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홍원유는 경기도 적성군 출신으로, 대한제국군에서 복무하다가 1907년 정미 7조약 체결 후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1908년 경기도 일원에서 윤의순(尹仁淳), 연기우 의병대에 가담했다. 그러다가 윤인순이 전사한 후 1909년 9월 17일에 경기도 마전에서 군사를 모집했고 9월 28일 총리대신 이완용의 조카이며 무관학교 학생인 이성구(李性九)를 납치해 그를 의병에 참여하도록 해 의병부대의 사기를 높이려 했다.
이후 홍원유는 수확기를 맞이해 군자금의 확보를 위해 각지에 방곡령을 발표했고, 1909년 10월 15~16일 전성서와 강기동을 만나 합진을 제의하여 의병부대의 연합을 모색하기도 했다. 또한 1910년 2월 7일엔 부하 12명과 함께 적성군 동면 어유리에서 부민(富民) 2명에게 각각 금 50원과 80원을 2월 24일까지 조달하라는 전령을 교부했고, 3월 3일 포천군 산내면 금동(琴洞)에서 관헌에게 의병을 밀고한 산내면장 양기하(楊箕夏)를 응징했다.
1910년 3월 6일 양주군 회암면 독암리에서 양주분견소 토벌대와 교전했으며, 3월 21일에는 부하 14명과 함께 양주군 석적면 회촌에서 의병에 가담했다가 일제에게 귀순한 뒤 적성 헌병분견소의 밀정 노릇을 하며 의병의 행동을 밀고한 최봉순을 처단했다. 그 후 4월 14일 전성서 의병대와 연합하여 의병 36명을 이끌고 포천군 내정면 신기리에서 적성, 마전 헌병분견소의 연합 토벌대와 교전했지만 패하고 22년식 기총과 23년식 소총 등의 무기를 빼앗겼다.
홍원유와 전성서는 포천군 북면 면장 조운식에게 격문을 보내 군자금 조달을 명령했고, 5월 2일 조운식을 방문해 격문에서 요구한 군수전 5천냥을 요구했지만 조운식이 의병을 속이고 도망치자 그의 집을 불태웠다. 5월 8일에는 파주군 가곡면 북창리에서 토벌군에게 정보를 제공한 이장 등의 집을 불태웠다. 그러나 홍원유는 5월 29일 일본군 토벌대의 급습을 받고 여러 부하들을 잃고 퇴각했다.
이후 일제는 1910년 6월부터 양주 일원에 대한 대토벌 작전을 시작했고, 적성경찰소와 헌병 분견소는 홍원유를 체포하기 위해 6월 17일까지 경기도 일대를 수색했지만, 홍원유는 이미 부대를 해산하고 잠적했다. 이후 그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홍원유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