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덕윤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황덕윤은 1900년 10월 10일 경상남도 진남군 동면 동충동(현재 경상남도 통영시 항남동)에서 태어났다. 1927년 3월, 경상남도 도평의원인 김기정(金淇正)이 도평의회 석상에서 조선인교육의 불필요 및 조선어의 통역철폐를 주장했다. 이에 박봉삼 등 십여 명의 인사들이 김기정 징토시민대회를 개최해 김기정의 친일발언 사실을 규탄하고 공동절교를 선언하며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박봉삼 등이 체포되자, 황덕윤은 이에 분노하여 1927년 5월 10일 황봉석(黃奉石), 이태원(李泰源), 서상환, 최봉선 등 35명의 동지와 함께 모임을 갖고 구속인사들에 대한 금전모금, 변호사 선임, 석방운동을 위한 시민대회의 개최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일경에 의해 이같은 계획이 무산되자, 동년 5월 13일 그는 다시 박봉삼 등 구금인사들의 석방과 동포들의 호응을 촉구하는 격문 5백여매를 인쇄하여 시내 각처에 배포하였다. 이에 고무된 수천명의 군중들이 김기정의 집을 습격하여 투석과 곤봉으로 건물을 파괴하는 한편 통영경찰서로 몰려가 구금인사의 석방과 면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체포된 그는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0년 12월 14일 신간회 통영지회의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지회를 이끌었다. 또한 1931년 5월 16일 신간회가 해소될 때에는 해소파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간부로 활동하였는데, 강기덕(姜基德)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하는 25명의 중앙집행위원의 일원으로서 신간회의 해소에 따른 제반 업무의 처리를 담당하였다.이후 통영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3년 5월 3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황덕윤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