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황허 홍수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피해
5. 홍수 이후


1. 개요


1938년 6월 9일부터 황허 중하류 허난성, 안후이성, 장쑤성 일대에 발생한 대홍수. 이 사건은 집중호우 등으로 발생한 일반적인 자연재해가 아니라,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홍수이다.'''

2. 배경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군은 후퇴를 거듭했고, 일본군은 1938년 초 안양 점령을 시작으로 허난성 일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중국은 이를 저지하고자 하지만 역부족이었고, 일본군은 허난성 동부로 남하하였다.
이후 6월 들어서는 북송의 수도였던 역사적인 도시 카이펑이 위기에 처했고, 중국군은 카이펑 인근의 란펑 현(現 란카오 현)에서 마지막 방어전을 치르지만 일본군에 패배하여 결국 6월 6일 카이펑은 일본군에 점령당하고 말았다.
일본군의 다음 목표는 허난 성 성도(省都)인 정저우였고, 이곳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했던 장제스는 '''황하 제방을 무너뜨려''' 일본군을 수공으로 저지할 것을 결정하게 된다.

3. 전개


1938년 6월 7일부터 중국 국민혁명군 제53군 1단은 정저우 인근 화위안커우(花園口)의 황하 제방을 파괴하기 시작하여, 이틀 뒤인 9일 마침내 제방을 무너뜨렸다. 천정천[1]이었던 황하의 물살은 무너진 제방을 통하여 인근 평야지대로 넘치기 시작했다. 넘친 황하의 물살은 인근의 카이펑 등지로 흘러갔고, 카이펑을 넘어 진격하던 인근의 일본 육군 제14사단, 제16사단은 이 홍수에 휩쓸려 큰 피해를 입었다. 이 결과 중국은 일본군을 저지하고 정저우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중국의 계산은 인근의 다른 하천으로 물이 빠져나가도록 만들어 홍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날인 10일 황하 상류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계산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제방 붕괴가 확대되는 바람에, 드넓은 평야지역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물벼락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4. 피해


침수지역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허난성 동남부 지역 뿐 아니라 인근의 안후이성, 장쑤성 일대까지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산 하나 찾기 어려운 대평원이었기 때문에 물살을 막을 수 있는 장벽이 거의 없었던 것.
이 상황에서 중국 정부는 화위안커우 인근 지역에만 홍수경보와 대피명령을 내리고, 나머지 지역에는 아무런 경보도 내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피해가 커질 줄 예상하지 못한데다, 침수 지역이 온통 전쟁터에 일본군 점령 지역도 있었던지라 체계적인 경보와 대비가 어려웠던 것.
결국 엄청나게 많은 민간인들이 난데없이 찾아온 물벼락에 그대로 휩쓸리고 빠져죽었다. 이 홍수로 인해 '''주민 89만 명이 사망하고, 이재민은 무려 1250만 명에 달했다.'''

5. 홍수 이후


이 사건을 계기로 황하의 흐름은 동남쪽으로 바뀌어 화이허양쯔강 하구 쪽으로 합류하게 되었다.[2] 이는 1947년 화위안커우 제방의 복구가 완료되면서 다시 원래 흐름으로 돌아왔다.
적을 막기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엄청난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에, 중국과 장제스는 적잖은 비난을 들어야 했다. 특히 예전에 협력관계였던[3] 나치 독일은 중국에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고, 안 그래도 흔들리던 양국의 관계가 이를 계기로 완전히 끝장났다.[4]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허난성은 이후로도 중국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계속 벌어지는 통에 제대로 복구조차 되지 않았고, 이는 4년 후인 1942년 가뭄과 함께 찾아온 허난 대기근으로 이어졌다. 이 때는 '''300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였다.

[1] 강바닥이 인근 땅보다 높은 하천[2] 황하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흐름을 바꾸었고, 양쯔강 하구 쪽으로 흘러간 적도 몇 차례 있었다.[3] 물론 일본과 중국이 전쟁을 시작하면서 점차 사이가 나빠지고 있기는 했다.[4] 중국은 이후 독일 대신 소련을 파트너로 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