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조지

 


이름
헨리 조지(Henry George)
출생
1839년 9월 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
사망
1897년 10월 29일, 향년 59세
미국 뉴욕
국적
미국
종교
성공회[1]
1. 개요
2. 생애
2.1. 사상
2.2. 죽음
3. 사후


1. 개요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한 학자이자 정치가, 경제학자. 지공주의의 토대를 깔았으며, 토지가치세를 주장했다. 19세기 후반에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2. 생애


헨리 조지는 미국 펜실베니아 필라델피아의 성공회를 믿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생애 초반까지는 중하류층 집안에서 태어나고 학교도 자퇴해 선원, 식자공도 하면서 어렵게 살아갔다. 그리고, 골드러시의 영향으로 서부로 이주했으나, 생계가 어려워져 신문산업에 종사하게 되고, 후에 신문사 샌프란시스코 데일리 이브닝 포스트를 가지게 된다.
저서 ‘진보와 빈곤’이 출간 직후 크게 성공하면서 유명한 저술가, 연설가가 되었다. 순회연설을 통해 뉴욕시장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2.1. 사상


최초에 그는 공화당지지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는 가난과 불로소득에 눈을 떴고, 배타적 사업권에도 불만을 품게 된다.
그의 저서 진보와 빈곤에서도 나타나 있듯, 그는 토지의 가치에 부과하는 지대에 대한 공유를 주장했다. 그리고 토지 자체의 공유를 반대한 점에서 마르크스와 갈등을 하기도 했다.
즉 헨리 조지는 자본과 토지를 구분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였다. 개인은 자신의 노동생산물을 사적으로 소유할 권리가 있는 반면에 사람이 창조한 것이 아닌 자연에 의해 주어지는 것인 토지나 환경은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누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그의 사상은 빈곤하게 살던 시절과 직접 보고 겪은 것을 바탕으로 한다. 미국 서부 열차 선로 부설에 동원된 임노동자들의 임금 수준보다 열차 부설에 따라 주위 토지 가치 상승으로 토지소유주들이 얻는 이득이 크게 증가하는 것에서 토지 공개념의 사상적 단초가 나왔다.
부동산과 관련한 그의 주장이 오늘날에도 많이 언급된다. 토지 소유주가 직접 토지 가치를 올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여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토지가격 상승과 임대료 상승을 통해 돈을 벌고 있다면 이 부분은 불로소득이기 때문에 100% 과세를 해야 한다도 주장했다.

2.2. 죽음


그가 1890년에 세계 순회 강연을 마치고 돌아왔을 떄부터 시작된 뇌졸중은 그의 건강을 심각히 악화시켰으나, 그는 계속 정치활동을 했고,그것이 그의 죽음을 앞당겼다는 설도 있다.

3. 사후


당시 유럽에서는 위축되어 있던 노동운동이 헨리 조지의 영향으로 다시 활발해지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활발해지는 노동운동의 배경에 헨리 조지가 있음을 파악한 로마교황청은 헨리 조지의 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황 레오 13세는 본인이 노동자들에 대하여 상당한 연민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헨리 조지의 사상을 실제 이상으로 급진적인 것이라고 오해하여 경계하였다[2]. 결과적으로 교황청은 헨리 조지의 지지자였던 가톨릭 노동운동 지도자 에드워드 맥글린 신부를 파면하게 된다[3].
[1] 하지만 그의 부인인 애니 C 팍스가 가톨릭 신자라서 자식들도 가톨릭 신자다.하지만 헨리 조지는 복음주의 개신교(성공회) 신자로 남았다고 한다.[2] 레오 13세가 발표한 회칙 '새로운 사태' 에서 드러나 있다.[3] 하지만 이후에 헨리 조지가 교황에 공개 서한을 보내었고, 에드워드 맥글린 신부가 복권됨으로 짐작해 오해가 플린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