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현
1. 청도군 출신 독립운동가, 손기현
손기현(孫琪鉉)은 1886년 5월 26일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5일 김재화(金在華)와 함께 박창기(朴昌淇)의 집에서 김상구(金相久)·김종태(金鍾台) 등을 만나 독립만세시위의 전개 방법에 대해 논의한 후 동포 형제의 분기를 촉구하는 내용의 격문 20여 매를 작성하여 그날 밤 면내 방음동, 대천동, 순지동, 오진동 일대에 부착하여 인근 주민의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또 17일 밤에는 김진효(金鎭孝)·손한조(孫漢祚)·김용구(金龍久)·김상구(金相久)·홍해성·김종식(金鍾軾)·김종수(金鍾秀) 등 청년들과 함께 사립 문명학교에 모인 뒤 청년들에게 매일신보(每日申報)를 보여주면서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으니 우리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김용구, 김종수가 문명학교의 존폐를 우려하여 신중론을 폈으나, 그는 학교의 존재보다는 조국의 독립이 우선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3월 18일에는 지난번의 격문 부착사건 때문에 김진효 등이 취조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면사무소에 들러 면서기들에게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제작하도록 강요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그도 여기에 가담해 동리를 행진했으며, 면장인 이영호(李永浩)의 집으로 가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돌아오는 길에 방음동, 오진동에 들러 이곳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그러나 3월 20일 헌병대에게 체포되었고, 1919년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청도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7년 3월 2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손기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밀양시 출신 독립운동가, 손기현
손기현(孫基賢)은 1883년 6월 20일 경상남도 밀양군 산외면 다죽리에서 1863년 정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 손규헌(孫珪憲)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무반가문으로서 7대조 손명대(孫命大)를 시작으로 부친 대까지 대대로 무신 요직을 차지했다.[4]#
그는 일찍이 만주로 망명했고, 1920년경 중국 봉천성(奉天省) 환인현(桓仁縣) 남관(南關)[5] 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해 5월 중국 봉천성 환인현에서 한교공회(韓僑公會) 외교원에 임명되어 외교 활동을 벌이다 안동현 일본영사관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되었다. 이후 1920년 8월 1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옥고의 여독으로 고통받다가 1942년 2월 27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손기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