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시

 



'''함흥시'''
咸興市
Hamhŭng City

}}}

'''시청 소재지'''
해방동
'''지역'''
관북
'''면적'''
556㎢
'''광역시도'''
7구역
'''시간대'''
UTC+9
'''인구'''
768,551명 (2008)
'''인구밀도'''
1,382명/km²
'''구역당위원장'''

미상
'''인민위원장'''

미상
[image]
[image]
'''동흥산구역의 모습'''
1. 개요
2. 역사
3. 교통
4. 기후
5. 명승지
5.1. 기타 유명지
6. 여담
7. 통일 이후의 전망
8. 기타
9. 이북5도위원회 기준 행정구역
10. 출신 인물


1. 개요


북한 함경남도의 인민위원회(도청) 소재지. 성천강 하구 함흥평야에 자리잡은 공업도시이다. 광복 당시에는 함주군, 흥남시와 경계를 접했다.
함흥냉면으로 유명하며, 함흥차사라는 사자성어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도시의 서쪽을 성천강(城川江)이 흘러 동해로 빠져나간다.
2008년 기준으로 인구 약 77만 명. 북한에서 평양남포에 이어 3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이 정도면 남한 기준으로도 어지간한 지방 대도시급이다. 참고로 충청북도 청주시의 인구가 약 83만명, 전라북도 전주시의 인구가 약 65만명이다. 인구는 남포보다 적지만 평양의 위성도시이기도 하고 여러 지역이 한 행정구역으로 묶여 형성된 남포와 달리, 함흥은 함경도 지역의 대표도시이고 함흥대극장과 신흥관등 평양과 비견될 문화관광 시설들이 있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북한 제 2의 도시로 여겨지기도 한다. 통일되면 광역시라는 지위를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철도로 약 350km[1], 속초에서 뱃길로 200km[2].
함경도의 '함'이 이 도시이다.[3]

2. 역사


한사군 시대에는 임둔군(臨屯郡) 부조현(夫租縣)이었다. 원삼국시대에는 대략 옥저 땅이었다가[4]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진흥왕 대에 잠깐 신라 땅이 되었다가 다시 고구려에 빼앗기고[5] 이후 발해의 일부였다가, 고려시대에는 천리장성 이북으로 여진족의 영역[6]이었으며, 고려윤관의 여진정벌으로 확보한 동북 9성 가운데 하나인 '''함주'''(咸州)였다[7]. 그러나 몽골(원나라)에게 정복되어 쌍성총관부에 의해 98년간 통치되었고, 이성계도 이 때 원나라 치하 함흥 일대에서 만호장을 세습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본거지[8]로 유명하여 '풍패지향(豊沛之鄕)'이란 별명[9]이 있었다. 경흥동에 정화릉(定和陵)[10]·덕안릉(德安陵)[11] 등 왕릉이 있고, 귀루동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선원전(璿源殿), 경흥동에는 그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집 가운데 하나인 경흥전(慶興殿)이 있다. 별궁 격인 함흥본궁(구 사포구역 → 흥남시 소재) 역시 존재했으며, 흑백사진으로만 남은 이성계의 젊은 어진은 함흥본궁에서 촬영된 것이다. 함흥차사라는 관용구도 물론 여기에서 유래.
원래 '''함흥군'''이었다가, 1914년 동북부 지역을 신흥군으로 분리하였다. 1930년 함흥면이 '''함흥부'''로 승격되고, 함흥군의 잔여지역은 함주군으로 개칭되었다. 해방 이후 소련군정 치하에서 함흥부가 '''함흥시'''로 개칭되었다.
북한 치하에서는 다른 도시들처럼 파란만장한 변천을 겪었다. 6.25 전쟁 때 크게 파괴되었으나, 소련동독의 지원을 얻어 재건되었다. 한때 함흥에는 동독의 초대 대통령의 이름을 딴 '빌헬름 피크 거리'가 있었을 정도. 1952년 12월 함주군을 일부 흡수했다가, 다시 1954년 함주와 오로군(현 영광군)에 일부지역을 편입시켰다.
1960년 '''함흥직할시'''로 승격되었고, 이 과정에서 흥남시, 퇴조군(현 락원군), 함주군, 오로군을 함흥직할시로 편입하였다가, 1970년 8월 다시 함경남도 도청소재지인 일반시로 격하되었다. 이때 덕산구역, 퇴조구역을 덕산군, 퇴조군으로 독립시켰으나, 덕산군은 1974년 1월 다시 함흥시 회상구역에 편입되었으며, 이때 본궁구역이 사포구역에 통합되었다. 그해 8월에는 반룡구역이 동흥산구역으로 개칭되었다.
2001년 8월에 인구 약 36만의 흥남구역, 해안구역, 흥덕구역, 사포구역의 일부를 독립시인 흥남시로 만들었으나, 4년만인 2005년에 다시 폐지하고 흥남시는 함흥시로 돌아왔다. 2001년 당시 함흥시는 흥남시가 분리되면서 동흥산구역, 성천강구역, 회상구역 등 각 구역들을 폐지하였으나 2005년 흥남시가 다시 편입되면서 구역이 되살아났다.
1961년부터 흥남에 2·8비날론연합기업소가 있으나 알다시피 비날론("주체섬유")이란 것이 참 안습한 녀석이다. 비날론 항목 참조.

3. 교통


철도 시설로는 함흥역, 흥남역, 창흥역등이 있다. 북한 철도망의 가운데에 함흥이 있고 북한 서부와 동부는 함흥을 거쳐야만 지나다닐 수 있는 형태로 교통의 요충지이다.
신흥선, 장진선, 서호선 등이 지난다.
참고로 이 기준은 두개 이상의 노선이 지나가는 기차역만 넣은 것이다.

4. 기후


겨울이 길고 혹독하게 추운 북한치고는 비교적 따뜻한 편이다. 최한월인 1월의 평균기온은 -4.1℃[12]로 위도상 더 남쪽인 강원도 철원군보다 더 따뜻하고 비슷한 위도인 평안북도 구성시보다도 3℃ 정도 더 따뜻하다. 함흥의 겨울철이 비교적 따뜻한 이유는 한반도의 지붕이라 불리는 개마고원이 차가운 북서풍을 막아주고 수심이 깊은 동해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 내에서도 겨울이 따뜻한 곳에 속한다. 최난월인 8월의 기온도 23.2℃로 서늘한 편이고 연교차가 큰 대륙성 기후를 강하게 띄는 북한 내에서는 연교차가 27℃ 정도로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13]
다만 이는 유라시아 동안에 한정해서 비교적 따듯하다는 것이다. 편서풍의 영향을 받는 대륙 동안은 대륙 서안에 비해 추울 수 밖에 없다. 함흥의 위도는 북위 39°54'45"로 북위 39°28'인 스페인발렌시아와 비슷하다. 그러나 함흥과 발렌시아의 1월 평균 기온은 각각 -5.5℃와 11.6℃로 15도나 차이가 난다. 발렌시아의 평균 기온은 오히려 북위 26도에 있는 푸젠 성과 비슷하다.
그리고 함경도 지방답게 연 강수량은 847mm로 매우 적은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전통적으로 농사 대신에 감자 농사가 성행했다. 그 유명한 함흥냉면이 바로 감자 전분으로 만든 것인데 함흥 지방은 강수량이 적고 일교차가 매우 큰 곳이라 감자를 기르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기 때문이다. 함경도 지방에서 생산된 감자의 질은 남한의 강원도, 제주도에서 생산된 감자보다 그 품질이 월등히 더 높다고 한다. 다만, 북한의 열악한 경제사정으로 인해 저장 기술이 매우 낙후되어 제철이 아니면 제대로 먹을 수는 없다고 한다.

5. 명승지


  • 함흥본궁
  • 만세교: 성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원래는 목교였다. 1928년 홍수로 유실되자 2년 뒤 콘크리트로 재건되었다. 정월 대보름에 다리밟기를 하는 풍속이 있었다.
  • 함흥향교: 현존하고 있는 것은 누각인 제월루(霽月樓)뿐이다.
  • 함흥 선화당
  • 구천각(九千閣): 반룡산(북한명: 동흥산) 기슭에 있는 함흥읍성의 북장대였다.
  • 치마대(馳馬臺): 구천각 부근에 있으며, 태조 이성계가 말을 달리며 무예를 익히던 곳이라고 한다.
  • 경흥전
  • 덕안릉, 정화릉
  • 귀주사(歸州寺): 설봉산 아래 있는 로 고려 문종 때 창건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31본산의 하나였으며, 이 부근에는 김일성의 지시로 동물원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반룡산의 경치, 성천강의 은반(겨울철 얼어붙은 강), 만세교의 낙조, 치마대의 가을달, 귀주사의 단풍, 함흥본궁의 밤비(夜雨), 서호진의 돛단배를 함흥팔경이라고 한다.#

5.1. 기타 유명지



6. 여담


  • 북한의 주요 대도시 중 유일하게 구글 맵스에서 도시와 그 구역[14]들이 모두 표시되는 곳이다. 평양이나 청진은 일부 구역이 표시되지 않는다.

7. 통일 이후의 전망


남한 주도의 통일이 이뤄지면 함경남도의 주요 거점도시로서 평양, 청진과 함께 광역시 승격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옛 함흥, 함주, 흥남 지역을 다 엮으면[15] 대충 100만 정도의 인구가 되고, 또 함경도에 대한 배려 차원도 고려한다면 그렇게 된다는 것.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좋게 말하면 낙관론이고, 나쁘게 말하면 억지라는 반론이 있다.
첫번째로 통일 이후에는 인구 유동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북한이야 인구 통제를 하지만, 통일 이후 대한민국의 경우 적어도 이북 5도간의 인구 유동을 막을 필요성도 명분도 없는지라, 이미 껍데기만 남은 함흥의 인구가 그대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적다.
두번째로 함경남도가 두 토막 나 버린다. 마지막으로 일제가 나눠놓기 이전의 함흥 지역을 다 합친다면[16] '''4,121.89㎢라는 거대하다 못해 무지막지한 행정구역이 탄생한다(…)''' 신흥군을 제외하면 2,900㎢ 정도로 많이 작아진다만, 참고로 서울이 605.18㎢, 그 넓은 평양이 1,260㎢, 남한 최대 면적 행정구역인 홍천이 1,819.6㎢인데 이 셋을 합친 것보다 더 넓다!(3,684.78㎢) 애초에 일본이 저래 쪼개 놓은 이유가 함흥이 너무 넓어서(…)라고 한다.
이런 건 수원-화성-오산 통합 같은 일종의 시나리오로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행정구역 통합을 한다면 어디까지를 통합 함흥시의 범주로 삼아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듯 하다. 뭐, 통일이 된 후에 고민해도 늦지 않을 것이고, 지금 결정난 거 아무것도 없다.

8. 기타


함흥 사람들을 얄개와 같다고 하는데 사막에 떨어뜨려도 살아남을 정도로 억세고 강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편견은 의외로 꽤 오래되었는데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함흥부의 풍속은 강하고 사납다라고 기록되었을 정도.

함흥에 관광 갔던 한 외국인이 몰래 찍은 영상으로 보인다.

9. 이북5도위원회 기준 행정구역



'''함흥시'''
咸興市
Hamheung City
}}}
<colbgcolor=#522142><colcolor=#ffffff> '''군청 소재지'''
소화1가동
'''광역자치단체'''
함경남도
'''하위 행정구역'''
8행정동 84법정동, 법정리
'''면적'''
274.14㎢
'''인구'''
112,157명[17]
'''인구밀도'''
409.12명/㎢
아래 행정동과 법정동은 《이북5도 명예읍·면·동장 위촉에 관한 규정》 제8조 별표2에 규정되어 있다. 광복 당시 행정구역이니만큼 일본식 지명도 많이 보이며, 일부 지명은 겹치기도 한다.
행정동
법정동·리
비고
'''경흥동'''(慶興洞)
경흥리(慶興里)·부평리(富坪里)·상수리(上水里)·심동리(深洞里)·하수리(下水里)

'''반룡동'''(盤龍洞)
금일리(錦一里)·반룡리(盤龍里)·산수리(山手里)·서일리(曙一里)·운흥리(雲興里)·지락리(知樂里)·출운리(出雲里)
동흥산구역
'''보고동'''(保古洞)
보고리(保古里)·상보리(上保里)·신보리(新保里)·자흥리(自興里)·중보리(中保里)

'''사포동'''(沙浦洞)
사포리(沙浦里)·신흥리(新興里)·용호리(龍湖里)
사포구역
'''서상동'''(西祥洞)
서상리(西祥里)·신흥리(新興里)·풍호리(豊湖里)·흥도리(興島里)

'''성천동'''(城川洞)
만세리(萬歲里)·성천리(城川里)·황금리(黃金里)
성천강구역
'''중앙동'''(中央洞)
남문리(南門里)·대화리(大和里)·복부리(福富里)·소화리(昭和里)·연지리(蓮池里)·조일리(朝日里)·중앙리(中央里)
시청 소재지
'''치마동'''(馳馬洞)
일출리(日出里)·춘일리(春日里)·치마리(馳馬里)

광복 당시 행정구역을 보면 주요 도시에 소화동(昭和洞), 명치동(明治洞)이라는 지명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당시 일제히로히토의 연호인 쇼와(昭和), 그리고 할아버지 메이지(明治)의 연호를 따서 붙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정(町)으로 표기했는데, 이북 5도 한정으로 이를 현대 한국식 동(洞)으로 구역만 바꾸어서 일단 표기하고 있는 상태로, 비슷한 경우로 일본의 고대 국가였다는 야마토에서 따온 대화동(大和洞)도 이 때문에 많이 띄는 것. 단 고양시 대화동(大'''化'''洞)이나 평창군 대화면(大和面) 같은 경우는 이와 연관이 없다.[18] 그 외에 이즈모, 후쿠토미, 아사히, 히노데, 카스가 같은 것도 보인다.

10. 출신 인물



[1] 철도상으로는 포항시, 목포시와 비슷한 거리에 있으며, 직선거리로는 약 270km으로 광주광역시와 비슷한 거리에 있다.[2] 육로 이용시 300km.[3] 함경도의 '경'은 경성군이다.[4] 교과서의 지도에는 항상 함흥 일대에 옥저를 집어넣는다.[5] 이후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에도 함흥평야를 다시 차지하지 못했다. 통일 이전엔 신라가 먹었다가 통일 이후엔 오히려 발을 못 붙인 특이한 케이스.[6] 여진부락 포로모타부가 있었다.[7] 그 외에도 고려는 함흥에 귀주사(歸州寺)라는 절을 세우기도 했었다.[8] 고향은 정확히는 화령(영흥군. 오늘날 금야군)이다.[9] 한고조 유방의 고향인 풍읍 패현과 동급으로 간주해 이런 별명이 붙었다. 남한에도 비슷한 표현이 붙은 곳이 있는데 이성계의 본관 소재지인 전라북도 전주시객사다. 전주 객사에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10] 환조 이자춘과 그의 아내 의혜왕후의 능.[11] 목조 이안사와 그의 아내 효공왕후 이씨의 능.[12] Dfa기후[13] 대개 북한 지역은 연교차가 30℃ 이상으로 매우 크게 난다. 27℃ 정도면 비교적 연교차가 작은 편이다. 서울도 연교차가 28℃가 넘는다.[14] 우리나라로 치면 구에 해당. 직할시, 특별시 아래의 구역은 자치구(예시로 평양직할시 평천구역), 간혹가다 있는 일반시 산하 행정구역으로서의 구역(예시로 함경남도 함흥시 사포구역)은 일반구로 생각하면 편하다.[15] 사실 1914년 이전에는 역시 함흥군 땅이었던 신흥군도 역사성을 따져 추가 편입할 수도 있긴 하다.[16] 현 북한 체제 내의 함흥시+함주군+영광군+신흥군+락원군. 이북 5도청의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함흥+흥남+함주+신흥이다. 계산은 후자 기준.[17] 1944년 호구조사[18] 대화면의 경우 야마토와 한자가 같기는 하나, 일본과는 전혀 연관이 없고 조선 중기때부터 쓰인 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