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석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한경석은 1909년 7월 2일 충청남도 아산군 영인면 신화리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상경하여 경성부 관훈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에 거주했다.
그는 1927년 10월 서울에서 고학당(苦學堂) 학생 정관진의 권유로 조선학생혁명당(朝鮮學生革命黨)에 가입하고, 1929년 3월 조선학생전위동맹으로 개칭된 동조직의 중앙집행위원으로서 조직부장에 선임되었다. 1929년 5월, 그는 서울 관훈동에 소재한 자신의 집에서 중앙부원회를 개최하고 각자 재학하는 학교에 독서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고, 6월 같은 장소에서 제3회 중앙부원회를 개최하고 표어를 결정했다. 그해 9월에도 자신의 집에서 제4회 중앙부원회를 개최하고 각자 규합한 동지들을 소개했다.
1929년 11월, 한경석은 봉익동에 소재한 김순희(金淳熙)의 집에서 제5회 중앙부원회를 개최하고 전라남도 광주에서 발발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관련해 경성부 내의 조선인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을 선동하기 위하여 정종근(鄭鍾根)에게 격문을 인쇄 살포할 것과 김태래(金泰來)에게 격문의 원고를 작성케 할 것을 결의했다. 이후 1929년 12월 광주학생항일운동 동조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고, 1930년 1월 29일부터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어# 1931년 5월 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미결구류 200일 통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다 대전형무소로 이감되던 중 '조선민족독립만세'를 고창해 1933년 1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이 추가되어 옥고를 치르고 1935년 5월 1일에 가출옥했다. 이후 아산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1년 3월 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한경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0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3. 여담
2020년 4월 14일, 한경석의 아들 한영은씨가 독립유공자 후손 1544명과 더불어 "친일반민족 방송 TV 조선, 채널 A 재승인을 취소하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방송통신위원회에 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