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환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서상환은 1888년 9월 24일 경상남도 통영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윤상태(尹相泰), 서상일 등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조직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경상우도 지방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 유림들이 참여해 곡물상의 상업조직과 사립교육기관을 통해 독립군을 지원했다. 그는 이 단체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일제 헌병에게 체포된 그는 1년간 옥고를 치렀고,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경남 일대에서 동지 규합에 힘쓰다가 또다시 체포되어 1년간 고초를 겪었다.
1927년 3월, 경상남도 도평의원(道評議員) 김기정(金淇正)이 도평의회 석상에서 조선인 교육이 불필요하며 조선어의 통역을 철폐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박봉삼 등 10여 명이 김기정 징토시민대회를 개최했다가 김기정의 고소로 그해 5월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에 분노한 황덕윤, 황봉석(黃奉石), 이태원(李泰源) 등 35명의 인사들은 5월 10일 모임을 갖고 구금 인사들에 대한 금전 모집, 변호사 선임, 석방운동을 위한 시민대회 개최를 계획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이를 막자, 황덕윤, 황봉석 등은 5월 13일에 다시 구금인사들의 석방과 동포들의 호응을 촉구하는 격문 5백매를 인쇄해 시내 각처에 배포했다.
서상환은 여기에 호응해 시위에 가담했고, 수천 명의 군중이 김기정의 집을 습격, 파괴하고 구속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일 때 선두에서 앞장섰다. 그러다가 일제 경찰에게 또다시 체포된 그는 1928년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68년 5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서상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