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삼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봉삼은 1875년 9월 21일 경상도 고성현 춘원면 동교동(현 경상남도 통영시 서호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5일 통영시장에서 군중과 더불어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1개월간 구류되었다. 이후 통영 기독청년회(基督靑年會)의 회장으로 있던 그는 1921년 2월 이후 특별강연회 등을 통해 표면상 전도부흥회를 가장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때 그는 주로 농민층을 상대로 식민통치의 부당성에 대한 계몽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또다시 경찰에 체포되었고, 4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경찰범처벌규칙 위반 혐의로 구류 15일형을 선고받았다.
1927년 3월 경남 도평의원 김기정(金淇正)이 도평의회 회의석상에서 조선인 교육이 불필요하며 조선어의 통역을 철폐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그를 박봉삼을 비롯한 10여 명은 김기정 징토시민대회를 개최해 김기정의 부일 행위에 대하여 강력 규탄하고 공동절교를 선언하며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할 것을 결의했다. 그는 이 대회의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통영 시민들에게 결의사항을 인쇄하여 배포하고 김기정에게는 4월 27일까지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김기정은 그를 고소했고, 결국 그는 5월 9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에 그는 유치장 안에서 단식 투쟁을 벌였다.
이 일련의 일에 분노한 황덕윤, 황봉석(黃奉石), 이태원(李泰源), 서상환 등 35명의 인사들은 5월 10일 모임을 갖고 구금 인사들에 대한 금전 모집, 변호사 선임, 석방운동을 위한 시민대회 개최를 계획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이를 막자, 황덕윤, 황봉석 등은 5월 13일에 다시 구금인사들의 석방과 동포들의 호응을 촉구하는 격문 5백매를 인쇄해 시내 각처에 배포했다. 이에 수천 명의 군중이 김기정의 집을 습격, 파괴하고 구속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 후 박봉삼은 1928년 5월 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명예훼손, 상해훼기 혐의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 후 자택에서 고문의 여독에 시달리다 1936년 8월 2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박봉삼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3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3. 여담
2020년 4월 15일, 독립유공자 후손 1,544명이 반민족 매체인 TV 조선, 채널 A 재승인을 취소하라는 내용의 요구서를 방송통신위원회에 제출했다. 이 요구서에 서명한 인사들 중에는 박봉삼의 증손자 박현일, 증손녀 박현정, 증손부 김지연, 고순자 박수빈, 고손녀 박지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