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성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홍해성'''
'''洪海性'''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5년 7월 18일
경상북도 청도군 이위면 소진동
(현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1]
<color=#fff> '''사망'''
1949년 10월 2일
경상북도 청도군
<color=#fff> '''묘역'''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홍해성은 1895년 7월 18일 경상북도 청도군 이위면 소진동(현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고종의 국장(國葬) 참례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3.1 운동 목격하고 귀향한 김상구(金相久)·김종태(金鍾台) 등은 청도군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이후 3월 15일 밤에는 손기현·김재화(金在華) 등에 의한 격문 부착 사건이 있었다.
그는 3월 17일 밤 김상구·김진효(金鎭孝)·손한조(孫漢祚)·김용구(金龍久)·김종식(金鍾軾)·김종수(金鍾秀) 등과 사립 문명학교(文明學校)에서 만나, 다시금 독립만세운동 결행을 다짐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지난번의 격문부착사건에 연루되어 운문 주재소로부터 호출을 당하였다.
이날 취조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다른 청년들과 함께 즉석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하고, 면사무소로 가서 면서기들에게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제작하도록 하여 이들과 함께 면사무소를 나와 동리를 시위행진하고, 면장인 이영호(李永浩)의 집에서 만세시위를 한 후, 돌아오는 길에 방음동·오진동에 들려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는 3월 20일 대구(大邱)헌병분대에서 헌병 3명과, 청도경찰서에서 서장 이하 5명의 경찰이 이곳에 출동해서 대대적인 검속 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청도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9년 10월 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홍해성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0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독립유공자 홍주일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