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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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甫謐
215년 ~ 282년
1. 개요
후한 말기와 삼국시대의 의사로 아명은 정(靜), 자는 사안(士安), 자호는 현안(玄晏)이며, 황보숭의 증손으로 침구학의 대가로 유명한 인물이다.
안정 조나 사람으로 부친 대에 가문이 쇠락해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숙부에게 입양되어 신안에서 살았으며, 숙부의 집에서 친자식처럼 사랑받고 지내 엄격하게 교육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부잣집 자식과 어울려 다니면서 한가롭게 놀았으며, 매일 향락을 즐기거나 동네에서 잘못된 일을 저지르는 문제아였다.
231년에 숙부의 집안 살림이 넉넉하지 못함에도 돈을 물쓰듯 낭비해 결국 논, 밭, 집을 팔아버릴 정도로 그 재산이 몰락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는 것 밖에 몰라 창을 들고 싸움 연습만 했다. 과일을 들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집에 들어가다가 숙모 임씨의 훈계에 잘못을 뉘우치면서 부잣집 자식과 인연을 끊은 뒤에 20여세에 마을에서 가장 학식이 높은 학자 석탄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향리에 나아가 공부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질문을 하느라 쉬는 날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숙부의 집 형편은 더더욱 나빠지자 책을 빌려가면서 공부하거나 시간을 아끼기 위해 농사일을 하면서 책을 읽었으며, 이에 책벌레(書痴)라고 불렸다. 낙양으로 유학을 떠나 책을 빌리면서 음식을 굶으면서 책을 읽어 어떤 사람이 신체 건강을 돌보지 않고 책만 읽는다고 걱정하니 그 말은 감개무량하나 아침에 학문에 정통하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대답했으며, 사람들이 학문을 열심히 연구하는 것에 감동해 아호를 서음(書淫)이라고 불렀다.
10여년 동안 책을 읽으면서 모든 책을 암송해 244년에는 그 이름은 대학자로 널리 알려졌다. 256년에 풍비증과 반신불수로 아프자 3개월 간 치료했다. 병세가 호전되자 의학의 중요성을 알고 침구학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268년에는 한식산을 잘못 복용했다가 병에 걸려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었지만 가족들이 칼을 빼앗아 이를 방지했다고 한다.
위나라에서 효렴으로 추천했고, 사마소가 직접 초대해 벼슬을 시키려고 했지만 거부했다. 서진이 세워진 이후에 사마염이 태사중서자, 의랑, 보저작랑, 공조 등의 벼슬을 주려고 했지만 또 사양했다. 사마염에게 황실의 장서를 빌려달라고 아뢰었지만 사마염이 그 이름과 사람됨을 알았기에 책망하지 않고, 황궁의 장서를 보내주어 책들을 탐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문학가 좌사의 부탁으로 삼도부의 서문을 썼다. 그런데 이 삼도부가 인기를 끌어 낙양의 권세가들이 서로 다투어 책을 베끼려고 하자 종이, 붓, 먹, 벼루 등의 가격이 치솟아 종이가 품절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말년에는 황제삼부침구갑을경을 편찬해 654개의 혈위에 대한 것을 기록했으며, 68세로 사망하자 영태현 장오가보에 묻혔다고 한다.
문장과 많은 저서를 남겨 문장으로 삼도부서(三都賦序), 석권론(釋勸論), 현수론(玄守論), 독종론(篤終論), 역사 전기서로 제왕세기(帝王世紀), 연력(年曆), 고사전(高士傳), 일사전(逸士傳), 열녀전(列女傳)가 있다. 철학서로 현안춘추(玄晏春秋), 음양역술(陰陽曆術), 귀곡자주(鬼谷子注), 의학서로는 황보밀을 가장 유명하게 한 황제삼부침구갑을경(黃帝三部鍼灸甲乙經)이 있다.
특히 이 중에서 고사전, 황제삼부침구갑을경은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것들로 황제삼부침구갑을경은 갑을경 또는 침구갑을경이라고 부른다.
2. 관련 사료
- 진서 황보밀전