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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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초대 최고권력자로 1994년 죽을 때까지 45년을 집권한 독재자이자 학살자이다.[10]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등을 지냈다.
북한에서는 사후에도 정권 주도 하에 '영생불멸의 위대한 수령'으로 숭배되고 있는데, 다른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와는 달리 영구적인 맹목적 숭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11]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6.25 전쟁을 일으킨 전범이며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키고, 대한민국이 징병제 국가가 되게 한 만악의 근원이며, 한민족 전체를 놓고 보면 민족해방이라는 이름하에 쓸데없는 동족상잔을 일으켜 수백만명이 넘는 희생자를 낳게 한 민족 반역자이고,[12] 서방세계에선 변화하는 국제정세조차 무시한 채 폐쇄적으로 국정 운영을 해 북한을 세계 최빈국으로 만든 원흉으로 찍혔다. 또한 오늘날 북한의 일인 세습독재 체제를 수립해 아들 김정일에게 독재권력을 세습하였다.
2. 생애
1912년 4월 1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과 중국을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내다 중학교 재학 중이던 1920년대 말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당했다. 1930년대에는 만주 지역 무장항일투쟁에 참여하였으며,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40년 소련으로 월경해 소련군에 입대했고 1945년 소련군과 함께 국내에 돌아왔다. 광복 이후 열렬한 지지 속에 북한의 최고권력자로 등극했으나, 6.25 전쟁을 일으켜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키고 다수의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등 전쟁범죄를 일으켰으며 이후 8월 종파사건, 갑산파 숙청 등을 통해서 반대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여 1972년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채택과 함께 마침내 유일집권 체제를 완성했다. 집권 기간 모든 정치적 반대 계층을 탄압하고 수십만명 이상을 수용소에 가두는 동시에, 인민을 노예로 만들며 유사이래 최악의 파탄국가로 이끄는 데 책임이 막중한 인물이다.
전후 중화학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통해 1950 - 60년대에는 대한민국보다 빠른[13] 경제 성장을 거두며 성공적인 전후복구를 이루었지만, 애초 계획경제의 한계, 지나친 자립 노선, 과도한 국방비, 허접한 경공업 따위의 까닭이 맞물려 차츰 남한에 비해 경제 성장이 밀리게 되었고, 소련과 중국의 대립 와중에 독자노선과 병영국가화를 추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다른 동구권 국가들과 동떨어진 길로 빠져들면서 자연스레 공산주의로의 이행이란 목표도 허울 좋은 집권 명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1980년대 말 중국의 개혁개방과 동구권 국가들의 연쇄 붕괴에도 꿋꿋이 정권을 유지했으나, 차츰 정권 유지가 쉽지 않다는 현실 인식 하에 미국과 대한민국 등 국가들과 대화 통로를 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던 중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 평양 집무실에서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사망했다. 향년 82세.
"인민들에게 고깃국과 이팝을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14] 는 말을 50여 년간의 집권 기간 동안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 약속이 실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그의 사후 북한은 아예 대다수의 인민이 굶주림과 아사(餓死) 위기에 노출된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사망 직후 김씨일가 신격화 차원에서 그의 시체는 방부처리(엠버밍)되어 금수산태양궁전에 박제되고, 그의 장남 김정일은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 등으로 떠받들며 주석직을 영구결번 시켰다.
3. 능력
3.1. 무능력한 정치인
김일성은 당시로서는 제법 고학력인 중졸[15] 이었지만, 무식했으며 나라를 이끌 능력은 부족했다. 소련을 등에 업고 공산주의 국가를 이끌기는 했지만, '''이런 무식함은 자신과 같은 독재자 마오쩌둥[16] 과 비교 불가 수준으로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연구자들은 그가 공산주의 사상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거나 관심이 없었다고 본다.
오히려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세습에 상당히 부정적이었으며,''' 자신의 자녀들이 아버지 후광만으로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싫어해 자녀들에게 정치판이나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제약을 걸었고 마오의 자녀들은 정치와 전혀 상관없는 분야에서 직업을 가졌다. 마오쩌둥 본인부터가 장제스가 펼친 수차례의 초공작전을 격퇴하고 불가능할 것 같았던 대장정을 성공시켰으며 끝내 국공내전에서 이긴 인간승리의 표본이라 볼 만할 사람으로, 사실 집권 이후의 실책이 워낙 커서 그렇지, 지도자·혁명가·이념가[17] ·전략가·전술가로서도 김일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능한 인물이었다. 특히 게릴라전의 교리는 마오쩌둥이 새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오히려 고학력인 저우언라이는 게릴라전에서 완패하여 그 후 마오쩌둥에게 게릴라전을 이끄라고 했다.'''
''''''
김일성의 이 무식함을 증명하는 일례가 바로 6.25 전쟁이다. 김일성은 인천상륙작전으로 군세를 잃고 평양마저 함락 당한 끝에 강계까지 도망쳤는데 만약 펑더화이와 쑹스룬 등이 이끄는 중공군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완벽하게 망할 뻔했다.[18] 사실 낙동강까지 밀어붙였던 전쟁 초반에도 소련의 지원과 전쟁을 예측하지 못하고 대비를 못한 남한의 실책이 겹친 덕에 운좋게 이겼을 뿐이다.
김일성은 점령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현지인의 민심을 얻는 것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조차 모르고 있었으며, 그 결과 인민군은 점령지에서 학살과 전쟁 범죄를 자행하고 인력과 자원을 징발하여 그나마 있던 민심마저 잃어버렸다. 이에 스탈린은 "김일성 동무는 그런 멍청한 짓을 금지시키지 않고 뭐하고 있어?"라고 화를 냈고 마오쩌둥조차 어리석다고 김일성을 비판했다.[19] 그런 이유로 수많은 북한인들이 김일성의 실체를 깨닫고 6.25 전쟁 당시 월남했다.
게다가 김일성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에 '''도무지 공산주의라고는 볼 수 없는 요소들'''을 너무나도 많이 이식하였다. 가령 초강성 민족주의와 지나친 반외세 경향을 강조한다거나[20] , 핵심계층-동요계층-적대계층이라는 신분제 사회를 만들어 놓거나[21] , 족벌 세습을 당연시한 것 등이 그것이다.
그와 그의 수하들이 주체사상이라는, 마르크스나 레닌이 들었다가는 무덤에서 뛰쳐나올 법한 '''사이비 공산주의''', '''사적 소유가 철폐되고 경제가 국유화된 '노동자 국가'라는 이념에 전혀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생산력의 부족과 풀뿌리 민주주의의 부재로 인한 '기형적 노동자 국가'에 어울릴 법한 사상'''을 만든 것도 그가 공산주의에 워낙 무지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과거 1990년대 주사파들이 불법월북을 통해 김일성을 만나 주체사상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했지만, 김일성 본인은 주체사상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남한의 추종자들이 설파하는 주체사상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주체사상 자체가 (여느 설정이 그렇듯이) 그때그때 필요한 대로 끌어다 붙여서 만든 결과 모순과 왜곡으로 가득찬 설정인 데다, 애당초 김일성 본인이 사상 자체에 별 관심도 지식도 갖고 있지 못했던 이유가 크다.
다만, 6.25 전쟁이 끝난 즉시 박헌영, 김무정, 최창익 등 수많은 경쟁자들을 숙청하고 최용건을 바지사장으로 만들어 온갖 권력을 휘둘러댄 것으로 볼 때, 권모술수 하나만은 천재적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군인으로서는 무능한 정치군인에 불과했어도 정치적으로는 쓸데없는 쪽으로 꽤 수완이 있었던 셈이다. 즉 정치적 역량은 빵점인데 정치공학적 역량은 수준급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민족주의자이기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반미, 반일이라는 일관된 개념은 있었고 우방이라 할 수 있는 소련, 중국에 대해서도 어느 한쪽에 끌려다니지 않는 등거리외교를 펼치며 나름 독자성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민족주의는 스킨헤드나 탈레반이 그랬던 것처럼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 개념을 결여한 것이었기에 최악의 전체주의 독재로 치달았고, 그 전체주의 독재권력을 구축하고 강화하는 과정에서 스탈린이나 마오쩌둥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둘에게 미안할 정도로 수많은 희생자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이보다 더한 좌파 계열의 전체주의 독재권력자는 '''아예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경제성장 자체를 부정했던'''[22] 폴 포트 정도밖에 없다. 무엇보다 그의 주체사상은 지적으로 조악한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전체주의 + 군국주의 + 파시즘 등등 인류 역사에서 등장한 모든 사상들 가운데 자기네들 독재권력 유지에 유리한 것들만 다 뽑아내 섞어놓은 일개 개똥철학이자 '''그 자신과 후손들을 신으로 숭배하는 극악무도한 사이비 종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3.2. 무능한 전쟁광
위의 말은 김일성이 강계시 군수산업공장을 방문하면서 직접 한 말이다. 이때 김일성은 간부들에게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어야 하냐? 아니면 총알을 주어야 하냐?" 라고 묻자 의견이 반반씩 갈렸는데 김일성은 위의 말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간부들을 모두 반동으로 숙청시켰다는 말이 있다.'''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사탕과 연필 대신 총알과 총을 쥐어주어야 한다.''' - 김일성.
실제로 북한은 지금도 대한민국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소학교때부터 아이들에게 전쟁교육을 시켜 유사시 소년병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소년병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백해무익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법한 부분인데도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김일성이 독재와 적화통일을 위해 얼마나 전쟁에 미쳐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단 교육제도를 통해 성장한 아이들은 평범한 단순 노동자에서 부터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들이 양성되고 실제로 한국도 그런 식으로 나라가 발전시켜왔기에 지나친 교육열로 인하여 부작용이 생겼고 교육제도에 대한 투자와 관심이 많다. 이에 반해 북한은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으며 그나마 되고 있는 것도 국제적인 고립과 우상화교육으로 북한사람들은 기본적인 상식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작 김일성의 군사적 능력은 매우 형편없었다. 애초에 기본적인 군사적 식견이라도 있었다면 해당 항목 맨 위의 발언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도 김일성이 직접 지휘해서 승리한 전투는 도저히 지려야 질 수 없는 압도적인 물량 차가 났던 전투인 보천보 전투나[23] 6.25 전쟁 중의 오산 전투 정도였다.
그리고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으로 UN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자 북한군에게 총 후퇴 명령을 하달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 '''고 라디오 방송을 내보낸 뒤 평양직할시를 떠나 덕천시로 도주했고 한국군과 UN군이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자, 피신 장소였던 덕천시를 떠나 강계시를 임시수도로 정한다. 그런 뒤에 강계의 지하 동굴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남조선 해방을 호언장담했던 그는 스탈린으로부터 책임추궁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림은이 당시 김일성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얘기를 전하는 바에 따르면, 김일성은 완전히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으며 시베리아 유배형을 면치 못하리라고 자포자기하고 있었다고 한다.[24]
이 때문에 6.25 전쟁 중 자꾸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는 김일성에게 펑더화이는 '''"당신은 요행만 믿고 전쟁을 일으켰나!'''"라고 맹비난하였고 그래도 정신 못 차린 김일성은 유엔군과 한국군의 반격으로 북한군과 중공군이 주도하던 전세가 다시 밀리게 되자 북한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중공군과 상의도 없이 멋대로 북한군 병력을 후퇴시켰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유엔군이 중공군을 기습하여 중공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고, 이 때문에 펑더화이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홍콩 유력지 "명보"에 따르면 분노한 펑더화이가 '''김일성의 싸대기를 때렸고''' 그 탓에 김일성이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펑더화이는 북한군이 벌이는 대대적인 양민학살과 조직적인 약탈, 그리고 그로 인한 한국인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김일성을 불신하였다고 한다. 비록 삼대기율 팔항주의는 허구로 밝혀졌고 중공군도 잔혹하기는 매한가지였다지만, 적어도 그런 '삼대기율 팔항주의'라는 허물이라도 있던 중공군은 북한군만큼 막나가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시비만 걸어놓고 정작 진짜 싸움은 펑더화이와 쑹스룬에게 죄다 떠넘겼을 뿐'''이었다. 즉,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한 것이 없다. 전쟁 초반의 선전은 6사단장 방호산 등의 활약과 전쟁 경험이 많았던 조선족 부대인 조선의용군의 도움으로 달성한 것이고, 후반의 반격은 펑더화이와 쑹스룬이 지휘한 중공군이 주도한 것이다.
3.3. 무자비한 숙청광
김일성의 반대파 숙청은 6.25 전쟁이 한창이였을 때도 어김이 없었다. 전쟁 초기 김일성은 잦은 전술적 실패와 자신의 오류를 부하에게 전가하면서 처형을 명령하거나 강등시키는 등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자신의 잘못을 상대에게 뒤집어 씌웠다. 1950년 6월 28일 인민군 제 3, 4 사단은 남진하여 서울을 점령했다. '''그런데 제1사단장 최광의 진군이 문제가 됐다'''.
전쟁이 시작되자 제1사단은 고랑포를 거쳐 임진강에 도착했으나 국군 제1사단의 조직적인 거센 저항에 직면하여 진군이 타 사단에 비해 지연됐다. 당시 고랑포 → 임진강 → 문산 → 서울로 진군 경로를 하달한 이는 전쟁계획을 세우고 지침을 내렸던 최고사령관은 김일성이었다. 임진강에 도달한 제1사단장 최광은 예하 연대를 장악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전투를 지속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은 김일성은 전선사령관 김책에게 최광을 체포하여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김일성은 제1사단의 부진한 진격에 대단히 신경질적이었으며 자신의 계획이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일절 반성이 없었다.
김일성의 작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던 사례는 북한군 제2군단의 수원 점령 실패에서도 나타났다. 북한군의 제1차 작전에서 6월 28일까지 서울을 점령한다는 작전임무는 제1군단에 의해 성공적으로 달성됐다. 그러나 제2군단이 같은 날까지 수원을 점령한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6월 28일까지 한국군의 주력을 수원에서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김일성의 작전목표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김일성은 수원점령에 실패한 인민군 제2군단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문책의 칼날을 들이댔다. 제2군단장이던 소장 김광협을 제2군단 참모장으로 좌천시켰고, 참모장이던 최인은 보직 해임시켰다. 예하의 제2사단장과 제12사단장도 보직 해임과 동시에 대좌로 강등시키는 치욕적인 문책 인사를 단행했다. 이때 소장이던 최현은 제2사단장으로 임명됐다.
김일성의 책임전가성 문책은 전쟁 후에 더욱 잔인하게 나타났다. 전 조선로동당 비서였던 림은(林隱)에 따르면, 6.25 전쟁에서의 무참한 패배는 김일성으로 하여금 '피의 숙청'을 단행케 한 계기가 됐다. 자신의 전략이 없음으로 인해 패배한 전쟁의 책임을 군사령관에게 전가하고 개인 독재의 길을 여는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 김일성의 숙청은 그 잔인함에 있어 이오시프 스탈린을 능가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림은 자신이 희생의 직전까지 갔다. 그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장군 중 95%에 해당하는 70여 명이 학살 내지 처형되고 당·정·군의 간부급 20만 명이 숙청됐다.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된 사람들을 합하면 희생자 수는 무려 수백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출처]
또한 김일성은 항상 눈엣가시로 생각하던 연안파의 거두 김무정을 낙동강 전선에서의 패배와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 중공군이 참전하기 직전에 숙청해버렸다. 김일성이 김무정을 밀어내는 과정은 하나의 블랙 코미디였다. 김무정이 평양 방어는 무리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억지로 평양 방어를 떠맡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일성은 평양이 함락당하자 방어사령관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면서 김무정을 실각시켰다.
6.25 전쟁에 대한 피해와 책임을 자신이 지게 될까 두려웠던 김일성은 자신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 위한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상으로 떠오른게 박헌영과 남로당파였다. 김일성 정권은 한참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에 이미 박헌영을 체포하고 권력의 핵심부에서 남로당파 간부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결국 박헌영은 6.25 전쟁 책임론에 휩싸여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53년 3월에 체포당한다. 당시 체포당한 이유는 '리승엽이 미군과 비밀리에 내통한 간첩의혹'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리승엽은 6.25 전쟁 때 인민군 서울점령 치하 때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휴전 직후 미국 스파이, 반당종파분자 등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당에서 제명당하고 직위에서 해임당했다.
1955년 12월 15일, 박헌영은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고 결국 사형 판결을 받았다. 재판 직후 증인으로 나와있던 리강국 등 주요 남로당계 간부들은 즉결 처형당했다. 북한에서 고위직 지내다 김일성으로부터 신변위협을 느껴 소련으로 망명한 박길룡에 따르면, 박헌영은 7월 19일에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세운 꼭두각시#s-1 답게 김일성 역시 스탈린식 개인숭배를 자신에게도 적용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후원자였던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에 의해 스탈린의 신격화가 중지되었다. 김일성이 동유럽 순방을 위하여 북한을 비운 사이 연안파와 소련파는 소련의 지지 아래 연합하여 김일성 실각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연합한다.
그 연합 전면에 나선 서휘, 윤공흠, 리필규는 출당 조치되고 최창익과 박창옥의 당직은 박탈되었다. 동시에 최창익과 박창옥은 내각부수상직 등의 정부 직위도 박탈되었다. 반대파의 완전한 제거를 위하여 '반종파투쟁'을 강도 높게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김두봉, 오기섭, 류축운 등이 현직에서 해임되는 등 1957년 여름까지 200여 명의 반대파 인사들이 '종파주의자'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종파주의자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두봉을 국가주석의 자리에서 내쫓는 등 실각시킨다. 김일성 반대파의 대표나 다름없었던 최창익은 완전히 숙청되어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어 일생을 마쳤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이 1956년 8월 종파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연안파와 소련파가 숙청되었다.
북한의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도 8월 종파 사건 이후 처음으로 등장하였다고 한다. 8월 종파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수의 반대파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정치범수용소가 만들어졌고 지속적으로 그 규모가 확대된 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최후의 분파였던 갑산파는 1967년 경제건설 노선에서 김일성과 이견을 보이다가 결국 숙청되고 만다. 대표적인 예가 김일성의 심복이었던 김광협이다. 이러한 숙청은 1970년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김원봉 등 월북한 인물들을 숙청했다.
4. 음란함
대략 1975년경에 김정일은 김일성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위해서 기쁨조를 만들어서 바쳤다.
기쁨조 안에 행복조, 만족조, 가무조가 있는데, 그중에서 만족조는 성적으로 만족을 주는 조이다. 이것도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기쁨조를 하다가 퇴직한 사람은 고급 아파트에 들어가게 해준다. 그러나 기쁨조를 나올 때 내부에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못하게 각서를 쓰게 한다고 한다.
김일성의 경호원을 1년 6개월 했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기쁨조는 1975년도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처음에는 인민국협조단에서 18명 정도를 뽑았는데, 실력보다는 예쁘기만 했으면 됐다고 한다. 북한에는 음팔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사람이 스트립쇼를 하면 김일성이 좋아했다고 한다.
한편,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에게만 여자를 안겨주기에는 부러웠는지 예술단에서 예쁜 사람들만 뽑아 김정일 주위를 빙빙 돌게 만들었다고 한다. '''즉, 김일성도 살아있을 때부터 기쁨조를 신명나게 즐겼다는 이야기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똑같이 1971년에 득남을 했다. 김일성은 김현을, 김정일은 김정남을 각각 얻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진짜 종요처럼 75살에 김백연을 득녀했다.
5.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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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5세 시절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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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33세 시절 붉은 군대 환영 평양시민대회에 참석했을 당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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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33세 시절의 김일성과 그의 아내 김정숙(당시 29세). 앞의 아이는 4세 시절의 김정일. 체형은 부계지만 이목구비는 모계 유전자가 강한 것 같다.
키가 무려 193cm나 되는 사람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탈북자들이 이 설을 신봉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2017년 시점에서 추정되는 실제 키는 '''177cm다. 말년에는 173cm까지 줄었다.''' 177cm면 2021년 한국 기준으로도 평균 이상이며, 영양이 부족한 북한 기준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장신이다. 서로 비슷한 키도 아니고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면 상대방의 키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고, 게다가 김일성은 키에 비례해 덩치도 제법 되기 때문에 키가 작은 옛날 북한 사람들이 보기에 얼핏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김일성이 청년기였던 1930년대 한반도의 20대 남성 평균 신장이 163 - 164cm이었음을 감안[25] , 현재 한국 평균키로 환산하면 188 - 190cm이 된다. 즉 체감상으로는 실제보다 더 크게 보였기에 저런 소문이 돌았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에 김일성과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만난 사진이 있었는데 티토와 약간의 차이가 날 정도. 티토의 추청키는 대략 172cm 정도로 추측된다.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 같은 덕스런 얼굴이 북한 기준으론 좋은 외모. 사실 장군님 킹왕짱, 희망 어쩌고 세뇌되어 자라니 미학이 그렇게 형성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객관적으로 젊었을 적 외모는 괜찮은 편이었다. 게다가 본인은 이러한 외모에 자신이 있었는지 아니면 카리스마를 과시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항상 전면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고, 이는 그의 아들 김정일이 결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정치기반 확립과 숙청을 감행한 것과는 꽤나 대조적이다. 그리고 김정일은 언제나 인민복 차림인데 김일성은 정장을 좋아했다는 것도 특이하다.
물론 이상의 사항은 어디까지나 '''1970년대 이후 토실토실 살이 찌기 전의 이야기.''' 다만 21세기의 김정은처럼 터질 듯한 초고도비만까지 찌진 않았다. 흔히 김정은이 살찐 것이 할애비의 이미지를 차용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알려져 있는데, 2020년 기준 김정은의 비만도는 김일성이 가장 뚱뚱했던 시절보다 훨씬 심각하게 더 쪄 있다. 처음엔 따라한 거라고 해도 김정은의 경우는 생활습관 자체가 잘못된 것에 가깝다.
김정일의 이복동생 김평일이 내외적으로 김일성을 닮았다고 한다. 1946년 북조선로동당 당수 취임 즈음 때까진 저 날씬한 모습이 유지됐지만 1948년 북한 정권이 수립될 때 투실투실해진 것을 보면 2년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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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0월에 마지막으로 중국 방문을 했을 때 촬영된 사진들. 38년 만에 덩샤오핑 주석과 공식 석상에서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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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26] 대통령과 협상하던 중 뱃놀이를 즐기고 있는 김일성. 그리고 정확히 '''14일 후''' 김일성은 사망했다. '''그리고 94년 당시 칠순이었던 카터는 26년이 지난 지금도 멀쩡히 살아있다.''' 지미 카터는 이상하게도 그가 만난 독재자는 얼마 가지 않아서 권력을 잃거나 사망한다는 징크스가 있어서 농담 삼아 '독재자 킬러'라는 별명이 있다. 그런데 김일성의 경우엔 정말로 카터 때문에 사망한 것이라는 '''진지한 분석'''들이 있긴 하다. 카터가 주선한 북미 대화 및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다가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회되고 이 때문에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주장들이 있다.
6. 족보 집착
묘하게 자신의 성씨와 조상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전주 김씨 33세손(시조로부터 32대손)으로서 6.25 전쟁 중에 전주 김씨 족보를 구하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 했다. 한 일본 기자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전주 김씨 족보와 조상의 영정을 모셔놓고 향을 피우는 방을 따로 마련해 놓은 걸 봤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또한 이 이야기 때문에 전주에서는 전주 김씨의 시조 김태서의 묘가 전주 모악산에 있기 때문에 북한과 전쟁이 나도 전주는 안전할 거라는 이야기를 우스개소리로 하곤 한다. 하지만 정작 6.25 전쟁 개전 초기(9월)에 '''전주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본가인 전주 김씨 시조는 사실 경주 김씨의 일파[27] 인 김태서로서 그 후손 전주 김씨는 몽골 침입 당시 경주를 떠나 이주한 방계이며, 한동안 전주에 있다가 평양으로 이주했다.[28] 즉 근원적인 조상은 신라 쪽으로 닿는다.
하지만 김일성의 집안이 정말 전주 김씨인지를 교차검증할 만한 자료가 마땅치 않다. 1915년 전주 김씨 대동보가 편찬되었으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되었다. 게다가 김일성 일가가 살았던 평안남도 대동군 일대가 누락되었다. 따라서 문서로서 김일성 일가가 확실히 전주 김씨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실제로 전주 김씨들은 김일성과 종친이라는 이유로 분단 이후 상당한 세월을 눈치 보면서 살았어야만 했다. 실향민 + 전주 김씨 콤보인 사람들은 더더욱 사회적으로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으며 이런 이유로 모국을 떠난 이민 1세대들도 있다. 참고로 일반 북한 주민들은 계속된 국가의 통제로 인해 지금은 자신의 본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주민들이 많다고 한다.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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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뒤에는 혹이 있었으며, 살이 꽤나 쪄 있어 반공 애니메이션에서는 주로 돼지로 묘사되었다. 김씨 일가를 돼지로 묘사하는 것은 이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심지어 똘이 장군에서는 인간의 형상을 한 돼지로 등장해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는데, 김일성 본인은 이 콤플렉스를 거론하는 것을 무척이나 기분 나쁘게 여겼으며 이것에 관해 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만약에 논할 경우엔 아주 무시무시한 아저씨가 찾아와서아주 무시무시한 곳으로 끌고 간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측에서 찍은 사진 중엔 김일성의 혹이 찍힌 경우가 매우 드물다고 한다. 1988년 북한 정권 수립 40주년 기념 행사 때 프랑스 취재진이 녹화한 영상에 그의 혹이 드러난다. 20초 부근 참고.[29] 김일성의 혹은 지방종으로 추정되는데 외과 수술을 통해 조기에 절제할 수도 있었으나, 치료 시기를 놓쳤고 고령이 된 후라 수술을 하면 건강에 타격이 가겠기에 그냥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사이에 혹은 더 커졌다. 정원식 전 국무총리가 남북고위급회담 차 방북했을 때, 김일성을 예방한 적이 있는데 당시 내외통신(현 연합뉴스) 기자에 의해 혹이 선명하게 찍힌 사진도 있다. #
- 위의 이유로 김일성에게는 목 뒤의 혹과 사실상 왕국이나 다름없는 북한의 삼대세습 정치체제를 로마 황제 식으로 비꼰 '혹부리우스'라는 별명이 생겨나게 된다.
- 김일성의 전직 주치의가 <신율의 시사열차>에 출연하여 "김일성이 젊은 청년 피 뽑아 한 달에 한 번씩 피갈이를 했다."라고 증언했다. 이 피갈이의 부작용으로 목 뒤에 혹이 생겼다는 것이다. 20대 내내 김일성에게 피를 헌납한 청년들은 죽기 일보 직전인 사람과 같을 정도로 폭삭 늙었다고 전한다. 실제 나이는 20대인데 외모는 70대처럼 변했다는 것이다.
- 현 북한에서의 역사교육에서 한글창조를 세종대왕이 아니라, 김일성이 완성했다고 가르친다. 실제로 탈북민 유튜버 놀새나라TV 에서 역사시간에서 배우기를 세종대왕님이 한글을 창조하시다가 그만 눈이 멀어버렸다. 그래서 우리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가 한글을 완성하였다. 라고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에는 한글날이 조선글날이라는 이름으로 있긴 하지만, 찬밥 대접을 받고 있다.[30][31] 그런데, 북한사람들은 이걸 실제로 믿는다. 애초에 북한은 TV가 조선중앙TV가 끝이기도 하고, 세뇌교육을 시켜버리니 진짜로 믿는것. 다만 지역마다 배우는건 좀 다른모양.
- 공교롭게도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가 일어난 그 날에 태어났다.
- 빨치산 시절부터 자신을 지지해 준 김책을 존경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원래 소련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김일성으로 내세우려던 것은 김책이었다는 카더라도 있다. 그가 죽고 나자 함경북도 성진을 '김책'으로 바꾸고 공업대학을 만들 때 그의 이름을 붙여서 '김책공업종합대학'이라고 짓기도 했다.
- 의외로 어렸을 때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고 한다. 생전 김일성이 인생에서 제일 후회하던 것 중 하나가 어렸을 때 교회 열심히 안 다니고 놀러 다녔던 거라고... 그가 살던 평양이 일제시대에는 '동방의 예루살렘'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개신교 강세 지역이었는데, 여기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 자신의 카리스마를 대중들에게 드러내는 걸 좋아한 나머지 1946년부터 1994년 사망한 해까지 육성으로 신년사를 내보냈다. 예외적으로 1966년과 1970년에는 신년사 대신 로동신문 사설로 대체했다. 반대로 비밀주의를 표방하던 김정일 때에는 신년사 없이 공동사설이 신년사를 대체하다가 2013년에 김정은이 부활시켰다.
- 6.25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허락받으러 갔는데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하여 반대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끈질기게 아양 떨고 지랄 부리고 하여튼 스탈린에게 허락 받으려고 별짓을 다했다. 결국 스탈린은 무려 48번씩이나 거절한 끝에 6.25 전쟁을 허락하고 말았다. 물론 그 뒤 스탈린은 인민군이 깨져서 패주하는 꼴을 쳐다만 봤다. 그래도 형님은 형님인지라 UN군 공군에게 개박살난 북한 공군을 대신해 소련 공군을 참전시켜는 줬다.
- 북한에서는 문화어가 '수령님께서 몸소 쓰시는 영광스러운 언어'라면서 김일성이 과거에 말한 '지주놈의 상통'(면상), '자본가놈이 뒈졌다', '대가리를 돌로 까부신다'와 같은 온갖 각종 욕설이 난무한 막말도 문화어라면서 대놓고 교과서에 실어놓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라고. 그러나 타국에서는 보기 힘든 유례 없는 일인데, 아무리 도널드 트럼프나 로드리고 두테르테와 같은 사람들이 막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북한에 비하면 상당히 양반이며 적어도 미국이나 필리핀은 대놓고 교과서나 언론에서 쌍욕을 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불분명하나, 일각에서는 1967년 김일성이 "전투적 화법을 사용하라"고 지시한 것을 시초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도 지도자의 품격에 따라 달라져서, 김정일 때는 더 심해졌다고.
- 해방 이후에는 남측의 정적들에게 죽을 위기를 몇 차례 넘겼다. 1946년 3월 1일 3.1절 기념연설을 하던 도중 백의사에게 암살 당할 뻔했다. 수류탄을 암살자가 던졌는데, 그 자리에 있던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가 되집어던져 암살을 모면했으나, 그 장교는 가까이서 터진 수류탄 덕에 팔 하나와 여러 곳을 다치고 의병제대했다. 소련군정문서 1946년 4월 6일자에 의하면, 이승만과 김구는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테러단을 파견했다고 한다. 그전에 북한으로 파견된 테러분자들이 김일성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소식도 보도된 바 있다. 자동차에 수류탄이 투척되었는데 자동차는 어떤 파손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테러분자들은 이승만이 조만식에게 보내는 것으로 보이는 추천장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과 김구는 파쇼테러단이라고 비난 받았다. 김일성이 권력을 확실히 잡은 1950년대 후반에서야 비로소 이 장교를 손수 찾아가 고마워했고, 북한에서 따로 연금과 여러 가지를 제공하여 은혜를 보답했다고 한다. 심지어 기념영화까지 나왔으며, 죽을 때도 북한에서 장례비를 지원했다.
- 외국에서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개인숭배의 정도가 나오는데, 평양의 웬만한 공원에는 투명 플라스틱으로 덮인 벤치가 있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변은 '수령님께서 앉으셨던 의자'라서 길이 보존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는 아들과 손자까지 이어져 다녀간 벤치뿐만 아니라 현장지도 때 몸을 기댄 나무에도 강화 플라스틱 덮개를 씌운다. 그리고 현장지도로 방문한 일반 가정에는(물론 사전에 다 방문 준비가 완료된 가정이다.) 집의 안팎으로 붉은 색 바탕에 금색 글씨로 현판이 달린다. 그 현판의 내용은 대충 '주체00년 김ㅇㅇ 수령동지께서 ㅇㅇㅇ현장지도 중 찾아와주신 집'으로 적힌다. 이러한 방문의 대상이 되는 가정은 이를 반기는 마음 절반, 싫어하는 마음 절반이라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방문준비로 인해서 집 안팎이 정돈되고(페인트 칠부터 시작해서 동네 진입로까지 싹 다 새로 깔린다고 한다.) '수령님께서 직접 만난 사람'이라는 북한에서 최고의 끗발을 날릴 수 있는 뒷배가 생기기 때문에 절반은 기쁜 마음이고. 방문 이후 다녀간 집 자체를 전술한 벤치처럼 보존해야하기 때문에 돈이 있건 없건, 지원이 있건 없건 항상 그 상태 그대로 유지시켜야 할 의무가 생기기 때문에 싫어하는 마음이 같이 생긴다고 한다.
- 북한에서 제작한 드라마나 영화에서 김일성[32] 역할을 한 배우는 평생 그것만 해야 하고 대단히 경호를 잘 해준다. 일명 1호 공훈 배우. 참고로 북한에서는 박정희 전문 배우로 유명한 재일교포 출신의 배우도 이 정도 대우를 받지만 그 사람은 다른 역도 꽤 나왔다.
- 보통 동아시아에서는 부모,선조,성인,군주의 한자를 피하는데 이를 피휘라고 한다. 왕조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모습이였는데 김씨가문은 특이하게 아버지의 한자를 차용하여 이름을 짓는다. 이를 편휘라고 하는데 서양에서는 일반적이나 아시아에서는 일본에서나 쓰이던 특이한 방식이다.
- 소 뒷걸음질로 쥐 잡는 격으로 여러 사람과 나라들을 살리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박정희[33] , 장제스와 중화민국[34] , 요시다 시게루[35] 와 일본[36] 등이 있다.
- 김정일이 실권을 쥐게 된 1980년대 이후로는 외교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고, 유년기부터 항일투쟁과 해방 시기까지의 활동을 다룬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같은 책을 집필했다. 하지만 저 회고록은 자기 입맛에 맞게 항일운동사를 마구 뜯어고치고 윤색해 북한 밖에서는 불쏘시개로 취급된다.
- 평소 집무실에서 틈틈이 책을 읽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좋아했던 책은 역사책과 문학책이었으며, 심지어는 한국에서 발간된 책까지도 읽었다. 실제 1989년 소설가 황석영이 문익환 목사 일행과 방북하여 주석궁에 갔을 때는 황석영의 여러 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한동안 그와 책 내용을 두고 토론까지 했을 정도라 한다. 문익환 목사는 성경책을 보여줬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별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 김일성은 시와 노래를 좋아해서, 지은 노래와 시가 몇 십 편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노래는 '조선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일제 강점기 때 동북항일연군이 부르던 것을 1993년에 보천보전자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수 전혜영이 다시 복원했다. 김일성이 좋아하는 노래는 사향가와 자장가이다. 사향가는 내용이 고향에 대해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외조모인 이보익의 애창가였다. 김정일도 어린 시절에 그녀가 부르는 사향가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또 자연을 노래한 시는《묘향산 가을날에》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의 내용은 평안북도 묘향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으로 국제친선전람관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김정일의 50회 생일을 맞이하여 '백두광명성찬가'라는 한시를 짓기도 했는데, 양강도 삼지연군 화강암 비석에 새겨져 있다.
- 서예 활동을 많이 했다. 북한의 공공건물에는 김일성의 친필이 있는 간판이 있는 것을 꽤 볼 수 있다. 김일성의 친필비는 개성에 있으며, 인민들이 살고 있는 주택에도 현판을 제작해서 나누어 주기도 했다. 김일성의 친필이 걸려 있는 건물로는 대동강여관과 김형직사범대학, 그리고 북한의 종합대학 중 하나인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이 있다.
- 북한 원의 인물이다. 북한 원 2기 3차 시리즈 100원권 지폐에는 '혁명의 영재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라는 기나긴 수식어가 붙어 있다.
- 김일성의 장례식에 당시에는 북한의 인민들이 총동원되어 매일 생화를 들고 김일성의 동상을 찾았고 이로 인해 북한에 꽃이란 꽃은 모조리 팔려버리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김일성 사망 당시에만 해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날에는 김일성 동상이나 초상화 앞에 꽃다발을 갖다 놓는 관례가 있었고 이 시기를 이용하여 짬짬이 꽃장사에 나서는 장사꾼들이 있었는데, 김일성의 장례기간 동안마다 이 사람들은 말 그대로 떼돈을 벌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북한 돈으로 5원밖에 안 하던 생화 한송이의 가격이 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10배 가까이 오른 50원까지 거의 인플레이션 급으로 올랐을 정도다. 심지어 그 가격에도 꽃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일시적으로 종이로 만든 조화가 김일성 동상앞에 놓이기도 했다.
- 러시아 신문에서는 김일성이 너무 오랫동안 중국에서 살아 온 탓에 북한공산당 창건대회 때 그는 한국어로 된 연설문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김일성의 첫 연설이 처참했던 것은 사실인데, 사실 이건 김일성의 탓이 아니라 연설문을 고려인 2세들이 써서 문법이나 어휘가 조악했기 때문이었다.
-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거리 및 시설 이름도 있다. 이름은 "김일성 거리"로, 캄보디아의 프놈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모잠비크의 마푸투에 있다. 특히 다마스쿠스에는 김일성의 이름을 딴 공원도 있는데, 공통적으로 다 친북 성향인 나라들이다. 남한 주도로 통일될 경우 통일 대한민국에서 개명요구를 할 수도 있지만, 외교적 간섭으로 비춰질 수 있으므로 그냥 묵인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 "스탈린은 내 친구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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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납북된 신상옥과의 대화 도중 고려연방제의 국호 후보에 대해 언급하면서 신라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을 때 외세의 힘을 빌렸다는 점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박정희의 신라 계승 정신도 좋지 않게 보았다. 북한에서는 역사를 가르칠 때 지금의 북한 땅에 중심지를 두었던 나라인 고조선, 고구려, 고려, 북한을 높게 평가하고, 반면 지금의 남한 지역에 중심지가 있었던 신라, 조선, 대한민국을 낮게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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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정권도 초창기에는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했기에 김일성과 태극기가 나란히 있는 사진들이 있다. 심지어는 김일성이 태극기에 경의를 표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영상도 있다. 지금와서 보면 매우 어색한 사진이기도 하다.
- 장성택의 길이라는 책에 의하면 김일성은 자신의 건강이 예전만 못하다고 느끼던 시점에 자신이 가장 믿는 측근 10명을 불러 모은 뒤 손잡이가 은으로 되어 있는 권총 열 자루를 꺼내어 각자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리고 엄중한 태도로 그들에게 후계와 체제 문제에 대한 중대한 발언을 남겼다. 그 발언은 "만약 자신이 죽은 후 후계자인 아들이 자신의 노선에서 일탈해 함부로 체제 개혁에 손을 댄다면, 누구라도 바로 이총으로 그를 사살하라"는 명령이었다 한다.
8. 가족 관계
김일성은 김태서가 시조인 전주 김씨의 후손이다.
- 8대 조부: 김계상
- 8대 조모: ???
- 7대 조부: 김차형 (1699년 - 1768년)
- 7대 조모: 나씨 (1703년 - 1744년)
- 6대 조부: 김욱 (1728년 - 1813년)
- 6대 조모: 도민숙 (1735년 - 1811년)
- 현조부: 김민수 (1770년 - 1854년)
- 현조모: 고송희 (1772년 - 1832년)
- 고조부: 김송령 (1810년 - 1899년)
- 고조모: 나현직 (1811년 - 1897년)
- 증조부: 김응우 (1848년 - 1878년]]): 북한에서는 그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민중들을 선동하여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하게 이끈 주동자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북한의 왜곡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 사건의 총책임자는 어디까지나 당시 평안감사 박규수와 철산부사 백낙연이었고, 행동대장 역할을 맡은 사람은 퇴역 장교 출신의 박춘권이었다. 물론 당시 기록 그 어디에도 김응우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사건 당시 김응우는 21세의 햇병아리 묘지기였을 뿐이지만 박규수(1807 - 1877)는 이미 60을 바라보는 노회한 고위 관료였다. 누가 이 사건을 주도했을지는 뻔한 일.
- 증조모: 리씨 (???? - ????)
- 조부: 김보현 (1871년 8월 19일 - 1955년 9월 2일)
- 조모: 리보익 (1876년 5월 31일 - 1959년 10월 18일)
- 부친: 김형직 (1894년 7월 10일 - 1926년 6월 5일): 개신교 미션스쿨인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동문들과 '민족주의'단체인 조선국민회 결성에 참여했다. 아들과 달리, 이 단체의 목표는 일종의 준비론에 가까웠다고 한다. 충격적인 사실은, 그는 자신의 아들과 달리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훗날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암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거점으로 온갖 고초를 겪으며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때문에 남북통일 이후 김씨 일가의 진실이 밝혀질 때 재평가될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기도 하다.
- 외조부: 강돈욱(1871년 2월 3일 - 1943년 11월 14일)
- 외조모: 위돈신
- 모친: 강반석 (1892년 4월 2일 - 1932년 7월 31일): 만약 베드로를 떠올린다면 맞다. 장로회 장로 강돈욱의 차녀로, 그녀 본인 역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참고로 숙부인 강량욱은 장로회의 목사였다.[37]
- 처: 정실 김정숙 (1917년 12월 24일 - 1949년 9월 22일)
- 후처 김성애 (1928년 - 2014년) (추정)
- 형제
- 자식
- 김정일 (1941년 - 2011년)
- 김만일 (1944년 - 1947년): 3살 때 김일성 관저에 있는 연못 근처에서 놀고 있다가 그 연못에 빠져 익사했다.
- 김경희 (1946년 - )
- 김평일 (1954년 - )
- 김영일 (1955년 - 2000년)
- 김현 (1971년 - ): 김일성과 제갈씨에게서 태어온 사생아다. 북한 당국에서 존재를 철저히 숨겼지만 북한에서 넘어온 이한영이 자신의 수기를 통해 김현의 존재를 알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2001년 자신의 이복형인 김정일에게 처형당했다. 사람들의 추측으로 정통성을 위한 조치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김현은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과 동갑이다. 그런데 2015년에는 처형당하지 않고 살아있으며 외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 김백연 (1987년 - ): 위에 나온 김송죽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아버지와의 나이차가 참으로 장대하며 동년배 내지는 1살 연하로 확정된 김여정의 고모다.
북한이 1946년에 내놓은 공식 김일성 전기인 한설야의 인간 김일성에 따르면 1930년대에 한영애란 여자와 하얼빈에서 살림을 차린 적이 있었으나 난리통에 헤어졌고 이후 최희숙이란 여자와 살림을 차렸으나 일본인들이 김일성을 홧병 걸려 죽게 하려고 사로잡아서 눈알과 심장을 뽑아 죽였다고 김일성은 주장했는데 소련에 의해 우상화된 김일성의 전기인만큼 신뢰성은 낮다. 한영애는 김일성이 한반도 이북의 수괴가 되자 6·25전쟁 도중에 김일성을 다시 만나기 위해 이동하다가 공습으로 죽었다 한다. 이후 최희숙의 친구인 '키도 작고 얼굴도 못난' 여자인 김정숙과 결혼했다고 김일성은 구술하고 있는데 이후 이 한설야의 인간 김일성은 철저히 말소되었고 지금은 읽고 싶다면 평양 인민대학습당 비공개 열람실에 꿍쳐져 있는 정로 신문을 뒤져봐야한다.
9. 어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국가건설사상과 업적이 구현된 주체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조선의 시조이시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서문 中.[39]
천리마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인민은 쌀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이번에 카터하고 회담할 때 지금 UN에서 제재하겠다 하는데, 할려면 해라. 이때까지 우리는 제재받고 살았지 제재 안 받고 산 적이 없다. 다 제재한다고 우리를. 일본놈들도 제재하지, 다 제재하지. 우리 제재 받고 살았다. 제재받고도 이만큼 살아나가는데, 제재할려면 더 더 해라. 우리 못살 거 뭐이가? 그랬더니 '제재 취소하겠다.' 그래. 취소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나도 마찬가지다. 못사는가 봐라. 우린 더 잘산다.
— 생전 마지막 지시 中#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어!'''
- 1950년 11월 7일 피난 당시 만포진에 있는 소련 대사관 파티에서 만취한 김일성이 박헌영 부수상과 전쟁에 대한 이견으로 언쟁할 때 대리석으로 된 잉크병을 박헌영에게 던지며.
우리 인민군대는 전투를 계속하면서 부득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군은 마지막 피 한 방울을 다 흘릴 때까지 용감히 싸우라.
- 10월 10일 한국군과 UN군이 파죽지세로 평양으로 진격해 오자 평양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기 전에 한 라디오 방송.[40]
남조선 인민들은 스스로 해방 투쟁을 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무장공비를 지속적으로 침투시켜서 해방구를 만들고 봉기를 시켜야 한다.
생활 수준이 높아질수록 인민들은 사상적으로 나태해지고 행동은 더 산만해진다.
우리 행성에서 핵무기가 있는 한 핵전쟁의 위협은 가셔질 수 없으며, 인류는 항시적인 핵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핵무기의 시험과 생산, 배치를 금지하고 지금 있는 핵무기들을 축감하며 나아가서 '''모든 핵무기를 완전히 없애버려야 합니다.'''
남조선에서 미국 놈들을 몰아내야 하겠는데, 그놈들은 절대로 그냥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젠가는 미국놈들과 다시 한번 꼭 벌여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전쟁 준비를 다그쳐야 합니다. 동무들은 하루 빨리 '''핵무기와 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적극 개발해야 합니다.'''
내가 죽으면 나의 혁명동지들이 묻혀있는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묻어달라. 그곳에서 내 옛 동지들과 함께하고 싶다.
일본은 100년의 원수지만, 중국은 1000년의 원수다.
- 아들에게 남긴 유언
남조선 당국자들은 우리의 호의를 무시하고 민족 단합이 아닌 외세와의 야합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소위 자신들을 문민정부라 칭하지만 역대 군부독재 정권과 조금도 다를바 없습니다! 있지도 않은 핵 문제를 물고 늘어지며 갈등을 충돌(동)질 하는 건 미국입니다!
- 1994년 생전 마지막 신년사 중.
10. 창작물
- 1980년대 중반까지 김일성의 얼굴이 공개되는 건 한국에서는 코렁탕의 지름길이었다. 대부분 캐리캐처로 등장했으며 브리태니커나 뉴스위크지에서 김일성의 사진이 나올 경우 먹지로 처리하거나 찢어버려서 수입되었다. 해외제작 6.25다큐의 경우는 김일성의 육성부분은 묵음으로 처리했다. 이런 것들이 풀린 시기는 88 올림픽 전후.
- 김희라 - 100분 드라마 《반역자(1982, KBS1)》. 혹이 포인트.
- 전광렬 - 여명의 그날(1990, KBS1), 해방 직후의 젊은 김일성. 해당 작품은 외압성 조기종영으로 끝났다. 외압을 받은 이유는 김일성 미화 논란 때문이었다. 이 드라마의 김일성은 처음엔 이상을 가진 항일 투사였으나 점차 권력을 장악하며 독재자로 타락하는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전광렬은 기존의 '혹부리 돼지' 이미지와는 다른 샤프한 미남이었고, 1990년 당시에는 김일성 가짜설이 아직 대세였던 데다 김일성의 '인간적인' 모습을 묘사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든 경직된 시기였다. 정작 재미있는게, 이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박정희의 모습도 일본군 신분으로 비밀 광복군 활동을 하는 모습으로 나왔다는 것.
- 문오장 - 지금 평양에선(1982, KBS1)에서 손과 입만 나오는 걸로 처리되었다. 연기가 그럴듯 했는지 최은희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이 저 간나새끼가 평안도말은 언제 배웠어? 가만 둘 수 없다"라고 욕설을 퍼부었을 정도로 열이 받았다고 한다. 다만 문오장 본인이 출연한 KBS2 토크쇼 《밤과 음악사이》자료화면에 따르면 김철만 역도 맡은 것으로 나온다.
- 국정환 - 제1공화국(1981, MBC)
- 주현 - 제4공화국(1995, MBC)
- 박철호 - 서울 1945(2006, KBS1)
- 이원종 - 2016년작 영화 인천상륙작전: 아주 잠깐 나오며, 흰색 육군 원수용 하예복을 입고 있다.
- 1993년에 남파간첩 출신 귀순자 이항구[42] 가 <소설 김일성>을 낸 바 있었다.
- 굽시니스트의 2차세계대전 만화에 코믹하고 무능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웹버전과 출판버전 둘 다 나오는데, 웹버전은 지프차 타고 전장에서 도망치다가 홍범도 장군한테 관광당하는 내용이며, 출판버전은 독일군 포로로 잡혔다가(이때도 자신이 북쪽의 실권자라면서 살려주면 후한 보상을 해주겠다 허풍을 친다.) 홍범도 장군이 구해주면서 페어로 다닌다. 그리고 마지막에 김정일의 친모(!)임이 밝혀진다.
11. 관련 사건사고
- 김일성 가짜설
- 1986년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 김일성 암살설
12. 관련 문서
- 김일성상
- 김일성화
- 김일성훈장
- 김일성 시계
- 기쁨조
- 도서정리사업
- 동북항일연군
- 민생단 사건
- 보천보 전투
- 북한
- 정치범수용소/북한
- 조선인민혁명군
- 창평 정치범수용소 학살 사건
- 프룬제 군사대학 쿠데타 모의 사건
- 해주시 학살 사건
- 6.25
- 8월 종파사건
- 김정일
- 김정은
- 스탈린주의
- 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