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시 학살 사건
1. 개요
인천상륙작전 이후 후퇴하던 북한군이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자행한 '''학살극.'''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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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시 우물에서 학살된 민간인 시체를 건져 올리고 있는 국군의 모습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과 대한민국통계연감[1] 에 따르면, 1950년 9월 15일 ~ 1950년 9월 28일에 있었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은 후퇴하면서 북한 지역에서도 숱한 학살극을 벌였다. 김일성은 6.25남침 때에 북한지역에서 이른바 북한 내 불순분자 색출을 모토로 '예비검속'(豫備檢束)을 했는데, 이들에 대한 성분조사는 악명높은 '정치보위부'에서 실시했다. 김일성은 미군이 압박해 들어오자 모조리 이들을 학살했다. 관련 기사
함흥감옥에서 약 700명, 함흥시 충령탑 지하실에서 약 200명, 함흥시 정치보위부가 있는 3곳의 지하실에서 약 300명, 함흥 북쪽의 덕산 니켈광산에서 약 6,000명, 함흥시 반룡산 방공호에서 약 8,000여 명이 학살당했다. 함흥시에서만 모두 1만 2,000여 명이 퇴각하는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했다.(납치자와 실종자는 포함되지 않은 숫자) 학살 방식은 총살, 우물 생매장, 투석(방공호의 경우 폭사)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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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각하는 북한군에 의해 학살당한 함흥시 주민들의 시신 약300여구
다음은 북한 지역에서 일어난 북한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책임이 김일성에게 있다는 근거이다.
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김일성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후방을 철옹성같이 다져야 한다. 도피분자, 요언(妖言) 전파 분자와 무자비하게 투쟁하며 밀정 및 파괴분자를 적발, 가차없이 숙청하고 반역자는 무자비하게 처단해야 한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