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Bartleby, the Scrivener: A Story of Wall Street
미국 작가인 허먼 멜빌의 1853년 작 단편.
제목에서 보이다시피 배경은 월가이다. 처음에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1853년에 <Putnam's Magazine>에 익명으로 발표되었고, 1856년에 자신의 이름을 건 <The Piazza Tales>에 실려 출간되었다.[1] 발표 당시에는 큰 주목을 끌지 못했으나 최근 들어 사회학이나 인문학 혹은 정신분석학, 심지어는 병리학적 관점 등 다양한 시점에서 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작품이다.
바틀비의 직업인 '필경사(scrivener)'란 당시 변호사의 일을 돕는 직업이다. 지금처럼 전산화가 되지 않았을 때, 변호사가 처리해야 할 수많은 서류작업 및 심부름을 대신하여 해주는 일종의 필기 노동자이다. 소설을 보면 알겠지만 과중한 업무량에 비해 보수는 극히 적었으며 근무환경도 좋지 못했다.
이야기는 뉴욕 맨해튼에서 성공한 변호사를 화자 삼아 시작된다. 자화자찬을[2] 은근슬쩍 늘어놓는 이 변호사는 자신이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 가장 기묘한 남자인 바틀비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의 초반에서 변호사는 필경사들을 고용하는데 이들의 별명은 각각 니퍼(Nipper)와 칠면조(Turkey)이다. 니퍼와 칠면조는 특이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칠면조는 낮에 차분하고 오후에 흥분한다. 니퍼는 오전에 흥분하고 오후에는 차분하게 된다. 니퍼는 둘 중 더 나이가 적은데, 만성 소화불량으로 고생한다. 칠면조는 알콜 의존증이다. 어린 사환의 별명은 생강 견과(Ginger Nut)인데, 이 소년이 두 필경사에게 가져다주는 간식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니퍼와 터키, 그리고 진저넛은 모두 다 본명이 아니라 음식에서부터 이름을 따온 별명이다. 이는 그 사람들에 대한 친근감의 표현이 아니라, 사람을 그 사람으로써 알고 싶지 않아하고 그저 쓸만한 노동력을 내는 부분으로만 보는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변호사의 사업이 번창하면서 새 필경사를 고용하는데, 그의 이름은 바틀비였다. 어딘지 쓸쓸해보이는 그를 보면서, 변호사는 바틀비의 차분함이 니퍼와 터키의 괴팍함을 중화시켜줄 것으로 기대했다.
처음에 바틀비는 문제없이 일을 잘 수행했다. 그러던 어느날 변호사가 평소처럼 일을 맡기자, 돌연 바틀비는 이렇게 대답한다.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변호사는 혼란에 빠진다. 이후로 바틀비는 점점 일을 하지 않게 되고, 창문 건너편의 벽을 바라보면서 백일몽에 빠지는 일이 잦아진다. 변호사는 너무도 당황스러운 나머지 바틀비를 설득해보려 하지만, 그는 마법과도 같은 주문으로 응답한다.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어느 휴일, 변호사는 자신의 사무실에 들르려다가 그 안에 바틀비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바틀비는 그곳에서 살고 있던 것이다. 그 누구도 만나지 않는 바틀비의 외로움은 묘한 방식으로 변호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호사의 바틀비에 대한 감정은 연민과 혐오가 뒤섞인 것이 되어간다.
바틀비는 일을 조금 더 하는 것 같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게 된다. 그럼에도 변호사는 바틀비를 해고시키거나 설득할 수조차 없었다. 결국 변호사 자신이 바틀비를 남기고 사무실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만다.[3] 그러나 바틀비는 여전히 떠나기를 거부한다. 바틀비를 사무실 밖으로 끌어냈지만, 그는 종일 그 계단에 앉아있으면서 복도에서 잠을 잔다. 변호사는 심지어 자신의 집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제안하지만, 바틀비의 응답은 여전하다.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후에 변호사는 바틀비가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찾아간다. 훨씬 여윈 바틀비를 보고 안타까웠던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사식을 넣어준다. 며칠 뒤 다시 바틀비를 찾아간 변호사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만다. 바틀비가 식사를 거부하고 굶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식사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변호사는 어떤 사실을 알게 된다. 바틀비는 과거에 수취인 불명 우편을 처리하는 사무실(dead letter office)에서 일하다가 해고되었다는 것이다. 변호사는 이 사실에 대해 생각한다. 바틀비가 태워 버리기 전에 읽은 수취인 불명 우편에는 얼마나 많은 안타까운 사연들이 담겨져 있었을 것인가? 바틀비는 그곳에서 갈 곳 잃은 사연들을 불태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점점 업무를 거부해가고 연명조차 포기해 버리게 된 뒤에는 그런 자초지종이 있었던 것이다. 변호사의 탄식과 함께 작품은 끝을 맺는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전술했듯 이 작품에는 매우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이 소설은 월가를 배경으로 진행되는데 여기에 초점을 맞춰 바틀비를 월가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에 대항한 일종의 영웅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며, 작중 등장하는 인물들의 병에 대한 병리학적 해석도 있다. 아니면 소위 '팔리는 글'을 쓰지않는 길을 택함으로써 출판계와 대중으로부터 외면받던 허먼 멜빌 자신의 투영이라는 해석도 있다. 최근에 월가에서 벌어진 시위와 관련해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작품이다.
본 작품의 배경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사무실은 큐비클로 나뉘어있고 변호사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필경사들을 불러 일을 시킨다. 창문 밖에는 아무런 풍경도 보이지 않으며, 건물의 벽이 모든 것을 가로막고 있다. 월 스트리트(Wall street)라는 이름 자체가 벽으로 이루어진 길이다. 이때 이 장소는 상호 인간적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삭막한 자본주의적 세계를 상징한다. 니퍼가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신경질적이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론 변호사는 이런 업무환경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 장소에 특화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에 존 제이콥 애스터(John Jacob Astor)라는 사람을 위해 일한다고 뻐기는데, 그는 유명한 장사꾼으로,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런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을 매우 큰 자랑으로 여기는 화자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질서에 이미 적응해 있는 사람이다.
독일에서 큰 관심을 끈 한병철의 <피로사회>에 바틀비를 다룬 글이 있다.
테드 창의 단편 우리가 해야 할 일에도 바틀비가 언급된다.
1. 개요
미국 작가인 허먼 멜빌의 1853년 작 단편.
제목에서 보이다시피 배경은 월가이다. 처음에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1853년에 <Putnam's Magazine>에 익명으로 발표되었고, 1856년에 자신의 이름을 건 <The Piazza Tales>에 실려 출간되었다.[1] 발표 당시에는 큰 주목을 끌지 못했으나 최근 들어 사회학이나 인문학 혹은 정신분석학, 심지어는 병리학적 관점 등 다양한 시점에서 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작품이다.
바틀비의 직업인 '필경사(scrivener)'란 당시 변호사의 일을 돕는 직업이다. 지금처럼 전산화가 되지 않았을 때, 변호사가 처리해야 할 수많은 서류작업 및 심부름을 대신하여 해주는 일종의 필기 노동자이다. 소설을 보면 알겠지만 과중한 업무량에 비해 보수는 극히 적었으며 근무환경도 좋지 못했다.
2. 줄거리
이야기는 뉴욕 맨해튼에서 성공한 변호사를 화자 삼아 시작된다. 자화자찬을[2] 은근슬쩍 늘어놓는 이 변호사는 자신이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 가장 기묘한 남자인 바틀비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의 초반에서 변호사는 필경사들을 고용하는데 이들의 별명은 각각 니퍼(Nipper)와 칠면조(Turkey)이다. 니퍼와 칠면조는 특이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칠면조는 낮에 차분하고 오후에 흥분한다. 니퍼는 오전에 흥분하고 오후에는 차분하게 된다. 니퍼는 둘 중 더 나이가 적은데, 만성 소화불량으로 고생한다. 칠면조는 알콜 의존증이다. 어린 사환의 별명은 생강 견과(Ginger Nut)인데, 이 소년이 두 필경사에게 가져다주는 간식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니퍼와 터키, 그리고 진저넛은 모두 다 본명이 아니라 음식에서부터 이름을 따온 별명이다. 이는 그 사람들에 대한 친근감의 표현이 아니라, 사람을 그 사람으로써 알고 싶지 않아하고 그저 쓸만한 노동력을 내는 부분으로만 보는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변호사의 사업이 번창하면서 새 필경사를 고용하는데, 그의 이름은 바틀비였다. 어딘지 쓸쓸해보이는 그를 보면서, 변호사는 바틀비의 차분함이 니퍼와 터키의 괴팍함을 중화시켜줄 것으로 기대했다.
처음에 바틀비는 문제없이 일을 잘 수행했다. 그러던 어느날 변호사가 평소처럼 일을 맡기자, 돌연 바틀비는 이렇게 대답한다.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변호사는 혼란에 빠진다. 이후로 바틀비는 점점 일을 하지 않게 되고, 창문 건너편의 벽을 바라보면서 백일몽에 빠지는 일이 잦아진다. 변호사는 너무도 당황스러운 나머지 바틀비를 설득해보려 하지만, 그는 마법과도 같은 주문으로 응답한다.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어느 휴일, 변호사는 자신의 사무실에 들르려다가 그 안에 바틀비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바틀비는 그곳에서 살고 있던 것이다. 그 누구도 만나지 않는 바틀비의 외로움은 묘한 방식으로 변호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호사의 바틀비에 대한 감정은 연민과 혐오가 뒤섞인 것이 되어간다.
바틀비는 일을 조금 더 하는 것 같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게 된다. 그럼에도 변호사는 바틀비를 해고시키거나 설득할 수조차 없었다. 결국 변호사 자신이 바틀비를 남기고 사무실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만다.[3] 그러나 바틀비는 여전히 떠나기를 거부한다. 바틀비를 사무실 밖으로 끌어냈지만, 그는 종일 그 계단에 앉아있으면서 복도에서 잠을 잔다. 변호사는 심지어 자신의 집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제안하지만, 바틀비의 응답은 여전하다.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후에 변호사는 바틀비가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찾아간다. 훨씬 여윈 바틀비를 보고 안타까웠던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사식을 넣어준다. 며칠 뒤 다시 바틀비를 찾아간 변호사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만다. 바틀비가 식사를 거부하고 굶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식사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변호사는 어떤 사실을 알게 된다. 바틀비는 과거에 수취인 불명 우편을 처리하는 사무실(dead letter office)에서 일하다가 해고되었다는 것이다. 변호사는 이 사실에 대해 생각한다. 바틀비가 태워 버리기 전에 읽은 수취인 불명 우편에는 얼마나 많은 안타까운 사연들이 담겨져 있었을 것인가? 바틀비는 그곳에서 갈 곳 잃은 사연들을 불태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점점 업무를 거부해가고 연명조차 포기해 버리게 된 뒤에는 그런 자초지종이 있었던 것이다. 변호사의 탄식과 함께 작품은 끝을 맺는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3. 기타
전술했듯 이 작품에는 매우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이 소설은 월가를 배경으로 진행되는데 여기에 초점을 맞춰 바틀비를 월가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에 대항한 일종의 영웅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며, 작중 등장하는 인물들의 병에 대한 병리학적 해석도 있다. 아니면 소위 '팔리는 글'을 쓰지않는 길을 택함으로써 출판계와 대중으로부터 외면받던 허먼 멜빌 자신의 투영이라는 해석도 있다. 최근에 월가에서 벌어진 시위와 관련해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작품이다.
본 작품의 배경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사무실은 큐비클로 나뉘어있고 변호사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필경사들을 불러 일을 시킨다. 창문 밖에는 아무런 풍경도 보이지 않으며, 건물의 벽이 모든 것을 가로막고 있다. 월 스트리트(Wall street)라는 이름 자체가 벽으로 이루어진 길이다. 이때 이 장소는 상호 인간적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삭막한 자본주의적 세계를 상징한다. 니퍼가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신경질적이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론 변호사는 이런 업무환경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 장소에 특화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에 존 제이콥 애스터(John Jacob Astor)라는 사람을 위해 일한다고 뻐기는데, 그는 유명한 장사꾼으로,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런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을 매우 큰 자랑으로 여기는 화자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질서에 이미 적응해 있는 사람이다.
독일에서 큰 관심을 끈 한병철의 <피로사회>에 바틀비를 다룬 글이 있다.
테드 창의 단편 우리가 해야 할 일에도 바틀비가 언급된다.
[1] 영문 위키피디아 참조.[2]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일종이다. 자신은 크게 신경쓰지 않으나 내가 이런 평가를 받는 인물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자화자찬의 고급스런 유피미즘이다.[3] 지금처럼 노동자의 권리가 신장된 시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애초에 변호사가 바틀비를 해고시키지조차 못할 정도로 바틀비의 어조와 태도가 차분하고 기묘한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월 스트리트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가 자기가 고용한 직원 하나를 자르지 못해서 사무실을 옮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