에트 대학으로 옮겨 전공 공부를 마친 뒤 프린스턴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에 기독교 선교사로 파송갈 것을 서면으로 약속할 것을 요구했다. 홀렌벡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더 이상 지원해주지 않겠다고 통첩을 했으나, 서재필은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홀렌벡과 결별하게 된 서재필은 라파에트 대학교의 한 교수와 인연이 닿아 계속 지원을 받으며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는 워싱턴 D.C.로 이주하기 위해 라파에트 대학교를 자퇴했다.
컬럼비안 대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서재필은 1894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개명하고 미국 시민권을 따게 된다. 조선에선 이미 역적으로 낙인 찍혀 있을뿐더러, 부모형제, 부인, 갓난 아들까지 모조리 죽었으니 미국으로 귀화하는 게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후 여차저차하여 주경야독으로 1894년[17] 컬럼비아 대학교(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부설 코크란 대학을 세균학 전공으로 졸업하고 병원에서도 잠깐 근무하다 이후 워싱턴에 개인 병원을 개업하고 얼마 안가 미국 여인 뮤리얼 암스트롱(M. S. Armstrong)[18] 과 결혼한다. 이후 1896년 스테파니 제이슨(Stephanie Jaisohn Boyd)를, 1898년 뮤리엘 제이슨(Muriel Jaisohn)[19] 을 낳았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의사 면혀도 따고 결혼하여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꾸리는 동안 조선에서는 외세의 힘에 밀리는 조정으로 인해 국가 체계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미국에서 10여년간 생활하며 미국 사회와 민주주의적 정치 시스템에 큰 동경을 가지게 된 서재필은 조선의 상황을 보며 그나마 남아있던 조선과 조선 민중에 대한 기대를 버리게 되고, 점차 후진적으로 변하는 조선을 증오하게 된다.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졌던 갑오개혁 과정에서 갑신정변 주동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져 박영효, 서광범 등이 귀국하여 복권되었다. 특히 1895년 5월 박정양 내각이 성립되자 이 내각의 실세였던 내부 대신 박영효는 개화당 동지인 서재필을 외부 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당시 병원을 개업한 직후일 뿐만 아니라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귀국하지 못했고 그 후 실각한 박영효가 미국을 방문하여 재차 귀국을 권유하자, 같은 해 12월 26일 고국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옛 조국 땅을 다시 밟았다.[20] 당시 신변 문제 때문에 서재필은 미국에서부터 사설 경호원을 고용하여 귀국길 내내 대동하도록 했다.
귀국 직후인 1896년 1월 갑오개혁에 의해 입법 기관으로 설치된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여기서 서재필은 정부의 보조금으로 개화파 인사들의 후원 아래 1896년 4월 7일 국내 최초의 민간 대중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논설이나 각종 기사를 자신이 직접 썼다. 특히 논설을 중요시하였는데, 그것은 이를 통해 사회 전반에 근대 사상과 제도를 소개하여 국민을 계몽하려던 목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당시 서재필은 한국어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하며 철저히 미국인으로서 영어만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 서재필은 조선 사회에 대한 불편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조선인들을 "you, korean"이라고 표현하거나 왕 앞에서도 신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이 점점 정치화되었고, 초기에는 나름대로 양호하였던 정부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서재필은 결국 미국으로 추방된다.[21] 하지만 독립협회 내부에서는 여전히 입지가 남아 있어서, 독립협회 인사들이 참여한 중추원 최초 의제에서 서재필을 각료로 추천하는 인물도 있었다. 중추원에는 관료 추천권이 없었지만, 최초의 의제가 새로운 관료를 추천하는 것이었고 여기서 박영효,[22] 서재필 등 당시 대한제국 정부가 학을 떼던 인물들이 여럿 선출된다. 그리고 이는 중추원과 독립협회가 해산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3. 미국 생활과 독립 운동
다시 미국에 도착한 후 곧바로 미 육군성의 임명을 받아 외과 의사로서 미국-스페인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1898년 12월 전쟁이 끝나자 펜실베이니아에 개인 병원을 개업하고, 대학에서 해부학을 강의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조선과 완전히 연을 끊은 것은 아니라 1919년 3.1 운동을 전후해선 다시 기고문 등을 실으며 외교적 선전 활동을 하게 된다. 임시 정부의 대미 외교 고문을 한동안 맡기도 했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1925년엔 호놀룰루의 범태평양 회의에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하여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규탄하기도 했다.
허나 독립 외교 및 선전 활동은 상당수가 사비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23] 이는 사업 실패 등과 겹쳐[24] 그가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턴 생계 문제로 의사 일에 전념하며 적극적인 독립 운동에 참여하기 어렵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42년 3월 1일엔 워싱턴에서 동포들이 개최한 태평양 전쟁 전승 기원 기념식에 참가했고, 1942~1945년까진 미군 징병 검사 의무관으로 자원 봉사 활동을 하여 미 국회로부터 공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주로 미국 정치의 중심지인 미국 동부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9년 4월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했고, 16일에는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독립기념관(미국)까지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며 대한독립을 외쳤던 ‘한인독립대회(Korean Inpendence League)’를 주도했다. 당시 필라델피아시는 군악대를 지원했다.## 1921년 3월 2일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서재필 박사는 3·1운동 2주년을 기념하는 '한인연합대회'의 개회를 선언하고 '기미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낭독했다. 이 행사에는 미국 동부지역 한인들과 함께 현지 미국인들까지 무려 1천300명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윌리엄 E. 메이슨(일리노이) 당시 연방하원의원도 자리에 참석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미국의 주류 언론으로부터도 주목을 받았는데,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이튿날 '메이슨 의원, 일본의 한국 침략을 맹비난하다'(Mason raps japan for piracy in Korea) 제하의 기사를 게재했다. 메이슨 의원이 일본의 침략행위를 강력하게 비난하고, 미국 연방정부에 대해 한국의 독립을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추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2.4. 광복 이후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군정의 초청으로 고문 자격으로 귀국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당시 서재필은 국적이 미국이였기 때문에 대통령 후보자 자격이 박탈되었다. 본인도 대통령 자리에 큰 미련이 없었고, 정세와 고령[25] 문제로 인해서 출마할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이때 라디오 방송 연설을 영어로 했다고 한다. 그래도 지지자가 없지는 않았는지, 국회에서 간선으로 실시한 제1회 대통령 선거에서 무효표가 되긴 했지만 1표를 얻긴 했다. 그러나 어쨌든 서재필의 고사로 인해 이승만과 서재필을 경쟁시키려는 미국의 계획은 틀어졌고, 이는 이승만이 이후 대통령에 한결 편하게 오르는 기회가 된다. 그래도 보은격으로 김규식에 이어 조선적십자사 2대 총재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곧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1951년 사망했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1994년엔 그의 유해가 환국되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때 서재필의 영정을 운구한 외증손 이상호 전 지방자치단체국제화재단 이사장은 훗날 "내가 죽은 다음에 나쁜 놈, 더러운 놈 소리 듣지 않도록 해야겠다 생각했다"며 당시의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한편, 이때 그에 대해 비판적인 인사들 사이에서는, 그가 이런저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로 추서된 이유는 일명 조중동 메이저 언론들이 그를 고평가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돌았으며, 그가 현충원에 안장된 1994년에는 한겨레에서 딱히 업적도 없는 사람이 현충원 갔다고 까기도 했다. 이보다 온건하게 이회영 같은 사람과 비교되면서 업적에 비해 너무 띄워주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재미동포 사회 같은 곳에서 선구자격으로 기념해도 좋을 사람을 희한하게도 한국에서 독립유공자랍시고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서재필은 나라를 바꾸기 위해 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심지어는 집안이 멸문까지 당하고, 거기에 본인도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미국인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자신의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조선인데 절대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리가 없다. 오히려 서재필은 그러한 피해를 겪고도 해외에서 모국의 독립을 위해 애쓴 대인배였다.
그의 정체성이나 공과 등에 대한 업적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한 인간으로만 보자면 비극적인 가족사부터 다사다난했던 인생사를 보면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았고 고생 꽤나 한 인물이긴 했다. 또 후술된 어록을 봐도 알 수 있듯 최소한 당시 기준으론 나름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3. 논란
2017년 황태연 교수[26] 가 서재필이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주장을 중앙일보에서 제기하였다.# 다만 해당 기사에도 자세한 내용은 없는데 다른 기사에 따르면 독립신문 소유권을 일본에 매각할 의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서재필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게시되어 있으니 참고할 사람은 참고해두자. 시사저널 1994년 기사.
다만 황태연 교수도 서재필이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건 독립협회 시절이라 주장했고, 이 당시 독립협회는 청나라와 러시아의 존재 때문에 친일 성향이 강한 터였다. 서재필 본인은 이후 미국 정부에 연줄이 닿은 뒤로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개화되지 못한 나라들인 건 똑같다고 보았다.[27]
다른 독립협회 인사들처럼 일제에 너무 낙관적인 장밋빛 전망을 가졌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조선 병합 이후엔 일제에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4. 어록
세상에 불쌍한 인생이 조선 여편네다. 여편네가 사내보다 조금도 낮은 인생이 아닌데 사내들이 천대하는 까닭은 사내들이 개화되지 않은 데 있다.
- 1896년 4월 21일 독립신문 논설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내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을 짐승처럼 부려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주어야 한다.
- 1898년 10월 16일 독립신문 논설
일본은 한국에 가한 잘못을 교활하게 은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미국에 알려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게 만들어야 한다.
- 1919년 4월호 『코리아 평론』 논설
한국이 통일되는 그 날이 빨리 오게 하려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 1947년 7월 1일 귀국 인사
5. 선거이력
6. 기타
- 제이손이란 이름은 '서재필'을 '필재서'로 바꿔 필립 제이손으로 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Jason'이 아닌 'Jaisohn'으로 적은 이유에 대해 미국인 기자들이 발음나는 대로 적은 거라는 의견이 있다.
- 키가 장신이었다. 무술 실력도 뛰어나 갑신정변 때는 수구파 처단과 호위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미국인 여성인 뮤리엘과 결혼하게 된 계기도, 불량배를 제압한 그의 무술 실력에 뮤리엘이 반했기 때문이라고 하니 소싯적 완력을 짐작할 만하다.
- 흔히 서재필 '박사'라고 많이 언급하지만 서재필은 박사 학위를 받은 적이 없다. 이는 사람들이 Dr. Jaisohn을 '의사 서재필'이 아닌 '박사 서재필'로 잘못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박사 필립 제이슨이었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박사 학위자가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최초의 박사 학위 취득자는 이승만.[28] 서재필이 다닌 대학은 워싱턴의 컬럼비아 대학교(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부설 코크란 대학인데, 이 대학은 워싱턴의 고졸 공무원들을 위해 세운 야간 대학으로 컬럼비아 대학교와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는 1888년 코크란 대학에 입학하여 자연과학을 주로 공부한 후, 다음해에 역시 야간 3년제 외과 대학에 등록하였고, 1892년 의학사 학위를 받은 후 1년간의 인턴 생활을 거쳐 1893년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 1896년 4월 23일 경성(서울)에 거주하는 미국인들과 미국 해병대원들의 야구 친선 경기가 있었는데, 그중 서재필이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 이름으로 출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6번 타자 중견수로 출전하여 2득점을 기록했다고 한다.
- 독립협회 활동 당시에는 한국어를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하였지만, 그로부터 먼 훗날인 1949년 3월 1일에는 한국어로 장시간 연설했으며 육성 녹음도 남아 있다. 음반 원본은 분실되었지만 복사본이 남아있으며 전체 분량은 약 9분 정도다. 전반적으로는 19세기 근대 양반가에서 썼을 법한 서울 방언 억양이지만, 이미 연로했던 데다 영어의 음색[29] 이 많이 섞인 탓에 듣기에 따라서는 이승만보다도 훨씬 어눌하게 들리는 게 특징이다. 링크1링크2[30]
- 1950년 9월 14일 병석에서 존 하지 장군에게 보낸 서신이 남아있다.# 요약하자면, '자신이 한국인들로부터 건네받은 한국의 정치 및 경제적 상황에 대한, 치우치지 않은 정보'를 월터 스미스 장군 산하의 육군 정보처에 제공하고 싶다는 내용.
- 서재필이 태어난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 '서재필 기념 공원'이 있다. 미국 워싱턴시에도 2008년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1] 한국명 '서재필'을 비슷한 어감의 미국 이름으로 음차한 것으로, 'Phillip Jason'이 아니다.[2] 87세 생일을 불과 2일 앞두고 사망했다.[3] 갑신정변에 실패한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조지 워싱턴 대학교 의과대학원을 졸업하던 해인 189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해 미국인으로 귀화했다.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 서광범과 함께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인물이다. 훗날 조선으로 귀국했을 때와 해방 이후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을 때 국적회복에 대한 권유가 들어왔으나 그는 사망할 때까지 미국 시민권을 유지하였다.[4] 한국인 최초의 미국유학생이다. 조선후기 근대 개혁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갔지만 미국에서 학력을 딴 경우는 서재필이 처음이다. 참고로 최초의 조선인 미국 유학생은 유길준이다. 유길준은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에 방문했다가 미국에 그대로 남아서 유학생이 되었으나 1년여 만에 유학생활을 그만두고 유럽을 여행한 뒤 조선으로 귀국했다.[5] 한때 미육군 군의관으로 미국-스페인 전쟁에 참가했다.[6] 서재필은 조선에서 추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는 대부분 해외에 머물며 독립운동 및 의사활동을 했으나, 종종 귀국하여 머물기도 했었다. 대표적으로 서재필이 일제강점기 시절 이상재나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했을 때도 조선총독부는 그가 미국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체포하지 못했다. 그 대신 일제는 하와이나 필라델피아 등 서재필의 활동지에 첩자를 파견해서 서재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7] 용암 삼거리 인근에 2008년 들어선 서재필 기념공원이 있으며, 크고 아름다운 독립문 실사 모형이 서있다.[8] 동복현은 현 화순군 동복면, 사평면, 이서면, 백아면에 해당하는 군현이었다. 부군면 통폐합 이후 화순군에 합병되었다.[9] 서광언이라고도 한다.[10] 양어머니 김씨는 이미 갑신정변 이전인 1884년 초에 사망했다. 양부는 갑신정변 직후 서재필을 파양했으나 결국 연좌제를 당했다. 후에 서재필은 자신을 찾아온 양부 서광하에게 돈 몇 푼을 던지면서 냉대했고, 김구와 윤치호는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11] 친자식이긴 한데 서자였다. 그래서 서재창의 명목상 후사는 사촌 동생 서재영의 아들 서호석이 사후 입양되어 이었다. 이 서자의 자세한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12] 여기서 한 설에 의하면, 서재필 등을 인도하라는 고종의 요구에 다케조에 일본 공사가 이들을 내리라고 했으나, 용기 있는 일본 상선 선장의 거부로 다행히 목숨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 이 얘기는 허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본발 창작물 외에는 딱히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 갑신정변 항목을 참고하면 알 수 있지만, 원본에는 일본 공사가 하나부사라고 통용되었는데, 실제로는 당시 공사가 다케조에였기 때문에 이 공사명만 바뀌어서 기록된 것이다.[13] 갑신정변에 실패한 이 후 세 사람은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을 빠져나가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이 일본인 선장의 배에 탑승하여 숨어있을 때 관리들과 당시 조선에서 근무중이던 독일 출신 외교관 묄렌도르프가 제물포항으로 급습하여 갑신정변의 역적들인 세 사람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서재필은 이 때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일본인 선장이 "일본의 선박을 함부로 수색하게 할 수 없다" 고 둘러대며 그들을 돌려보내 서재필은 생존할 수 있었다.[14] 훗날 박영효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하여 서재필과는 노선을 달리하게 된다.[15] 이 때 미국 선교사들이 그들의 미국 망명을 적극 도왔고 이 때문에 서재필은 개신교로 개종하게 된다.[16] 참고로 그의 미국 이름 필립 제이슨도 홀렌벡이 작명해주었다.[17] 근데 연도는 인터넷을 뒤져봐도 문서마다 글마다 몇 해씩 차이가 있긴 하다. 두산 백과만 봐도 1889년 입학해 1893년 졸업했다는 글이 있으니 주의 요망. 사실 대학 졸업 시기뿐만 아니라 시민권 취득년도, 뮤리얼 암스트롱과의 결혼 연도 등도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18] 서재필의 두 번째 부인으로 제임스 뷰캐넌 전 대통령과 사촌 형제이자 남북 전쟁 당시 철도 우편국을 창설했던 미국의 정치인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George Buchanan Armstrong)의 딸이다. 둘은 가정 교사로 만나 연애를 시작, 워싱턴 D.C. 교외에 있는 커버넌트 교회에서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참고로 뮤리엘 집안에서는 서재필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결혼을 결심한 뮤리엘의 마음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는 서재필이 밤길에 불량배에게 희롱당하던 뮤리엘 암스트롱을 구해줬기 때문이었다는데, 서재필이 178cm 정도 되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장신이었고, 갑신정변때 직접 칼을 들고 싸웠을 만큼 뛰어난 무력과 완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불량배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대통령 가문의 결혼식이어서인지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주류 언론의 조명을 꽤 받았다고 한다.[19] 화가, 독신으로 살았다. 사진 [20] 그는 원래 조선에 대한 환멸 때문에 귀국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이 그를 데리고 오기 위해 주미조선공사관의 방을 빌려주고 식비를 제공하며 그를 설득했다. 결정적으로 서재필이 귀국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워싱턴을 방문중이던 갑신정변을 함께 일으킨 박영효가 그를 방문하여 설득했기 때문이다. 서재필은 다시 한번 조선을 개혁해보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렇게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21] 이에 대해 서울대 신용하 교수는 <독립협회 연구 : 독립신문,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사상과 운동> (일조간, 1996년, 55쪽)에서 정부가 독립신문을 탄압한 이유로 "수구파 정부에 대한 비판, 제정 러시아의 침략 간섭 정책 비판, 탐관오리의 부정부패 고발, 전제 군주권에 대한 비판, 국정 개혁과 민권 신장 주장, 서재필의 오만한 처신"을 뽑기도 했다.[22] 갑오개혁 과정에서 반역죄가 걸려서, 일본으로 망명해 있던 상황이었다. 이후 꾸준히 자신의 정치적 복권을 시도하고, 쿠데타 시도도 하면서 사람들을 파견하고 있어서 1급 반역자 취급을 받았다. 이 때문에 박영효는 고종 퇴위 이후에야 한국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23] 서재필이 공식적으로 참여한 것은 이승만이 설치한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부위원장 같은 직책 정도였다.[24] 인쇄업을 했다가 잘 안됐다는 소리가 있다.[25] 이승만보다도 무려 10살이 많았다.[26] 고종을 매우 고평가하는 인물이다. 해당 교수의 저서로는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공자와 세계』(전 5권·2011년) 등이 있다.[27] 당시 서재필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들 수 있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서양 사회는 1914년에 1차 대전이 벌어져 환상이 깨지기 전까지는 정말로 모든 것이 잘 풀려가고 있는 것처럼만 보였고, 그나마 명백히 남아있는 사회 문제가 바로 인종차별 문제였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서재필 본인을 직접 중용하면서 그에게 "어쩌면 인종차별 문제도 해결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는 인식을 주었을 테니 그 시점부터 서양 사회에 대한 동경이 더욱 극대화되었을만도 하다.[28] 여담으로 서재필은 젊은 시절 이승만에게 신학문과 영어를 가르쳐준 스승이기도 했다. 허나 이후 스승인 서재필이 귀국하고, 미국이 친미파던 자신과 서재필 중 서재필을 한국의 지도자로 삼으려는 기색을 보이자 관계가 불편해지기도 하였다.[29] 특히 받침 ㄹ을 계속해서 영어 L처럼 발음한다든지.[30] 사실 언어능력이 다 자라기 전 유년기 시절에 해외로 건너가지 않은 이상, 자신이 원래 사용하던 언어를 잊어먹기란 어렵다. 한국어를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게 놀라운 사실은 아니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