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 대기근

 

1. 개요
2. 평가
3. 매체에서


1. 개요


1942년 발생한 중국의 대기근. 이름 그대로 허난성에서 발생하였으며 여러가지가 원인이지만 1938년 황허 홍수의 타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어난 대형 참사로 알려져 있다.
중일전쟁 이후 중국 허난성에 기근이 닥친다. 앞서 언급한 황허 홍수의 여파로 허난성의 경작지는 기존의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1942년부터 극심한 가뭄이 시작되었다. 단 1년 동안 무려 300만명이 아사하게 된다.

“정신 없이 만두를 먹는데 고기 소에서 사람의 손톱이 나왔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먹는 만두가 인육으로 만들어진 거라는 걸 알았다. 그 가게 안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그 사람들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살던 동네의 어떤 가족은 먹을 것이 다 떨어지자 남아 있는 가산을 모두 팔아서 마지막 한 끼를 배부르게 먹고는 모두 같이 자살했다.”

“식량 조금을 사기 위해 부모가 자식을 팔거나 남편이 아내를 팔고, 형과 오빠가 동생을 파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증언이 나올 정도로 당시 허난성은 생지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당 정부는 구제작업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당시 지역 관리들이 문책 당할까봐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점도 있고 정보가 들어와도 적극적인 구제책을 마련하지 않은 점도 있다. 다른 지역으로 이야기가 번져 민심이 흉흉해지는 걸 두려워한것으로 추정된다.

2. 평가


허난 대기근은 분명이 끔찍한 대기근이였으나, 어떤 미친 독재자로 인해 16년 뒤에 벌어질 제사해 운동에 비하면 자연재해가 원인이라는 점에서 그나마 참작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이 생태계 사슬을 제대로 인지하지 않고 발생한 제사해 운동과 달리, 국민당 정부가 제방을 터뜨린 건 일본군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린, 그나마 현실적인 결정에서 비롯되었다. 구제작업을 하지 않고 아사자를내버려 둔 것은 마오쩌둥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난 대기근은 중일전쟁 중에 일어난 일이고 비슷한 시기 뱅골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일어난 벵골 대기근이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전쟁 중인 시기에서 충분히 일어날 가능성은 있는 사건이였다.

3. 매체에서


펑샤오강의 영화 1942가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