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 대지진

 

'''(たい(しょう12(ねん (かん(とう(たい(しん(さい
다이쇼 12년 칸토대진재
'''
'''발생'''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UTC+9)
'''진앙'''
일본 제국 카나가와현 오다와라시[1][2]
'''진원 깊이'''
23km
'''규모'''
'''M,j,''' 7.9 - 8.1, '''M,s,''' 8.2 - 8.3, '''M,w,''' 7.9 - 8.2
'''진도'''
JMA 기준
'''진도 6'''[3]: 카나가와현, 치바현, 시즈오카현, 야마나시현, 도쿄부 전 지역
'''지진
지속 시간
'''
'''약 7-8분'''[4]
'''분류'''
해구형 지진
'''해일'''
최고 12m
(시즈오카현 다카타군 아타미마치)
'''여진'''
M7 이상 여진 3회, 진도 6 여진 6회
'''인명
피해
'''
'''사망'''
'''105,385명 - 142,800명'''
'''실종'''
'''부상'''
'''확인 불가'''
'''재산 피해'''
가옥 11만여 채 완파,
10만여 채 반파
일부 군함 파손
'''대피'''
수십만 명
[5]
1. 개요
2. 경과
3. 피해
4. 복구
5. 영향
6. 관동 대지진 학살
6.1. 개요
6.2. 상세 진행상황
6.4. 사회주의자 테러
6.5. 학살의 규모
7. 매체에 반영된 관동 대지진
8. 기타
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지진 당시를 긴급지진속보로 재현해본 영상.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에 일본 사가미 만을 진앙지로 발생했던 사가미 트로프 지진이다. 1855년에도 대지진(안세이 도카이 지진)이 있었고, 그 이전에도 칸토 남부 지방(미나미칸토)를 진앙으로 하는 지진은 여러 번 있었지만, 보통 칸토 대지진은 이때를 말한다.

2. 경과


칸토 지진은 5분 간격으로 세 차례 일어난 지진이다. 최초에 발생한 M 7.9의 진원은 11시 58분 경 수 초 간격으로 오다와라와 미우라 반도의 지하에서 약 십수 초 동안 일어났다. 계속하여 M 7.2의 첫 번째 여진이 도쿄만에서 12시 1분에 일어나고, 2번째 M 7.3의 여진이 야마나시현에서 12시 3분에 발생하였다. 이 세 지진은 모두 약 5분 이상 계속되었다.
그 이후에도 12시 7분 이즈반도 근해에서 규모 6.0, 11분 규모 5.6, 17분 규모 6.4, 13시 20분 규모 6.2의 여진이 일어났다. 사가미 만에서도 12시 23분과 40분에 규모 6.5의 여진이 두 차례 일어났으며 12시 48분에는 야마나시현에서 규모 '''6.8'''의 여진이 관측되었다.
13시 31분, 14시 22분, 16시 38분 시즈오카현에서는 각각 규모 6.1, 6.6, 6.6의 여진이 관측되었다. 15시 19분 이바라키현에서는 규모 6.3의 지진이 관측되었다. 17시에는 카나가와현에서 규모 4.3의 여진이 관측되었다.
지진 다음날에도 강력한 여진은 계속되었다. 3시 4분 야마나시현에서는 규모 불명, 진도 5의 여진이 관측되었고, 4시 13분에는 후지 5호 근방에서 규모 4.6의 지진이 관측되었다. 11시 46분에는 치바현 남동부에서 무려 규모 '''7.3'''의 여진이 관측되었고, 18시 27분에는 같은곳에서 규모 6.9의 지진이 관측되었다. 22시 9분에는 시즈오카현 이즈 반도 부근에서 규모 6.5의 여진이 관측되었다.
'''이틀만에 규모 6 이상의 여진이 칸토지방에서만 무려 15번[6]이나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패닉에 빠졌다.'''[7] 정부 조직이 마비되었으며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칸토 대지진이 일어난 시간인 '''오전 11시 58분'''은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이날 도쿄를 비롯한 지진피해지역에서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각 가정집과 요식업소에서 불을 사용'''하였는데, 지진이 발생하면서 불이 대부분 '''목재 건물'''인 피해지역 건물들을 불태우며 널리 퍼져나간 것이다.[8]
설상가상으로 기상여건도 화재 확산을 더욱 빠르게 했는데, 지진 전날인 8월 31일 일본 큐슈 지방에 태풍이 상륙했고, 지진 발생 당일인 9월 1일 오전에는 동해로 빠져나가 있었다. 이 태풍이 일본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고 도쿄를 비롯한 칸토 지방에 거센 남풍이 불고 있었다. 목재 건물들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선 도시구조에 강풍까지 부는 바람에 화재는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3. 피해


리히터 규모 7.9에서 8.3 사이로 추정되며 7분 정도 지속되었다. 도쿄 지역과 요코하마 지역, 치바현, 카나가와현, 시즈오카현 등에서 10만 명에서 14만 2천 명 이상이 사망했고, 3만 7천 명이 실종되었다. 10만 9천여 채의 건물이 전부 파괴되고 10만 2천여 채는 반파되었다. 이로 인한 사상자와 행방불명자는 동일본 대지진의 '''6배''', 고베 대지진의 '''16배'''이다. 피해액은 지진발생 전년도 국민총생산액의 '''1/3에 이르렀다.'''
그리고 요코스카 등 관동지역에 있던 군항에 있던 일부함들이 피해를 입었다. 대표적으로 항공모함으로 개장하던 아마기급 순양전함 1번함 아마기가 대파되고[9], 미카사가 부두에 부딪혀 침수되는가 하면, 도쿄의 빽빽히 밀집된 목조 건물 구조로 인해 화재선풍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화재가 매우 빠르게 번져나갔다. 이러한 화재로 인해서 지진 이틀후 도쿄의 기온은 무려 '''46도'''까지 올랐다.
또한 도쿄 혼조 육군 피복창 광장에선 수많은 인파가 피난갔는데, 그새 스미다강에서 분 세찬 바람 때문에 피난보따리에 불이 붙어 4만 명이 타 죽었다.

4. 복구


지진 이후 복구하는 과정에서 혼란이 컸던 이유는 내각이 어수선했던 점도 작용했다. 당시 총리였던 가토 도모사부로가 지진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 암이 악화되어 갑자기 사망하고 우치다 고사이 외상이 총리직을 대리하고 있었던 것.
지진 직후 참모본부에서는 도쿄에서 다른 곳으로의 천도가 검토되었다. 그러나 지진 발생 11일 후 발령된 조서에 따라 도쿄를 계속 수도로 삼기로 결정되자 천도설은 흐지부지되었고, 이후 복구 과정에서 현대 도쿄의 기틀을 구성하는 도로철도 그리고 공원 등이 계획되어 더욱 근대적 모습으로 도시가 재건되었다. 특히 공원은 이후 있을지 모르는 대지진의 피난처 구실을 하게끔 만들어졌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다시 파괴되었다.

5. 영향


국가적 차원의 재앙이었음에도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주었기에 이후 일본이 변화하게 되는데 긍정적 영향을 준 측면도 있다.
이재민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멀리 관서지역으로 피난민들이 자리잡게 되면서 오사카의 인구가 폭증하게 되어 잠시간 일본 최다 인구의 도시가 되는 일도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관동과 관서지방의 인적 교류가 많아지면서 요리문화나 대중문화등 문화적 교류가 증가했다.
내진, 내연에 관심을 갖게되어 건축분야에서도 발전이 있다. 칸토 평야라는 넓은 평지 위에 도시가 위치했기에 도시권의 무분별한 확장은 당시부터도 진행되고 있었는데, 지진과 그에 동반한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일본 내에서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도시정비 및 도시계획이 자리잡게 된다.[10] 스미다 강위를 지나는 여러 교각들이 내진 설계에 기반하여 지어진것도 이 시점부터이며 또 일본 최초의 아파트가 세워진다.[11] 1924년 5월 내무성에 의해 현재 도시 정비사업을 담당하는 UR의 전신격인 '도준카이'(同潤会) 재단이 설립되었으며 이 재단의 주도로 1933년까지 도쿄와 요코하마 곳곳에 이재민들을 위한 아파트가 건립되었다. 워낙 튼튼하게 지었기 때문에 몇몇 아파트들은 2000년대 초까지 남아있던 사례도 있었는데, 가장 유명한 게 오모테산도에 있는 '아오야마 아파트'였다. 2003년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오모테산도 힐즈'란 상가건물로 재건축되었으나 딱 한 동이 그대로 보존되어 카페건물로 쓰이고 있다.
반면에 부정적인 방향으로는 일본인들이 자국이 안전한 땅이 아니라는 인식을 확실히 숙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경제불안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12] 이듬해 금 수출 금지가 되는 등 일본 군부의 폭주에 힘을 실어준 일련의 불황이 시작된다.
본래 히로히토 황태자(쇼와 덴노)는 1923년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대지진의 참상을 본 그는 결혼식을 미루었다. 히로히토 황태자의 약혼녀 구니노미야 나가코 태자비는 대지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위로하는 와카를 지었으며, 사다코 황후도 이재민들을 위로하는 활동을 펼쳤다.

6. 관동 대지진 학살



6.1. 개요


'''관동대학살(関東大虐殺)''' 또는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事件)'''으로도 불린다. 관동 대지진이 있었던 1923년 9월 1일부터 약 3~4주에 걸쳐서, 일본 칸토(관동) 지역의 가나가와현, 도쿄부[13], 사이타마현, 치바현, 이바라키현, 군마현, 토치기현, 나가노현의 민간ㆍ 소속 일본인들이 조선인중국인, 그리고 일부 일본인에 대한 '''인종 제노사이드'''[14]를 가한 사건이다. 수백에서 수천에 달하는 무고인이 일본 정부치안 당국의 묵인, 방조[15]와 재해 현장의 무법적 상황 속에서 살해당했다.

6.2. 상세 진행상황


오래된 일도 아닌데

깡그리 잊어버린

일이 있다.

먼곳의 일도 아닌데

아득히 제쳐 놓은

일이 있다.

남의 일도 아닌데

누구도 생각않는

일이 있다.

그러나 언제인가 그런 일은

새록새록 숨어서 숨을 쉬는 법이다.

때만되면 억세게 튕겨져나와

만갈래 비사를 외치게 한다.

의리가 없어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머리가 나빠서 까먹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이 좋아서 없는 걸로

해두었던 것은 아니다.

새록 새록 그것은 우리속에서

숨쉬고 있었다.

잊고 싶어도, 까먹고 싶어도

아예 없었던 걸로 해두고 싶어도

그것은 이제 너무도 억세어서

고스란히 잠재울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았다.

- 관동 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을 다룬 한국 유일의 희곡『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3-4페이지의 코러스 중 발췌 (작가 김의경)

[image]
1923년 9월 10일자 매일신보. 신문은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폭동을 조장한다.\''''는 기사를 전면에 실었다.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관제 언론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기사를 썼다.
1923년 도쿄 일원 칸토 지방은 지진 때문에 엄청난 사상자와 피해가 속출했고, 치안도 무너져 민심과 사회질서가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팽배한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사회주의자들과 결탁하여 방화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인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편향적인 유언비어까지 더해진 결과, '사회주의자들의 교시를 받은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방화약탈까지 한다.'는 과격한 선동 문구로 완성되어 각지에 나돌았다.
심지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들이 독이 든 만두를 나눠주고 있다'''', ''''조선인들이 일본지진 일어나게 해달라고 일본에 저주를 퍼부었다.''''는 유언비어라 하기에도 급이 너무 떨어지는 허무맹랑한 낭설까지 나돌았다. 한술 더떠 ''''조선인들 모두가 일본 열도를 영차영차 밀어서 지진을 일으켰다.''''는 어이가 없어질 정도의 만평이나 프로파간다 그림들이 신문이나 벽보 등으로 나돌았다. 게다가 당장의 분노를 표출하고 조선인들에 대한 증오가 있었던[16] 일본 극우들은 이러한 소문들을 곧이곧대로 믿 고, 서로 적개심을 확산시켜가며 조선인 학살의 구실을 쌓아갔다.
게다가 조선인들에 대해 무관심했던 다른 민중들도 지진으로 인해 여기저기 무너지고 물 공급까지 끊긴 상태라 삶의 터전을 잃은 허망함과 좌절, 화재,[17] 치안에 대한 불안감까지 커져갔다. 그런데 이런 소문들까지 나돌자 당장의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여 곳곳에서 우익들의 선동 하에 죽창, 몽둥이, 도끼, 갈고리, 일본도, 총기 등으로 무장한 자경단들이 결성됐고, 이들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불시검문을 해 '''조선인이다 싶으면 가차없이 살해했다.'''
우선 조선식 복장을 한 이는 현장에서 찌르거나, 때리거나, 찍거나, 베어 죽였다. 게다가 기름을 붓거나 장작불에 천천히 화형시키기도 했으며,(사진 주의) 심지어 밧줄로 굴비엮듯 묶거나 반죽음으로 만들어 강물에 던지기도 했는데, 직후 살겠다고 수면 위로 올라오면 그 즉시 쫓아가 확인사살을 해버렸다. 게다가 여자들은 임신 유무와 상관없이 윤간까지 하고 죽였다.
게다가 창씨개명이나 화를 피해 일본식 이름과 복장으로 위장한 조선인들까지 잡겠다고 조선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18] 「十五円五十銭(십오 엔 오십 전) (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이나「大根」(だいこん)등의 단어까지 시켜보아 '''발음이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살해'''하였다. #[19]
이 과정에서 일부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 유치장으로까지 피신하였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서 안까지 쳐들어와 끄집어 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데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의 의무가 있는 '''일본제국 경찰과 계엄 출동한 일본군 상당수는 이러한 학살들을 묵인하거나 동참'''까지 해 혼란을 가중시켰다. 물론 요코하마 츠루미 경찰서의 오오카와 츠네키치(大川常吉) 서장처럼 원리원칙에 따라 할복을 각오하고 같은 신민인 조선인을 보호한 사례도 있었고, 계엄 출동한 일본군이 자경단을 직접 공격, 해산시키고 조선인을 구출한 사례도 일부 존재한다. 심지어 소위 말하는 황도파를 비롯한 군벌이나 제국주의적인 군인들이 조선인 학살에 부정적이었고, 이 난리통에 조선인들을 보호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20] 심지어 조선인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21] 야쿠자 등 일부 범죄 집단들까지 조선인들을 숨겨주기까지 했다.
심지어 러일전쟁의 명장, 아키야마 요시후루도 '조선인들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유언비어에 휘둘리는 건 정신력이 나약해서이다.' 하고 사람들에게 훈시했고, 극우파이자 일본 국가사회주의의 거두였던 기타 잇키는 무정부주의자이자 훗날 천황 폭사기도 사건의 주역이 된 박열에게 피신처를 알선하였다. 도쿄에서 조선인 학살이 벌어지자 박열은 다급해져 기타 잇키를 찾아갔고, 기타가 피신처를 알선해준 것.[22] 위에서 말한 대로 극우 제국주의자들 중에서도 조선인 학살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상할 것이 없고, 오히려 '''극우 제국주의들조차 비판했을 정도로 당시 상황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일본 극우 일부가 관동대지진 학살에 반감을 품음은 극우의 특징인 파시즘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현상이 아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영토였고, 조선 황실을 '이왕가'로 칭해가며 일본 황실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조선인들 또한 명목상 똑같은 천황의 신민(정확히는 2등 신민)이었는데, 문제는 같은 천황의 신민끼리 (급은 낮더라도) 천황의 허락도 없이 국적을 나눠 서로 죽이고 다니니 아이러니하게도 극우주의자들에게는 반국가적 불충행위로 보일 수밖에 없다.
결국 재일 조선인들 중 일부는 한국으로 피난에 가까운 귀국을 하였는데, 사태가 너무도 심각하여 부유한 상인들조차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귀국했을 정도이다. 특히 집이나 토지와 같은 부동산은 아예 가져올 수가 없으니 급매 그런 것도 못 하고 귀국했는데, 사태가 진정된 후에도 일본으로 가는 게 쉽던 시절이 아니라 일본에 가지 못한 재일 조선인들이 많았다. 결국 이들의 부동산은 일본 정부일본인들 소유가 되었고 재일 조선인들은 1원 한 푼 못 받았다.
한편 시간이 지날수록 자경단의 규모는 점점 불어났고, 만행 또한 점점 도를 넘어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도쿄에 흐르는 스미다강[23]과 아라카와강이 투기되거나 강가에 암매장 혹은 방치된 시체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경찰과 군부는 체제 안정을 위해 자경단의 학살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고 단속에 나섰지만 이 때는 이미 수많은 조선인들과 함께 휘말린 중국인, 조선인으로 몰린 일본인들, 일단 지방에서 도쿄로 상경해 발음이 좀 이상한 일본인(특히 도호쿠 출신[24]), 및 수백년 전에 합병된 류큐인과 외자 성을 강제당해 조선인으로 오인받은 아마미 제도 출신, 부라쿠민, 반체제적이라 지정된 좌익계 사회주의자 등이 무차별적으로 죽임당한 뒤였다. 일본 정부 역시 최종적으로 내무성발 정보들이 유언비어임을 공식확인하고 조선인 학살을 막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생긴 피해자의 수를 축소발표했으며, 자경단 일부를 연행, 조사하기도 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거나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결국엔 '''학살사건으로 인한 사법적 책임 또는 도의적 책임을 진 기구는 전혀 없었다.''' 단 한 사람, 일본 국적의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전후 한국 언론에 사과하였고 그는 이 밖에도 한국의 민족주의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2004년 대한민국 정부에게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고, 일본변호사연합회에서도 2003년 관동대지진 학살사건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인정, 사죄하고 원인규명에 나서라고 권고했으나, 고이즈미 정권은 이를 무시했다.
이런 식으로 사회적 불안 속에 외부인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이 유언비어에 의해 발화되어 사회적으로 용인되어버리는 살인, 학살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근세의 마녀사냥과 현대까지 이어지는 집시 핍박이 같은 부류에 들며 특히 작은 사회에서 더 빈번하고 끔찍하게 일어난다. 조선에서 찾아보자면 비슷한 사례로 만보산 사건이 종종 언급된다. 여기선 가해자가 조선인들이고 피해자가 중국 화교들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이전 한국 교과서 등에는 이 '''조선인 학살극'''의 피해규모를 6천여 명으로 수록했다. 다만 이후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 수치에 대해 논란이 생겨났다. 자세한 것은 아래 학살 문단 참조.

6.3. 일본군이 개입된 학살




6.4. 사회주의자 테러


일본군일본제국 경찰의 학살 직접 참여의 경우 대부분 조선인 학살을 틈타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인권운동가, 반정부 행위자 등으로 경찰 및 헌병대에 요주의 대상으로 등록된 (주로 좌파 계열인) 운동가를 죽이고자 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실상은 집단 광기의 분위기에 편승해 학살에 참여한 것이 대다수이다.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학살된 반면, 사회주의자들이 당국으로부터 검거된 시점은 9월 3일과 4일 이후부터였으며, 그 이전까지는 아무런 박해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히라사와 게이시치나 야마기시 사네지, 스즈키 나오가즈, 가와사키 진이치, 요시무라 고지, 가와이 요시토라 등 상당수의 사회주의자들은 자발적으로 자경단에 가입해 조선인을 경계하는 업무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지진 당시, 반전 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성향의 기독교인 인사인 우치무라 간조조차 자경단과 함께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그대로 믿고는 몽둥이를 들고 집 주변에서 경계를 섰다는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자, 그를 믿고 따랐던 많은 조선인 유학생들이 실망하거나 분노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유명한 사회주의자인 오스기 사카에도 9월 16일 헌병대위인 아마카스 마사히코에게 체포되어 도쿄헌병대 구내에서 살해당하기 전까지는 자경단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여동생의 집에 놀러갈 만큼 자유롭게 지냈다. 게다가 일본 민중들은 사회주의자가 범죄를 일으킨다는 일본 정부가 퍼뜨린 유언비어를 믿지 않고, 정부를 비판했으며 군인이나 경찰에 검거되거나 피살당한 사회주의자들을 동정하였다. 아울러 피살되거나 검거된 사회주의자들의 가족과 친지들은 정부를 상대로 진상 조사와 책임 추궁을 강하게 요구하고 항의했다. 그 결과 오스기를 죽인 아마카스는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 죽임을 당한 오스기와 이토 노에, 다치바나 무네카즈 등의 유골은 유족들에게 모두 인도되었다.[출처:] 이중 무정부주의자로 유명한 인사였던 오스기 사카에와 이토 노에는 헌병대에 의해서 일가가 참살되고 우물에 던져졌다(아마카스 사건). 이 사건의 책임자는 헌병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이며, 이 사건으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뒤 만주국으로 건너가 여러 정치공작과 선전활동(주로 영화 제작)에 가담했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사카모토 류이치가 열연한 인물이 바로 이 사람.
또한 이 사건의 재판 과정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알아주는 문제 중 하나인 천황의 통수권 문제가 두드러지면서 법리적인 근거를 얻게 된다. 바로 '''천황의 대리인으로서 임무에 나선 군인의 책임을 묻는 것은 천황에게 책임을 묻는 것과 같다'''는 논리로 변론한 것. 이전에도 이미 군 통수권 행사에서 군의 독주는 어느 정도 확장되고 있었지만, 이 시점에서 이제 일개 대위조차도 천황의 권위를 등에 업고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생긴 셈이었다.[25]

6.5. 학살의 규모


학살된 한국인의 수가 자료에 따라 편차가 심하여 정확한 피해자의 수에 대해 논란이 지속되어 왔다.
초기부터 수천 명 단위 학살 소문이 돌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독립신문 1923년 12월 5일자의 자세한 보고서를 통해 6661명 희생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본은 희생자 중 상당수가 지진으로 인한 희생자의 착오라고 주장하고, 실 희생자는 조선인 약 300명 미만이라고 사태 수습 이후 사법성 명의로 공식 발표했다.
그동안 이의 신빙성은 매우 낮다고 평가되었는데, 적어도 일본 정부가 사실을 인정하고 벌인 각종 재판에서 확인된 희생자 숫자만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를 가볍게 뛰어넘기(약 900명) 때문이었다. 일본 학자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2711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추정했다.[26]
그런데 2013년 6월, 53년도에 한국 정부가 피해 청구 목적으로 조사하여 작성한 희생자 명단이 발굴되었었는데, 이 명단에는 당초 일본 정부가 주장한 300명 미만에 근접한 피해자 318명이 기록되었다.# 하지만 이 인원은 남한의 일부 사람을 대상으로 6.25 전쟁 중 짧은 기간 동안 조사한 결과라서 실제보다 숫자가 적을 것이다.
이전까지의 정설보다 더 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는 독일 외무부 자료가 발굴되었으나, # 독립운동가들이 학살 4개월 후에 작성된 최종 보고서 형태인데 당시 일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완전히 거부해서 조사를 못 하게 방해했다.
2013년 11월 24일, 명부에 실린 관동대지진 피살자 290명, 3.1 운동 때 피살자 명부에 일부 포함된 52명 등 342명 중 피살자는 198명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살해된 사람들이 '쇠갈퀴'나 '곡괭이'로 살해되었으며 일본 헌병이 개입한 경우까지 드러나기도 했다. #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 오사카국제평화센터(피스 오사카)에도 관련 게시물이 있었으나, 2011년 하시모토 도루가 시장으로 취임한 후 2014년 9월 들어 보수공사를 단행하여 난징대학살, 조선인 강제연행 관련 자료와 같이 사라져 오사카 대공습 등을 위주로 전시물이 개편됐다.

7. 매체에 반영된 관동 대지진


  • 박경리 작가의 소설 《토지》에서는 학살과 동시에 조선인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닌 오가다 지로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 손연자 작가의 동화 《마사코의 질문》에도 이 대학살이 표현되었다.[27] 소설 속 단편인 '꽃을 먹는 아이들’의 주인공인 일본인 겐지가 조선인 여자아이에게 관심이 있어 말을 붙이려고 따라가던 중 이 지진이 났고 그 사이에 폭도들이 몰려들어 겐지는 조선인으로 오인받아 살해당한다. 작중 겐지는 초등학생밖에 안 되었다. 겐지를 살해한 사람들은 겐지에게 역대 천황의 이름을 외워보라한 후 말더듬이 겐지가 더듬거리며 천황 이름을 못 외자 즉시 살해해버린다.
  • 데빌 서머너 쿠즈노하 라이도우 대 아바돈왕》에서는 칸토 대지진이 없어 다이쇼 20년이라는 가상의 세계가 만들어졌다.
  • 아리랑》에선 한국인 학생들이 일하고 있는 공장 사장이 "우리 가족을 건드리느냐!"라며 폭도들의 난입을 막는다.
  • 영친왕이방자의 일대기를 다룬 일본 드라마인 《무지개를 이은 왕비(2006)》에서는 조선인 학살 소식을 듣고 영친왕이 뛰쳐 나가려다 아랫사람들에게 제지를 당한 뒤 통곡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선인 학살 사건을 조금이나마 다룬 몇 안 되는 일본 작품이라서 잠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극중 영친왕의 행동은 픽션.
  •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드라마가 있는데, 배우 서인석과 이휘향 주연으로 나온 1990년작 KBS1 3.1절 특집드라마 《왕조의 세월》 에서도 영친왕(서인석 분)이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죽은 조선인들의 원혼에게 자신들을 구해지 않았냐는 원망을 듣는 상황의 악몽을 꾸다 깨어나는 장면으로 관동대지진의 관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표현하였다.
  • 일본인 소설가 나카지마 아츠시의 《순사가 있는 풍경》은 관동 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을 조선인의 시각으로 쓰여진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 재일교포 소설가 가네시로 가즈키가 쓴 《연애소설》의 단편 〈꽃〉에서는 등장인물 도리고에 씨의 조부가 대지진 직후 이웃에 사는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학살당하고 있다는 소리에 의분을 참지 못하고 말리러 나갔다가, 사회주의자로 몰려 고문을 당한 끝에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후손인 도리고에 씨는 '납득할 수 없는 것'과 싸우기 위한 직업을 경찰에서 변호사로 바꾸었다.
  • 피타텐에서도 배경 스토리에 이 이야기들이 나온다.[28]
  • 할아버지와 나의 사건수첩이라는 추리만화에서는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다룬 에피소드에서 관동 대지진과 학살이 나온다. 조선인 여인이 우물에 빠져죽은 사건이 있었고 아직 소년이었던 할아버지는 범인을 추리, 사건을 해결한다. 근데 조선인이 우물에 빠져죽어 우물을 못 쓰게 되었다는 할아버지의 발언이 왜곡되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뿌렸다는 소문이 퍼지고 학살이 시작된다. 어린 할아버지는 이를 말리고 싶었지만 무기력했고, 소문의 원형이 되는 발언이 자기 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과 이를 밝히지 못하고 지켜만 봐야했던 죄책감을 가슴에 안고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었다. 이를 들은 주인공은 할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 상주전신관학원 팔명진에서는 일본 최대 최악의 흉령 나키리 쿠보가 관동 대지진을 일으킨 원흉으로 등장한다.
  • 리비아썬에서는 [29]에 의해 사카노우에 타케루가 이 사건을 환상으로 겪게 된다.[스포주의]
  • 한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김충원이 90년대 초 출간했던 어린이 교육서적인 퀴즈탐험 한국의 역사 3권에서 관동 대지진 문제가 나왔는데, 이때의 삽화가 어린이 삽화 치곤 제법 소름끼치게 그려졌다. 폐허가 된 거리에 쓰러진 조선인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려는 일본인의 모습이 그려졌는데, 아래에서 위를 올려보는 구도로 그려지고 제법 세밀하게 그려져서 어른이 봐도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 일본의 소설 제노사이드에서는 일본인들이 저지른 또하나의 끔찍한 '제노사이드' 라고 강력하게 비판하며, 이러한 제노사이드를 옹호하는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불만을 표출하는 주인공의 고등학생 시절 회상 장면과 함께 나온다.
  • 다이쇼 소녀 전래동화에서도 등장했지만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고 그냥 이름만 나오고 강도가 심한 지진이라는 것에만 끝났다.
  • 프롤레타리아 작가 코바야시 타키지의 장편소설 《전형기 사람들》[30]에서 관동 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나온다. 홋카이도 대학생들의 군사교련 반대 운동을 다룬 대목에서 정기 발화연습[31] 도중 육군 예비소령인 교관이 '불령한 조선인들이 시가지에 불을 지르고 폭행을 저지르고 있으니 진압하라'는 취지의 지령을 내리자 학생들은 그런 모멸적인 지령에 움직이는 것은 수치라며 집단으로 반발하고 이것이 후에 군사교련 반대 운동으로 이어지는데, 작중 학생들이 교관에게 반발해 대오를 흐트리는 장면에서 "모두에게는 관동대지진 때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퍼뜨려 조선인들을 학살했던 기억이 또렷했다."라고 직접적으로 나와 있다. 비록 짧은 언급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이 1930년대에 쓰여진[32] 소설임을 감안하면 당시로서는 이렇게 작품 내에서 조선인 학살을 직접적으로 거론한 것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33]
  • 일본침몰 만화판에서는 관동 대지진을 언급하면서 제2차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고,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듯이 학살의 대상이 조선인에서 불량해보이는 청년들로 바뀌어 같은 일이 일어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 영화 박열에서도 관동 대지진과 학살이 묘사된다.
  • 가상역사물 재벌강점기에서는 주인공 어진이 관동 대지진을 대비해 일본에 거대한 돔을 지어서 대피소를 만들고 구호물자도 구비, 오세창과 전형필이 모아온 문화재들까지 보관해놓는다. 그리고 지진이 일어나자 구호물자들과 의료용품들을 풀고 조선인 구조대원들과 의사들, 러시아에서 망명해 온 의사, 간호사들의 활약으로 조선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져서 자경단이 오히려 미즈노 렌타로가 쓴 공문[34]에 분노했다.
  • 라이트노벨 《유녀전기》에서는 주인공인 타냐 데그레챠프가 관동 대지진 당시 일어난 화재와 상승기류로 인한 화염 회오리를 모티브 삼은 술식이론을 내놓아 알렌시 학살에서 민간인 학살에 사용한다. 전생에 일본인이었던 주인공이 그 사건을 악의적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주인공의 악한 성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 환상게임 백호선기에서는 1권에서 줄에 묶인 사신천지서가 풀린 순간 이 대지진이 일어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불이 붙은 지붕이 떨어지기 직전의 위험한 상황에서 사신천지서를 연 오스기 스즈노는 잠시 책 속의 세계로 들어왔다 나오게 되는데, 나왔을 땐 이미 도쿄는 잿더미가 된 상태. 이 후 스즈노는 인신매매단에게 위협당하다가 스즈노의 아버지의 지인인 오이카와에게 구출된다.
  • 2019년 4월 21일 방영된 KBS1 역사저널 그날에서 학살 정황에 대해 자세히 다루었다.
  • 2019년 6월 16일 방영된 NHK 대하드라마 이다텐 ~도쿄 올림픽 이야기~ 1부 23화분에서 대지진 이후 동료를 찾으러 돌아다니던 주인공이 무장한 자경단에게 잡혔는 데 하필 주인공은 강한 쿠마모토 사투리를 구사하기에 자경단은 주인공을 일본인이 아닌 걸로 간주하고 들고 있는 무기들을 사용하려고 했으나 때마침 주인공을 아는 사람이 이 사람은 딸의 선생[35]이라고 말하면서 겨우 자경단으로부터 구출한 다음 주인공에게 허위소문이 나돌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왔다.
  • 대체역사물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한일합방이 일어나지 않아 한국인들이 일본에 많지 않아 관동대학살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주인공이 콜레라를 퍼뜨려 생화학 테러를 저질러 피해를 더 키웠고 집권하던 일본해군 세력에 부담을 주고, 결국 일본은 내전에 빠지게 된다.

8. 기타


일본 제국 폭주의 시작을 알린 대재해로 평가된다. 가뜩이나 피해를 복구하는데 엄청난 예산을 썼던 일본은 이후 1927년 쇼와금융공황과 30년의 쇼와공황. 그리고 세계 대공황을 맞아 일본의 경제는 수직으로 추락했고, 불만이 가득 쌓인 군부가 폭주하기 시작해 5.15 사건2.26 사건으로 난리를 벌이더니 기어이 일본 정부는 군부에 굴복하고, 미쳐돌아가는 군부는 만주 사변을 일으키고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패망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칸토 대지진이 난 직후 미국에서는 일본을 돕자는 모금운동을 벌였다. 이미 1차 대전 때 동맹국 인연이 있었던 지라 우호관계였으나, 2차 대전 발발 후 1940년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을 체결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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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진으로부터 1주일 뒤인 9월 8일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미 해군의 클렘슨급 구축함 수 척이 집단 좌초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의 주된 원인은 궂은 날씨로 인한 시계 악화였지만 지진으로 인해 거칠어진 해류와 파도 역시 원인으로 보고 있다.
당시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에는 일본이 반출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 지진으로 인해 모두 소실되고 대출본 47권만 살아남았다. 이 대출본 47권은 2006년에 한국에 반환되었다. 심지어 오쿠라호텔 조선관으로 쓰인 경복궁 자선당도 대지진 때문에 불타 기단만 남아 방치됐고, 결국 1999년 삼성문화재단이 기증 형식으로 반환할 당시 파손된 기단 위에 복원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새로 지어야 했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때도 나카무라 에이치 참의원이 "사건 이후 일어난 화재가 재일 한국인의 방화일 수도 있다"는 식의 헛소리를 했다가 민단에 사과해야 했다. 그리고 2011년 초 관동 대지진에 맞먹는 규모의 대지진이 도호쿠에서 일어났는데, 트위터에서는 '''"재일 조선인(한국인)과 지나인(중국인)이 우물 물에 독을 타고 혼잡한 틈을 타서 부녀자강간하기 쉽습니다. 조심하세요."'''라는 식의 자아비판 개드립을 치기도 했다. 혐한우익들의 선동이 아니라 자아비판성 드립이니 절대 혼동하지 말 것. 21세기에 우물 드립을 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처음 트윗한 사람도 언급한 부분.
일본 영화계의 거장인 구로사와 아키라는 어린 시절 이 지진을 목격한 적이 있다. 한번은 군중들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 이 낙서가 증거다!'라고 선동했는데, 정작 그 우물의 낙서는 아키라가 장난삼아 의미없이 그린 것 뿐이었다. 또한 아키라의 아버지가 조선인이라는 오해를 받아서 집을 자경단이 포위했는데, 아버지가 당당하게 호통을 치자 자경단은 스스로 물러났다고 한다.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작가 나카지마 아츠시는 칸토대지진이 있은 지 얼마 안 돼서 《순사가 있는 풍경》 이나 《호랑이 사냥》 과 같은 작품을 쓰기도 했는데, 일본인들이 느낀 정체불명의 공포감과 당시 조선인들의 삶이 어떻게 어우러져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다이쇼 시대의 대표 작가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지진이 발생한 후 자경단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러나 첫날부터 그 참상을 목격한 뒤 바로 집으로 돌아와 버렸고, 평생 자경단 참가의 경험을 후회했다고 한다. 당시 태동기이던 일본 애니메이션 인프라도 해당 지진으로 인해 사실상 쑥대밭이 되었고, 이에 따라 '아니메 원년 3인방'[36] 중 하나이던 기타야마 세이타로가 조기 은퇴 수순을 밟았다.
매년 9월 1일이면 추모식을 여는데, 당시를 기억하는 이들이 서서히 고령 등으로 사망했고, 오래된 사건이라 대중들 뇌리에도 희석된 터라 크게 치르지도 못하고 조용히 지나가는 수준으로 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나마 일본 공산당이 추모식에 당대표부터 중의원, 참의원, 지방의원들까지 참석할 정도로 꾸준히 관심가지고 있지만, 입헌민주당에서도 개인 자격으로 오기도 한다.
추도비도 있는데, 케이세이 전철 오시아게선 야히로역에서 아라카와 강 방향으로 주택가 골목길을 걷다보면 있다. 이 추도비는 일본인들이 관리해왔으며, 무궁화도 심어져있다.#
가끔 이 당시의 선동 문구였던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가 현대 일본에 와서 패러디의 대상이 되곤 하는데, 역으로 한국 쪽에서 이걸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주로 한국이 진짜로 일본에 빅엿을 먹이는 상황에서 통쾌함을 담아 쓰거나, 혹은 더 나아가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에 의해 피해를 입었을 때, 이상한 걸 보고 배웠을때, 얼토당토 않은 남탓을 할때, 트롤링을 저지를때 ○○가 ●●에게 ☆☆을 풀었다는 식으로 밈화된다. 아무리 용도가 그렇다 해도 역사와 관련되어 있는 상황일 경우 민감한 문구일 수 있으니 가급적이면 쓰지 말자.
2020년에 도쿄도는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는 단체들을 헤이트스피치로 인증하였다.#
2021년 2월 13일 동일본 대지진의 여진 발생 이후 일본의 SNS 등에서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인종차별성 가짜뉴스가 확산됐다고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14일 보도했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후쿠시마현과 미야기현에서 발생한 강진을 둘러싸고 또다시 차별적인 발언, 루머, 불확실한 정보가 트위터, 유튜브 등에 난무했다”며 “재해 때마다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日 지진 후 퍼지는 가짜뉴스 "조선인이 우물에 독 풀었다" 日 지진뒤 SNS 퍼진 루머
일본군 위안부를 매춘부로 규정하는 논문을 발표해 논란을 불러일으킨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 존 마크 램지어가 2021년 8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출간될 논문에서 관동 대학살을 부정하는 내용을 실었다.# 그것도 단순히 조선인 희생자들의 숫자가 과장되었다는 수준을 넘어서서 '''다수의 재일 조선인이 실제로 범죄자였고, 진짜로 우물에 독을 풀었기에 자경단에게 처단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고로 이 주장들은 모두 조선총독부발 보고서를 근거로 한 것이다.

9. 관련 문서




[1] 혹은 아시가라카미군 가이세이정 요시다지마, 사가미 만 등.[2] 여진은 사가미 만, 치바현 보소반도, 야마나시현, 이바라키현, 시즈오카현, 카나가와현 등.[3] '''진도 7이 생긴 것은 1949년의 일로, 관동 대지진이 발생한 1923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4] 일반적인 지진은 '''1분 이내에서 길어야 2분 이내로 끝이 난다.''' 이 지진이 얼마나 맹렬하게 요동쳤는지 알 수 있는 대목.[5] 일본 격심재해법이 제정되기 전에 일어난 지진이기 때문에 이 틀을 사용한다.[6] 여진의 총 횟수는 수천번 이상[7] 심지어 '''규모 7'''이상도 3번 일어났다.[8] 지진 사망자의 90%가 화재로 인한 사망이다.[9] 배의 척추나 다름없는 용골이 부서져서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폐기가 예정되어 있던 카가급 전함 1번함 카가와, 항공모함이 될 예정이었던 아마기의 운명이 뒤바뀌게 된다.[10] 허나 성과는 미미하여 2차대전의 공습때도 대화재로 큰 피해가 있었고 현시점까지도 각종 재난 대책이 미비한 주택이 허다하다.[11] 이 당시 일본에서는 공동주택 전반을 아파트라고 불렀다.[12] 사실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말년의 공황 분위기가 미증유의 국난으로 촉발된 게 정확하지만. 사실 고메이, 메이지 시절에도 지진은 있어왔지만 1923년의 지진은 근대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도쿄에서 큰 규모의 여진과 화재로 인한 건물 피해가 워낙 컸기 때문에..[13] 현재의 도쿄도.[14] 이 과정에서 같은 일본인(당시로서 일본 내지인)도 사회주의자나 외국인으로 몰려 상해 또는 살해당했다.[15] 일본 내무성에서 계엄령을 선포한 상태에서 일선 경찰에 '조선인에 의한 흉악범죄와 폭동을 경계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상태로, 조선인들이 계엄의 대상이 된 셈이다.[16] 사실 불과 2년 전인 1921년, 조선인 이판능연쇄살인을 저질렀지만 조선인들이 반발하여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언도했기 때문에,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은 이들은 더욱 증오감을 가졌을 것이다.[17] 당시 건물들은 목재가 대부분이라 화재에 특히 취약했다.[18] 한국어에 없는 어두유성음 및 이따금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장음 발음(撥音) 등으로 이루어진[19] 기가 막히는 것은 일본어 실력이 능숙한 사람도 때때로 낚이는 경우가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지방 출신 일본인이나 관련 발음이 어눌한 일본인도 (특히 도호쿠벤을 쓰는 사람들) 학살에서 예외가 아니었다는 뜻도 된다. 고대 구약성서, 십볼렛에 언급된 발음이 이상한 외부인(및 내부인까지)을 살해하는 악습이 시공을 초월하여 일본에서 벌어진 셈.[20] 다만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인 학살에 부정적인 경우가 의외로 많았던 것은 인륜 도덕적인 원인뿐 아닌 그런 학살을 놔둘수록 사회 혼란이 심화되고 자신들이 조선인들을 평화롭게 지배하고, 조선인들 역시 동등한 신민이라는 프로파간다에 엄청난 금이 가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하나라도 조선인이다 싶으면 일단 죽이고 보는' 저들의 습성 때문에 애궂은 일본인들까지 죽임당하는 일도 한 몫 했을 것으로 보인다.[21] 조직원 및 상납관계 등.[22] 참고로 이 기타 잇키란 사람은 2.26 사건에서 유일하게 민간인으로 동참했다가 쿠데타 진압 후 황도파 장교 20명과 함께 처형되었다.[23] 서울로 치면 한강 격.[24] 도호쿠 사람들 중에는 성씨가 金인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물론 콘, 콘노 등으로 읽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자경단에겐 통하지 않았다.[출처:]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강덕상 저/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25] 재판 자체에서는 당장 판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으나, 이후 종범들을 대상으로 열린 별도 재판에서 이 논리가 제기되면서 병사들은 완전 무죄 방면되었고 장교들의 지휘책임 역시 묵살되었다. 이후 이 상황을 신병 정신교육 시간에 강조하면서, '''병사는 무조건 천황의 대리인 장교의 명령에 천황의 명을 받들듯 따라야 한다'''는 식으로 교육했다. 이는 훗날 2.26 사건 등의 군사반란 상황에서조차 장교의 명령에는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로 비화되었다.[26]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행한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PDF 참고 #[27] 교과서에 수록된 것으로 인지도가 높은 단편 '방구 아저씨'도 이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28] 시아는 당시 도쿄의 요정으로 팔려가 일하고 있었는데, 이 지진으로 다 개박살나면서 타로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와 결혼한다.[29] 부시를 닮았다(...).[스포주의] 물론 조선인은 아니고 네눈박이라서 괴롭힘을 받다가 조선인에게 구해지는 일본인으로 체험하게 된다.[30] 작가가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사망했기 때문에 미완으로 남아 있다.[31] 사격훈련의 일종으로, 실탄 없이 화약만 넣은 상태로 실시하는 훈련이다.[32]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1931년에서 32년까지 쓰여진 분량이다.[33] 한편 코바야시는 작품 곳곳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전술된 《전형기 사람들》에서는 작중에서 오타루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직접 등장하는 부분이 있고, 대표작인 《게 가공선》에서도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의 하층 노동자들보다도 더 비참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서사가 잠시 나온다.[34] 조선인이 폭행을 저지르고 우물에 독을 풀었으니 조선인들을 학살하여 애국을 보이라는 개소리.[35] 아이러니한 점은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딸이 맨 발로 뛴 사진때문에 장가를 못 간다고 날뛰면서 주인공을 선생직에서 해임하라고 했었다는 점이다.[36] 기타야마 세이타로, 시모카와 오텐, 고우치 준이치를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