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

 


1. 개요
1.1. 대한민국에서
2. 현상학의 개념들
2.1. 의식의 지향성
2.2. 현상학적 환원(에포케)
2.3. 노에시스와 노에마
2.4. 생활세계
2.5. 상호주관성
2.6. 현상학적 시간


1. 개요


'''phenomenology'''
에드문트 후설에서 시작한 서양 현대철학의 사조.
더 좁은 의미로는 실재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에서 드러나는 현상 자체를 기술하고 분석하는 철학 분과를 일컬으며, 더 넓은 의미로는 이러한 현상에 대한 연구를 중시하는 철학적 경향을 일컫는다.
후설은 그의 철학적 경력의 초기에 수와 논리적 형식을 경험과 심적 상태로 환원하고자 한 심리주의의 노선을 따랐으나, 1900-1901년 대표 주저인 <논리연구>에서 이러한 입장을 스스로 비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나 논리적 형식, 물질 같은 객관적 대상들과 의식 사이에 중대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 그리고 의식에 대한 탐구를 통해 이러한 객관적 대상들에 대한 탐구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은 후설의 지속적인 확신이었으며, 이에 근거하여 그는 20세기 초반에 괴팅겐 대학에서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현상학'''을 창시하기에 이른다.
현상학은 인식 주체의 생물학적 특성, 자연의 인과적 법칙 등을 논외로 하여 순수한 의식 자체를 기술하고 그 구조를 분석한다. 예를 들어, 나는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중력의 법칙을 통해 설명할 수도 있지만, 나의 시각 경험 속에서 사과로 의식되는 무엇이 땅으로 의식되는 무엇으로 움직이는 의식 현상을 상세하게 기술할 수도 있다. 전자의 접근 방식이 실재에 관한 태도라면(그 중에서도 물리학적 태도에 해당한다), 후자의 접근 방식은 현상학에 해당한다. 후설은 이렇듯 순수하게 의식을 탐구하기 위한 방법론과 기본 개념들을 고안하였고, 실재 자체가 아니라 실재가 주관에게 드러나는 의식 현상을 탐구하는 이러한 관점 전환을 '현상학적 환원'이라 불렀다.
1913년 그의 두 번째 주저인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1>에서 후설은 순수 현상학의 근본 개념과 방법,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대상들이 의식에 드러나는 방식을 기술하고 분석하는 순수 현상학에 기초하여 어떻게 대상 자체에 관해 탐구하는 현상학적 존재론(ontologie)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 설명한다. 이 시기부터 그에게 현상학은 명실상부하게 보편적 철학, 제일철학으로 여겨진다. 후설 자신이 칸트의 영향을 받아 '초월적[1] 현상학'을 표방하듯이, 현상학은 모든 것이 의식에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의미 혹은 가능한 모든 인식을 검토하고 이해하고자 한다.
이후에 후설은 당대 유럽 학문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현상학을 제시하였다.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모든 것을 물리학적, 계량적 방법으로 탐구하려 한 실증주의는 모든 의미의 근원인 의식 자체를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리학에서도 생리학적 방법이 전부라고 여기는 오류를 범하였다. 그로 인해 데카르트 이래 철학과 학문의 목표로 여겨진 보편수학(mathesis universalis), 즉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학문의 이념은 더욱 요원한 것이 되었다.[2] 이에 후설은 실증주의를 극복하고 대상이 최초로 우리에게 경험되는 장인 생활세계(삶의 세계)를 복권한다는 과제를 제시하며 20세기 유럽 대륙에서 현상학의 시대를 열게 된다.

1.1. 대한민국에서


과거 국내 학계에서 대륙철학을 전공한다는 것은 곧 현상학을 전공하는 것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만큼 현상학은 대한민국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철학적 방법론이었고, 그 시절에는 현상학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 곧 철학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분석철학을 전공하려던 학생들조차도 학부에서 현상학 강의 정도는 들어야 했던 시절이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예전보다 그 영향력이 상당히 약해진 상태다. 현재는 대륙철학을 전공하더라도 현상학까지 전공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고, 학부에서도 현상학 강의가 잘 열리지 않는다. 다만 미학 쪽에서는 여전히 현상학의 영향력이 강한 편이라, 현재도 미학과의 학위 논문 중에는 현상학적 방법론을 취하고 있는 논문들이 제법 있다. 적어도 미학에서만큼은 현상학을 모르면 미학을 전공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아직은 틀리지 않은 듯하다.
국내 현상학 연구의 대표적인 권위자로는 서울대학교 철학과의 이남인 교수가 자주 거론되고 있다. 덕분에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생들은 학부부터 이남인 교수의 현상학 강의를 수강할 수 있다.

2. 현상학의 개념들



2.1. 의식의 지향성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 'intendere'에 있다. 이 단어는 무엇을 가리킴 혹은 무엇을 겨냥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의식이 지향성을 가진다는 말은 의식이 무엇을 표상한다는, 겨냥한다는, '무엇에 관한' 의식이라는 말이다. 중세 철학에서부터 지향성은 꽤 중요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현상학적 의미의 지향성의 직접적 시초가 되는 것은 후설의 스승인 프란츠 브렌타노의 지향성 개념이다.
후설은 의식의 지향성을 현상학이 해명해야 할 핵심적인 사태로 보았다. 후설의 작업의 많은 부분은 지향적 의식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다룬다. 이러한 지향성의 해명을 통해 현상학은 의식이 지향하는 다양한 대상들에 관한 존재론과 연결될 수 있게 된다.
후설의 초월적 현상학은 우리가 대상에 관해 인식하는 모든 내용이 의식의 법칙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고 본다는 점에서 일종의 관념론이라고 할 수 있다.[3] 반면 실재론적 현상학(realistic phenomenology)이라 하여 의식에 의해 그 내용이 완전히 결정되지 않는 대상 인식을 인정하려는 부류도 있는데, 괴팅겐 학파, 뮌헨 학파가 대표적이다. 이것은 현상학이 형이상학이 아니라 하나의 방법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와 다소 비슷하게 의식과 대상, 혹은 행위자와 행위의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2세기의 걸출한 불교 철학자인 용수보살의 저작 중론(Fundamental Verses on the Middle Way)에서도 발견되는데, 바로 "눈은 (대상 없이) 스스로를 볼 수 있는가" 혹은 "가는 자는 가지 않는다" 등의 역설로 표현되는 그것이다.[4]

2.2. 현상학적 환원(에포케)


'에포케(epoché)'는 고대 그리스의 회의론자들이 주로 사용하던 '판단 중지'를 의미하는 단어다. 어떤 것에 대한 판단이 과도하게 치우치게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피론주의자들이 주로 사용해 왔는데, 현상학에서도 마찬가지로 현상학의 주제인 의식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의식 그 자체를 판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현상학적 에포케를 실행한다.
예를 들어, 우리 바깥의 물질적 세계나, 의식이 일어나는 몸의 뇌과학적 메커니즘 등은 순수 현상학의 고려 대상에서 제외된다. 유의해야 할 점은 에포케가 이러한 것들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회의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는 절차라는 점이다. 이러한 절차를 통해 이뤄지는 순수 현상학에 토대하여, 나중에 현상학적 존재론(현상학적 심리학 등)은 그 대상들을 순수 의식과의 관련 하에서 탐구할 수 있다.

2.3. 노에시스와 노에마


'노에시스(noesis)'는 그리스어로 지식, 혹은 지성을 의미하는 '누스(nous)'와 지각을 의미하는 '노에인(noein)'을 합성해서 만든 용어로, 의식이나 사고 자체, 더 좁게는 어떤 대상을 지향하는 의식을 가리킨다. 반면에 '노에마'는 그리스어로 생각된 것을 의미하는 'νόημα(로마자로 옮기면 'noema')'의 차용어로, 의식되거나 생각된 것, 혹은 생각의 내용으로서의 의미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내가 소설책을 읽고 헤라클레스에 관해 생각하면, 나의 생각하는 작용 내지 상태는 노에시스이고, 내 생각의 의미(헤라클레스)는 노에마이다. 여기에서 노에마가 실제 대상과 구분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헤라클레스에 해당하는 실제 대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설은 노에시스와 노에마의 혼동, 더 나아가 노에마와 실제 대상의 혼동을 의식에 대한 탐구를 가로막는 주요 장애물이라고 보았다.

2.4. 생활세계


후설이 극복하고자 한 주요 세계관은 과학혁명을 시작으로 눈부시게 발전한 자연과학을 절대화하는 과학주의적 세계관이었다. 참된 인식은 오직 자연과학에서만 가능하며 그 외의 지식이나 관점은 무가치하다는 인식을 담은 이 세계관은 후설이 보기에 당시 유럽의 위기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당연히 후설이 자연과학을 부정하거나 무가치하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후설의 주장은 과학이나 과학주의는 세계에 관한 한 가지 이해 방식에 불과하며 그래서 우리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세계의 전모를 밝힐 수 없다는 것, 오히려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든 다양한 방식을 다룰 수 있는 현상학이 보편적 철학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 개념은 생활세계(Lebenswelt, 삶의 세계)이다. 그것은 학문적 이해가 수립되기 전에 우리에게 나타나는 세계이다. 우리는 생활세계에서 사물들을 처음 만나고, 이때 사물들은 단순히 감각적, 감정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그 다음에 사물들을 논리화하고 개념화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결국 수학이 동원되면서 사물들은 영속적 법칙의 담지자로서 인식된다. 이렇게 '수학화'된 사물들이 물리학의 사물들이며, 이것들은 생활세계의 사물들에 말하자면 이념의 옷이 입혀진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물리학의 사물들이 생활세계의 사물들로부터 어떤 의미에서 '나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물리학의 사물들만이 참되거나 유의미한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후설은 수학화된 자연과학의 시초를 갈릴레이로 지목하면서, 그가 자연의 위대한 법칙을 발견함과 동시에 생활세계의 다양성을 은폐했다고 하여 갈릴레이를 '발견의 천재인 동시에 은폐의 천재'라고 평하였다.

2.5. 상호주관성


상호주관성은 복수의 주관, 혹은 복수의 주관의 상호관계를 일컫는 표제이다. 1913년 <이념들 1>에서 후설이 제안한 현상학적 환원은 마치 자아 바깥의 모든 것을 없애고 자아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인상을 줌으로써, 현상학을 공허하고 유아론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후설은 이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상호주관성의 현상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후설은 단번에 자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만 탐구를 제한하는 것을 '데카르트적 환원'이라 칭하고, '나'를 넘어서 복수의 자아들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탐구를 제한하는 것을 '상호주관적 환원'이라 칭하면서 후자의 환원의 방법과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후설은 라이프니츠모나드 개념을 빌려와서 상호주관성을 설명하기도 한다. 각각의 개인은 하나의 모나드이지만, 그 모나드는 타자와의 감정이입을 통해 소통하면서 주관성의 그물망을 형성해 나간다. 이렇게 구성된 상호주관성은 객관성의 토대가 되며, 학문 역시 과학자사회라는 상호주관성에서 비롯된다.

2.6. 현상학적 시간


현상학적인 의미의 시간은 객관적이고 일상적인 의미의 시간(년, 월, 시, 분, 초)이 아니라 의식 자체의 흐름인 동시에 다른 모든 의식적 체험들의 토대이다.
현상학적 시간은 과거 - 현재 - 미래에 대응하는 파지(Retention, 계속 붙듦) - 근원적 인상 - 예지(Protention, 미리 붙듦)라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감각이나 사고 같은 체험들은 이러한 형식으로 끊임없이 흘러간다. 근원 인상으로서 주어진 감각은 계속 붙들리면서(파지) 점점 희미해지고, 동시에 끊임없이 새로운 감각들을 선취(예지)하도록 한다. 시간적으로 이어져 있는 감각들은 다양한 층위에서 하나로 통합되고, 이에 따라 결국 하나의 대상에 관한 의식(지향성)도 생기게 된다. 그래서 어떤 대상을 향해 있는 우리의 지각은 늘 시간적 국면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느 건물의 앞면이 나에게 감각적으로 주어지면 그것은 희미해지면서 끊임없이 과거로 가라앉고, 이러한 앞면을 바탕으로 보이지 않는 뒷면과 옆면이 예측되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건물 전체가 의식된다.
현상학적 시간은 현상학의 기본적인 토대가 되는 주제이며, 후설은 현상학적 시간을 엄밀히 분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 여기에서 '초월적(transzendental)'이라는 말은 무엇을 넘어서 있다는 일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무엇에 관한 인식의 조건에 관련된다는 의미이다.[2] 실증주의는 말하자면 철학의 목을 베어버렸다고 <위기>의 서두에 언급한다.[3] 실제로 후설 자신이 그의 현상학을 '초월적 관념론'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관념론이 아니거나, 아주 약한 관념론이다. 칸트와 비슷하게 후설은 그의 초월적 관념론이 자연적 실재론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초월적 관념론은 대상 인식의 내용(의미, 노에마)이 의식에 의존한다고 주장하지, 통상적인 관념론처럼 대상이 의식에 의존하거나 대상이 의식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4] 즉, 눈의 본다는 성질은 그 대상이 있기에 성립하며, 눈과 대상 사이의 관계가 없이는 성립하지 못한다. 또한 간다는 성질은 아직 간다는 성질을 가지지 않은 자를 표현하기 위해 주어지지만, 이미 가는 자에게는 간다는 성질을 더할 수 없으며 가지 않는 자 또한 이미 가지 않기에 간다는 성질을 더할 수 없다는 귀류 논증법이 사용되었다. 결론적으로 가는 행위는 가는 자와 분리될 수 없으며, 분리되어 '간다'라고 하는 것은 개념으로서의 가설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일련의 논리들은 결국 다른 것과의 관계 없이 홀로 발생하는 불변하고 고정된 자성(아트만)은 존재할 수 없다는 불교의 무아공 사상으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