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 7조약

 


'''언어별 공식 명칭'''
'''한국어'''
제3차 한일협약 (第三次韓日協約)
'''일본어'''
第三次日韓協約(だいさんじにっかんきょうやく
1. 개요
2. 내용
4. 여파
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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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丁未七條約
'''제3차 한일협약''' 또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정미 7조약은 1907년[1] 7월 24일 대한제국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조약이다.
조약이 체결된 해가 정미년이었기 때문에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라고 부르며, 제1차 한일협약, 제2차 한일 협약(을사조약) 등과 구분하기 위해 제3차 한일 협약 또는 한일 신협약 이라고도 한다. 별칭으로는 정미협약(丁未協約), 정미조약(丁未七條約), 제2차 을사조약(第二次乙巳條約) 등이 있다.

2. 내용


1907년, 고종황제헤이그 특사를 보낸 것이 일본에게 발각되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당시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로 하여금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하여 결국 7월 20일 고종이 양위하여 순종황제가 즉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이완용의 전권을 이용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을 장악할 수 있는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일본국(日本國) 정부와 한국(韓國) 정부는 속히 한국의 부강을 도모하고 한국 국민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목적으로 이하의 조관(條款)을 약정한다.
제1조 한국 정부는 '''시정(施政) 개선에 관하여 통감(統監)의 지도'''를 받을 것이다.
제2조 한국 정부의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이다.
제3조 한국의 사법 사무는 일반 행정 사무와 구별할 것이다.
제4조 한국의 '''고등 관리(高等官吏)를 임명하고 해임시키는 것은 통감의 동의에 의하여 집행'''할 것이다.
제5조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한 일본 사람을 한국의 관리로 임명'''할 것이다.
제6조 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가 없이 외국인을 초빙하여 고용하지 말 것이다.
제7조 메이지 37년 8월 22일에 조인한 한일 협약 제1항[2]을 폐지할 것이다.
이상을 증거하기 위하여 아래의 이름들은 각각 본 국 정부에서 해당한 위임을 받아서 본 협약에 이름을 적고 조인한다.
광무 11년 7월 24일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훈 2등 이완용(李完用)
메이지 40년 7월 24일
통감(統監) 후작(侯爵)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조약의 주요 내용은 그냥 통감부가 내정을 다 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분명 을사 조약에서 통감부는 오로지 외교 업무를 위해 설치한다고 되어 있었으나 여기서는 대한 제국의 법령 제정 및 행정 처분 업무, 관리의 임명권까지 죄다 통감부의 승인이나 동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일본 사람을 한국의 관리로 임명한다는 내용은 내각 각 부 차관에 일본인이 임명되어 차관 정치를 펼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무엇보다도 이 조약에서는 이에 덧붙여 각 조항의 시행에 관해 협정된 비밀 조치서가 작성되었는데, 이는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그 내용이었다. 그 후 일제는 1909년 7월 기유각서로 대한 제국 사법권과 교도 행정권을 빼앗고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있기 직전인 6월에 경찰권까지 빼앗았다.

3. 체결자


'''정미칠적'''
'''송병준'''
'''이병무'''
'''고영희'''
'''조중응'''

'''이재곤'''
'''임선준'''
'''이완용'''



4. 여파


대한 제국 군대의 해산 1907년 8월 1일 강제 해산 당일,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자 이에 분노한 군인들이 대대 일부 장교들의 지휘에 따라 무기고를 부수고 총을 꺼내 일본군과의 교전을 시작하였다. 남대문 전투 항목 참조.
이후 해산 군인들은 전국 각지의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정미의병에 참여하게 된다.

5. 같이 보기




[1] 융희 1년[2] '대한(大韓) 정부는 대일본(大日本)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 고문(財政顧問)으로 삼아 대한 정부에 용빙(傭聘)하여 재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