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죠피 숄 남매
1. 개요
나치에 저항하는 비폭력 단체인 하얀 장미를 이끌었던 사람들이다.
2. 생애
2.1. 하얀 장미 결성전까지
오빠인 한스 프리츠 숄(Hans Fritz Scholl)은 1918년 9월 22일에 독일 남부에서 태어났고, 여동생인 조피 숄(조피아 막달레나 숄 Sophia Magdalena Scholl)은 1921년 5월 9일에 태어났다. 그들이 청소년일 때 나치가 집권하기 시작했다. 1941년도에 나치는 유전자 순수성을 보호한답시고 안락사 정책을 벌이고 있었다. 한스와 조피는 안락사에 반대하는 아우구스트 폰 갈렌 주교의 강론(설교)을 듣고 경악한다. 그리고 곧 하얀 장미를 결성하게 된다.
2.2. 결성 그리고 투쟁
그들은 아우구스트 폰 갈렌 주교의 강론전문을 복사하여 뮌헨 대학교에 뿌렸다. 그리고 그들의 급우인 알렉산더 슈모렐(Alexander Schmorell), 빌리 그라프(Willi Graf), 크리스토프 프롭스트(Christoph Probst) 등과 그들의 대학교수였던 쿠르트 후버(Kurt Huber)가 입단한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1943년 2월까지 전단지를 만들고 뿌리면서 저항한다. 그들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나치와 히틀러가 곧 망한다고 주장하고 주로 남독일[1] 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2.3. 체포, 그리고 죽음
그들은 여섯번째 전단지를 1943년 2월 18일, 뮌헨 대학의 수업 종료에 맞춰 공개적으로 배포한다. 그러나 곧 나치 당원인 뮌헨 대학의 경비에게 발각되었고 그들은 체포당한다. 그들은 곧 재판에 넘겨져 나치의 악질 판사인 롤란트 프라이슬러에게 재판을 받았다. 남매는 당당하고 용감하게 신념을 발언하였으나[2] 사형을 선고받았고 선고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들이 남긴 말은 ''''자유여 영원하리''''와 ''''태양은 아직도 빛난다''''.
다른 하얀 장미 구성원들도 첫번째 재판에서 사형선고을 받고 처형당하거나 2번째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3]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치는 이 단체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심지어 전단을 인쇄하는 것을 돕거나 멤버 중 한명인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의 부인과 아이들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까지 체포해 6개월에서 1년의 실형을 선고할 정도로 하얀 장미에 대한 나치의 탄압은 극심했다.
나치의 연좌제식 탄압과 감시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숄 집안의 맏딸이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잉에 숄이었다. 그녀가 나중에 하얀 장미라는 책을 쓴다. 그리고 이 책은 이 단체의 활약과 끝을 보여주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3. 기타
2003년에는 독일 역사의 위인들을 부조로 만들어 기리는 레겐스부르크[4] 의 발할라 기념사원에 반나치 운동가로는 최초로 조피 숄이 헌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